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티

소생

*주의: 반복되는 자살, 살해 묘사

사빈 유나는 눈을 떴다. 이곳은 광장이 아니었다. 잘려나갔던 왼쪽 다리는 멀쩡하게 붙어 있고, 혈흔은 어느 곳에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설은 꿈이었던 걸까? 아니, 이곳은 광장도 아니며 본인의 집도 아니었다. 그를 자각하고 시야를 넓히자 특이한 안경이 보였다. 사빈 유나는 이 안경을 본 적이 있다. 광장에서 손을 들었던 그 사람. 그가 하고 있던 안경이다.

“눈을 떴군요.”

그가 말했다.

“사이버네틱 의사인가?”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치료비는 받지 않죠.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않겠어요? 청중은 나뿐이지만.”

사빈 유나는 입을 떼는 대신 몸을 일으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몸이 뉘여져있던 수술대에서 내려와 신체의 상태를 확인하듯 걸었다.

“나노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생전과 똑같은 상태로 재생시켰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디스티 노바가 그를 지켜보며 물었지만 여전히 사빈 유나는 말이 없었다. 다만 수술대 근처를 맴돌 뿐이었다.

“나는 말이지.”

그의 시선이 시술용 전동 톱에 꽂혔다. 동시에 손이 뻗어졌다. 사빈 유나는 톱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전원을 켜 날이 돌아가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디스티 노바는 무척 당황한듯 억지로 웃으며 빠르게 말했다.

“그건 위험하니 내려놓는 게 어떨까요?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장비의 회전음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입니다!”

“되살아나기를 바란 적이 없어.”

노바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사빈 유나는 그렇게 선언하고 본인의 목을 잘라냈다.

사빈 유나는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바로 몸을 일으켜 신체를 확인했다. 사이버네틱 의사가 자신을 다시 살려낸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곁에 서 있었고, 위험한 물건은 모조리 치워진 상태였다. 유나는 분노에 찬 눈으로 노바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건 내 의지에 반하는 행동이야!”

“그런 것 같더군요. 하지만 난 당신이 하려던 말을 반드시 전부 들어야겠습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당신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각자의 의지가 충돌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네요.”

유나가 수술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엄지를 감아쥔 주먹에 온 힘을 실어 노바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노바가 쓰고 있던 안경이 날아가고 붉은 눈이 유나를 응시했다. 그는 제자리에 멀쩡히 서서 양팔을 벌린 채로 말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원초에 도달한 자라면 이런 고난을 견뎌낼 가치가 있었다.

“이게 그 응답입니까? 폭력을 이용해 굴복을 받아내려는 건가요?”

“아니.”

그를 향해 유나가 달려들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움직임이었다. 노바는 체중에서 오는 힘을 못 이기고 나뒹굴었다. 그를 붙잡은 유나가 꽉 악문 치아를 드러내며 사정없이 주먹을 내리꽂기 시작했다.

“멈추세요! 이것보다 나은 방법이 분명…”

디스티 노바가 잡히지 않은 한쪽 팔로 주먹을 간간히 막아내며 겨우 말했다. 하지만 유나의 대답은 분출중인 감정과 다르게 무감각하며 싸늘했다.

“너는 나를 모르잖아.”

그러더니 유나는 잠시 노바를 두고 일어섰다. 주먹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수술실 밖으로 나간 유나를, 노바는 겨우 일어서 비틀거리며 쫓아갔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유나는 어디서 찾아낸 건지 길다란 몽키 스패너를 들고 노바를 맞았다.

“흐아아아!”

그리고 다시 상대에게로 돌진해 머리를 후려갈겼다. 확실히 죽은 것을 확인하기까지 몇 번이고 막대기를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그 다음으로 유나가 선택한 일은 처음과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당신을 되살려낼 수 있습니다. 답을 얻을 때까지 말이죠.”

사빈 유나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디스티 노바가 말했다.

“둘 다 분명히 죽었는데….”

유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려 했으나 팔을 고정한 밴드 탓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노바가 웃었다. 승리감 따위가 아닌, 버릇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캬하하! 당신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움직임을 억누를 필요가 있겠더군요. 죽을 때까지 얻어맞는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거든요. 아직도 온몸이 쑤셔요. 얼마나 두드린 건지….”

노바가 미간을 찌푸린 그대로 커스터드 푸딩을 한 스푼 떠먹었다. 한참 그 맛을 음미하더니 숟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신체에 손상을 입더라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거든요. 그게 아니었다면 여기서 미련 많은 죽음을 맞이했겠지요. 참 다행인 일이죠! 아무튼, 내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당신이 얻은 지식을 내게도 알려주세요! 그 다음에는 죽든 말든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다음 순간 작은 숟가락이 마치 발언권이라도 되듯 유나에게로 향했다. 유나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확히 무엇을 알려달라는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 연설을 할 때는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있었는데, 지금은 자신을 제멋대로 살려낸 노바를 향한 분노만이 맴돌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노바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들려주기까지 준비가 필요하다면 시간을 충분히 가지세요. 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한 번 맞아 죽었던 사실이 무색하게 노바의 목소리와 태도에서는 정도 이상의 여유가 묻어나왔다. 유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싫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사람… 이들이 세상을 이토록 불균형하게 만든 원인이다. 그들은 멈추는 법이 없다. 그 표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유나의 침묵이 이어졌다. 노바는 그 옆에서 조용히 푸딩을 떠먹기만 했다. 그리고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졌을 때 노바가 뒤돌았다.

“뭐, 꼭 오늘 전부 말해줄 이유는 없겠죠. 당신의 적대감을 보면서 나도 각오는 했습니다. 그렇다고 위협을 가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저 당신이 길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될 뿐이죠!”

노바의 고개가 돌아갔다. 유나는 비스듬히 보이는 그의 안경에 시선을 맞췄다. 무슨 꿍꿍이로 하는 말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음이 전부였다.

“그럼 나를 며칠이고 여기에 두려고?”

“후후,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한다면 이 건물 안에서는 돌아다닐 수 있게 해드리죠.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죠? 말 한마디면 자유가 보장되는 거라고요. 그저 여기서 지내면서 원래 하려던 연설만 마저 하면 되는, 당신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 아닙니까?”

“…그래, 좋아. 약속할게.”

꽤 순순히 대답을 내놓는 유나의 태도를 노바는 잠시 의심했다. 그러나 약속이라 한 말을 벌써부터 어긴다면 이후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욱 나빠질 것이 뻔했으므로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 조작했다. 유나는 세 번째로 수술대 위에서 일어났다.

“내가 처음으로 죽은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어?”

그가 하는 말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의 것 같았다. 당장은 이전 두 차례와 같은 맹목적인 광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진심으로 약속에 동의한 걸지도 몰랐다.

“아직 하루도 안 지났습니다. 오늘 하루동안만 세 번 죽은 거죠. 배는 안 고픈가요?”

창밖은 명백하게 주황빛이었다.

카타나는 하루종일 발닿는 모든 곳을 들쑤시며 사빈 유나를 데려갔다는 자를 찾아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단서 하나를 붙잡았다. 시가지에서 약간 떨어진 공터 같은 곳에 큰 저택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 아니냐는 증언이었다. 카타나가 이를 알아낸 뒤 알맞은 건물을 찾아가기까지는 약 2시간이 걸렸다. 그는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사면을 돌며 창문 안쪽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 많은 창문 중 멀쩡한 응접실처럼 보이는 한 곳에서 사빈 유나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실험실이 있던 층 아래에는 평범하게 꾸며진 생활 공간이 있었다. 노바는 그곳에서 유나에게 커스터드 푸딩을 제공했다. 유나는 굳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이것 뿐이냐고 묻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손과 입을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만 했다. 푸딩은 달았다. 유나가 지금껏 먹어본 푸딩과 비슷한 식감, 비슷한 맛, 비슷한 향을 가졌을 테지만 혀를 겨우 자극하는 미약한 단맛 외에는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증오는 여전했으며, 반복하는 이 고리를 어떻게 깨부술지가 유나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의 고집은 너무나 단단했다. 미쳐버리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사빈 유나는 되살아난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어야만 한다 해도 이 가증스러운 사이버네틱 의사의 손에 감쪽같이 복원될 바에야, 싸구려 시술을 받고 정당하지 못한 금액을 지불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당연히 그보다는 죽은 채로 남는 게 나았다. 생은 타인에 의해 강요될 수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노바는 그런 유나를 가만히 관찰했다. 계속 말을 걸어보았으나 대답할 마음이 없는지 응답이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안정된 상태가 유지되었다. 노바가 걱정하는 것은 곧 찾아올 밤이었다. 둘은 밤새 서로를 감시해야 했다. 그리고 예상 밖의 행동을 저지를만한 사람은 유나뿐이었고, 어떤 면에서든 노바는 불리했다. 지금이라도 자살하도록 두고 남은 뇌를 뜯어서 분석해 답이 남아 있기를 바라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겠어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어차피 죽는 김에 내가 한 부탁 하나만 들어준다고요.”

그 뒤로도 말할 것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요란하게 깨지는 유리창 소리에 노바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근원지에는 유나만한 키에 길다란 칼까지 찬 사람이 있었다. 그는 창문틀을 넘어 이미 유나 옆까지 다가온 상태였고, 노바가 무장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턱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유나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카타나, 그자를 죽여!”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타나는 노바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칼을 세워 갈비뼈 사이를 서너 차례 찔렀다.

“당신…!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그를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칼이 다음으로 관통한 곳은 정확히 기도였다. 카타나는 절개선이 가슴팍으로 이어질 때까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이제 정체불명의 남자는 조용했다. 카타나는 피를 턴 칼을 납도하고 여전히 앉아 있는 유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유나, 종일 찾아다녔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침에는 왜 나갔고?”

유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걱정을 쏟아내는 상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가 할 말, 혹은 그가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이제 죽을 거야.”

“뭐?”

당황한 카타나를 두고, 유나는 카타나의 허리 옆에 삐져나와 있는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 물러섰다. 칼이 자연스럽게 뽑혀나왔다. 날이 유나의 목 옆으로 비스듬히 올라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카타나가 막기도 전에 주먹이 도신에 내리꽂혔다. 칼은 상처를 그대로 베며 떨어졌다. 칼을 되돌려주려 걸어오는 유나를 카타나가 받아 어떻게든 지혈했다.

“이 상태가 가장 자연스러운 거야…”

카타나는 어제부터 내내 유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봐온 유나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유나의 실종부터 자살까지, 이 사태는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사건 사이의 연결 또한 매우 불명확했다. 하지만 카타나가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애써 상처를 막아도 어딘가 잡히지 않은 부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사빈 유나가 네 번째로 죽을 때, 그 곁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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