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부재

우쿱

기실 그 날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되어 거기까지 이르렀는지 중랑장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열병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몸이 불덩이처럼 끓어올랐고 의식은 흐렸다. 사방신의 가호는 사랑이 과해 중랑장의 작은 몸에서 넘쳐흘렀다. 타고난 재능으로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지훈아, 지훈아…….”

다정한 손조차도 불붙은 석탄처럼만 느껴지니 침상 옆에 지켜 선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헷갈렸다. 옆을 지킨 사람이 몇 번이고 바뀌었어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날, 그 때, 승선이 들어왔을 때에는 알았다.

그가 신을 벗고 급하게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열로 덥혀진 방 안에 들어온 바깥의 달콤할 정도로 차가운 밤 공기.

“승선, 지금 뭘……?”

그가 자신 쪽으로 몸을 숙이자 나던, 늘 몸에 패용하던 향낭의 짙은 향기는 간데 없고 진하던 땀과 흙냄새. 철냄새.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복숭아 향.

“승철이 형?”

아, 조금만 마음이 급해지면 예의를 벗어던지고 손쉽게 어릴 때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옆에 있던 자는 권 별장인 모양이었다.

간신히 그것을 알아채며 지훈은 눈을 뜨려 했다.

“형, 잠깐! 지훈이 의식도 못 차려서 계속 불이 나온다니까?”

“비켜 봐.”

그리고 차가운 손이 자신의 뜨거운 양뺨을 잡아왔다.

“아이고??”

옆에서 순영이 박 치는 소리를 냈지만, 승철은 거침없이 지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귀 옆으로 승철의 긴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닿았다.

바싹 마른 입술이 승철의 입술과 혀로 인해 벌어졌다. 그러나 불덩어리처럼 말라버린 입안에 들어온 것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승철은 지훈의 입안으로 재빠르게 작은 구슬을 밀어넣었다.

구슬은 혀 위에 놓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녹아내리며 상쾌한 기운을 뿜어냈다. 마치 코앞에서 뭉갠 듯이 복숭아 향이 짙었다.

구슬만 쏙 밀어넣은 뒤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승철은, 지훈이 목이 꿀꺽 하고 넘어간 뒤에야 다 녹았는지 확인하려 지훈의 혀를 더듬었다.

“하아…”

그건 단지 확인에 불과한데도, 지훈은 반사적으로 혀를 감아 빨아들이며 조르듯이 턱을 들어올렸다.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이지훈은 염치고 뭐고 눈을 뜨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입맞춤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

순영이 보고 있을 지도, 사람이 더 있을 지도, 하는 생각은 굳이 하지 않았다.

승철이 각도를 바꾸며 입맞춤이 깊어졌다. 혀가 엉키고 짧은 숨이 오가며 절박하게 지훈은 매달렸다. 마지막의 입맞춤이다.

승철 역시 똑같은 생각으로, 불길처럼 뜨거운 지훈의 입술을 삼킨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지훈이 힘을 다 쓰고 떨어져나가자 승철도 정중히 멀어졌다.

그 꼴을 어쩐 일로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순영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형,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아? 설마 선도… 훔친 거야?”

그 말에 힘없이 가물가물해지려던 지훈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뭘 들었어?’

선도는 귀한 것이다. 삼천년마다 꽃을 피우고 삼천년마다 맺히며 선인이라 할 지라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병을 낫게 하고 불로장생을 약속하는 복숭아.

‘내가 방금 삼킨 게 선도라고?’

순식간에 사라진 선도는 짙고 상쾌한 향만 남긴 채였다.

다시 토해내야 해.

돌려주면 죄가, 조금은, 감해질 지도.

지훈은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 손을 들어 승철의 손목을 잡았다.

아무리 높이 쓰일 것이라 이름 높은 승선이라 할 지라도 그것을 허락도 없이 훔치는 것은 중죄다.

선계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의 벌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다. 고작 중랑장을 위해 각오해야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주작의 가호로 일어난 불길이 승철의 손목을 태웠다.

“안, 안 돼… 그럼 형이…”

그러나 승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지훈의 손을 풀어 이불 위로 내려놓았다.

까마득하게 잠겨가는 의식 너머에서 승철이 터무니없이 가볍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그거밖에 방법이 없더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옆을 지키는 건 권 별장이 아니라 이 정언이었다.

방 안은 심지를 죽인 호롱불의 빛만으로 어른어른했다.

그러나 열이 내리고 눈앞이 또렷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정언…….”

“나, 나 알아보겠어?”

석민이 눈물을 훔치며 급하게 물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물 좀 마셔.”

이미 한 발짝 관에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이지훈의 차도가 눈부시게 나아지는 모습을 앞에 두고서도 석민은 눈알이 빠지도록 울고 운 모양새였다.

“어떻게, 된 거야.”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민은 지훈이 물어보는 일을 눈치챘으면서도 일부러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양, 억지로 웃었다.

“일어날 만큼 힘이 나? 다행이다. 한참 못 일어났는데……”

“최승철 어딨어.”

“혀엉……”

“어딨냐고.”

석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 한 달을 앓아누워 있었지만,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그의 몸을 태우던 사방신의 가호조차 아무런 아픔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너무 갑자기 일어나지 말고. 응? 좀만 더 쉬어.”

석민이 안절부절 못하며 잡으려 했지만 지훈은 놀랄 정도로 가볍게 떨치고 밖으로 나갔다.

사위는 어두웠지만 단 한 군데 저 멀리에서 불빛이 일어 하늘까지 밝힌 곳이 있었다.

석민이 뒤쫓아 왔지만, 지훈이 더 빨랐다.

지훈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사헌부를 향해 달렸다.

다리가 쉼없이 빠른 동시에 머리가 명징하게 돌았다.

이석민은 자신을 잡아두려 한다. 왜? 다른 이도 아니고 석민일 제 옆에 놓은 까닭이 무엇인가. 착하고 거짓말도 못하는 애를, 굳이 거짓말을 해서 붙잡아둬야 할 자리에.

…그렇다면 반대다. 이석민을 다른 자리가 아닌 바로 이지훈 옆으로 지정해야 할 까닭이 있는 것이다. 착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애니까. 저토록 울 정도로 힘든 무언가를 보지 않아도 되도록, 그러면서도 이지훈을 간병한다는 확실한 핑계를 붙여 떼 놓은 것이다.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순식간에 뒤로 흩어졌다.

그러면 이 정언이 저토록 울면서 보기 힘들어할 것은?

……선도를 훔친 죄로 최 승선이 벌을 받는 모습.

마침내 사헌부에 가까이 온 지훈이 숨을 고르고 사헌부의 높은 담을 올려다보았다. 그 안에서 얼마나 불을 피웠는지 주변까지 낮처럼 훤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서워 아주 잠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마주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 겁이 났다. 비겁한 변명이 잠시간 떠오르기도 하고, 최 승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제 다리로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덕분임에 가슴이 미어지고.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그렇게 승철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해도, 이해가 되면서 이해를 하지 못하고 만다. 왜 나 때문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느냐고.

지훈은 떨리는 무릎을 잠깐 내려보다 제 뺨을 치고 사헌부의 담을 훌쩍 넘었다.

최승철은 결박되어 사헌부 마당 가운데 꿇어앉혀 있었고, 그 앞에 수많은 이들이 서 있었다.

지훈은 그 모습에 숨이 덜컥 막혔다. 도열한 중에는 아는 얼굴들이 있는데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가운데에 선 판이부사가 교지를 펼쳤다.

“모월 모일, 최승철의 자격을 박탈하여 하계의 윤회고리로 떨어뜨린다.”

지훈이 사람을 헤치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자신 없이 모든 치죄가 끝나 있었다.

“잠깐, 잠시만요!”

“또한 죄의 엄중함을 물어 인세의 모든 복을 거두어들이며 덕업은 쌓이지 못하리라. 선과 깨달음을 위한 고행이 아니라 오로지 업보를 감하기 위해 고통을 위한 고행이 될 것이다.”

“나 때문이니까, 제발!”

막무가내로 소리치며 모인 이들을 밀치며 앞으로 향하는 지훈을 누군가 끌어안으며 입을 막았다.

“하지 마. 너까지 벌을 받으려 하지 마.”

반도원의 관리, 최승철의 지기, 윤정한의 목소리와 손이었다.

지훈은 넋이 나간 채 자신을 막은 그를 뒤돌아 올려다보았다. 술법으로 조용히 지훈을 묶은 윤정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승철이가 그걸 바라지 않아.”

“선도를 훔쳤지만, 그게 스스로를 위한 것도 아니잖아! 나 때문이었잖아! 내가 먹었으니까, 그러니까 벌도 내가 받겠다고! 그게 맞지 않아? 그게 옳잖아!”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지훈이 꼼짝도 못하고 정한에게 잡혀있는 사이 교지는 끝났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철이 고개를 곧게 들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많은 이들의 틈에서 지훈을 발견했다. 지치고 피로로 단단했던 표정이 한순간 밝아진다. 우와, 너 일어났구나. 짜식 내 덕분인 줄 알아.

억겁으로 떠넘겨진 벌을 앞두고 찰나의 순간 단지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로 최승철은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제멋대로.

교지의 마침표가 온전히 찍혔을 때에 검고 어두운 하늘에서 굵은 벼락이 쳤다.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광량이 최승철을 때린다.

“안 돼!”

이지훈의 눈앞에서 벼락을 맞은 최승철이 빛 속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도자기를 망치로 때린 듯이, 그의 혼이 맑고 허무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린다. 잘게 흩어져 하계로 뿌려진다.

지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손을 뻗었다.

혼이 부서진 최승철은 무수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하나의 혼이지만 산산조각이 났으니 늘 불행해야 했고 외로웠다.

부스러기가 된 혼의 조각은 작고 비천한 벌레로, 손톱만한 것은 작은 동물로, 그만큼의 크기로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태어났다.

무엇으로 태어난대도 복이 없이 순간처럼 짧은 삶이었지만 그 생에는 단 한 번, 단 한 순간이나마 빛나는 것이 있었다.

선인을 만나는 것이었다.

기억하지 못해 외롭고 불행히 되풀이되는 삶, 그러니 그 생에 오직 단 한 번.

하찮은 벌레일 때에도. 덫에 걸려 죽어가는 짐승일 때에도. 버려져 굶어죽은 아이일 때에도.

이지훈은 그 생에 나타났다. 혼이 부서진 승철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는데도.

그저 한 번만, 새롭게 받아 태어난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는 그 한순간을 위해서.

“…형은 맨날 이렇게 예쁘네. 하얗고, 빨갛고, 까맣고.”

그토록 예쁘다 했던 토끼는 곧 여우에 끌려가 물려 죽었고, 그러한 짧은 생마다 하계에 내려간 이지훈은 경고를 받았다.

모습을 비추는 것조차 도리에 어긋나니 최승철에게 오히려 더 벌이 내려갈 수 있다고.

그렇게 달래는 정한을 보며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고 그저 그 앞에 나타나는 것밖에 없어.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해.”

“격이 높은 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깨우칠 수 있지 않니. 어차피 한 번 보기만 할 것이면 보지 말아라. 부사가 호시탐탐 너 지켜보고 있어.”

“…….”

“…왜 서로 그리 멍청한 짓들을 해. 그냥 평범하게 사랑하면 안 돼?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왜 그렇게 더 큰 벌을 받을 일들을 해…….”

꺼질듯한 목소리로 정한이 중얼거리는데 거기다 대고 ‘아니 그래도 할 건데?’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거리를 왕창 떠안았다가 몇십 년 만에 간신히 눈치를 보며 내려갔을 때, 그 사이 최승철은 이미 열다섯 번의 삶을 버텨내다 죽었고 다시 태어났다.

전쟁 중, 열다섯의 형은 불탄 산에 버려져 있었다.

새카맣게 타버린 재와 바싹 마른 나무뿐인 산에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그 위로 선명한 붉은 피를 뿌리며 최승철은 기어 봉우리 위로 올라가려 했다.

엎드려 기고 있던 승철은 간신히 몸을 돌려 얼굴을 하늘로 했다.

얼굴은 파랗게 질려 이미 고통의 기색조차 지나갔다. 그저 새파란 하늘만이 그 두 눈에 비춰지고 있었다.

곧 죽겠구나.

지훈은 눈을 밟지 않고 조용히 승철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연약한 삶을 슬퍼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죽음의 순간이 있었다.

이 또한 이지훈이 받는 죄다. 단 한 번 이지훈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한 최승철이 수없이 죽는 모습을 보고, 또 보고, 되풀이해 보는 것.

죽음이 가까워진 망아의 순간, 삼도천에 발목을 담근 최승철은 기나긴 윤회의 찰나를 철벅거리며 잠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으므로,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와 늘 눈이 마주쳤다.

지금처럼.

벌레였을 때에 겹눈에 비치던 커다란 형상, 동물이었을 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존재. 냄새도 존재감도 없던,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남자.

바로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윤회한 생들이 겹쳐지고 겹쳐진다. 고통은 혼의 은덕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어느 것과도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에 단 하나, 몇백 몇천 번의 생을 관통해 존재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 이제는 인간이므로 최승철은 저 남자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붓하게 다물린 입술. 내면의 파랑을 억제하려는 찌푸린 눈썹 사이. 그럼에도 눈은 완전히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떨리고 있다.

승철이 남자를 향해 마지막 힘을 짜내 웃었다.

“괜, 찮지……?”

미소는 그가 기억조차 없는 선인일 때와 다를 바 없어서 지훈은 미칠 것 같다.

그리고 승철은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지훈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괜찮냐니?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짓을 해서는.”

지훈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승철의 눈을 감겼다.

언제나 까맣고, 하얗고, 붉은 최승철.

“어떻게 날 이렇게 창의적으로 괴롭힐 수 있어.”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려 붉은 피에 섞였다.

“왜 날 살려서…….”

그리고 이번 생, 모두가 걱정하던 대로 되었다.

최승철이 이지훈을 보고 깨달아버렸다. 원래부터 높이 쓰이리라 위명이 자자할 만큼 혼의 자질이 좋았으니 작은 깨달음만으로도 깨져버린 혼의 나머지 조각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모여, 결국 온전한 하나가 된 것이다.

앞으로 일곱 번의 윤회가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일곱 번의 윤회가 남았음에도 끝내 이 차관의 도움으로 죄인이 하늘의 도리를 깨우쳤다.”

“제가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예전의 부사, 검찰청장이 버럭 분노를 표출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 따위 변명을 늘어놓는 거냐. 네가 하늘의 법을 우습게 아는구나!”

“…아닙니다.”

검찰청장은 냉혹한 자였고, 이지훈에게 어떤 벌도 내려지지 않은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자였다.

선도의 덕택으로 중랑장밖에 안 될 인물이 자신의 턱밑까지 기어올라왔는데, 죄를 짓고도 저리 떨지 않는 것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하계에 함부로 내려간 것만으로도 충분한 죄가 됨을 모르느냐!”

최승철만이 죄를 모두 뒤집어써 선도를 먹은 이지훈은 추궁하지 못한 것이 늘 불만스러웠던 차이니 이런 빌미가 주어지자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이 차관이 원래 최승철이 받았어야 할 일곱 생애를 대신해 벌을 받으리라.”

이 벌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이지훈도 그냥 눈만 내리깔았다. 하계에 떨어진대도, 일곱 번을 태어나고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 말에는 머리를 숙이는 것도 잊고 번쩍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선도를 훔친 대죄와 이어진 죄 역시 모두가 최승철이 가진 이 차관과의 인연 때문이니, 그가 선계에 들어올 때는 너와 이어진 인연의 실을 모두 자르고서야 들어올 수 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옆에서 홍 차관이 벌떡 일어났다.

“받아야 할 벌은 이 차관이 다 받아 갈음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인연까지 끊어야 합니까?”

“앞서 말했다시피 죄질이 나쁘다. 그리고 최승철이 짓는 죄가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지 모르는 이는 없을 터! 죄인에게 이지훈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함이 옳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얼굴이 시뻘개진 이지훈에게로 쏠렸다.

청장은 그러한 반응과 지훈의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 만족했다. 이것야말로 죄를 뉘우치게 할 벌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더 이상의 죄를 짓게 하지 않으려는 조치다.”

꽉 깨문 입술에서 우득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모인 친구들이 일제히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이지훈도 그래야 했으나, 지훈은 거기서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최승철이 짓는 죄가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지’, 그 말에 혀 끝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얼어붙은 듯 했다.

청장의 말이 옳았다. 이지훈 때문이다. 최승철이 선도를 훔친 것, 또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업보를 제멋대로 끝낸 것. 이지훈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는가?

그가 최승철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를 사모하고 그가 자신을 귀애하여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 할 수 있을까.

깨진 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지만 지훈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의 생에 내가 없어지는 것이 옳지 않나.

어떤 정신으로 퇴청해 돌아왔는지 기억 나지 않았다.

내일이면 하계로 귀양을 가는 게 실감도 나지 않았고, 그 벌을 다 받고 돌아온 후엔 최승철과의 모든 인연이 끊겨 승철에게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선계에서 함께 자라고 함께 울고 웃고 했던 어린 시절의 일도, 하계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일도 모두 없었던 일이 된다니.

그 입맞춤도.

나를 위해 거침없이 했던 일마저.

나를 사랑했던 일마저.

얼마나 멍하니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걸까.

넋이 나간 지훈을 준이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지훈아, 지훈아. 할 말 있어.”

“어, 어어….”

그 때서야 자신의 마루에 열한 명이나 되는 선인들이 바글바글 앉아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얘 넋이 나갔네.”

“그럴 만 하잖아. 벌로 죄를 갈음했는데 인연까지 끊는다는 건 말도 안 돼.”

보기 드물게 화가 난 홍지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벌어질 수 있다 이거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단지 가능성이 있다고 미리 벌해선 안 돼. 그건 예방조치가 아니야.”

그렇게나 많이 모여서 와글와글 하는데도 지훈은 여전히 멍했다. 귀에 소리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지훈아.”

“음. 응?”

“이거 받아.”

윤정한이 날카로운 단검을 내밀었다. 귀해 보이는 단검이었다.

지훈이 어리둥절해 하며 거절했다.

“하계로 내려가는데 여기서 이걸 받아도.”

“이거 그냥 그런 거 아니다? 잠깐만 손 내밀어봐.”

지훈이 별 생각 없이 내민 손을 단검이 살짝 그었다. 예리한 날이 지나가자 따끔한 아픔과 함께 피가 솟아올랐다.

“아픈데.”

단검의 날에 피가 묻은 것을 확인한 정한이 의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귀물이 너의 혈맥에 속하니 네가 하계에서 새로운 몸을 입었다 해도 여전히 그 혼을 따라다닐 거야. 언제든 네가 원하면 나타나고, 언제든 없어지겠지.”

“……이런 걸 왜 나한테 줘? 호신이나 하라고 이렇게 귀한 걸 주는 건 아닐 텐데. 승철이 형한테도 이런 건 안 줬잖아.”

“…….”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지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장 앞에서와 다들 다르다는 것도 이제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일제히 다 짧게 잘려 있었다. 술법에 필요한 머리카락이 짧게 도려내져 있으니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지훈이 다그쳤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니들 다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는 순영이 나서서 단검을 건네받아 지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면서도 결국 말을 잇지 못해서 계속 손등만 토닥이자, 정한이 파리한 안색으로 말했다.

“지훈아, 이걸로 하계에서 승철일 만나면 죽여.”

“농담하는 거야?”

“농담이면 좋겠다~”

친구들은 바싹 옹기종기 붙어 복잡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로 심장을 찌르면 혼이 깨질 거야. 그럼 승철이가 원래 예정되었던 대로 하계에서 일곱 번의 생을 윤회하게 되고, 네가 하계에서 한 번의 생 이상의 벌을 받지 않아도 돼.”

“됐어. 내가 잘못한 거니까 벌을 받기로 했잖아. 됐어. 말하지 마.”

그러나 친구들이 돌아가며 굳은 어조로 설명했다.

“아니, 그렇게 승철이가 원래대로의 벌을 다 받고 선계로 와야 돼. 그래야 너하고 인연을 자르지 않을 수 있어.”

“이 단검이 승철의 피를 뒤집어 쓰면 너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게 돼.”

“네 손으로 찌른다면, 그것으로 둘 사이의 인연의 실은 자르지 않겠다는 허락은 받았어.”

“지훈아, 하계의 일곱 생 정도는 지금까지에 비하면 정말 짧은 순간이잖아. 너도 기다릴 수 있잖아.”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 손으로.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사람을, 어떻게 내가 죽일 수 있어.

그러나 친구들의 얼굴 역시 단호했다.

“이대로 승철이와 지훈이 너와의 연이 끊기면 안 되잖아. 그럴 수는 없잖아.”

“…승철이도 그걸 바라지 않을 거야.”

지훈은 자신의 피로 붉게 빛나는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최승철을 찌르라고. 심장을 찔러 피를 내어 뒤집어 쓰게 하라고.

단검은 충분히 예리했고 충분히 길었다.

손을 펴자 단검은 그의 혈맥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최승철은 온전한 혼으로 태어났다. 삼도천에서도 그의 기억을 모두 지우지 못해 태어났을 때부터 하계에서 보낸 수백수천의 기억을 모두 가졌다. 아직 눈을 뜨지조차 않은 아기에겐 과도한 정보량이니, 한 번의 생이 단 한 장의 종이로 쓰여졌다 해도 수많은 종이가 머릿속에서 헝클어진 탓에 미쳐버렸을 수도 있다. 이번 생의 종이를 찾지 못해 백치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승철은 모든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했고,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흩어지지 않도록 꾹 누르는 압정이 있다. 그 모든 삶을 관통한 한 명의 존재. 그저 단 한 번의 눈맞춤을 허락하고 사라져버린 존재.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그 얼굴만은, 누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벅벅 문질러 놓은 듯 항상 흐릿했다.

‘왜.’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해서 어떤 짓이든 해줄 수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몰랐다.

가지고 있지도 못한 걸 이미 잃어버렸다는 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런 말은 수백의 삶 속에서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저 가슴에 뻥 뚫린 구멍만을 응시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공허한 구멍을.

그런 허전함 속에서 살아가다 어느 날 고시원의 방문을 열었을 때, 낯선 남자가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바람 향기 같기도 한 처음 맡는 향기가 좁은 방 안에 자욱한 와중, 무서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문을 잠그고 나갔는데 어떻게? 라든가 누군데 이렇게 당당하게? 라는 생각은 의외로 들지 않았다. 사람이 아닐 테니까. 수백의 삶을 살아온 짬바가 있으니 남들이 쉽지 못하는 일에도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중앙에 제멋대로 퍼져 앉아있던 남자가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허어, 무서워하지도 않네.”

“칼부림이면 이미 났겠지.”

시큰둥한 대답에 남자는 재밌다는 듯 굴었다.

“그런가? 난 윤정한이야.”

“어어.”

“넌 최승철이겠지.”

“어, 그렇지.”

승철은 문을 닫고 그 문에 등을 기대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서 나한텐 무슨 일이야?”

“내기 하지 않을래?”

“난 도박 안 해.”

“아냐아, 도박이 아니야. ‘내기’란 말야. 내기를 받아들여 이긴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돈을 원한다면 억 단위든 조 단위든 준비해줄 수 있어.”

“뭐 오징어게임이라도 해?”

“어?? 오징어?”

“……됐다.”

승철은 눈앞의 남자가 진짜 사람이 아니란 걸 그 때 확신했다. 국뽕 컨텐츠를 몰라? 진짜로 대한민국 인간이 아니었다.

“성공하면 소원을 하나 들어줄 거고, 실패하면?”

“이것도 간단해. 네가 실패해 못 찾으면 네 소중한 사람을 영영 잃게 될 거야.”

승철은 콧방귀를 뀌고 웃으려고 했다.

그는 천애고아다. 수백의 삶 속에서 누구와도 인연을 깊게 맺을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 소중한 사람이라니, 소중한 사람 따위 있을 리 없잖아.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기 직전. 직감이 속삭였다.

‘그 애야.’

자신의 압정.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승철은 그걸 떠올린 순간 확신했다.

수백의 삶과, 그것을 관통하는 유일한 그 애. 흐릿한 기억을 빡빡 닦아 깨끗이 만들 수만 있다면, 그렇게 그 애를 알게 된다면. 승철은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될 것만 같았다.

지금 그 애를 잊어버리고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큰 틈을 안고 사는 것만큼.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할래.”

“……난 너 설득하려고 한 시간짜리 피피티도 준비해왔는데.”

“한다고.”

“내가 할 말은 아닌데, 생각이란 걸 쫌 하고 수락해 보는 게 어떠실련지.”

“시간낭비할 생각 없어. 내가 네가 말한 걸 찾으면 소원으로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지? 안 잃어버리는 거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승철을 앞에 두고, 정한은 울듯이 웃고 말았다.

“그래. 영원히.”

승철이 툴툴댔다.

“기껏 하겠다고 했는데 수상하게 영원 어쩌고 하냐. 암튼 그 정도면 됐어. 뭘 찾으면 되는데.”

정한은 웃다가 한탄했다.

“너를 보니 성공을 점치기 어렵구나.”

승철은 얼굴을 왕창 찌푸렸다.

“왜. 뭘 못할 거 같은데.”

사소한 부분은 다르다 할지라도 혼은 같아서, 최승철은 이토록 최승철이라서.

…널 쉽게 죽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정한은 고개를 저으면서 태연히 웃어보였다.

“아, 그건 이쪽 문제.”

“허얼… 나중에 소원 말해도 ‘이쪽 문제가 있어서 못해주는데?’ 이러는 거 아니겠지? 똑바로 해라.”

“이 짜식이 신선을 앞에 두고 못하는 말이 엄써!”

“신선이었냐고…….”

정한이 뒤늦게 무게를 잡으려고 해봤자였다.

승철이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닦달했다.

“뭘 찾아야 되는데. 기한은 어느 정도까지인데.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도 돼?”

“그거는 맘~대로 해, 맘~~대로. 에구, 신선이 그렇게 꼬치꼬치 깐깐하게 굴면 그것도 좀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겠어?”

그 말에 오히려 승철이 대놓고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내는데도, 그것마저 최승철 같아서 정한은 펼친 부채로 입가를 살며시 가렸다. 하계의 한 번의 환생을 위한 껍데기가 아닌 그저 최승철인 것이란 생각에 미혹될 것만 같았다.

정한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가 똑바로 승철을 바라보았다.

“이지훈을 찾아.”

“사람?”

“응. 사람. 전국 어디에 있을 진 모른다. 몇 살일지도 가르쳐줄 수 없지만 너보다 연하일 거야.”

“그 사람을 찾으면…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당연하지. 믿어. 내 공언하니 네가 이지훈을 찾는다면 네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승철이 계속 캐물었다.

“언제까지 찾아야 하는데? 내가 아무 이지훈이나 데리고 와서 진짜 이지훈이라고 하면?”

“그럴 리 없어. 보면 알게 될 거야. 긴가민가 맞나? 하는 수준이라면 이 신선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말하겠니?”

“진짜 개어이없단 건 알겠는데.”

“넌 꼭 그 애를 알아볼 거야. 첫눈에 그 애를 알아볼 걸.”

다짐하듯 말한 윤정한은 부채를 접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이 스르륵 공기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꼭 찾아야 해.”

마치 그의 소원을 들어주길 바란다는 듯 간절하게 확신을 담아서.

“언제까지… 언제까지 찾아야 되는데?”

승철이 빽 소리쳤지만 향기로운 향만 남았을 뿐 좁은 고시원 방엔 이제 승철 한 명뿐이었다.

혼자만 남게 된 승철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한숨을 팍팍 쉬었다.

이토록 수상한 내기는 처음 보았다.

“별 이상한 신선이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이지훈은 일단 절대로 자신이 할 일을 회피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못 만나면 제가 어쩔 수가 없죠?

그래서 못 만나는 사이 많은 생각을 했다.

하루는 최승철을 만나면, 친구들이 쥐어준 그 단검으로 꼭 심장을 찌를 것이라 다짐했다. 어떻게 형이 날 잊게 할 수 있어. 어떻게 모든 인연의 실을 자르도록 그대로 두냐. 무슨 짓을 해서든 날 잊지 못하게 해야지. 일곱 번의 하계 생을 버티면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느냐 생각을 했다. 중죄를 지으면서도 날 살린 사람을, 나는 심장을 찔러 죽이려 하냐고. 승철의 고통을 끝내고 내가 나머지 죗값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고작해야 스무 해를 살면서 그토록 고통스럽게 매일매일을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하계에서 사는 삶이 고통밖에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하계는 이토록 한없이 어지러웠다. 그저 순수히 존재할 수 없이 모든 것이 시끄럽고 모든 것이 왕성해 정신을 하나로 모으기조차 힘들었다.

그것이 못내 짜증스러울 때는 승철을 생각했다. 이토록 허망하고 험란한 세상을 몇 번이고 주유한 승철을.

그러다 어느 날, 윤정한이 차분히 꿈에 찾아왔다.

-언제까지 미룰 작정이니.

“미루는 거 아냐. 못 만나는 거야.”

-야잇. 너 승철이 서울 간 거 알고 서울 쪽에 머리도 안 두고 자는 거 다 안다.

지훈이 짐짓 놀라는 척을 했다.

“서울? 어쩐지. 그래서 내가 못 봤구나. 여기 부산이구 그 서울? 이란 데랑 멀어. 인간은 축지법 같은 거 못 쓰거든?”

-차암나.

정한은 낄낄 웃었지만, 곧 정색하고 허리를 곧게 폈다.

-확실히 해. 나하고 약속해. 승철이 만나면, 바로 찌르겠다고.

“아니 이 형은 나한테 마음의 준비도 안 시키네.”

-마음의 준비는 이십 년이면 됐을 만 하지 않니?

“이십 년밖에 안 됐네….”

그렇게 대답하며 지훈은 슬쩍 눈을 피했다.

정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지훈아, 진짜. 나하고 약속해줘.

“뭐를…….”

-너나 승철이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못 만날 수도 있어. 너 지금 하는 것처럼 서울 안 가고 삐대고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어어…?”

최승철을 만나면 죽이라고 맨 먼저 말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 같은 소리를 하는가.

열한 명의 의견은 제각각이었지만 결국은 선계의 인연을 중요시했기에 하계에서 이지훈이 찌르기를 바랐고, 윤정한은 그 중에서도 특히 그랬다.

벌을 회피해 꼼수를 부릴 생각을 제일 먼저 한 것도 윤정한이었으니까.

‘내가 못할 거 같으니까 포기했나.’

하지만 아니었다.

윤정한은 다짐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

-이번 생에 못 만나면 그 땐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할게. 하지만, 하지만 만난다면.

정한이 지훈의 손을 꽉 잡았다. 정한의 손은 차갑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우리가 준 단검을 써. 정말로 망설이지 마. 망설여선 안 돼.

지훈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윤정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이라고 다짐을 시켜주기 위해서 악역도 자처했다. 원래는 이지훈이 혼자 다짐했어야 할 일인데.

승철의 연이 끊기는 건 오직 지훈 뿐이고 다른 이들은 아무 달라짐이 없는데도 이토록 신경써주지 않았나.

오히려 자신이 매달려야 할 일인데.

“최선을 다해볼게.”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지훈은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이지훈은 프랜차이즈 화로구이 전문점에서 알바를 했다. 면접 처음엔 에둘러 거절당했는데 화로 열기 때문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자마자 합격이 됐다.

-왜 화로구이에서 알바하는 거야?

합격한 날 밤에 꿈에서 원우가 물어서 한솔이 대꾸했다.

-이렇게 알바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국에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어.

-아니 경제 활동을 왜 하냐고.

언외에 ‘승철이를 찌르면, 그 후는 다른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게 될 텐데.’ 같은 확신이 있다.

지훈은 ‘거기 프랜차이즈지만 김치가 맛있다.’ 정도의 헛소리로 마무리했다.

프랜차이즈 화로구이 전문점은 젊은 애들이 모이는 길 코너에 딱 자리잡은 아주 좋은 입지였다.

불을 붙이는 화로는 골목 안쪽에 있어서 신호가 올 때마다 왔다갔다 하며 갈아줘야 했다. 겨울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불 들고 다닌다고 지훈은 거의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했다가 혼난 다음엔 일단 점프수트를 입고 허리춤에서 묶었다.

‘서울을 가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나.’

정한이 와서 그렇게 말한 이상 지훈도 결정을 해야 했다.

‘근데 그래도 알바 한 달은 채워주고 나가야지.’

지훈은 멍하니 화로 속에서 타오는 숯의 붉은 빛을 바라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몸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애들이 골목 옆의 대로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웃고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참 활기차고 밝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나 무리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선인이라는 자각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의 안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는 하나의 질문 때문에.

찌를 것인가, 말 것인가.

손에 힘을 주면 단검은 금방 그 손안에 쥐어졌다. 여전히 지훈의 피로 끄트머리가 붉은, 아름다운 단검이 인간의 생에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걸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선계에서의 별다를 것 없던 하루하루가 떠올랐다.

승철이 갑자기 장난치면서 뒤에서 덥썩 안았던 날. 어색하게 바둑돌을 쥔 손을 고쳐주겠다고 손을 겹쳤던 때. 뜨거운 손을 한참 잡고 있다 슬며시 놓았을 때 손등이 시원해지던 감각. 힘들어서 넋이 나갔을 때 함께 옆에 있던 온기. 두툼한 무복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몸. 차가웠던 마지막 입맞춤.

이걸 승철이 다 잊는다면.

이지훈은 얼굴을 두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알바비 받으면 서울로 가자.’

그리고 그 순간에 저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갑자기, 오직 한 사람만이 빛나며 그에게 뛰어왔다.

최승철은 돈은 없었지만 시간과 감이 있었다.

일단 한국의 민증 체계를 믿고 전국의 이지훈을 전부 뽑아본 다음에 자신보다 어린 이지훈만을 남긴 뒤 하나하나 찾아가 본 것이다.

‘이 사람’이 진짜 내가 찾는 이지훈일지 아닐지는, 그냥 보면 알았다. 선인이 말한 첫눈에 보면 알 거라는 확신이 오지 않았으니까.

흔한 성에 흔한 이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이 빠르니 서울에서 시작해서 하나하나 뒤지며 마지막으로 부산까지 오는 데엔 반 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태어난 ‘이지훈’들도 있을 테지만, 시커먼 남자가 갑자기 애 본다고 불쑥 나타났다간 선인과의 내기고 나발이고 경찰에 끌려 갈 것 같아서 제외했다.

하도 들여다봐서 너덜너덜한 ‘이지훈’들의 주소록과 무제한 통화료 사이에서 다섯 번째 ‘이지훈’을 실패하고, 적당한 모텔에나 들어갈 생각으로 번화가를 걸을 때였다.

터덜터덜 걷던 승철이 불 앞에 앉아있는 어떤 남자애를 본 건 우연이었다.

해는 이미 져서 좁은 골목은 가로등 빛만으로 어스름했고, 그 아래 화로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화로 앞에서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남자애 하나가 불을 들여다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긴 검은 머리카락은 땀에 가닥가닥 젖어서 붙어 있고, 코앞의 화롯불 때문에 하얀 피부는 발그레하게 물들어서 눈동자에도 주홍빛이 돌고 있었다.

흔하다면 흔한 광경이었다.

알바가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데 최승철에게는 벼락과 같았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똑바로 꿰뚫어져 하염없이 당겨지는 감각.

승철은 이제 이해했다.

‘첫 눈에 그 애라는 걸 알아볼 걸.’

신선은 허언을 하지 않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지난한 삶들을 관통한 존재가 저기에 있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동그란 얼굴 가득히 놀란 표정을 담아 이쪽을 향해서.

몇백몇천 번 그래왔던 것처럼 눈이 마주쳤다.

밤의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승철은 달렸다.

“이지훈!”

내가 널 알아. 너도 날 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어도 그걸 알았다.

신선 때문에 ‘이지훈’을 찾지 않았다면 평생을 모를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채 죽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찾았다.

이제는 알았다.

승철은 어버버하고 있는 지훈을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안았다.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끼고 사랑해서 무슨 짓을 해서든 살려주고 싶었던 사람이 품 안에 있다. 갈비뼈가 부서질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꽉 껴안았던 승철은 불현듯 포옹을 풀어 동그란 얼굴을 양손으로 꽉 잡고 새삼스럽게 살폈다.

동그랗고 작은 얼굴은 찐빵처럼 따끈했다.

여전히 영문 모를 당황한 표정으로 자길 올려다보는 이지훈의 얼굴.

“다행이다.”

승철은 울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심코 말했다.

“열 이젠 안 나는구나.”

“…….”

“버, 번호 알려주라.”

“……없는데요.”

“그래? 그렇, 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 다 아는데도 승철은 고분고분 납득하고 한쪽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더니 지훈의 손을 잡았다.

“으, 왜…”

말은 그러면서도 지훈은 힘줘서 손을 빼지는 않았다.

승철은 자기 핸드폰 번호를 지훈의 손바닥에 썼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펜도 무엇도 없으니까 손을 잡고 그 예쁜 손에다 대고 몇 번이나.

알바 때문에 다쳤는지, 지훈의 손바닥엔 칼로 그어진 것 같은 작은 흉터가 있었다. 흉터와 달리 손가락이 지나간 자취 같은 것은 온기조차 금세 없어지고 자국도 남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썼다.

“외워줄래?”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서.

자꾸 눈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승철이 눈을 계속 깜빡였다가 또 소매로 눈가를 쓱쓱 문질렀다. 하지만 그건 서럽고 외로운 눈물이 아니었다.

“아씨, 미안해. 이게, 울고 싶은 게 아닌데 왠지 자꾸 눈물이 나네.”

승철은 머쓱하게 웃고 울었다. 그도 어지간히 피부가 하얘서 펑펑 울자 그 붉은기가 눈가와 뺨에 선명했다.

눈이 마주쳤다.

승철이 순하게 웃었다.

최승철의 웃음이었다. 선인일 때와 다를 바 하나 없는 그. 냉막하던 인상을 한 방에 무너뜨리던 웃음. 신이 나서 촐싹댈 때의 얼굴.

그리고 승철이 다시 와락 지훈을 껴안았다. 지훈은 무심코 선계의 최승철을 떠올린다. 지 힘도 모르고 상대방을 터트릴 듯이 꽉꽉 껴안는 버릇.

겨울인데도 승철이 입은 얇은 티셔츠 너머로 울리는 터질 듯한 심장소리. 꽉 눌린 뺨과 귓가에 그 심장소리가 이토록 선명했다.

심장. 생그러운 심장 소리.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힘을 주자 단검은 어김없이 소환되었다. 승철이 열심히 손가락으로 번호를 써준 그 손바닥 위로.

‘뭐가 됐든 좋아.’

최승철이 제발로 찾아오다니.

이것은 곧 있으면 스러지고 윤회로 돌아갈 하계의 목숨일 뿐이다.

연약한 삶은 그저 업보를 위한 유배에 불과했다. 스러진다 해도 바닷물에 녹은 소금처럼 그저 그 뿐. 눈 한 번 딱 감으면 최승철을 영엉 잃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그를 사모하고 그가 나를 귀애하고, 그런 선계의 날들로 돌아갈 수 있다. 자신과의 연이 끊어지지 않은 최승철을 다시금 다정히 끌어안고 입맞출 날을 꿈꿀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정말 수백번은 보았고 이지훈은 맹세컨대 한 번도 살리기 위해 관여하지 않았다. 길어져봐야 고통받을 시간을 늘리려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테고, 또 그렇게 참견하여 하늘의 법을 어기려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저 단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번 보았으니 되었다.

지훈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입술에서 툭,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인데도 승철이 놀라서 지훈의 입술을 들여다보았다.

“어떡하냐.”

주저없이 승철이 손가락을 지훈의 입술에 댔다. 윗니에 깨물린 입술을 살살 빼내자 붉게 자국이 나 터져 있는 입술. 핏방울이 맺힌 입술에 승철이 제가 아픈 듯한 얼굴을 했다.

“왜 아프게 그래.”

지훈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승철도 고집 있게 따라왔다.

지훈이 얼굴을 찡그리고야 말았다. 숨이 차츰 가빠졌다. 고통스러워졌다. 인간의 몸이란 너무나 연약하고 고통에 취약하고, 혼란스러워서.

눈앞의 최승철이 자신을 귀애한 최승철과 다른 이인데도 그걸 구별할 눈조차 눈물로 흐려지고 말아서.

승철은 눈앞의 ‘이지훈’이 울기 시작하자 어쩔 줄을 몰랐다. 승철이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려다 혹시나 지훈의 얼굴에 상처가 날까봐 소매를 걷고 맨손으로만 문질렀다. 지훈은 승철의 손목에 주작의 힘에 의해 타버린 흔적이 남은 것을 보고 더더욱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흐느꼈다.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이미 머릿속에서 증발되어 사라졌다.

근처에서 집게 같은 것이 떨어졌는지 짤랑, 하고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승철은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의 이지훈이 울지 않게 달래야 한다는 마음만이 있었다.

그를 사랑했고, 그를 사랑하고 있고, 사랑할 것이라는 마음만이.

무슨 짓을 해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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