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스타!!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2

학교는 인간관계의 마지노선이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떠난 뒤로는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구축하지 않는 한에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굳이 인간관계를 붙잡고 유지하는 데에 애를 쓰지는 않았다. 더 이상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는 해방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졸업한 뒤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음식점의 사장님은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말이 많고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 삶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가 어리고 학력이 짧고 연줄이 없다는 점이 작용한 건지 그는 이것저것 간섭하고 조언하길 좋아했다. 누군가에겐 민폐로 보일지도 모르는 그런 다정하고 호들갑스러운 참견도 아주 싫지는 않았기에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에게 어울리곤 했다.

“시이나 군은 연애 같은 건 생각 없어? 인기 많잖아? 며칠 전에도 손님한테 전화번호 받았지?”

“아니, 글쎄! 들어바여, 사장님! 그 사람 저한테 퇴근하고 식사하자고 그랬자나여? 근데 옷 갈아입고 나가니까 막 모르는 척을 하는 거예여!”

내가 넋두리를 시작하자 사장님이 내 시선을 피하는 척 눈을 굴렸다.

“어쩐지 알 것 같아. 시이나 군 얼굴은 잘생겼는데 스타일이 참, 어흠~…….”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며 짓궂은 표정을 하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애초에 크게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건도 아니었고 농담에 예민하게 대꾸할 정도로 그를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나도 가볍게 대꾸했다.

“사장님두 뭘 모르시네! 옷은 편한 게 최고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햐아~ 정말 아깝다니까.”

감사할 일이다. 사장님도 참, 나 같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아깝다는 표현을 아낌없이 써준다. 정말이지 아깝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다. 하지만 나의 태도가 비굴이나 겸손으로 포장되는 건 싫었기에 진심을 말하는 대신 그냥 가볍게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요리도 그래. 시이나 군 정도의 실력이면 좀 더 공부해서 큰 레스토랑에 취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야기의 주제가 미묘하게 틀어졌다. 그 순간 앞으로 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였던 탓이다. 그런 화제에 질렸냐 하면…… 뭐, 지겹지 않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이겠지. 그렇다고 그의 말을 잘랐냐 하면 그러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웃는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장님은 재촉한 적 없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작은 가게의 아르바이트로 만족하는 건 아니지? 어때? 따로 공부하고 있어?”

그게 단순히 떠보는 말이 아니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가 어리고 연줄 없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걱정을 받아야 할 정도로 끔찍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미 그와 비슷한 질문들을 수없이 많이 들었다. 선하고, 그래서 더욱 무례한 질문들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런 말에 대응하는 방법 정도는 오래 전에 터득했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잉? 이 가게가 어때서여? 전 완전 맘에 드는데여?”

점장님은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지는 것은 싹싹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칭찬이었다. 나는 여전히 순진한 행세를 하며 그의 칭찬에 쑥스러워하는 척을 할 뿐이다.

싹싹하다니. 내 말은 무엇 하나도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그건 전부 나의 진심이었다. 점심에 식사도 제공되고 기한이 임박한 식재는 가져가도 된다. 주문할 때 제법 여유있게 주문하는 편이니 저녁에는 항상 양손 가득 챙겨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책임질 부분이 적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책임이 늘어나는 건 싫다. 그러니까 그의 모든 배려는 내게는 사실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배려는 대부분 동정으로부터 온다. 그의 배려는 구체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고작 중졸인 시이나 니키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도움이었다. 만약 내가 여전히 사회에 편입되기를 바랐다면, 말이다. 이제와서 그런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사장님은 몇 번인가 내게 이직 제안을 했다. 좀 더 바쁘고 사람이 많고 페이가 센 가게였다. 나는 그때마다 넉살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아니, 사장님 저 아예 보내버리시려구여? 요즘 세상에 사람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나는 그냥 시이나 군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지~“

이러나 저러나 사장님의 덕을 많이 봤다. 사장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좋게 말해준 덕분인지 다른 가게의 대타를 뛰게 되기도 했고 가끔은 단기 알바가 필요하다며 불러주기도 했다. 나는 말귀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요리에 대해서만큼은 성과를 보일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학력도 중졸에 그걸 상쇄할만한…… 이렇다 할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싼 값에 쓰기 좋았을 테다. 사용자 입장에서 나만큼 다루기 쉬운 노동력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순진하고 멍청한 얼굴을 한 채 열심히 일했고 곧잘 남은 식자재를 받아 집으로 향하곤 했다.

크리스마스니 뭐니 하며 거리가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레스토랑이 유난히 손님들로 북적이는 특별한 날이면 언제나 도서관 앞에서 날 기다리던 린네 군을 먼저 낡은 아파트로 돌려보냈다. 평소 이상의 격무에 시달린 지친 몸에게 혼자서 돌아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어쩐지 외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파트로 돌아가면 린네 군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저 남아서 버려졌을 뿐인 싱싱한 식자재로 요리를 했고 린네 군은 내가 요리를 가지고 식탁으로 오길 기다렸다. 하루를 마무리지을 우리의 식사는 단출했고 소박했으며, 그럼에도 맛있었고 즐거웠다.

아주 좋은 제안이 들어온 것이 그때쯤이다. 이름이 제법 알려져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직원들에게 숙식이 제공된댔다. 그도 그럴 것이 위치가 영 좋지 않았다. 아마 멋진 경관을 위해 접근성을 포기한 결과겠지. 이해의 계산식이 돌아갔다고 해도 막상 그런 저울질에서 직원의 숙식까지 부담하며 경관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애초에 그토록 교통이 좋지 않은 위치에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올 정도는 되는 대단한 레스토랑이라는 거다. 당연히 그 레스토랑에 가려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우습게도 린네 군의 얼굴이었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아이돌의 꿈 역시 멀어진다. 어디서든 아이돌이 될 수 있다면 린네 군도 애써 고향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근처에는 아이돌 사무소가 있다. 내가 이곳에서 린네 군을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린네 군은 여기서 멀어지고 싶지 않을 테니 나를 따라와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 결국 린네 군을 생각하면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린네 군에겐 굳이 말하지 않았다. 딱히 고민 중인 것도 아니고 이미 결정된 문제였으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게 문제였다. 만약 내가 먼저 린네 군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면 상황은 조금 바뀌었을까?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내겐 린네 군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느 날엔가 퇴근이 조금 늦어진 날이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었고 그저 점장님의 농담따먹기에 어울려주던 때였다. 린네 군이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가게로 들어왔다. 그가 손님이 아니라는 것은 그 태도에서 드러났다. 도서관에서 나의 퇴근을 기다리다 먼저 찾아온 것 같았다. 점장님이 그를 손님으로 대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내가 알은 체를 하며 린네 군에게 달려갔다.

“아, 저희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 사촌형이에여. 이쪽은 저희 점장님이에여. 인사해여, 린네 군.”

“니키가 신세지고 있습니다.”

린네 군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렇게 말했다. 이 인간, 그새 제법 뻔뻔해졌다. 도시 물을 먹은 탓인가. 나는 슬쩍 그를 흘겨보았다. 나를 향해 슬그머니 미소짓는 길쭉한 눈매와 시선이 마주쳤다. 짓궂은 얼굴이었다. 그런 린네 군의 태도에서 우리 둘의 사이가 꽤 친밀하다고 판단한 건지, 점장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시이나 군이랑 친한가봐? 자자, 형아도 시이나 군을 설득해주면 좋겠어.”

점장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린네 군이 조금 느리게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린네 군은 눈을 깜박이는 일도 없이 나를 똑바로 향한 채로 점장님에게 되물었다.

“설득, 말입니까?”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눈치챘다. 그건 두 사람을 만나게 한 나의 실수였다. 내가 린네 군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레스토랑으로부터 받은 제안 말이다. 내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이야기는 린네 군을 흔들어놓기 충분한 비밀이 되어있었다.

린네 군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점장님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지겹도록 들어온 설득이었다. 온전히 배려와 걱정으로 이루어진 참견이었다. 몇 번이고 거절했다. 가볍게 에둘러 농담을 섞어서. 그러면서도 예의를 지켜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면 된다. 점장님이 앞으로 몇 번을 제안해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내 태도 또한 똑같을 것이다. 점장님에게라면 그럴 수 있었다. 점장님은 아쉬워하면서도 이해할 것이다. 나의 농담에 농담으로 응수할 것이다. 서로의 햄스터볼에 부딪친 것처럼 우리의 영역은 부드럽게 서로를 밀어낼 것이다. 하지만 린네 군은?

나는 확실히, 린네 군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린네 군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린네 군에게서는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의 사이에 완충제는 없다. 린네 군은 햄스터볼에 얌전히 들어가있는 애완용 햄스터 같은 게 아니다. 그는 야생동물처럼 내 햄스터볼을 발톱으로 움켜쥔다. 그러면 나는 햄스터볼째로 붙잡힌다. 그 뒤에는 깨진 햄스터볼 사이로 쏟아지는 그의 언어와 감정을 그대로 받아내야 한다.

린네 군은 분명 서운해할 것이다. 왜 비밀로 했냐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졸업식 날처럼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졸업식 날의 침체된 분위기를 기억한다.

린네 군은 웃음으로 대충 무마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가볍게 에두르면 무겁게 매달리고 농담을 건네도 절대 맞춰주지 않는다. 그저 올곧게 나를 노려볼 뿐이다. 그는 배려를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모든 상식과 예절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예의라는 게 없다.

린네 군은 이제 완전히 점장님의 이야기에 집중한 채다. 나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등 뒤로부터 린네 군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질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린네 군이 쫓아와 내 목덜미를 붙잡는 상상을 했다. 붙잡히면 어떻게 변명해야 하는 걸까. 이를 악물었다. 생각이 겹치고 겹쳐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익숙한 느낌에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이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배가, 고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요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해야했다. 하마터면 생각에 빠져 눈치채지 못하고 죽을 뻔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좋은 변명거리가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체질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싶어서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요리를 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죽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여전히 린네 군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마저 린네 군이나 생각하고 있다니. 이래서야 굶어죽는 것도 시간문제다.

린네 군도 금방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린네 군은 겉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니키.”

“아, 왔어여? 너무 배가 고파서여. 얼른 식사 준비할 테니까 린네 군도 조금만…….”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이야기해봐.”

린네 군은 곧장 그렇게 말했다. 린네 군은 이런 사람이다. 내 고민은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나를 둘러싼 햄스터볼 따위는 린네 군의 날카로운 발톱 아래에서 처참하게 부서진다. 나는 애써 요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꾸했다. 다행이 밝은 목소리가 나왔다.

“나하항! 그건 이미 안 하기로 결정한 일이라구여~”

그러고보면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린네 군은 진학을 포기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린네 군은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제가 나의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형이라도 된 것처럼.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주제에. 자기도 어린애면서.

“왜 그렇게 뭐든지 쉽게 포기해버리는 거야?”

관계라는 건 피곤할 뿐이다. 신경을 쓰다보면 배만 고파진다. 그러니까 린네 군이 그만 파고들면 좋겠다. 서로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책임지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작 나 같은 걸 위해서 스스로의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학교도, 일도…… 니키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닌 거야?”

그렇게 말한 린네 군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호흡마저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니키에게 중요한 건…….”

순간 린네 군이 말을 끊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무심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린네 군의 시선이 느리게 나를 향했다. 시선이 맞닿았다. 이제라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너 설마.”

말문을 열고서도 잠깐 망설인 린네 군이 조금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나…… 때문이야?”

“엥. 린네 군 자의식 너무 강한 거 아니에여?”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애써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린네 군이 굴러들어오기 전에도 졸업하면 바로 일할 생각을 종종 했었다. 생각 뿐이었지만. 린네 군은 그저 그 결정을 가속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나는……. 아니, 나 역시도 평범한 삶을 동경했었다. 린네 군이 쭉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있으니까 생활비가 부족해서 진학보다 취업을 선택하고, 이 지역에서 벗어나야 하는 직장은 포기한 거 아냐?”

나는 그리 어려운 인간이 아니다. 단순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똑똑한 린네 군이 내 선택의 이유를 눈치채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니키는 나 때문에…….”

하지만 드물게 린네 군이 틀렸다. 이 결과는 린네 군 때문이 아니라 린네 군 덕분이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에 얽매여있지 않을 수 있게 해줬다. 아무 의미 없는 인간관계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도록 해줬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레일을 따라 달리지 않는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내게 보여줬다. 내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해줬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도록 당신이 만들어줬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이 향한 끝에는 항상 린네 군이 있었다. 그 뿐이다.

“나 때문에,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는 거야?"

그랬기에 린네 군의 상처 받은 얼굴을 보는 건 역시 조금 난감했다. 당신이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우리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딱히 서로에게 화가 났다던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린네 군도 내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시무룩해진 것 같았다. 내가 진학하지 않고 바로 일한 것이나 좋은 제안을 거절해버린 데에 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린네 군은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니까. 나는 여전히 인간관계에 둔하고 관심이 없었지만 이 분위기를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인간관계에 둔하고 관심이 없었기에 당연히, 해소할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린네 군과 함께 귀가하는 일도 없어졌다. 내가 도서관에 도착하는 것보다 먼저 린네 군이 집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린네 군이 어색하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어쩐지 그게 조금,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감정에 붙일 이름을 고민하는 데에도 칼로리는 소모된다. 최대한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어느 날엔 일하는 음식점에 유명한 프로듀서가 들렀다. 나도 그 업계에 짧게나마 발을 들였던 사람이니 그 얼굴을 본 순간 알았다. 당시에도 아이돌 프로듀싱을 하던 사람이었다. 멏 번인가 아버지와 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이름까지 기억할 여력은 안 되지만. 뭐, 그 쪽에서는 아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 딱히 죄책감이랄 것은 들지 않았다. 물론 그게 당연하기는 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성장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에겐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나는 뻔뻔하게 그에게 다가섰고 주문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텄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빠르게 친밀해질 수 있는 것은 드물게 타고난 나의 자질이었다. 짧은 대화만으로 그가 지금 몸을 담고 있는 소속사까지 알아낸 나는 가볍게 린네 군의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갓 중학교를 졸업해서 바로 사회에 뛰어든 어린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어른은 그리 흔치 않다. 쉽지 않으리란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돌도 대체로 어린애들이다. 그들도 어린애들을 다루는 일에는 익숙할 터였다. 어쩌면 나 같이 별 도움 안 되게 생긴 어린애라도 어떻게든 쓸모를 찾아낼지도 몰랐다. 뭣보다 그 업계에서 꽤 오랜,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생존 전략은 확실하겠지.

역시나 그는 나 같은 어린애를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가 린네 군을 아이돌로 만들어주기 위해 나를 이용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용당해줄 생각이었다. 덕분에 그 다음부터는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캐릭터가 진짜 독특한 사람이거든여.”

린네 군의 특이한 상황이나 기괴한 과거사를 전부 다 이야기한 건 아니었다. 그런 걸 전부 드러내기엔 리스크가 크기도 하고 이야기가 길어지면 사람들은 쉽게 관심을 잃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귀찮았다. 린네 군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다보면 분명 배가 고파질 터였다.

덕분에 간략한 설명이 되었지만 다행이 그는 린네 군의 기묘한 캐릭터성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야 그렇다. 잘생기고 말끔한 페이스에 묘하게 천진한 구석이 있어 엉뚱한 발화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이상하다는 말은 칭찬이다. 그의 관심에 조금 들떠버린 나는 몇 가지 일화를 더 이야기해줬다. 길어지면 안 되는데. 지루하게 만들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은 나 자신이 가장 신났던 것 같다. 그 순간 느꼈던 고양감까지 부정할 셈은 없었다.

명함은 받지 못했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기약 없는 인사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실패를 상정하기야 했지만 그래도 꽤 순조로웠는데. 나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말을 많이 한 탓에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는 얼마 뒤에 다시 찾아왔다. 음식점이 아니라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찾아온 것이 그때와의 유일한 차이였다. 기약 없는 인사는 의외로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약속을 잡았다. 받아 든 명함에 적힌 이름은 잘은 몰라도 낯이 익기는 했다.

나는 곧바로 린네 군에게 연락했다. 또 도서관에 갔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괜히 내가 초조해졌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내가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자 린네 군이 문을 열어주었다. 놀란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열쇠로 열고 들어오니까 당황스럽긴 했을 테다. 오는 동안 뭐라고 말을 할지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쩐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린네 군을 보자마자 이제껏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내밀었다. 조그맣고 빳빳한 종이가 린네 군의 손에 넘겨졌다. 린네 군의 기다란 손가락이 살짝 머뭇거리며 명함을 집었다.

“……뭐야?”

린네 군은 조금 멍한 상태로 내가 건넨 명함을 눈으로만 읽었다. 그의 이름과 함께 적혀진 직급과 직책은 아마 린네 군에게도 익숙할 터였다. 린네 군이 느린 손짓으로 명함을 뒤집었다. 명함의 뒷면을 차지한 디자인은 린네 군도 잘 알고 있는 기획사의 로고를 사용했다. 명함을 전부 확인한 린네 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시선에 대답했다.

“꽤 유명한 프로듀서예여. 이야기하다보니 코즈믹 프로덕션에서 새로운 아이돌을 발굴하고 있다나 뭐라나……. 저야 들어도 잘 모르지만 린네 군은 관심 있잖아여?”

“…….”

린네 군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배가 크게 울렸다. 뛰어오느라 그새 칼로리를 소비한 모양이었다.

“나하항……. 바로 저녁 만들게여!”

조금 민망해져 대충 웃음으로 때우고 바로 조리대로 향했다. 린네 군은 따라오지 않았다. 여전히 현관 앞에 선 채다. 나는 냉장고 안의 식재료를 확인하고 린네 군을 향해 물었다.

“고등어구이랑 계란말이 중에 뭐가 좋아여?”

“응…….”

대답이 되지 않는다. 내가 뭘 물어도 린네 군으로부터 돌아오는 건 고민에 빠진 듯한 단답형의 대답이다. 하지만 그 대답의 온도가 어제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린네 군이 나를 꺼려하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뭐, 확실하게 기뻐해주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 린네 군도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겠지. 린네 군에게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등어구이와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메뉴였지만 나도 린네 군도 뭐든 잘 먹으니까 상관없었다.

요리를 끝낸 나는 금방 지은 따뜻한 밥을 한가득 퍼올려 린네 군 앞에 놓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린네 군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기분 좋아보이네.”

“엥? 그야.”

그야? 나는 내가 꺼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뭐지? 린네 군의 일이 남일 같지 않았다. 린네 군이 기뻐하면 나도 기뻤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린네 군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사실, 당연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야’ 같은 부사를 붙여 설명할 이유가 못 된다.

그야…… 린네 군이 기뻐하니까. 턱없이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완성됐다. 그걸 입 밖에 내는 것도 어쩐지 내키지 않아 입을 다물어버리자 린네 군이 속삭이듯 나를 불렀다.

“……니키, 너.”

“넹?”

“……아냐. 나중에 이야기할게.”

“우잉? 뭐예여, 싱겁게.”

린네 군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여전히 대화는 없었지만 어쩐지 따뜻한 저녁식사였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린네 군을 처음 본 순간 그도 어떤 종류의 확신을 가진 모양이다. 린네 군에게는 첫 만남에 바로 명함이 내밀어졌다. 그러면 린네 군은 조금 느리게 명함을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제법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명함을 들여다 보았다. 나를 거쳐 받는 것과는 감회가 다를 것이다. 아마 감격의 순간이었겠지. 나는 별 생각 없이 손님이 빠져나간 테이블이나 닦았다.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마친 뒤에도 어째 린네 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채 내가 내어준 달착지근한 주스만 느리게 마시고 있었다.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진 얼굴은 예상 외였다. 아이돌에 대해 알려주면 눈을 빛내며 기뻐하던 사람이다. 이 급진전에라면 당연히 엄청나게 기뻐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그 반응에는 조금 맥이 풀렸다. 뭐, 너무 갑작스럽게 꿈에 가까워져서 현실감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적당히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뻐해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왜 안 가는 거야, 저 사람.

린네 군이 나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내가 퇴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다음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보통 음료수 하나로 그 정도 죽치고 있으면 날 기다리는 거라고 눈치챘어야 했다. 그게 보통이라는 거겠지. 그저 내가 보통에 속하기엔 함량 미달이라는 것이다.

오랜만에 린네 군과 함께 집으로 향하려니 익숙한 퇴근길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린네 군은 언제나 그랬다. 원래라면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만든다. 린네 군이 내 곁에 있으면 피부에 닿아오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건 아주……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언제든 배가 고팠기에 얼른 집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천천히 걷고 싶었다. 길 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일이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쓸모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린네 군도 그랬을까? 내 곁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걷던 린네 군이 조금씩 발을 끌었다. 점차 느려지던 발걸음 끝에 린네 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그를 돌아보았을 때는 린네 군의 걸음이 아예 멎은 다음이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린네 군과 시선이 마주쳤다. 린네 군은 시선을 굴리다 바닥을 바라보았다. 린네 군이 느리게 목을 울렸다. 뱉어내는 목소리는 흐르는 것처럼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니키도.”

그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린네 군은 이내 무얼 결심한 듯 내 얼굴을 곧게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를 향해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니키도 함께 했으면 좋겠어.”

린네 군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떤 각오처럼, 린네 군은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아이돌.”

단단하고 정갈한 선포에 약간의 당혹감이 들었다. 같이 데뷔하자고 한 건가? 나한테? 아이돌 시이나 니키라니. 그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진로였다. 나는 가만히 눈을 굴렸다. 가장 먼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직 세상물정에 어두운 린네 군과 둘이서 한 달을 버티기엔 조금 부족한 식비를 떠올렸다.

매니저니 프로듀서니 붙기야 하겠지만 그러고도 린네 군을 그냥 내버려두기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워낙 세상물정을 모르고 엉뚱한 구석도 있어서 나 없이도 잘 해나갈까 걱정이 들었다. 게다가 아이돌을 하면 식비도 어느 정도는 충당이 될 테다. 적어도 월급 즈음에 식비가 부족해지는 일은 줄어들겠지.

눈 앞의 일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내가 먼 타지의 부모님과 바로 눈 앞에 있는 린네 군 중에서 누굴 고르게 될 것인지는 뻔했다.

부모님, 부디 이 불초자식을 용서하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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