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축하

정쿱

“정하나! 하니야♥”

예민한 꿈 사이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윤정한의 잠을 깨웠다.

“응?”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꽉 찬 것은 바짝 얼굴을 들이댄 최승철의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얘가 나보다 일찍 일어났다고?’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정한은 생각했다. 게다가 아침잠 많은 승철이 저렇게 신난 상태까지 되려면 잠 좀 깨서 뒹굴면서 한참 핸드폰 하고 뿌스럭거리다 일어난 후 아닌가. 그렇게 될 때까지 내가 못 깼다고?

“그래그래. 꿈이구나.”

정한은 몸을 뒤척여서 이불을 어깨 위까지 덮고 돌아누웠다.

“야 꿈 아냐, 꿈 아냐.”

“꿈인데.”

“일어나라 그냥.”

승철이 뾰족한 정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아, 좀만 더 잘래애.”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잠은 홀딱 깨어 있었다.

슬그머니 다시 몸을 똑바로 돌리자, 자기 위에서 헤헤 웃고 있는 승철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승철은 한 번 더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뭉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진짜 꿈인가?’

목에 승철의 얼굴보다 더 큰 크기의 리본이 감겨 있었다. 아래로 늘어진 짙은 밤색의 리본 끈이 살랑살랑 흔들리면서 정한의 가슴과 목을 간지럽혔다.

“생일 축하해!”

신나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은 태도로, 승철이 리본을 손으로 콕콕 가리켰다.

“생일 선물은 나다. 거절은 거절한다. 빨랑 풀러봐.”

“나 생일이야?”

“어휴. 너 생일이지, 바보야. 까먹었어? 어쨌든 내가 제일 빨랐징? 오케이.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정한이의~ 생일 축하 합니다~”

정한은 완전히 잠이 깬 상태로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승철을 껴안았다. 정한과 승철의 가슴 사이에서 리본이 부드럽게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어영부영 정한이 끌어당긴 대로 구부린 승철의 등은 단단하고 뜨뜻했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다운 높은 체온과 체향에 섞인 향수 내음이 훅 끼쳤다.

정한은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그냥 껴안고 있었다. 닿는 곳부터 녹아내리듯이 뜨거웠다.

별다른 말 없이 그렇게 껴안고 있자 승철도 당황했는지 웅얼거렸다. 비염 때문에 조금 막힌 숨소리와 잠긴 목소리가 귀 옆에서 울렸다.

“나는 오늘만 기다렸는데. 오늘이면 진짜… 얼른 풀러봐! 리본 요기만 잡아당기면 된다?”

“아이고 세상에. 고생했다~”

그러면서 정한은 승철을 껴안은 채로 빙글 몸을 돌렸다.

얼떨결에 몸이 뒤집혀 이불 속에 파묻힌 승철이 입을 헤 벌렸다.

부산히 눈을 깜빡이는 머릿속에서 ‘이게 아닌데?’ 따위의 생각이 지나가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역시나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새였다.

“선물? 선물 안 풀고? 야이 선물부터 풀어야지 사람 성의가 있는데 말야.”

“에이이, 그럼 재미없지.”

리본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풀려는 듯 시늉만 하던 짓궂은 미소를 지은 정한은 몸을 일으켰다.

“으함~ 그럼 모닝 커피나 한 잔 때려볼까!”

그대로 기지개를 펴면서 거실로 나가자 승철이 뒤이어 쪼르르 달려나왔다.

“뭔 소리야. 너 아침부터 커피 안 마시잖아. 선물 뭔지 안 궁금해? 안 풀어봐? 어?”

정한은 짐짓 목소리를 깔았다.

“선물은 마음이 젤 중요하다잖아.”

“뭔소리여.”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 그런 걸 생각하면서 뭔지 충분히 생각하고 추리해보면서 기대하는 게 제일 큰 선물 아닐까?”

“뭔소리여 진짜…. 아니 그냥 풀러봐. 선물을 받았으면 얼른 풀러봐야지, 왜 그걸 풀지도 않고 보고만 있냐고~”

정한은 모르는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월의 하늘은 투명할 만큼 높았다. 여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듯이.

“오늘 날씨 좋네.”

“아아이, 정하나~ 요기 요기. 요거 잡아당기면 선물이 짠 나온다니깐.”

“아~ 아름다운 아침이다~”

“딴 소리 쫌 그만하고오!”

하지만 그쯤에서 물러설 윤정한도 아니었다.

회사 갈 준비를 끝낼 때까지도 정한이 풀지 않자 승철은 본격적으로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안 풀어봐? 으응?”

네 생일 선물은 나야♥ 라면서 목에 리본까지 달고 풀어보라고 하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고전적인 이벤트 아니겠는가.

“아침에 힘 쓰긴 싫다 따뚜야.”

“……니 머릿속엔 그런, 그, 그 생각밖에 없냐? 아니 사람이 생일선물을 준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 생일 선물을 풀기 싫다.

‘아침부터 지치긴 싫단 말야.’

승철은 정한이 심적으로 큰 일만 있어도 뚝뚝 체력이 떨어지는 절약형 배터리라는 걸 알지만 근본적으론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아니면 알긴 알아도 제일 먼저 선물은 나♥ 를 포기 못하는 것이든가.

‘하여간 최승철 정석적인 이벤트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돼.’

인소 보고 자란 사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랬으면 최승철은 분명히 나한테도 인소 전파 했지.’

자기가 좋아하게 된 건 꼭 남들한테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하니까.

그러면 정한은 어~ 읽어볼게~ 하고는 한두 페이지만에 바로 잊어버리고.

“웃지만 말고 빨리 씻고 나와.”

승철이 욕실 문에 기댄 채로 궁시렁거렸다.

“어우, 지짜… 너무한 거 아냐? 풀어달라고 사정을 해도 안 풀어주고……. 니 선물인데.”

“내 선물이니까 내맘이지.”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방치 플레이를 당하고 나자 오기가 생겼는지 최승철은 결국 출근길도 그렇게 나갔다.

“? 출근 그렇게 할 거야?”

“너 때문이잖아아아….”

“그래그래, 우리 승철이 예쁘다아. 잠깐만, 여기 봐봐.”

정한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어서 사진을 찍었다.

“자세 제대로 취해봐, 승철아. 나도 최선을 다해 찍어볼게.”

“아 그러지 말고 풀어보라고 쫌! 너 옆사람이 이러고 가면 부끄럽지도 않겠냐?”

“내가 왜 부끄러워? 리본 단 사람한테 시선 몰리는 거지 뭐~”

“!”

그래도 얼마나 결심이 굳은지 결국 리본은 자기 손으로 풀지 않고 출근길이 시작되었다.

덩치도 좋은 게 와라락 쪼그라들어서 머쓱해하면서 은근슬쩍 손으로 가리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그런 소극적인 몸짓으로 가려질 크기가 아니었다.

쳐다보더라도 어차피 지나갈 사람들인데 뭘 또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애당초 사람들이 한 번 더 쳐다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도.

당장 길가에서 키스를 갈겨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야, 아이고 하면서 피해가는 것 정도인데.

그런 시선만으로도 머뭇머뭇 멈칫하면서 걷는 게 바보 같고 귀엽다.

“당당하게 걷기 몰라, 승철아? 당당하게 걷기?”

“야,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풀어.”

“그렇게 부끄러워하면 오히려 시선을 더 끄는 거야. 가슴을 펴.”

“너 때문이잖아! 그냥 집에서 풀렀으면 내가 이러고 안 나와도 됐잖아아!”

울상이 된 승철의 귓가까지 새빨갰다. 티 없이 깨끗한 뺨에서 작고 동그란 귀까지 붉은 기가 선명했다.

진짜 여기서 키스라도 하면 얘가 그대로 펑 터지는 거 아니야?

“재밌겠다…….”

“너 또 이상한 생각하지?!”

“어떻게 알아찌? 흐하하.”

그 뒤에 나 잡아봐라 쑈가 펼쳐졌다. 정한은 곧바로 잡혔다.

파티션에 두 팔을 걸치고 선 승철이 근엄하게 물었다.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정한이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돈이 없다는 죄로 회사라는 감옥에 갇혀…”

“…아니거든. 선물 풀어보기 가장 좋은 오전 11시 반이거든.”

회사에서 이 시간에? 얘는 부끄러움이 많은지 적은지 알 수가 없어.

회사에서 연애를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거라서 리맨물도 안 본다며, 승철아….

하지만, 생각해보면 최승철은 처음부터 회사에서 스킨십이 진했다.

그것도 내내 데면데면하다가, 같은 팀이 된 후부터 갑자기.

엄청 친한 척 하면서 무슨 일만 있으면 이름 부르고, 어깨동무도 거침없이 하고 덥석덥석 사람 손을 잡아당기질 않나, 갑자기 고개를 기울여서 아래에서 빤히 사람 얼굴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어쩌다 마주쳐봐야 고개만 꾸벅 하고 거리를 두던 때를 생각하면 퍼스널 스페이스라는 걸 모르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회사 밖에서는 아는 척도 안했다. 윤정한은 지금도 분명히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

9월 24일. 건대입구 앞에서 친구와 만나서 설렁설렁 걷던 참이었다.

정한이 먼저 승철을 발견했다.

덩치가 좋기도 하고, 어쨌든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뜨이는 남자였기 때문에.

비스듬히 그늘진 음영이 뚜렷한 얼굴에, 별다른 표정 없이 시계를 흘끗 내려다보는 길고 진한 속눈썹.

데면데면하던 시기의 최승철에게 자주 보던 표정이었다.

회사가 근처라고 해도 어쨌든 회사 사람을 토요일에, 그것도 약속도 없이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일부러 소리 내서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도, 정한은 승철이 자신을 보면 달려와서 아는 척 할 거라고 생각했다. 잘 길든 강아지처럼 달려올 거라고.

승철이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니까.

거기엔 살짝 우월감이 있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서로의 감정을 저울질을 하면 분명히 승철의 마음이 더 클 거라고.

윤정한은 그런 무게를 착각한 적이 없었다. 안테나가 예민한 인기인의 숙명 같은 거라서.

그래서 친구 붙잡아다가 속삭였다. 회사 사람 만났다, 야. 그냥 모르는 척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너 따라온 거 아냐? 웃기지 마.

그 때 고개를 돌리던 승철과 눈이 딱 마주쳤다.

주변을 훑던 승철의 시선이 잠깐 정한에게 멈춘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라 순간 승철도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는지 눈이 살짝 커지고 뺨에 팽팽하게 긴장이 돌았다.

‘봤네, 봤어.’

정한은 살짝 귀찮아질 것을 예상하고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눈마주침의 그 짧은 순간동안 옆에 친구와 승철을 번갈아 소개시켜줘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부터, 여기서 만나다니 하하하, 무슨 일로 여기까지 하하하, 그런 말을 어떻게 해야 부드럽게 상황이 펼쳐질지 계산하느라 머리가 벌써 분주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계산은 부질없었다. 승철이 눈인사조차 없이 휙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

승철의 시선은 다시 자기 핸드폰으로 향해서 일부러인 듯 고집스레 이쪽을 외면했다.

그 때의 충격이라니.

‘너 사회생활 물로 보냐?’

회사 나왔다고 모르는 사람 돼?

종래엔 이 새끼 그럼 회사에선 나 왜 좋아하는 척 했어? 까지 분노가 순식간에 에스컬레이트 됐었다.

그래놓고 좆같은 월요일에 다시 만났을 땐 마치 토요일에 마주쳤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찐친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옆에 다가와 어깨동무를 한다.

순간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갔지만, 사회생활을 물로 보지 않는 윤정한은 그냥 죽은 눈을 하고 받아줬다.

여기서 ‘친한 척 굴지 마’라고 해봐야 회사에 개소리나 돌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쨌든 최승철의 인상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었다.

‘짜증나는 자식.’

이런 최악의 인상이 또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서 ‘짜증나게 귀여운 자식…’으로 바뀌는 데엔 반 년 정도 걸렸다.

의외로 뻔한 성격, 그런데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가 너무 복잡하게 꼬여버린 녀석.

그렇게 비비 꼬인 녀석은 이제 생일선물을 줘야 한다며 목에 왕리본을 달고 귀여운 척 파티션에서 후웅무웅 하고 있었다.

파티션에 뺨이 눌려서 찐호빵 같은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어허, 신성한 회사에서 무슨 짓이야, 승철아.”

“…너는 그럼 신성한 회사에서 리본 매고 다녀야 하는 내 심정은 생각 안 해주니?”

“그건 예쁘고 보기 좋잖아.”

“거짓말 쫌 하지 마.”

그래도 예쁘단 소리에 싫진 않은지 콧방귀만 뀐다.

몇 번 더 졸라보다가 안 될 걸 깨달았는지 승철은 팔랑팔랑 리본을 휘날리며 가버렸다. 눈을 흘기는 것도 잊지 않고.

참 빨리도 포기한다.

잠깐 데스크에 팔을 괴고 가만히 있었더니 승철과 교체하듯이 과장이 지나가다 말을 걸었다.

“어, 정한 씨 오늘 얼굴 좋아보이네.”

좋아보여요? 지금 애인 때문에 죽을 것 같은데.

라고 하기엔 사회생활 물로 보지 않는 윤정한이라서 차마 말도 못하고 그저 웃었다.

“어허허 그래 보여요?”

“그래그래!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식사 좀 제 때 챙기고, 응?”

정한은 껄껄 웃었다. 아, 사회생활 하기 힘드네.

“넌 생일인데 무드도 없이 이런 델 오자고 그러냐.”

여전히 목에 왕리본을 달고 있는 승철이 쭝얼거리거나 말거나 정한은 메뉴판을 펼쳤다.

승철이 목에 달고 있는 왕리본을 꾸물거리며 모양을 잡으면서 웅얼거렸다.

“더 좋은 데 가도 되는데….”

“여기도 비싼데? 백그램에 오만원이댜?”

“그만큼 돈을 쓰는데 무드가 없어, 너는.”

“무드? 있지~ 소주 마실래?”

“안 마셔.”

그러면서 손사래까지 치더니 눈을 부릅떴다.

“술 먹는다고 그냥 넘어가지 마라. 쪼옴 분위기 좋은 데서 선물 풀러보라고 내가 진짜 오늘만 백번은 더 말했다?”

“아라써, 아아라써.”

그렇지만 정한은 방글방글 웃으면서 소주와 소주잔 두 개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승철이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나 안 마신다니까?”

“어우~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괜찮아, 승철아. 안 마셔도 돼. 나 혼자 마실게. 혼자 먹어도 괜찮아. 혼자 자작하면 앞에 앉은 사람 사 년간 애인 없다 그랬지만 괜찮지 뭐.”

“…….”

결국 승철은 못 이기는 척 잔을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최승철은 윤정한이 하자고 한 일을 못하겠다고 안 한 적이 없었다. 징징거림이 부가적으로 따라와서 그렇지.

승철이 정한의 앞으로 슥 좋아하는 반찬을 밀어주고 집게도 슥 밀어주었다.

“으이구.”

정한은 그냥 한 마디 하고 익숙하게 술잔과 집게를 들었다. 이번엔 니가 굽네 내가 굽네 이럴 필요도 없다. 심기와 환경과 상태를 매순간 체크해보지 않고 관성적으로 굴어도 되는 상대.

그래서 새삼 깜짝 선물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게 웃겼다. 깜짝 놀래키는 것도 내심 좋아하긴 하지만, 늘 먼저 말해주고 싶은 마음에 실패하는 게 최승철 아니었던가.

용케 숨겼어.

지금까지 참 용케 숨겨왔어.

소주만 벌컥 마시니까 승철이 바로 잔소리했다.

“안주부터 먹어, 바보야. 이러다가 또 나중에 여기저기 아프다 이러지.”

입이 쓰긴 써서 정한도 얼른 젓가락을 들었지만 고기가 덜 익었다. 나온 반찬도 좋아하는 건 다 정한의 앞에 와 있지만 그래도 선뜻 젓가락이 안 갔다.

고기가 좋은데.

정한은 안광 없는 눈으로 쭉 고기를 바라보았다.

맨날 다들 밥 먹으라고 잔소리는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맨날 고기만 먹고 사는데.

…고기만 먹고 살아서 그런가?

탄단지인가 뭔가 그거 안 지켜서?

정한은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술잔을 한 번 더 기울였다. 그러면서 승철을 빤히 바라보았다.

승철은 리본 때문에 내내 신경이 쓰이는지 리본을 주물럭거리고 있다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왜, 왜. 왜 그렇게 봐. 이제 풀어주려고? 됐거든. 고깃집에서 진짜 이게 뭐냐?”

“어, 그래. 그냥 하고 있어. 예뻐.”

“너 아까부터 예쁘다고 대충 퉁친다?”

“예쁘니까 예쁘다고 하지~ 아유 우리 승철이 이쁘다아~”

아직 술 한 잔도 안한 승철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정한은 가끔 그럴 때가 웃겼다. 별 말도 아닌데 승철이 혼자 쩔쩔매거나 얼굴이 빨개질 때가.

눈은 또 커서 또륵또륵 굴러가는 게 빤히 보이는데 표정을 순식간에 고쳐지을 때.

매번 똑같은 말을 해도 매번 처음인 것처럼 부끄러워할 때.

마음속 호수에 부는 산들바람처럼. 표면에 간지럽게 작은 파도가 일게 만드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아, 고기 탄다!”

정한은 집게를 다시 고쳐잡았다. 승철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판 갈아달라 해, 하고 속닥였다.

저녁식사에 산책까지 마치고 돌아왔을 땐 거의 열한 시에 가까웠다. 정한은 인형을 잔뜩 소파에 쌓아다가 쿠션을 만들어놓고 늘어졌다. 이쯤 되니 승철도 체념했는지 삐졌는지 ‘선물 안 풀어봐?’ 같은 소리를 그만 뒀다.

거실 불을 끄고 넷플릭스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지금 뜨는 콘텐츠’라거나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시리즈’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 뭐 보지?”

때때로 추천 화면이 바뀌며 반짝거리는 빛이 승철의 얼굴을 미끄러지면서 오색찬란하게 물들였다.

그 때부터 느꼈지만, 승철의 이목구비는 뚜렷해서 음영이 꽤 짙은 편이다. 들어갈 덴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오고.

지금은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와 있고.

“왜 그렇게 입술이 나와 있냐.”

승철이 뚱하게 대꾸했다.

“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는데. 내가 제일 먼저 준비했는데…….”

“마지막까지 기대하고 있는 게 더 설레지 않아?”

“넌 말이나 못하면 진짜.”

승철이 제일 커다란 인형에 턱을 꽉 눌렀다. 리본이 찌그러지며 부스럭거린다.

정한은 대충 선택창을 들락날락하다가 연애 드라마 하나를 틀었다.

승철은 삐죽거리면서도 드라마에 집중했다. 정한도 처음엔 추임새도 넣고 재밌게 보다가 한 화가 끝나기도 전에 완전히 지쳤다.

승철이 꿈지럭대더니 가까이 와서 머리를 기댔다. 어깨에 힘이 확 들어가 움찔했다가 천천히 풀렸다.

“나 어깨 딱딱하지 않아?”

“딱딱해. 밥 좀 먹고 다녀.”

“너랑 맨날 먹었잖아.”

“세 입 먹고 배부르다 표정 좀 하지 말고 그냥 더 먹어.”

“나 편식은 안 하잖아.”

“맞아. 그거 하나만은 칭찬 해줘야지.”

그러면서도 어이 없다는 듯 승철이 웃었다. 어깨를 타고 그 진동이 전해졌다. 리본이 계속 부스럭거렸다.

밀려드는 피로 때문에 정한은 나른함을 느꼈다. 정한은 자신에게 기댄 승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보통의 회사원들보단 조금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오는 감촉.

자정이 되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고, 나른하고 손가락은 간지럽고, 조명은 어둡고, 드라마는 소곤소곤하게 조용했다.

그래서 불현듯 묻어두었던 질문이 나왔다.

“너 그 때 왜 나 모르는 척 했어?”

“언제.”

“너 대리 달았던 해 9월 24일에.”

너무 상세해서 그런지 오히려 승철은 열심히 생각해도 모르는 눈치였다.

“9월 24일? 그게 언제야? 무슨 날이지? 어떤 기념일? 아니, 진짜루… 언제야 그게?”

“건대입구 지하철역 앞에서 너 나랑 눈 마주쳤었잖아.”

승철은 매달려있던 정한의 팔에서 조금 떨어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끝에서 멀어졌다.

“아~~~~”

정한이 아쉬운 소릴 내거나 말거나 승철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쭝얼거렸다.

“……아니 왜 그 때 얘길 하고 그랭.”

“그냥, 아까 생각났어.”

사실 이제 승철이 그랬던 이유는 짐작하고 있다.

승철 역시 밖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정한에게 친한 척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나름대로 간격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존나 친한 척 하네… 라고 생각했지만, 승철은 자기 나름대로의 친한 척 하기 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정한의 눈엔 어이 없어도.

승철이 양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왜 기억하고 있냐. 그냥 좀 까먹지.”

“기억력이 좋아서 안 까먹거든.”

“뭐 그런 것만 기억해 진짜….”

애교로 넘어갈 것 같지 않자 승철은 인형에 콱 얼굴을 박은 채 인형만 괜히 쭈물거렸다. 정한은 보채지 않고 그냥 기다렸다.

“그냥… 너하고 친구 있는 거 보고 너무 친해보여서.”

“응?”

“난 너가 나 알아보기 전부터 니 알아봤거든.”

정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근데 그 때 너하고 친구하고 어엄청 웃으면서 오길래.”

“으응.”

“그 때 내가 아는 척 좀 하면 니가 대놓고 껄끄러워했잖아. 회사 안에서야 뭐 적당히 받아주는데 회사 밖에서도 그러면 아는 척도 안 해줄 거 같고……. 그래서 아는 척 하기 좀 그랬단 말야.”

“그냥 인사 한 번 하고 가는 게 뭐가 어렵다고.”

승철은 그냥 인형에 얼굴을 박고 웃는 소리만 냈다.

“그게 맞지.”

“그래서 알면서 모르는 척?”

“일부러 모르는 척 하려던 거 아냐. 진짜. 그냥 웃으면서 인사 하려구 했었단 말야.”

정한은 천천히 인형을 꽉 쥔 승철의 손을 풀어냈다.

떼어낸 후에도 주먹을 쥐고 있었지만, 정한이 만지고 쭉쭉 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승철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근데 그게 딱 눈 마주치니까 오히려 안 되더라. 어려웠어.”

정한은 느릿하게 승철의 손을 쓰다듬으며 깍지를 꼈다.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가락 사이에 불을 품은 것처럼 뜨끈뜨끈해졌다.

뼈대만 크고 살이 붙지 않은 정한의 손가락이 승철의 손등을 문질렀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어.”

승철이 웃는 듯 우는 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니가 좋아서…….”

“…….”

문득 승철의 손에도 힘이 다시 들어가 정한의 손을 꽉 쥐었다. 보드라운 손바닥이 건조한 정한의 것과 꽉 맞닿았다가 스르르 물러났다.

“근데 나만 보면 떨떠름해하니까 말을 걸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걱정하고 있는데… 너는 딴 사람이랑 막 웃으면서 가구….”

점점 칭얼거리는 소리가 되는 걸 본인도 아는지 끝으로 갈수록 웅얼거렸다. 파묻은 인형에 가려져 끝에 무어라 하는지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정한은 반쯤 눈을 내리깐 채 승철의 엄지 손가락을 문질렀다.

‘그 때의 안테나, 틀린 게 아니긴 했네.’

혼자 쩔쩔맸을 생각을 하니 웃음만 나왔다. 하여튼 정한의 마음속에 큰 스크래치를 남겼지만.

“아니 근데, 역시 눈치 챘었구나. 나 행회 돌렸잖아, 니가 나 못 봤을 거라고.”

“눈까지 마주쳤는데 왜 못 알아봤겠어. 그 때 인사 했으면 널 더 빨리 좋아졌을 지도 모르는데. 니가 그 때 홱 고개 돌려서 계속 삐져있었거든?”

“…지금도?”

승철이 깜짝 놀라 인형에서 얼굴을 떼고 정한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부끄러워서인지 꽉 눌러서인지 빨갛고, 앞머리도 눌렸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당황해서.

웃을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정한은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한은 승철의 손에 깍지 낀 채로 잼잼 했다.

“화가 났었지. 많이 났어. 근데 난 너한테 결국 화를 못 내겠어.”

정말로 그냥 나쁘고 싸가지 없는 놈이기만 했으면 응 그래~ 하고 말았을 텐데.

정한의 예민한 안테나는 결국 구석에서 복잡한 생각으로 빙빙 돌리는 승철을 잡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정한의 취향대로 분위기로 몰아가주는 것이라든가, 잘 삐지고 서운해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욕구에 솔직해서 괜히 더 마음 쓰이게 하지 않는 점, 담담하게 제일 귀찮고 힘든 일을 맡는 점.

아무리 정한이 무시해도 시무룩해질지언정 완전히 스러지지 않는, 사랑에 애타하는 마음이 그대로 비치는 눈.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최승철을.

정한은 실실 웃으면서 몸을 기울였다.

코가 맞닿기도 전에 리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정한의 턱과 목에도 닿았다.

“풀어줄 거야?”

승철이 정한과 깍지 낀 손을 목에 가져다 대면서 웃었다.

“내 선물.”

“…그래.”

고집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정한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흉내를 내면서 입을 꾹 닫고 여전히 빨간 뺨에 입술 도장을 눌렀다. 체온이 내는 온기가 선명했다.

정한은 각도를 비틀어 입술과 입술을 맞댔다. 승철의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오고, 손깍지 낀 반대편의 손이 정한의 목덜미를 감싸안았다.

승철이 닿은 부분부터 열이 올랐다. 하루동안 꾹 참아온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속의 호수가 폭풍우 치는 밤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길게 길게 입술을 포개고 빨아들일 때마다 승철의 속눈썹이 움찔움찔 떨리는 것까지 다 느껴지는 거리.

정한은 그대로 승철의 리본의 끝을 잡아당겼다.

리본은 스르르 풀리고, 천천히 온기가 사라졌다.

툭.

“하아….”

정한은 혼자 숨을 내뱉었다.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몇 번이나 입술을 짓씹던 정한은 입술의 온기가 완전히 사라져 차가워질 때에서야 지친 눈을 떴다.

승철은 앞에 없었다.

대신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작은 상자뿐이다. 승철의 목에 묶었던 것과 똑같은 색의 작은 리본이 풀린 상자.

정한은 건조한 표정으로 상자를 주워 열었다.

반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윤정한의 취향으로 골라서 상당히 귀엽다.

정한은 하나를 손에 끼워 보았다. 딱 맞지 않고 조금 헐렁해서 금방이라도 반대로 돌아갈 것 같았다.

“바보 최승철.”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정한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 날 왜 그렇게 불러?!’하고 화내줄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선물이 고작 이거야? 이거 주려고 아침부터 나타나서 그렇게 풀어달라고 조른 거야?”

이미 세상을 떠나 없는데도.

정한은 무심코 그가 앉았던 자리와 인형을 더듬었다. 거기에는 아직 온기가 조금은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 정말로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하루종일, 최승철이 여기에, 내 옆에 있었다는 것처럼.

오직 작년에 주지 못했던 정한의 생일선물을 주기 위해서.

“너는 어쩜 죽어서도 그렇게 떼쟁이냐. 내가 그래서…”

정한은 너덜너덜하게 지친 몸을 소파에 푹 기댔다. 천천히 뺨을 가로지르며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그래서 선물 풀기 싫다고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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