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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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 봐. 수학 문제 500개를 풀고 스쿼트 500개를 해야만 나갈 수 있대.” 도전해볼래? 하고 묻는 대신, 아스터는 마치 즐겁다는듯이 벽에 적힌 설명문을 읽었다.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대로 니아는 불만이 아주 많았다. 지난번에는 무슨 이상한 캐비닛에 갇히더니, 이번에는 또 이상한 방이라니. 니아는 방 안에 이상한
아스터는 디펜스를 여유롭게 끝냈다. 사실 내내 평화와 협력을 주창하기란 학계나 정계 전반에서 예의로라도 하는 일이나, 실제로 그를 이룩하고자 애쓰는 교수들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아스터의 학위 디펜스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랬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사실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아스터는 내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니아가 따로 마중을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를 앞둔 여름날이었다. 촘촘히 산재한 공장의 열기 때문인지 낮은 나날이 더워지기만 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 셰필드의 중심가로부터 2마일쯤 떨어진 곳, 더위가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이른 밤을 틈탄 19시 14분, 린치 부부는 첫 번째 자식을 얻었다. 첫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겠다 호언장담했던 에이드리언 다니엘 린치는 그 약속대로 아이의
“그는 이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되었을 위인이었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음침하게 얼굴 위로 드리운 남자가 묘비 옆에 서서 추도사를 읽기 시작했다. 하늘은 늘 그랬듯 우중충하고 흐렸다. 굵은 눈발을 실은 겨울바람이 좁은 틈새를 매섭게 훑으며 지나갔다. 사람들이 눈물을 꾹꾹 찍어내고도 남은 수분이나, 눈가에 붙어 녹은 눈송이는 건조한 공기가 스쳐지나가면서 눈꼬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순도가 낮은 강철이 연달아 생산되는 날. 보통 7번부터 9번 용광로와, 3번 전로에서 가끔 일어난다. 이런 물건은 바로 납품하지 못하고 각각 나누어 다시 주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문제가 없는 용광로와 전로에서 나온 강철 사이에 순도 낮은 강철을 녹여 섞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그나마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가 있던 설비
나의 비관은 언제나 더욱 먼 곳을 향했다. 이미 닥쳐온 순간은 미래를 망치지 않기 위해 정면에서 맞닥뜨렸다. 여지껏 좀먹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나는 사람이 비관으로써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잠식된 비관이 아닌, 동적인 비관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지나치듯이 [ ]을 듣고 평소와 같이 무시하지 않은 데에는 그러한 배경이
여기 자신의 삶을 전쟁으로 만든 이가 있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 다짐하며 날을 갈고 겨눈다. 전투가 끝나도 검집은 채워지지 않는다. 전쟁을 시작하기는 쉽다. 그러나 끝내기는 어렵다. 시기를 놓친다면 전황은 소모전으로 빠진다. 그 검날에 타인의 피만이 묻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테건은 단 하나의 전쟁을 지켜보았다. 명목은? 상대 국
— 유언자, 테건 다니엘 카펠은 18XX년 1월 8일을 기준으로 이하와 같이 유언한다. — 앞서 유언자는 심적 문제가 없으며, 이하 유언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관 등 어떠한 외부자에도 간섭받지 않고 온전히 개인의 판단으로 유언을 작성했음을 고지한다. 1. 유언자의 양친 에이드리언 다니엘 린치와 스칼렛 린치의 재산에 대한 상속 권리는 모두 현 배우자 제레
사빈 유나는 눈을 떴다. 이곳은 광장이 아니었다. 잘려나갔던 왼쪽 다리는 멀쩡하게 붙어 있고, 혈흔은 어느 곳에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설은 꿈이었던 걸까? 아니, 이곳은 광장도 아니며 본인의 집도 아니었다. 그를 자각하고 시야를 넓히자 특이한 안경이 보였다. 사빈 유나는 이 안경을 본 적이 있다. 광장에서 손을 들었던 그 사람. 그가 하고 있던
사빈 유나는 외출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저문 시간대에 돌아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은 물건을 구하기 위해 많은 곳을 돌아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사빈 유나는 만족했다. 유명 브로커인 어머니의 이름 없이도 오래된 서적을 구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아마 거래의 최종 단계에서 물건을 가지고 있던 자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