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가여심구] 편지

주화입마로 죽은 류청가와 동문을 죽였다는 사유로 추방당한 여심구

연성백업 by sol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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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S, 2세 주의

* 사망소재 주의


칠 오라비께.

오라버니, 이리 편지를 쓰는 것도 참 오랜만입니다. 6년만인가요, 물론 그 편지가 당신께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답니다. 당신과 같은 어리석을 정도로 선한 이가 제 청을 거절할 리는 없지요. 분명 중간에 구를 미워하는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이 역시 구의 업보이니, 더는 제멋대로 편지를 부쳐 오라버니를 곤란케 하기 싫어 그만두었습니다. 아무리 뻔뻔한 저라도 한자락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있던 모양이지요. 하나 이 편지를 가져가는 아이에게는 당신의 선함으로, 부디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짐작하셨을 바와 같이, 이 아이는 백전봉주의 아들입니다. 이에 한치도 거짓은 없습니다. 물론 구의 말을 믿을 이는 아무도 없겠지요? 사실이라 하여도, 저 추악한 여자가 백전봉주를 모종의 방법으로 유혹하였으리라 짐작하겠지요. 심지어는 당신조차 그러한 의혹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여, 나는 오라버니에의 신뢰가 아닌, 당신의 그 멍청할 정도로 선함에 감히 의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뢰를 이야기하기에는 이미 수십 년 전에 그것은 깨어지지 않았습니까?

죽기 직전이니 이제 더 이상 감출 것도 없겠다, 당신의 선함에 호소하려면 이쪽에서는 뻔뻔하게도 비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낫겠지요. 그래야 당신이 이미 등에 지고 있는 죄책감에 돌덩이를 하나 더 얹어, 이 아이에게 헌신하도록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천한 침노는 열 셋 적에 이미 태를 말리는 약을 먹어 앞으로의 인생에 아이란 없을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수선을 한 이라면 꼭 그런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걸 알게 된 게 이미 제 아이의 아비를 잡아먹은 이후였다는 것이겠지요. 구가, 청추가 그를 살해했다는 것을 부정할 요량은 없습니다. 예, 제가 죽였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남몰래 저를 안아주고 입맞춰 준 이를 죽였습니다. 주화입마였습니다. 구하지 못해 죽였습니다. 가물가물한 정신 와중에서도 수아를 뺏어 제 배에 찌르더군요. 제가 죽인 것이지요. 뽑으려 애를 썼으나 그리하면 피가 더욱 철철 흘러나온다는 걸 몰랐습니다. 무정한 사람, 제 살 생각은 없이 나를 안심시킬 요량으로 쓰다듬으며 품 속의 옥지환을 건네며 죽더군요. 아, 이 편지에 동봉합니다. 이제 죽을 몸이 가지고 가 봤자 쓸모가 없지요. 아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영서동에서 나오자마자 오라비를 걱정하며 입구에 서성이던 류 사질을 만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기사,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제가 죽인 것이 맞는데. 일은 그 이후로 오라버니께서 알고 있는 그대로 흘러갑니다만, 천하 만인이 기뻐할 소식이 있습니다. 악인이 그 동굴에서 어딘가를 잘못 얻어맞았는지, 아니면 천벌을 받았든지. 영력이 줄줄 새어나오더군요. 저도 청정봉에서 내려가고서야 알았습니다. 결국은 몸을 풀고서는 범인과 같은, 아니, 범인보다 못한 몸뚱이가 되었고……. 이후는,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구는 내일이면 죽을 거랍니다. 

단 한가지, 당신의 온정에 기대어 부탁드립니다. 아이의 자질이 빼어납니다. 아비를 닮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백전봉에서 키워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더는 원하는 것도 소망도 없습니다. 혹여나 제 한몸까지 의탁하는 것으로 보일까, 아이에게는 제가 죽은 후 창궁산에 가도록 일러 두었습니다. 제 장사를 치른다든가 하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저는 죄인이고, 창궁산과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역시 어찌 되든 아이가 마음 한켠에 걸리는군요. 당신의 선함을 믿지만, 딱 하나 더. 당신을 협박하고 가겠습니다. 악인이 안전을 담보하는 법이 원래 이런 것이지요. 이 말을 본다면 악칠 너는 어쩔 도리 없이 이 아이를 책임지겠지.

칠형, 왜 날 구하러 오지 않았어? 

-九

추신. 이제 앞으로는 이 아이가 소구야.


장문께 인사 올립니다. 저를 어쩐 일로 부르셨는…… ? 아, 차 감사합니다. 예법이요? 저희 어머니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엄한 분이시라, 제가 채 걷지 못할 때부터 예법에 대해서는 까다로우셨어요. 바깥에서 ‘어미는 몰라도 아비 욕 먹이면 안된다’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없는데…….  그래도 이 말을 하면 엄, 아니 어머니께서 크게 혼을 내셔서요. 그래놓고서는 아버지 얘기는 하나도……. 앗, 죄송합니다 장문. 저 혼자 떠들었지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예, 이제 곧 여덟 살이 됩니다. 어리지 않습니다! 군자는 나이를 핑계로 대지 말아야 한다고……. 

예? 장문을 외숙이라니, 어찌 그런……. 호, 혹시 어머니의 형제, 되십니까?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엄, 아니 어머니께서는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데요! 고아로 자라셨다고, 그……. 노비였다가 우연한 기회로 선술을 익히셨다고만 하셨어요.

그렇다면…….  감히, 외숙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감사합니다! 사실, 가족을 살짝 동경하고 있었나봐요. 살던 동네에서도 홀어머니 말고는 가족이 없는 또래는 하나도 없어서….  물론 엄마만 있어도 괜찮지만요! 그렇게 아버지 부끄럽지 않게 하라는 소리는 들었어도, 아버지 얘기는 하나도 없으시니까……. 아, 하나도 없으시던 건 아니구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면서도 알고보면 부드럽고 현명하셨다고, 그런데 이 말을 한 번도 아버지께 해준 적은 없다고……? 그 이후에 바로 입을 다무셨습니다. 그 외에는, 아버지를 닮았다든지, 아버지를 닮으라든지 하는 말 밖에는요. 

제 어머니가 궁금하셔 저를 부르신 건가요……? 

예,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고 나서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고 해요…. 원래는 떠돌이 선사로 사셨는데, 저를 안고서는 그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니 괜찮다 다독여주셨지만 왠지 그 모습이 좀 허탈해보이셔서. 어린 제가 보기에도, 거짓말이란 건…….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의 어머님은 저를 본다기보다는, 저를, 무거운 짐으로, 아니면, 어쩐지 속죄를 해야 할 불쌍한 것으로 보시는 듯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네……. 어머니께서 저를 홀몸으로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대필을 해 주시고 돈을 버셨어요. 하지만 동네의 부호가 저희 집을 찾아오고, 씩씩거리며 뛰쳐나간 이후로는 어쩐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숙! 

아버지, 말인가요.

사실……  저는 아버지가 찾아오실 줄 알았어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남기셨어요. 사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께서는 몰래 저를 키운 거라구요. 제대로 된 혼인도 아니였다고……. 몸을 의탁하려면 창궁산에 들어가 악 장문께 편지를 전하라구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가셨고……. 너무나 홀가분해 보이셨습니다. 

동네 분들이 장례를 치러주셨습니다. 다행히 이렇게 무사히 창궁산파에, 백전봉에 들어와 외숙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고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예? 이 가락지는…, 어머니께서 평생 품고 지내시던 건데. 한번도 제게 보여주시지는 않았지만요. 이게, 아버지의……. 어머니께서 제게요? 

…감사합니다.


악 장문은 이튿날 봉주들과 류명연을 소집했다. 몇 시진의 회의가 있었다. 아이는 류 가에 정식으로 입적되었다. 류명연이 아이의 후견인이 되었다. 지위가 복권된 청정봉주는 이장되어 백전봉주와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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