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OPRIKA
“오랜만이네, 아마기 린네 군!” 먼저 인사한 것은 남자 쪽이었다. 그는 린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다행이도 아마기 린네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금방 기억하는 편이었다. 덕분에 그 남자의 이름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린네와 몇 번인가 함께 일을 했고 그때마다 곧잘 말을 섞었던 남자였다. 남자의 말대로 그와는 제
린네는 몸을 뒤척여 똑바로 누웠다. 곁에 나란히 누운 니키의 존재감이 분명했다. 곁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 들숨과 날숨이 만드는 공기의 흐름, 호흡을 따라 얕게 달싹이는 이불, 그 안쪽에 자연히 서린 두 사람분의 온기가 전부.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도록 한다. 린네는 고개만 옆으로 돌려 니키를 바라보았다. 돌아누운 등은 더 이상 열네
“어서 와.”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먼저 열리는 문은 니키에게도 이제 낯설지 않다. 익숙한 높이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방긋 웃어 보이며 니키가 대답했다. “다녀왔어여~” 린네에게 니키의 장바구니가 넘겨졌다. 장바구니보다는 상자째로, 그러니까 대량으로 사 오는 것을 선호하는 니키가 웬일로 장바구니인가 싶다. 린네는 순순히 받아든 장바구니 안쪽을 슬쩍 들
나는 오메가다. 그건 인생에 하등 도움될 것이 없는 체질이었다. 극히 일부의 인간들이 가진 특수한 형질은, 좁은 마을에서는 더욱 특수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첫 발정기를 맞아야만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좁고 폐쇄된 마을에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가 있을 리가 없다. 온몸을 불태우는 것만 같았던 열병은 그 뒤로도 수차례 나를
긴장한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서는 알약의 부피는 여전히 낯설다. 억지로 내리누르듯 삼킨 뒤에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바로 약효가 돌 정도로 강한 약은 아니었으니 단순한 플라시보일 테다. 하지만 의지할 구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대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그때까지는 제대로, 약효가 돌 것이다. 나는 목 아래에서 달착지근하게 끓던 한
나는 린네 군 때문에 죽을 운명인 게 분명하다. “별일이네. 시이나 군도 식욕이 없을 때가 있어?” “하아~ 저두 최근에 첨 알았잔아여.” 내가 영 먹지 못하는 꼴을 보며 점장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런 성질이지만, 아니, 이런 성질이기에 오히려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을 만큼 자란 뒤에는 항상 배를 채워야 할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음식은 언제나 나의 첫 번째
묘하게 눅눅해진 것 같은 책장을 만지작거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창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오는 계절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고향의 산줄기는 본래도 날씨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는 지형이었지만 비는 특히 그 영향이 컸다. 이렇게 한참 비가 오고 난 뒤에는 강물이 불어나고 바위가 미끄러워진다. 빗살에 견디지 못한 나뭇잎이 차오른 물웅덩이를 덮는다. 그
“꼭 인어공주 같네여.” “에엥~? 린네 군, 공주님처럼 귀여운 이미지?” “우웩! 그런 게 아니라여~!” 내 반응에 린네 군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차피 나는 책을 읽지 않는다. 읽어봐야 요리의 레시피 정도라는 거다. 제대로 책을 읽은 것도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니 무슨 비유를 하려 해도 범위가 좁은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부루퉁하게 의자의 등받이
“형제싸움이여?” 눈을 동그랗게 뜬 니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고가는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와중에도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는 손짓에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능숙하다. 히이로의 앞에 오므라이스가 놓인다. 제 앞에 곱게 놓인 오므라이스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히이로 대신 린네가 대답했다. “엉.” “아니, 그럼 이렇게 사이좋게 오므라이스를 먹
형은 결국 마을로 돌아왔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신선했고 아이돌 활동은 즐거웠다. 나조차도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는데, 막상 형은 이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언제나 돌아갈 것을 상정하고 있었던 마냥. 아마도 그게 맞을 테다. 책임의 문제였다. 마을은 군주를 필요로 했고 형은 형의 역할과 책무를 다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마을에서 군주에게 필요로
종종 일을 도와주던 가게 앞에서 곧잘 서성이던 길고양이가 있었다. 당시 내게 일을 가르쳐주던 사수가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밥을 챙겨주기에 그에 이어 나도 자연스럽게 챙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여느 길고양이들이 으레 그러듯 어느 날부턴가 가게에 오지 않게 되었다. 어렸던 내가 고양이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이라고는 생긴 게 귀엽고 털이 보드랍다는
학교는 인간관계의 마지노선이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떠난 뒤로는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구축하지 않는 한에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굳이 인간관계를 붙잡고 유지하는 데에 애를 쓰지는 않았다. 더 이상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는 해방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졸업한 뒤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린네 군에게도 소속이 생겼다. 프로덕션에 출입할 때 필요하다는 사원증에는 이름과 사진이 박혀있었다. 린네 군은 일견 덤덤해보였다. 하지만 프로덕션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도 하루를 꼬박 그 조그만 플라스틱 카드를 들여다보는 데에 쓴 걸 보면 아마 감회가 남달랐겠거니 싶었다. 고향을 떠난 뒤로는 어디에서나 외부인이었던 린네 군이다.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보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현관 밖에 린네 군이 서있었다. 분명 스페어키를 줬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린네 군은 내가 문을 열어주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힘없이 떨어트린 시선만이 바닥을 향해있다. 길게 자란 앞머리가 현관의 조명을 가로막아 그의 갸름한 뺨 위로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린네 군을 올려다보며 씩 웃
MDM이 끝났다. 당연하지만 린네 군을 구원한 건 시이나 니키의 몫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남자와 그렇게까지 끈적하게 얽힌 관계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는 그냥 그거다. 린네 군이 가고 싶은 곳에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기 싫은 곳에 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이나 니키는 린네 군이 가고 싶은 곳에 갈 때 따라가면 된다. 만약 린네 군
“린네 씨, 결혼한다더만.” 코하쿠 쨩, 간만에 찾아왔다 했더니 냅다 그 이야기부터 꺼낸다. 별로 관심이 있는 화제는 아니었기에 나는 도마 위의 야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볍게 대꾸했다. “넹넹, 저두 들었어여~” 린네 군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린네 군이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린네 군과 나
생일 이벤트가 끝난 뒤에는 유닛 멤버들과 뒷풀이 겸 야끼니쿠를 먹었다. 야끼니쿠를 무한정 먹을 수 있는 타베호다이로 가자고 했더니 코하쿠 쨩이 이벤트 내내 그렇게 먹어놓고 질리지도 않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그야, 케이크니 화과자니 달콤한 걸 잔뜩 먹었으면 짭짤한 걸 먹어서 밸런스를 맞춰야 했다. 애초에 영역이 다른 싸움이었다. 아무래도 영역이 달랐던 탓일까
니키의 아파트를 나와 조금 걸어가야하는 거리에 심야에나 문을 여는 식당이 있었다. 보통 식사는 아주 먹고 싶은 경우가 아니면 대충 니키에게 만들어달라고 협박하거나 니키가 만든 걸 빼앗아먹곤 했다. 애초부터 절대 1인분만 만들지는 않는 녀석이니 빼앗아먹어도 큰 문제는 못 되었다. 그 녀석은, 많이 먹기도 했지만 애초에 혼자 먹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
“너, 괜찮은 거냐?” “엥? 뭔 소리예여?” 멍청한 대답이었지만 내가 린네 군에게 돌려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 정도였다. 린네 군 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말이 생기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 대답에 린네 군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면 말하라고 했잖아.” 주변이
현관문을 부술 것처럼 열어젖히고 집 안으로 들어선 린네 군은 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발 끝에 걸려 방 안으로 끌려들어온 린네 군의 운동화는 대충 서로 눌러 벗겨낸 탓에 뒤꿈치가 구겨져 있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현관을 정리한 뒤 린네 군을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린네 군은 변기를 움켜쥔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널찍한 어깨가 구겨지듯 움츠
“……엥?” 목을 울린 것은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몸에 걸친 티셔츠가 이상할 정도로 늘어져있다는 데에서 이미 위화감을 느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뒷머리를 가볍게 긁적이고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이 시야가 낮아졌다는 것만으로도 낯설어졌다. 상황은 전부 파악했지만 그래도 눈으로 확인할 필요는 있다. 각오를 굳히고
“맛있게 드세여~!” ……아니. 전언철회다. 이건 이 자식의 문제다. 나는 그냥 휘말린 것뿐이다. 니키자식, 이상할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날 대하고 있다. 거기다 이 식탁은 뭐란 말인가. 아무리 오랜만에 먹는 니키의 식사라지만 내가 그 차이를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요리의 가짓수부터가 평소와는 달랐던 것이다. 오므라이스에 피자만 해도 이미 충분히 많고
곯아떨어진 린네 군을 업고 돌아오는 길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린네 군이 술에 취해 잠들었다는 연락을 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별수 없었다. 내 어깻죽지에 머리를 처박은 남자가 알콜 섞인 숨을 뱉어낼 때마다 씁쓸한 위액의 냄새가 난다. 한 차례 게워낸 뒤에도 계속 마셨던 걸까. 술도 못 마시는 게 아닌 인간이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될
어제는 린네 군과 키스를 했다. 어쩌다보니, 홧김에, 실수로. 그런 수식이 어울리는 한심한 입맞춤이었다. 린네 군의 숨결에서는 나마저도 어지러워질 정도의 술 냄새가 배어있었고. 나야 뭐, 린네 군과 달리 멀쩡했지만 피하거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린네 군의 실수는 나의 기회였다. 술김에도 차마 솔직해지지 못한 어색한 입맞춤에 질척한 키스로 대응한 건 내 쪽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