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니지차

[사반] 운니지차 1

어느날 갑자기

※ 폴리아모리 엔딩(세같살/심구, 악칠) 주의

※ (씬이 있다면) 동축리버스 주의

※ 빙하 취급 나쁨(미안하다 빙하야)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검고 희어지기를 여러번. 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자,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제, 사제. 내 말이 들리는가?"

심현은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개가 천장을 가리고 있었고, 그 주위로 하얀 베일이 하늘하늘 늘어져있었다. 웹소설 열성 독자인 심현은 쉽사리 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엎드려 보나 물구나무서서 보나 트립이었다. 

‘내가 본 웹소가 뭐 있었지?'

심현은 빠르게 제 머릿속을 검색했다. 그는 꽤 기억력이 좋았고, 한 번 읽은 책은 거의 외워내는 훌륭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기억력에 나름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일력서생이었나? 아니면 제법무쌍? 복장으로 보면 선협물인 것 같은데, 선사신공?'

심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심현의 왼쪽 침상에 앉은 남자는 그런 심현의 속내도 모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어디 불편하지는 않고?"

아, 사람이 있었지. 심현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인 광경에 기겁했다. 나무로 된 기둥, 한지 덮인 창, 고전 복식을 입은 남자, 그리고 반투명한 귀신. 심현은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귀신? 귀신이라고?

'늦게도 일어나는군.'

귀, 귀신이다! 심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에게 수상쩍은 기색을 들키면 안 된다. 다행히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묵묵히 심현만 바라보고 있었다. 

"괜, 찮습니다."

어색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상대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말 한 마디 내뱉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뭐라도 하나 주던데, 나는 왜 아무 것도 없지? 상태창! 스테이더스!

그러나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심현은 좌절했다. 

'망했어! 어떡하지?'

'빌어먹을. 저딴 반푼이가 내 몸을 차지했다고?'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거든!'

심현은 갑자기 들은 폭언에 속으로 욕을 쏟아부었다. 갑자기 웬 소설 속으로 빙의해버면,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둥둥 떠다니며 매섭게 심현을 노려보던 귀신이, 휙 가까이 다가왔다. 심현은 극도로 놀라 몸이 굳었다. 

'잠시만. 네놈, 내가 보이는구나.'

그러면 보이지, 안 보이겠냐! 심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은 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졌구나. 목 사제를 불러올까, 청추 사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남자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청추? 심청추? 여기 광오선마도였어?

광오선마도. 시대를 풍미할 걸작은 아니지만, 한철 반짝이는 베스트셀러만큼의 가치는 있었던 작품이었다. 심현도 지인의 권유로 잠시 읽어본 적이 있었을 정도로.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창궁산파의 장문인, 악청원일 것이다. 청정봉주 심청추의 사형은 악청원 한 명 뿐이었으니까. 

심현은 눈을 내리깔며 고민에 빠졌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저걸 어떻게 치우지?'

지금 그는 한 마디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해서 그의 정체가 들통나기리도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 무슨 꼴을 겪게 될지 몰랐다. 

고뇌에 찬 심현의 머리 위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귀신은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해라.'

'뭐?'

'닥치고 따라해.'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심연에서 기어오르는 마물처럼 스산했다. 심현은 번쩍 놀라 귀신의 말을 따라했다. 

'장문사형께서 몸소 걱정해주시니 이 청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장문사형께서 몸소 걱정해주시니 이 청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장문인께서도 공사다망하실 것을 훤히 아는데 어찌 하찮은 일을 부탁드리겠습니까?'

"허나, 장문인께서도 공사다망하실 것을 훤히 아는데 어찌 하찮은 일을 부탁드리겠습니까?"

즉시 악청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문장에 담긴 뜻을 읽어낸 까닭이었다. 악청원이 조심스럽게 반박을 시도했다. 

"괜찮다. 사형이 사제를 보는 일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다고."

"이 청추의 심기가 불편합니다."

조금 날카로웠나? 지레 찔린 심현의 속내와 다르게, 악청원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알겠다. 이 사형은 가 볼테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악청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공했다! 심현은 내심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악청원을 흘긋 바라보았다. 다부진 어깨가 어쩐지 외로워보였다. 귀신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리 하지요."

악청원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둘. 

‘이제 네놈 차례군.’

귀신이, 아니 원래 몸 주인이 냉기를 폴폴 풍기며 심현을 쏘아보았다. 심현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내가 뭐! 나도 할 말 많아!”

하지만 심청추는 심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말은 너무나도 서늘하여, 마치 엄동설한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창궁산파 청정봉주의 몸을 노린 까닭이 뭐지?’

“내가 노린 거 아니거든?”

‘시답잖은 수작 부리지 마라.’

“나도 내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지리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심현은 저 망할 귀신을 떼어놓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때,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명범이군’

“그건 또 누군데?”

대충 심청추의 제자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나름 비중있었던 인물이었나보다. 심현은 떨리는 눈으로 심청추의 눈을 마주보았다. 

“어, 어떡하지?”

심청추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심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상 옆에 우아하게 앉았다. 

‘방법은 똑같다. 내가 하는 말을 따라해.’

“으, 응.”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현은 심청추의 냉랭한 목소리를 최대한 흉내내려 애썼다. 

“들어오거라.”

“네, 사존.”

들어온 것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남자는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심현의 옆 책상에 서류 한 뭉치를 얹어놓았다. 

“선맹대회에 참여할 제자들의 명단을 추렸습니다.”

“알겠다.”

선맹대회? 벌써 선맹대회 시즌이야? 심현은 기억을 탈탈 털었다. 그가 아는 스토리 내에서, 선맹대회는 두 번 나왔다. 낙빙하가 참여하는 선맹대회와, 아닌 선맹대회.

전자라면 매우 곤란했다. 흑화한 남주를 제 손으로 만들라니, 그건 죽어도 싫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도망치고 만다. 심청추 본신의 능력은 출중한 편이니 굶어죽지는 않겠지. 애초에 금단 중기의 선사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았다. 

명범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업무지시를 요청했고, 심현은 딴생각을 하면서도 심청추의 지시를 곧잘 전달했다. 질답이 끝나고, 명범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어찌할까요.”

‘그 녀석?’

‘네놈이 알 바가 아니다. 따라해.’

“내버려두거라.”

“알겠습니다.”



‘그녀석이라...’

‘딴 생각할 여유가 있는 모양이지?’

“엄마야!”

명범이 떠나자마자, 심청추는 다시 득달같이 심현을 물어뜯었다. 그는 심문의 귀재였다. 언행의 빈틈을 파고들어 진실을 끄집어내는 것에 능숙했다. 

심현은 그가 광오선마도의 독자였다는 사실만 빼고 모든 것을 탈탈 털린 것 같았다. 어쩌면 독자였다는 사실도 털려버렸을지도. 

‘그래서, 부잣집 도련님께서 한낱 필부의 몸에는 어인 일로 왕림하셨는지요.’

“나도 모른다니까!”

부잣집 도련님으로 오해받는 것도 싫은데, 남의 몸에 수작부렸다고 누명을 쓴 건 더 억울했다. 심현은 분에 차서 소리를 빽 질렀다. 

“너도 아무것도 모르잖아! 창궁산파 청정봉주면 대단한 거잖아! 너라도 뭘 몸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

심현은 씨익씨익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불안한데, 강도 높은 신문을 받으니 정신이 너덜거리는 것 같았다. 벌써 시야가 뿌얘지기 시작했다. 

‘쯧.’

혀를 차며 심현을 바라보단 심청추가 냉랭하게 선언했다. 서릿발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었다. 

‘협조해라.’

“뭐?”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네 귀환을 도울테니, 그동안 내 연구에 협조해.’

“협조?”

‘그래. 내 몸을 빼앗았다면 그 대가를 치뤄.’

나도 뺏고 싶지 않았어! 그 말을 내뱉으려던 심현은 심청추를 보고 움찔했다. 그가 뻗은 손이 문서더미를 뚫고 지나치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창궁산에는 온갖 기이한 주술과 물품이 들어온다. 그 중에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 말하는 심청추의 모습은 마치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안개를 닮아보였다. 심청추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래. 같이 힘내자.”

‘하?’

심청추의 눈빛에서 이 애송이가 대체 뭐라는거야? 라는 속내가 훤히 보였다. 심현은 눈물을 닦아내며 기합을 넣었다. 이세계의 첫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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