앙스타!!

시이나 선생님과 착한 아이의 약속♪ 上

“……엥?”

목을 울린 것은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몸에 걸친 티셔츠가 이상할 정도로 늘어져있다는 데에서 이미 위화감을 느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뒷머리를 가볍게 긁적이고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이 시야가 낮아졌다는 것만으로도 낯설어졌다. 상황은 전부 파악했지만 그래도 눈으로 확인할 필요는 있다. 각오를 굳히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화장실의 문을 열자마자 맞은편의 거울이 보였다.

거울 너머에 비친 얼굴은 잘 알고 있는 꼬맹이의 얼굴이다. 그야 눈 앞의 거울에 비치는 것은 나다. 그러니까, 아마기 린네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를 꼬맹이 취급을 하는 게 우습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건 가감없는 사실이었다. 눈 앞의 아마기 린네는 열살 남짓한 어린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

꼬맹이답지 않은 표정으로 거울 너머를 바라보는 아마기 린네와 눈이 마주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의 몸이라는게 이렇게 하룻밤새 수축해버려도 되는 건가? 될 리가 없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살펴봤지만 가죽은 물론이고 뼈에도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뭐, 이쯤 되면 꿈이거나 환각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침대 근처로 돌아와 휴대폰을 찾고 스케줄을 확인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스케줄은 없었다. 스케줄 화면을 치워버리고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켜 부소장을 찾았다. 그대로 연락을 하려다 휴대폰의 화면을 껐다. 본래대로라면 전부 한 손으로 충분히 조작할 수 있었을 일인데 두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지금의 스스로가 조금 우습게 여겨졌다.

헤비 쨩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도 그 자식에게 스스로 약점을 상납하고 싶은 마음은 그리 들지 않는다. 그나마 성주관이 아니라 니키의 아파트에서 이렇게 된 게 다행인가. 이렇게 되면 니키만 알고 끝날 수 있다. 니키라면 이 이상한 상황도 얼렁뚱땅 넘길 것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어쩐지 지친다. 한숨을 내쉰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니키의 침대에 몸을 묻었다. 어차피 지금의 내게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꿈이라면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뿐이고.

그렇게 결론을 내고 시간을 때울 겸 낮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금 일어난 데다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쉽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이런 환상을 보게 된 건지 모르겠다. 어떤 계기라도 있다면 이해가 될 텐데…….

그때 불현듯 떠오른 것은 니키 자식의 목소리였다. 그 자식, 날 보고 옛날에는 솔직하고 귀여웠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곤 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아마기 린네를 상대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 그 말이 떠올랐다는 건, 니키가 한 말을 은연중에 신경쓰고 있기라도 했었던 걸까. 아니, 그 정도로 섬세하고 나약한 신경줄을 갖고 있지는 않다. 서운할 것도 뭣도 없었다. 니키 역시 대단한 의도를 가지고 내게 그렇게 말한 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전제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니키와 만났을 때의 나는 이미 17살이었고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해도 고작 중학생이었던 니키보다 한 뼘은 더 컸다. 쥐방울만 한 꼬맹이였던 주제에 누가 누굴 보고 귀여웠다 어쨌다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나를 놀려먹으려는 거다. 짜증나는 자식.

뭐, 그렇다고 해도……. 지금 모습이라면 조금은 귀엽게 여겨질 여지가 있을 법도 하다. 작다는 게 귀엽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꼬맹이들은 귀엽기 마련이다. 니키한테 어린 아이를 귀여워할 수 있을 정도의 감수성이 존재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됐다. 세 살이나 많은 형님을 모시면서 딸린 애 하나 먹여키운 것 같은 기분을 내는 니키 군에게는 진짜 애가 딸리면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자. 어차피 연기는 특기다. 지금 상황을 모르는 척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니키는 무심한 구석이 있어서, 내가 살짝 실수를 해도 웬만한 정도로는 마음에 두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목을 울려가며 각오를 다졌다.

“이렇게 된 거 니키큥한테 한번 질펀하게 예쁨이나 받아볼까~?”

니키로부터 온 전화는 일부러 받았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냅다 바닥으로 던졌다. 그러고도 휴대폰에서는 계속 니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 이름에 반응하듯 대꾸한 뒤로 짧은 대화가 이어졌고, 대충 상황을 파악한 니키는 내 의도대로 아파트를 찾아왔다.

“우와! 린네 군 진짜 린네 군이에여?!”

니키는 현관을 열자마자 앞에서 현관문을 노려보던 나를 향해 그렇게 외쳤고 발꿈치로 대충 신발을 눌러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이 현관 앞을 굴러다녔지만 니키는 개의치 않고 경계하는 척 걸음을 물리는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넣어 나를 높이 들어올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놔!”

나의 머리는 성인 남자의 그것이고 몸이 어려졌다고는 해도 어린 시절의 나 또한 그렇게 약하지는 않았다. 니키의 행동을 눈치챘다면 피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는데도 이렇게 된 건 내가 방심한 탓이 크다. 경계하는 척을 하기는 했지만 눈 앞의 녀석은 시이나 니키다. 내가 경계할 필요가 없고 절대 나에게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는 인간. 눈 앞의 남자는 내 기억보다 훨씬 커다랬고 어른스러웠다. 그런데도 그 남자가 시이나 니키라는 것만으로도 방심을 해버린 것이다. 내가 버둥거리든 말든 니키는 여유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하항, 린네 군 엄청 쪼끄맣네영~ 린네 군도 인간의 자식이었구나~”

이 자식……. 평소처럼 냅다 등짝을 갈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노려보자 한 번 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니키가 나를 내려주었다. 그러더니 시선을 맞추듯 내 앞에 쪼그려 앉는다.

“아! 저는 시이나 니키예여. 편하게 니키라고 불러여. 아니면 형아라고 불러도 돼여.”

형아라니. 또 이렇게 헛소리를 한다. 니키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사진이라도 찍을 셈인 걸까. 나는 경계하듯 휴대폰의 카메라를 흘기며 대꾸했다.

“……니키라고 부를게.”

“그래여그래여, 니키 군이에여~”

흔쾌한 대답과 함께 나를 향한 휴대폰에서 셔터음이 울렸다. 니키는 시종일관 싱글벙글이다. 내가 이런 꼴이 된 게 그렇게 재미있나 싶다가도, 생각해보면 니키가 꼬맹이가 되어도 나 역시 지금의 니키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반응을 할 것 같긴 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넌 뭐하는 사람이야?”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안 했네여?”

니키는 그제야 눈 앞의 아마기 린네가 저를 모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 것 같았다. 휴대폰을 대충 주머니에 밀어넣은 니키가 주절주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웅……. 원래는 요리인인데 지금은 린네 군이랑 함께 아이돌도 하고 있어여! 멤버는 두 명 더 있는데 지금은 저뿐이네여~ 나하하~”

“……그렇구나.”

어쩐지 코하쿠 쨩이나 메루메루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멋쩍게 느껴졌기에 별수 없이 맥없는 대답이 나갔다.

“우잉?”

그러자 니키가 반응을 보였다. 니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울였다.

“안 궁금해여? 아이돌이 된 린네 군.”

아. 니키의 물음에야 비로소 내 실수를 깨달았다. 옛날의 아마기 린네라면 아이돌이라는 단어에 반응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마기 린네가 아이돌을 하고 있다는 데에 이 정도로 희미한 반응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 자식, 역시 쓸데없는 데서 예리한 구석이 있다.

“아, 아니.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

내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무마하듯 대꾸하자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니키가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나하항~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이렇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제가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는 게 믿기지가 않거든여.”

얼버무리는 데엔 대충 성공한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신이 난 니키의 반응에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냥 감회가 새로웠다. 어쩐지 가슴 한 편이 따뜻해진 것 같았다. 가볍게 덴 것처럼 근지럽기도 했다. 니키 녀석, 맨날 아이돌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투정부리는 주제에 일부러 좋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은 아이돌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으면서도 솔직해지기 어려웠던 것일지도 몰랐고 어쩌면 아이돌이 되고 싶은 어린 아마기 린네에게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모르는 곳에 뚝 떨어져서 불안한 거죠?”

니키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밝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니키는 내가 잠잠해지자 그걸 또 저 좋을대로 해석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편하다. 조금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니키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내게 물었다.

“저 나쁜 사람처럼 보여여?”

못된 물음이다. 얼굴로 선악을 판단하다니. 그건 어른도 하지 못하는 일이고 애초에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문득 어떤 과거를 돌이킨다. 처음 만났을 때의 니키는 쬐끄만 꼬맹이였다. 최근 키가 많이 자랐다며 으쓱거리는 어깨는 한창 성장기를 거치며 자라난 나에 비하면 훨씬 작고 여렸다.

그때 내게 다가온 것이 어른이었다면 분명 좀 더 경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나보다는 나의 어린 동생과 훨씬 더 가까울 나이대의 꼬맹이였다. 동그랗고 순한 눈을 한 꼬맹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어준 순간, 모든 경계는 허물어졌고 모든 긴장이 풀려버렸다.

어쩌면 나를 걱정하던 동생을 떠올렸던 것일까. 그래서 마음이 약해졌던 걸까. 아니면 그저 아이라서, 훨씬 나이가 많고 강한 나를 어찌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꼬맹이에게 들쳐업혀 그의 집까지 끌려가고 말았으니 얼굴로 무얼 판단한 건 역시 잘한 일이라고 하기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이러나저러나 니키가 꼬맹이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마음을 허락하지는 않았으리라. 분명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탐색하듯 그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나를 마주한 얼굴은 그때보다 날카로워졌고 훨씬 더 어른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이 얼굴을 보는 순간에는 어쩐지 마음이 녹는다. 나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럽다. 나의 작위적인 경계에 곤란해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행세를 하는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건 내가 시이나 니키라는 인간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려 애써도 이 얼굴 앞에서 어떤 확신이 드는 건 별수 없다.

아마 그 순간의 나는…… 어떤 순간의 니키를 만났더라도 분명 경계를 풀었을 것이다.

“……멍청한 얼굴.”

하지만 그걸 전부 솔직하게 대답할 마음은 들지 않아서 조금 망설이다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니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하항, 맞아영! 저 생긴 것만이 아니라 진짜 멍청해서 똑똑한 린네 군을 등쳐먹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여. 너무 걱정 말아여~”

나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니키가 응차, 하고 작게 힘주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을까여?”

짐을 묵혀두기 어려운 좁은 집이라 전부 갖다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니키가 중학생 때 입었던 옷이 몇 벌 있었던 모양이다.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입고 있었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즈음 되어서는 손목이며 발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키가 자라있었지만 니키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워낙 그런 데에 무심한 편이기도 했고.

그랬던 니키의 중학교 시절 옷조차 지금의 내게는 제법 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 녀석이니 아마 성장기를 감안해서 애초에 큰 사이즈로 샀던 것이겠지. 그리고 이 녀석은 그토록 크게 샀던 옷이 작아질 정도로 커버린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니키를 키우기라도 한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우웅, 그래도 좀 크네여.”

바지 허리의 뒤춤을 잡아 간단하게 옷핀으로 고정해준 니키가 제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나가서 쇼핑하고 올까여? 저녁 식사 준비도 할 겸……. 아! 린네 군 먹고 싶은 거 있어여? 앗, 도시에 어떤 음식이 있는지 모르나?”

처음에는 혼잣말에 가까웠던 고민이 이내 들뜬 목소리가 된다. 하여튼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신나서는.

“원래 린네 군이 좋아했던 음식으로 만들어주면 되겠져? 피자나 술…… 술은 안 되고 오므라이스 어때여?”

“오므라이스?”

“계란을 폭신폭신하게 익혀서 밥에 얹어먹는 거예여! 린네 군 한동안 오므라이스에 푹 빠져서 맨날 오므라이스를 만들어달라고 하던 때가 있었어여. 우웅, 요즘은 린네 군보단 린네 군의 동생 씨에게 더 많이 만들어주고 있긴 하네여.“

“히이로가?”

순간 그렇게 물었다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너, 히이로를 알아?”

”넹넹! 동생 씨랑은 같은 방을 쓰고 있거든여.“

”같은 방? 내가 아니라 네가?“

니키는 성주관과 히이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부 알고 있는 이야기에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다행이도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도 연기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실수가 잦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희미하게 한숨을 삼켰다.

모르긴. 이유 정도야 알고 있다. 상대가 시이나 니키이기 때문이다. 시이나 니키는…… 나를 멍청하게 만든다. 방심하게 만든다. 조금쯤은 곁을 내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대로 들켜버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거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는 신나서 떠드는 니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럼 가볼까여?“

니키가 나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첫 순간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 손이 겨드랑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또다. 시이나 니키가 아마기 린네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아마기 린네는 한 번도 시이나 니키보다 작고 어렸던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런 행동은, 상정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위로 들어올리려는 인력에야 비로소 당황을 깨우친 나는 냅다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이번에는 제대로 저항했다!

“우갹!”

“이 자식……! 무슨 짓이야?!”

나를 놓치고 제 턱을 감싸쥔 니키가 그새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야, 온힘을 다해 갈겨놨으니 아무리 어린애 주먹이라도 아플 게 당연했다. 하지만…… 멋대로 그런 짓을 하려 한 니키가 잘못한 거다.

“아아니, 그치만! 린네 군 너무 어리잖아여! 미아라도 됐다간 큰일이라구여!”

니키가 나를 안아들려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니키가 그렇게 말한 탓일까. 얼굴이 뜨거웠다. 그러니까 이 자식은 지금…… 내가 미아가 되지 않도록 안아들고 돌아다니려고 했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 이 자식, 나를 정말로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거다. 낯선 감각에 목 뒤가 간지러웠다.

내게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던 건 비단 시이나 니키만이 아니다. 지금껏 누구도 나를 어린아이로 취급한 적이 없었다. 나는 철이 들기 전부터 군주 후계였고 어린아이가 아닌 작은 군주로 취급되었다. 그러니까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는 거다. 이, 어린아이 취급에는.

평범한 어린아이라면 으레 어린아이 취급을 받게 되는 걸까. 어린아이들은 이런 취급에도 화를 내지 않는 걸까. 이 다정한 간섭을 온전히 호의로 이해할 수 있는 걸까. 과거의 나도, 그때 니키를 만날 수 있었다면. 이토록 상냥한 어른에게 어린아이로 대해질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럼 손 잡을까여?“

턱을 문지르던 니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울였다. 나는 미심쩍어하며 되물었다.

”……손?“

“넹!”

니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안다. 그럼에도 망설였다. 아니, 그렇기에 망설였다. 니키와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손을 잡아 본 적은 몇 번 없다. 남자들의 관계란 으레 그런 것이다. 스킨십이 적고 친밀감을 멋쩍어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니키는 몰라도 나는 그리 어리지 않았다. 타인과 쉽게 스킨십을 하고 친밀하게 굴 수 있는 부드러운 성정도 못 되었다. 이 좁은 단칸방에서 서로의 손이 맞닿는 일도 없이 우리의 사이에는 딱 그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 이 순간은, 우리에게 있어 낯설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니키는 내게 손을 내민다. 니키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을 수 있는 걸까. 그런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 역시, 어린애의 가죽을 뒤집어 썼다는 것만으로 이 손을 맞잡아도 되는 걸까. 니키에게……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걸까. 수많은 고민들이 심장에 감돌았다. 못할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구 쿵쾅대는 심장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조금 뒤늦게 니키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얽었다.

소극적인 접촉에 니키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내 손가락을 한데 쥐었다. 스스로의 감상이 어쩐지 낯간지러웠다. 한 번도 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손은 한 번도 내 손보다 컸던 적이 없으니까. 조그맣던 손이 아무리 길쭉해지고 커지고 단단해져도, 시이나 니키는 여전히 나보다 작고 어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린아이니까 비로소 안다. 이건, 어른의 손이다. 이 커다란 손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러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안다. 처음 만났던 순간의 시이나 니키부터 바로 어제까지의 시이나 니키를 느리게 센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했던 니키는 금세 쑥쑥 자랐다. 올려다보던 시선이 점차 가까워졌다. 이내는 고개를 들거나 숙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쳤다. 수많은 시선들이 그렇게 얽혔다. 그럼에도 니키는 항상 나보다 작고 어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먼저 태어났고 먼저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깨닫는 게 늦었다. 시이나 니키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니키를 흘끗 올려다보면 나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상가에서 간단한 상하의를 샀고 그대로 마트를 돌았다. 니키는 한 손으로 카트를 밀고 야채를 비교해 고르는 중에도 한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커다랗고 따뜻한 손의 온기가 지겨울 법 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손을 놓을 이유가 마땅찮아서, 그냥 그대로 붙들린 채 쇼핑을 마쳤다. 쇼핑백은 물론이고 장바구니 역시 니키가 한 손에 들었다. 그건 사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긴 했다.

손을 놓은 것은 니키의 아파트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현관문 앞에 선 니키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놓고 열쇠를 꺼냈다. 그야, 여기까지 왔는데 손을 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미아가 되려고 해도 어렵겠다. 그런데도 어쩐지……. 손을 놓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계속, 맞잡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손 씻고 옷 갈아입어여~”

“응.”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돌렸다. 말도 안 된다. 몸이 어려졌다고 정신까지 유아 퇴행해버린 건지. 그때였다.

”린네 군?“

그 부름에 말 없이 니키를 돌아보았다. 조리대 위에 장바구니를 대충 올려놓은 니키가 웃는 낯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 좀 더 잡고 있을까여?”

“…….“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느리게 손을 뻗었다. 그 제안은 너무나…….

“흐냑!”

너무나 얄미웠다. 싱글벙글 웃는 낯 하며 능청스러운 목소리까지. 내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놀려먹을 셈으로 한 제안이 분명했다. 당연하지만 나는 놀리기 위한 제안에 솔직하게 응해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나는 녀석의 팔을 뽑아버릴 기세로 손을 당겨 커다란 몸을 바닥으로 고꾸라트렸다.

“으아앙! 린네 군 꼭 린네 군처럼 폭력적이에여! 아니, 린네 군이 맞긴 한데~!“

“흥.”

가볍게 코웃음친 나는 쇼핑백을 들고 욕실 쪽으로 향했다. 니키가 뒤에서 뭐라고 또 징징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손을 씻은 나는 니키의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걸쳤다. 상가에서 산 옷은 싸구려였다. 그야, 언제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르는데 비싸고 좋은 옷을 살 이유가 없었다. 새 옷에서 나는 냄새는 어쩐지 니키의 낡은 옷에서 나던 냄새보다도 훨씬 낯설어서……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니키의 옷에서는 해묵은 옷장의 냄새가 났다. 그야, 평소에 입는 내 옷들도 기간이 달랐다 뿐이지 결국 같은 옷장을 지난 옷이다. 아마 내 옷에서도 이런 냄새가 나긴 할 테지. 익숙하지 않은 새 옷을 몸에 걸치며 피식 웃었다.

옷을 갈아입고 욕실 문을 열고 나오니 그새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토마토 소스의 냄새다. 자연히 침이 넘어갔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까치발을 들어 시선을 높였다.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노란 계란이 뽀얗게 익어가고 있다. 니키가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더니 나를 안아들었다.

“불 쓸 때는 가까이 오면 위험하다니까여~“

아까 전이었다면 버둥거리며 저항했을까. 나는 그 대신 니키에게 얌전히 안긴 채 그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불이 무서웠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맛있는 음식들의 냄새와 니키의 옷에서 나던 따뜻한 냄새가 한데 섞여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대로라면 이상해져버릴 것만 같다. 지금의 니키는 나를, 완전히 어린애로 만들어버린다. 지금이라면 놀릴 요량으로 손을 쥐어줘도 솔직히 맞잡아버릴 것만 같다. 목을 내어줘도 매달리듯 끌어안아버릴 것만 같다. 시선이 마주치면 어리광을 부려버릴 것 같다. 그래서, 지금만큼은 니키를 제대로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니키가 한 손으로 가볍게 뒤집어버린 계란의 노릇한 표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 뒤가 노릇노릇 익어버린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조금 뒤늦게 속삭였다.

“……내려, 줘.“

입 안이 바짝 말라 조금 어색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그러든 말든 니키는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몇 가지의 요리를 살피며 말했다.

“웅? 왜여? 린네 군, 제가 요리할 때 구경하는 거 좋아하잖아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니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요리 같은 거 관심도 없으면서 맨날 뒤에 붙어서 구경하구. 불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그랬다. 요리 같은 건 관심 없었다. 니키가 해주는 요리가 맛있었으니 굳이 내가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가지고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면 니키가 더 이상 요리를 해주지 않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가 아파트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고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함께하는 식사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조금, 쓸쓸해졌던 것 같다.

……아, 역시 말도 안 된다. 이런 기분을 느낄 이유가 없다. 감정에 이름까지 붙여가며 스스로를 돌이켜 볼 필요가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하여튼, 머리가 이상해져버린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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