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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좋아하는 건 늘 가장 먼저 먹었다. 딸기 케이크 위의 딸기부터 먹어치우는 게 당연하지. 누군가 먹어 치워버리기 전에 뺏길까 두려워서 한입에 삼켜 꼭꼭 씹어 넘기는 게 최상의 맛이라는 걸 알고 있다. 조금의 배려심도 없다. 이미 소녀 안에 들어간다면 나오질 않았으니까 애초에 배려할 필요도 없다. 다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포기할 뿐이다. 다행히도 자신의 주제 파악을 할 수 있었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가질 수 없다면 탐나기 전에 포기하자. 그러면 보면서 즐길 수는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언제부터였더라. 아, 분명 그때였던 것 같기도 해. 기억을 적어놓은 일기장을 물에 적신 것처럼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고백했는데,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이 기억을 잃는 건 대개 두 가지가 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거나,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거나. 자신을 무장하고 감정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일은 쉬웠다. 좋아하는 것을 가지기도 전에 삼켜지는 건 질색이었다. 형체를 잃은 생크림 케이크를 혀 위에 올리는 것처럼 역겹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그저 가벼운 일상 중 하나로 나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곧잘 어떤 것을 떠올린다. 그건 어떨 때는 자신에 대한 것이거나 지금 내가 갖고 싶어하는 건 무엇이 간에 대한 생각이다. 손에 넣었을 때, 가졌을 때를 생각하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어떤 이는 성공, 행복, 재물, 그리고 진실한 우정? 따위에서 삶의 의미를 느낄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이 감정은 소유에 대한 갈망이겠지. 눈앞에 있는 마법사를 향한 감정이 선명해진다.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나를 이렇게 바꿔 놓은 걸까. 

“응? 츠바키, 거기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재밌는 일이라면 얘기해주지 않겠어?”

자기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줄은 전혀 모르는 카인이 내가 앉아있던 곳 앞에 서서 허리를 숙여 말했다. 

“카인이랑 내일 데이트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면, 내일 데이트 가줄래?”

“그렇게 말한다면 안 갈 수가 없지. 그럼 임무가 끝나면 영광의 거리에서 술이라도 마시러 가도록 할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았다고 해도 그는 숨통이 조이는 느낌 하나 받지 못하겠지. 그렇게도 연약한 팔이다. 너를 지킬 수 없는 팔로 난 너에게 지켜주겠다 맹세했다. 너는 너의 몸을 꽉 조이지도 못하는 이 작은 품과 가느다란 손목의 뭘 믿고 날 믿는다고 말해준 것일까.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아도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게 너의 다정함이다.

다음날, 카인은 약속대로 임무가 끝난 후 우리가 곧잘 가던 술집으로 데려가 줬다. 데이트라기에는 분위기가 없는 장소일지도 모르지만 난 카인이 녹아있는 이 장소를 사랑했고 카인도 내가 이 장소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맥주를 연거푸 들이켜면 카인이 내 등을 툭툭 두드려온다. 

“하하, 츠바키! 괜찮은 거야? 오늘따라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즐기고 있어?”


“당연하지! 카인이 오늘따라 조금, 아주 조금 더 잘생겨 보이는 것 같지만 아직은 멀쩡하다고?”

그는 즐거운 얼굴을 하면서도 내가 걱정되는지 연신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바보같이 사람의 마음은 잘 모르면서 가장 원하는 행동은 늘 가장 먼저 알아준다. 그래, 오늘은 응석 부리고 싶은 밤인걸. 네게 상체를 기대고 너의 뺨을 양손으로 잡아 빤히 바라봤다. 이런, 조금 취한 걸까. 카인의 얼굴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다. 중심의 축이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카인, 취했어? 어쩐지 몸이 흔들리는 것 같은데.”


“나는 멀쩡하다고? 음, 조금 취한 것 같기도 하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할까!”

전혀 취하지 않은 카인이 그렇게 말하고 츠바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주점에 들어갔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나올 때는 달이 선명히 보이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걷는 발걸음이 어쩐지 가벼워 하늘을 걷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카인의 부츠 위를 밟아가며 걷고 있었다. 카인은 츠바키의 반쯤 감기는 눈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유성우가 눈앞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감았다 뜰 때마다 거리를 밝히는 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진다. 그런데도 귀는 똑똑히 열려 카인의 말을 제대로 담았다.

“있지, 츠바키. 벌써 츠바키가 현자 님이 되어준 지 1년이 넘었네. 우리에게 힘을 빌려준 걸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 그리고 잊지 못하는 게 하나 더 있지.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현자 님이 나를 지켜주겠다고 한 맹세를 말이야. 그때는 솔직히 츠바키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는지도 몰라. 하하! 사실 지금도 내가 츠바키를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츠바키, 늘 감사하고 있어. 그러니 나도 널 지킨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줄게.”

정말 바보 같은 마법사다. 이럴 때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게 당연한데도 당당하게도 지키겠다는 말을 내뱉는다. 내가 카인에게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각오를 삼켰어야만 했는지도 모르고 내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옳은 말을 가볍게도 찾아낸다. 비참하게도 따스한 사랑이다. 사랑에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면 내 감정은 추악하다는 말을 붙을 게 당연했다. 

그 뒤로 카인은 말 없는 나를 끌어안아 혼자서 말을 이어 나갔다. 대부분이 카인의 입에서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말들과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난 그저 카인이 나를 더 꽉 안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 시야는 완벽하게 까맣게 변했다. 카인이 내 몸을 조심히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히는 것이 사라지는 의식 너머로 느껴졌다. 자신을 대할 때는 칠칠찮으면서 이렇게 타인을 대하는 손길은 신중하며 나 자신조차 내가 소중해진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곧 너의 온기가 사라지면 꿈에 빠져든다.

흑백영화가 재생되는 것 같다. 꿈이라는 인식도 없이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눈앞에 비치는 건 두 사람의 실내화를 신은 발이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음성이 나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귀를 막았던 것인지 상대의 답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눈이 떠진다. 손은 입가에 있었다. 

일정한 음률의 노크 소리가 잠에서 정신 차릴 시간도 주지 않고 내 정신을 가져간다. 잠이 덜 깨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어 문을 열면 오늘도 운동하고 왔는지 땀에 젖은 탱크톱 차림으로 인사를 하는 카인이 있다. 좋은 아침, 이라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그리고 그제야 시야에 내 모습이 담겼는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곧 맑게 웃으며 이제 일어났냐며 물어온다. 

“응, 아직 졸리네. 카인은 오늘도 아침 단련 다녀온 거야? 부지런하네.”

나는 카인의 상체에 얼굴을 기대어 반쯤 졸음에 묻힌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전해져오는 열기가 선명하다. 자장가와도 같은 너의 숨소리, 규칙적인 심장 박동에 몸을 기대어 있는데 너는 나를 떨어뜨린다.

“같이 단련을 하자고 해도 츠바키는 안 하겠지만 말이지. 그보다 나한테서 땀 냄새나지는 않아? 씻고 올 걸 그랬나.”

“그럼 내 방에서 씻고 갈래?”

내 말이 나오자마자 당황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는 모습이 귀엽다. 벌서 1년을 함께 지냈는데도 이런 말들에 반응하는 네가 사랑스럽다. 

“농담이야, 바보. 자자, 얼른 씻고 같이 밥 먹으러 가야지?”

문을 닫아 몸을 돌려 문에 등을 기대었다. 카인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문 뒤에서 알겠다는 말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 

카인의 얼굴은 금방 다시 볼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고 카인은 그 가운데에서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후는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마법사들과 임무를 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카인은 아침 식사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내가 찾아갈까 생각해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줬지만 금방 몸이 뒤로 기울며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옆으로 돌아누워서 가만히 방을 응시했다. 혼자 있을 때 자꾸만 떠오르는 게 있다.

공포영화를 본 날의 밤처럼 영상이 눈이 감길 때마다 비친다. 그래서 불을 끄지도 못했다. 불을 끄면 이게 끔찍하게도 선명해질 것 같아서 억지로 밝음을 유지했다. 내 앞에서 비치는 너의 죽음은 늘 다양한 방식으로 상영됐다. 눈을 감으면 네가 죽어있고, 또다시 감으면 내가 너를 죽였고, 감을 때마다 새로운 죽음이 겹쳐진다. 죽음이 무섭다. 죽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죽는 것은 더욱 탐내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죽을까 손에 꽉 쥐지도 못했는데 죽으면, 고통스럽잖아. 그럴 바에는 숨이 터져라 안아 봤을 텐데, 라고 후회할 수밖에 없다. 눈이 녹은 더러워진 땅에 떨어진 붉은 꽃잎같이 추악한 본성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는 분노에 가까웠다. 마치 어린아이가 원하는 장난감을 얻지 못해 소리 지르는 것과 같은 교성이다. 귀를 때리는 교성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지칠 줄도 모르는지 붉은 꽃잎이 흐드러진 가운데 서서 축 늘어진 사람의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을 붙잡아 춤을 춘다. 춤 파트너가 자신보다 컸는지 금발의 여자는 곧 뒤로 무너진다. 시체에 깔린 채로 시체를 꽉 안으면서 뭐라 중얼거리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여자가 힘껏 끌어안은 몸뚱이는 여자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우그러진다. 여자 또한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힘을 풀지만 놔주지는 않는다. 

시야는 곧 뒤바뀐다. 그 여자의 몸 안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누군가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고 온몸이 피에 젖어있다. 위에 있는 걸 치워보기 위해 눈살을 찡그리며 손끝을 미약하게 움직이는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내 방이었다.

눈이 내린 바닥도, 피도, 시체도 없었다. 거울에는 남아있는 건 밝은 방 안에서 흥건히 땀에 젖은 여자가 담겨 있었다. 

안 좋은 습관은 왜 고쳐지지를 않는 걸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일어나 방의 불을 끄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지켜준다고 했어. 카인이 나를 지켜준다고, 그리고 난 카인을 지킨다고 했어.”

그러니까 단단해져야 해.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마치 그것만이 구원인 것처럼, 성서의 한 구절인 것처럼 여겼다. 그렇다 해도 고작 악몽조차도 무섭고 버거웠다. 숨소리 하나라도 내뱉으면 죽음이 찾아올 것 같았다. 사실 현실은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런 밤을 수도 없이 1년 동안 반복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것만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다행히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곧 식은 몸의 온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힘겨운 만큼 잠이 드는 것도 빨라 다행이다. 

네가 죽지 않은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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