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구] 무제

여심구 앤솔로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연성백업 by sol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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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아에게는 모친이 셋 있었다.

첫 모친은 심아를 낳은 사람으로, 군상의 스승이었다고 했으나 무언지 모를 큰 죄를 지었다. 죄인임에도 지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작지만 제법 있을 건 다 있는 방에서 심아를 길렀는데, 그때 일은 너무 오래되어 그리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모친 – 그러니까 죄인 심 씨 – 이 심아를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심 씨는 악독하게 어린 군상을 괴롭혔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의 진위 따위는 심아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듯했다. 심 씨는 심아를 바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는 듯했고, 소리를 질렀다가 애걸했다가, 가끔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어린 심아의 목을 조르려 했다가도 이내 억지로 심아를 끌어안고, 하여튼 몹시 불안정했다.

그래서 심아는 첫 모친을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전혀.

두 번째 모친은 군상의 후궁 중 하나인 숙비 녕 씨로, 정실이 없는 군상의 후궁 중에서는 가장 높은 이 중 하나였다. 녕 숙비는 심아의 친모인 심 씨의 제자이며 군상에게는 사저 되시는 분이었는데, 성격 또한 온후하여 후궁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만큼 군상께도 총애를 받고, 아무튼 뭘 잘 모르는 심아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귀한 분이었다. 

그런 고귀한 분이 죄질 나쁜 죄인의 자식을 제 아래로 들이긴 무리일 거다. 실제로도 그랬고. 녕 숙비가 아무리 옛 사존에 대한 마지막 정으로 그 자식을 거둔다고 해도, 또 아무리 녕 숙비가 심아를 진심으로 어여삐 여긴다고 해도, 진짜로 호적에 들일 수야 없었다. 당장 이름에서도 티가 나지 않는가. 심아, 그냥 심씨의 아이라서 심아라는 이름을 붙인 거다. 심아의 지위는 숙비의 수양딸이 아니라 궁인이었다. 공식적으로 궁인의 적에 오른 것은 아니되, 그렇다고 죄인의 자식으로 노비 명부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또한 심아가 모르는 복잡한 사정이 있기는 있는 듯했다. 심아는 그런 걸 알기에는 저 스스로 어리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 봤자 별 도움이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애매한 신분의 궁인 심아는 서넛 적에 녕 숙비에게 맡겨졌고, 숙비는 심아를 말동무 격으로 거뒀고, 그래서 심아는 궁인이면서도, 조금의 심부름 외에는 분수에 맞지 않게 편안한 잠자리와 식사를 누리고, 아무도 없을 때는 몰래, 숙비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었다. 

어머니라니. 배짱도 좋다만, 숙비가 그렇게 부르라 했다. 군상과의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군상의 타고나신 혈통 탓인지 아이가 쉽게 들어서지 않았던 숙비는 심아를 제 아이로 여겼다. 심아도 숙비를 진짜 어머니처럼 여기고 사랑했으나, 그와 별개로 이 때문에 어린 심아의 인생은 퍽 고달팠다. 지위는 모호한데 호사는 누리고 숙비의 애정을 받지만 그렇다고 숙비가, 온갖 권모술수에 능해 제 새끼를 질시하는 아랫것을 모조리 쳐낼 줄 아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음. 심아는 가끔 자기 머리를 도닥도닥거리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치하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심아가 열 살이 되자 끝났다. 

군상의 혈통, 그러니까 반인반마의 혈통 말이다. 군상의 자식 중에는 태생부터 천마족의 피가 유난히 짙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하필이면 영영 엄마가 이 경우일 게 뭐람. 처음 숙비의 회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심아는 이제 좋은 세월 다 갔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아기씨를 밉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럴 주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회임하신 숙비께 진심을 담은 축하의 말을 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석 달, 넉 달이 지나자 아기씨가 밉기 짝이 없어졌다. 선술 수련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범인보다는 훨씬 튼튼한 숙비일 텐데. 그런 사람도 천마의 피를 버티기는 힘든가 보다. 울상이 되어 손을 꼬옥 잡은 심아에게 숙비가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려무나, 내 네가 의탁할 곳은 알아두었단다….”

이 말을 듣자마자 불길했다. 아무리 성정이 착하고 해맑은 숙비라지만, 눈치에도 심히 해맑은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너무 불길했다. 심아가 조금 더 머리가 잘 돌아가거나, 하다못해 나이라도 조금 더 먹었더라도 이 불길함을 제법 멋있게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조금 더 무시무시하고 웅장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불길했다. 그 불길함은 맞아떨어져,

“……그래.”

군상이 직접 왕림하셔 심아를 보자고 하셨을 때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걸 겨우 숨겨야 했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겠냐마는. 영영 엄마를 잃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군상을 올려다볼 수 없기에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심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다는 건, 뭐,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냥 귀찮아하시는 말투도 아니고, 이건 진짜 제법 큰일 난 거다.

“영영이 그러더군.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다고. 널 두고서는 죽지도 못하겠다고 하더구나.”

“그, 그러셨습, 아니, 나이까……?”

진짜로 떨리기도 했지만, 일부러 영악하게 겁에 질린 연기를 한 것도 맞다. 물론 안 통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안 통했다. 같잖다는 시선이 심아의 머리통을 짓눌렀다.

군상은 심아를 빤히 쳐다보시다가, 돌아섰다.

“영영은 명연에게 널 거둬달라 부탁했다. 명연은 거절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꿨지. 그래 봬도 다정한 여자니까.”

“네에…….”

그렇다면 군상께서 오실 필요는 없지 않았나요! 심아는 절로 미간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군상께서 말씀하신 명연이라 함은, 후궁의 가장 웃어른 중 하나이신 류 귀비시다. 숙비와는 같은 창궁산 출신인데도 왠지 친분이 그리 도타우신 편은 아니었는데, 대체 왜? 그리고, 군상의 어조도 좀 미묘했는데……. 물론 자세한 건 알 필요 없었다. 심아에게 중요한 건 이 이후에 자기가 어떤 자격으로 류 귀비 궁에 들어갈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딱 하나였다.

물론 군상은 공사다망하신 몸이셨기 때문에 그냥 그 말을 끝으로 휑하니 돌아가셨다. 온몸에 힘이 풀리고 진땀에 범벅이 되었지만, 앓아 누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다음날 심아는 류 귀비의 궁에, 그것도 정식 양녀라는 기절초풍할 위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이 심아에게 총 세 명의 모친이 생긴 경위였다.

모친이라고 해도, 류 귀비는 그런 살가운 분은 아니었다. 고운 면사로 얼굴을 가리셔서 표정을 읽기 어려울까 했는데, 웬걸. 심아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그러니까……. 첫 대면부터, 화를 내시고 있었다.

“어미라 부르지는 마라.”

“알겠습니다.”

물론 단순히 화를 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건 알겠으나, 심아가 그런 것까지 읽어낼 만큼 비범한 건 아니고, 솔직히 상관도 없었다. 그 외에 읽히는 건 어린아이에게 화풀이하는 당신 자신에 대한 혐오 정도일까. 그것만 해도 첫 모친보다는 상당히 좋은 분이다. 평소에는 이러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어린아이를 아낄 줄 아신다는 뜻이다. 기준이 분명해 변덕이 심하지도 않다는 의미고. 일부러 심기를 거스르는 짓만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죽은 듯 살아야지, 하고 심아는 다짐했다. 

그러나 세상만사 다짐으로 되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그렇게 다짐한 게 별 소용이 없었다. 

심아는, 그러니까, 저만 조용히 있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바, 심아의 첫째 모친, 그러니까 친모가, 류 귀비의 손윗형제를 시해했다고 한다. 군상도 무심하시지! 아무리 숙비 마마의 유언이 있으셨다 한들, 형제를 해한 여자의 딸을 어찌 여동생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심아는 건방지게도 류 귀비가 불쌍하다고 속으로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제 코가 석자인 걸. 그런 분 밑에서 눈치를 보고 커야 하는 제 처지도 알만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본인에게 화가 났다. 심아는 정말이지 불쌍하게 여겨지는 걸 싫어했다. 자기 자신일지라도.

어쨌든, 그런 처지인데, 류 귀비께서는 본성이 선하시니 애꿎은 어린아이에게 화풀이하시지도 못하는 성정이셨다. 냉랭하게 말하시면서도 그에 따른 행동은 없으시고, 오히려 심아를 어느 정도 보호해 주셨다. 어미라고 부르지는 말라고 한 건 부르지만 않되 어미로써 해야 할 건 다 해주시겠다는 선포가 아니겠는가? 그걸 못 읽어낼 눈치 없는 궁인은 없을 테다. 숙비 마마보다도 심아를 제대로 챙겨 주시는 거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심아는 처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비께서 저를 기꺼워하지는 않으시리라 추론했다. 합당한 생각이었다. 제 존재 자체가 기껍지 않으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죽은 듯 살아야지 마음먹은 거다. 그런데…….

“귀비 마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마마께서 저를 찾을 줄이야. 그것도 아무래도 심아가 당신을 찾지 않은 걸 책망하시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복잡한 심경을 그 면사 너머로 드러내시니. 심아는 기민하게 알아챘다. 웬만큼 눈칫밥 먹은 심아가 아니면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나, 반대로, 눈칫밥만 먹고 그다지 배우지 못한 심아였기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있었다. 심아의, 약간은 가식적으로 빙그레 웃는 모습이 귀비의 심경을 복잡하게 했다. 그 여자를 닮았다, 고 생각하면서도 차라리 그에게는 그게 나았다.

류 귀비는 심아를 불러, 처음으로 심아가 제대로 ‘수양딸’ 역할을 하도록 했다. 무슨 일을 하고 지냈니, 하고 운을 처음 떼었을 때에는 심아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귀비께서도 한껏 어색해하실 것이 분명하기에 목을 가다듬었다. 이러저러하니 지냈습니다, 하며 운을 떼긴 했는데, 한 일이 별로 없었다. 편히 보전하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이었다. 그 외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음, 음……. 하고 있는 심아였다. 멀뚱히 아무 말 없이,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짜내고 있었다. 심아에게는 말재주랄 게 얼마 없었다. 숙비와 지낼 때도 말을 많이 하는 쪽은 숙비였고, 심아는 고개를 꾸벅이며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수양딸의 역할, 즉 심아가 귀비궁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이유는 귀비의 말동무 노릇이었다. 밥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웃전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귀비는 왠지 심아의 뚱한 얼굴을 보기 싫어하는 듯했다.

따라서 심아는 내키지 않지만 별 것 없는 비밀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실은 그 외에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선술에 재능이 있는 편이라는 말을 숙비에게 들은 적이 있는 심아였다. 혼자서 환화궁에 넘쳐나는 선사 출신들을 보고 곁눈질로 배운 몇 가지 기술을 나름대로 연습해보고는 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말씀드리기 뭐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실지 않을까, 천한 것이 과분한 배움을 탐낸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까?

허나 어쩔 수 없는 차. 심아는 어찌 말을 하면 귀비께서 조금이라도 탐탁하게 들으실까 고민했다. 심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는지, 귀비께서는 네까짓 게 뭘 그리 대단한 걸 하겠냐는 듯 – 물론 이는 심아의 자격지심일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이기도 하고 - 한번 말이나 해보라며 무언으로 종용하셨다. 

“그, 제가. 외람되나마, 조금의 선술을 할 줄 압니다.”

“…어떤.”

귀비는 기대하는 듯, 그러면서도 우려하는 듯 긴장했다. 어떤 대답을 상정해둔 듯했다. 그 대답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게 나올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 좁은 방 안에서 혼자서. 조금의 선술이라 하였다. 검 같은 것을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 절대. 그러나……. 그러나.

“날붙이를…, 아,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조금 뾰족하게 한다든지 할 줄 알아요. 그걸 조금 연습하고, 지냈습니다.”

아.

그럼 그렇지. 류 귀비는……. 류명연은,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걸 어떻게 오해한 건지 심아는 허둥지둥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절대로 귀비마마께 해를 끼치려, 아니, 제가 뭐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건방진 소리를 하여 죄송합니다……. 절대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더 배울 수 있게 은혜를 내려달라는 소리도 아니었구요……. 아아, 뭘 기대했던가? 아니, 뭘 걱정했는가? 저리 말하는 아이에게? 귀비는 손을 내저었다. 되었으니 물러가거라, 하는 뜻을 알았는지 아이는 눈치를 보면서도 인사를 올리고는 재바르게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류 귀비는, 심아보다도 더 지친 것 같았다.

그 다음날 저녁, 심아는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귀비께서 아씨께 성을 내리신다 하셨습니다.”

“네? 갑자기…말입니까?”

“또한 내일부터 매일 진시에 직접 사사하신다 하였습니다. 늦지 않고 준비하시기를.” 

중년의 궁인은 심아의 의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단칼에 잘랐다. 웬만하면 기가 죽는 일 없는 심아도 주눅들 차가움이었다. 물어물어 알아보니 그이는 귀비가 창궁산에서 수련하기 전, 류 가의 하인 출신이었는데, 그러면 귀비의 오라버니 되는 그 분, 그러니까, 심아의 첫 모친이 시해한 그 분과도 아는 사이였을 터. 지금까지 귀비를 수행하는 이이니 그 충성은 알만했고. 

그런데, 왜 이 사람도 심아에게 이상하게 구는지. 물론 이곳에서 심아는 제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조심히 살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뚱한 표정이 얼굴로 떠오를 수는 있지 않은가. 어린애한테 너무 각박한 게 아닌가? 하고 심아는 속으로 꿍얼거렸다. 하기야, 심아의 첫 모친도, 심아가 이런 표정만 지으면 발작했더랬다.

이 쯤 되면 그냥,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심아가 어딘가 타고나길 잘못 타고나서 이렇게 뚱해 있으면 정말 못나 보이든, 아니면 사람들을 격동하게 하든. 어느 쪽도 좋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이 궁인 역시 마찬가지로, 대번에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그러고는, 홱! 당장이라도 심아의 얼굴을 갈아 마시고 싶다는 듯이. 그렇지만 그 충동을 꾸역꾸역 집어삼키고서. 물론 저러고 나서 저와 친한 궁인과, 혹은, 류 귀비 본인에게 울먹이며 하소연을 하겠지? 흔한 일이다. 류 귀비는 궁인이 도를 넘는다 생각하면 질책하겠지만 그리 선을 오가면서도 ‘질책’으로 끝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그들의 끈끈한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일 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심아는 그냥 곧바로 침소에 들었다. 어차피 그 이른 시간에 자기를 따로 불러 챙겨 일으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아예 일찍 잠들어 눈이 일찍 열리는 게 나았다.

뭐, 그 역시 허사였다.

의외로 꿈자리가 편안했다. 일찍 잠든 게 무색하게도 심아는 겨우겨우 기상해 겨우겨우 눈곱을 떼고 겨우겨우 연무장으로 나아갔다. 환화궁에는 본디부터 환화궁에 소속된 수사와, 창궁산에서 적을 옮긴 도인들과, 힘을 기르는 데 열심인 마족들과……. 군상께서 알뜰히도 끌어 모으신 귀한 분들은 워낙 그 수가 많다보니 군상을 뵐 기회가 거의 없었고,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도력을 가다듬는 데에 쓰셨다. 덕분에 연무장은 이른 시간부터 꽉 차있어야 했으나…….

텅텅 비어 있네, 아마도 류 귀비가 행차해 계시기에 그렇겠지. 후궁의 가장 웃어른이시니, 그 앞에서 땀을 흘리기에는 부담스러워 그럴 것이다. 심아에게는 다행이었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깐 심아라고 할지언정, 한 무리의 시선이 저를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는 도저히 부담스러워서 뭘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오늘따라 냉랭한 얼굴의 귀비 앞에서는. 심아는 있는 힘껏 죄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비께서는 심아의 비굴한 모습을 경멸하시는 듯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심아의 친모와 겹쳐보시는 것 같은데, 뭐 어쩌겠는가. 심아는 이런 처세밖에는 몰랐다.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마마. 그, 이게 그러니까요.”

“책하지 않는다.”

책망하지 않으신다기에는 눈빛에 다 티가 나긴 했으나. 늦은 것보다는 태도를 책망하는 것이시겠지. 그러나 동시에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하시고. 오히려 완벽히 예법을 지키고 올바른 아이였으면 더 화를 내셨을 것이다, 하고 심아는 짐작했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관성이었다. …그 뿌리를 심아는 모르지만. 저는 하나도 모를 과거를 가지고 멋대로 어른들끼리, 됐다, 이런 생각을 언제부터 하게 되었지. 분에 넘치니 이조차도 감사해야 했다.

심아는 공손히 건네시는 목검을 받았다.

“검을 쥐어본 적이 있니.”

“없습니다.”

그런 걸 심아에게 넘길 리 없었다. 영영 엄마의 검을 본 적은 있으나 그녀는 검을 쥐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심아에게 만져 보라 허락한 적도 없었다. 정확히는 심아가 그런 것을 탐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고 귀비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목검을 내리그었다. 공기가 베이는 소리가 청량했다. 이렇게. 다시 보여주마. 이렇게, 하고. 당연히 눈으로 보고 심아가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리 없다. 검의 궤적이 이리저리 휘었다. 귀비는 그 모습을 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역시, 평범한 아이에게. 무얼 기대했을까……. 귀비는 무얼 기대했을까? 류명연은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동작을 단 두 번 보고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무언가를 보고 싶었던 걸까,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기에 심아는, 울컥했다.

“다시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으실까요?”

귀비의 눈썹이 꿈틀했다. 평소의 심아같지는 않은 행동이다. 귀비가 아는 – 사실 다른 모든 이들이 아는 – 심아는 눈치를 보고, 과묵한 주제에 되도 않는 아첨을 하고, 영악하고, 삐딱한 주제에 몸을 사리는 아이다. 일견 맞는 소리다. 그러나 그게 온전히 심아일지는. 너는 나구나. 불쌍한 것……, 첫째 모친이 심아를 보고 비웃으며 혀를 찬 기억이 떠올랐다. 심아는 울컥했다. 무엇에 대한 울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뜨거운 것이 목에 차올랐다.

“…….”

심아를 한 번 쳐다본 귀비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목검을 다시 내리그었다.

그 날 심아는 유시까지 검을 휘둘렀다. 밥은 먹지 않았다. 몇 번이고 휘둘렀고, 이따금 귀비에게 다시 보여달라 했다. 혼절하기 직전까지 힘을 뺐으나 결국,

성공했다.

“……!”

청량한 소리.

심아는 놀라 검을 손에서 놓치고, 주먹을 꼭 쥐고,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해 냈다…! 기쁨에 바르르 떨렸다. 사실은 근육이 한계에 달해 덜덜 떨리는 거겠으나, 기쁨이 더 컸다. 해 냈어…! 심아도, 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었다.

그걸 보고, 귀비는, 류명연은……,

“넌, 류 가에 입적될 거다.”

하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심청추는 이따금 어린아이의 멱살을 잡았다. 너는, 너는! 그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날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하하, 하하하……. 그 얼굴로, 그 얼굴로 나를 경멸하는 게야? 그렇지, ◼◼…, 아니, 아니야. 너는 그가 아니지, 하하, 하……. 너는 나야. 아이는 겁에 질렸으면서도 어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심청추는 그 눈에 더 발작했다.

그러다가도 심구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가여운 내 새끼. 너는 나구나, 불쌍한 것……. 날 너무 닮았구나. 어쩜 하는 짓 하나하나에서 내가 보이니? 하하, 하하하…….

아이는 어렸을 적의 소구와 너무나 같았다. 너무나 같아서 심청추는, 심구는 아이가 싫었다.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저와 닮았다면 저와 똑같이 파멸할 텐데.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었고, 어차피 죽일 수도 없었다. 끊겼다 겨우 붙은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더 싫었다. 거지나 죄인의 딸이나 그게 그거지, 이 아이도 아등바등 발악하다가 멍청한 짓을 거듭하고 결국 파멸할 거다. 그래서 아이가 더더욱 싫었다. 멍청하고, 못난 년. 

그렇지만 아이의 눈은 아이의 아비를 닮았다.

그 낯을 볼 때면 더욱 분기가 치솟았다. 같은 멍청하고 못난 년이지만 저것은 결국 아비를 닮았다. 고고하고 강직할 테지. 그렇다면 아이는 심구와 다른 결말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미웠다. 저가 잘난 게 무어라고? 어린 구와 다른 게 무어라고?  

가엾다, 가여워라……. 어차피 어느 쪽이든 끝이 좋을 리 없는 아이다. 그렇다면 가여운 생, 저가 뭐라도 된다는 착각 속에 살게 하기보다는, 직접 깨 주는 게 나을 게다. 미친 사람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심구는 아이를 안고, 도닥였다.

발버둥쳐라, 그러나 발버둥치지 말거라……, 어차피 다들, 날 볼 게다. 더러운 나를. 하하, 하……. 맞는 말이지. 너는 내가 아니냐?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를 심청추로 보았다. 

그렇지만 아이의 눈은 아이의 아비를 닮았다.

사실, 닮은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사실이 류명연을 괴롭히기에는 충분했다. 류명연은, 류명연은. 

“명연,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군.”

“…….”

“당신이 나와 손을 잡은 목적이 뭐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미 준비가 되었어.”

류명연이 낙빙하에게 협조한 이유는 둘이었다. 하나는 원수를 갚는 것, 하나는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하나는 성공했다. 악인은 감옥에 갇혔다. 낙빙하가 그를 고문했다고 한다. 지나치게 잔혹한 게 아닌가? 하고 자문하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가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고, 낙빙하는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지를 직접 복구하고 독방에 가두었다. 아무 말이 없었으나, 아마도 자기를 겹쳐 본 것일까……. 낙빙하가 모성에 굶주린 것은 이미 혼인 생활을 유지하며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악인은, 아니, 광인은 아이를 학대했다. 낳게는 해 두고 학대는 막지 않다니, 혼세마왕 역시 미친 자였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을 보고 이해했다. 악인 심청추와 닮았다. 작은 심청추를 대신 괴롭힌다는 희열이었을까. 비틀린 낙빙하 역시 악인이 되었다, 그러나 류명연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원수는 천하의 악한 그 자체였다. 친자식에게 하는 짓까지도 완벽히 악했다. 낙빙하의 고문은 그 자의 악에 비해서는 비할 데가 못되었다. 그리고, 아이도 그를 닮은 듯했다. 

원수가 죽은 이후로는 아이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아이가 녕 숙비 밑에서 자란다는 사실조차, 숙비가 죽기 직전 자신에게 부탁을 할 때야 알았다.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그가 말동무 궁인을 달고 산다는 걸 어찌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말동무 궁인, 즉, 원수의 딸은, 원수와 같았다. 아직 어린 아이라 죄를 지은 것은 없다고 해도, 명연의 눈치를 보고 아부하는 비굴한 모습이 원수와 똑같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니, 맞다. 그 아이는 심청추 그 자체이다. 그런데, 왜.

왜……, 류명연은 아이의 눈을 볼 때마다 무서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전혀 그럴 리가 없는 가능성을 떠올려야 하는 것인가? 왜, 왜, 아이가 무슨 술법을 쓰는지, 검에 어떤 재능이 있는지를, 애꿎은 아이를 괴롭히며 알아보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그 아이가 노력했을 때, 노력의 끝에 성공했을 때…….

“……나는, 두려워요.”

류명연은 그가 살아남으로써, 확인하는 게 무서웠다. 오라버니는, 만약에 정말……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그가, 자기의 원수와……. 류명연은 자신이 거대한 오해를 했을지 두려웠다. 아니다, 그가 본 심청추는 구제할 바 없는 악인이었다. 그 증거가 그의 남편의 과거 아닌가. 그건 확실했는데, 그렇다면 그의 오라비는, 왜, 도대체……. 

류명연은 그 말만 남기고 입을 꾹 다물었다.

두려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괴로운 건,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오라비를 되살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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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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