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불꽃을

0.

연옥의 입구

신전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세 번이나 일어났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가령 신의 앞에서 순결을 맹세한 신관들이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행했다거나, 금품을 훔쳐 달아났다 같은 그런 싸구려 치정극 따위가 아니란 소리다. 나라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사건이다.

이 나라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고작 몇백년이 되었던가. 그 짧은 역사를 논하고자 한다면 아무 역사서를 하나 꺼내어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서의 일부분을 인용한다.

「 태초에 신이 한 인간에게 권능을 내리시니, 그 인간은 이 땅에 터를 잡고 사람들을 모아 나라를 세웠다.

황무지의 땅에 생명의 씨앗을 퍼트리고, 말라붙은 물길을 터놓아주시니 어찌 이를 기뻐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신의 축복을 받은 땅에 선 이들이여. 그의 영광을 이어받아 아낌없이 섬길지어다. 」

이제 이 나라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본론부터 적도록 하겠다. 나라를 뒤 흔든 그 세가지 사건에 대하여. 


※ 이를 열람하는 자는 이 사건을 어디에서도 발설해서는 아니된다.

또한 관련된 문서를 복제, 유출할 경우 신의 분노를 받아 끝내 파멸하여 지옥으로 떨어져 구원받지 못할 지어다.

「 첫번째 사건은 신이 세운 이 나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제 1 대신전, 그곳에 신의 이름과 같은 이가 있다는 것.

그 성스러운 이름을 단 자가 다름 아닌 하나 뿐인 대신관이었다. 신의 사랑을 받기라도 한 것 마냥, 그는 누구보다도 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신과 같은 이름을 한 대신관이라니, 그를 추종하던 이들 중의 일부는 그분이 신이시라며 굳건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두번째는 그런 대신관이 어느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는 것.

아무도 그가 어떻게 사라졌는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종교의 힘이 왕권보다 강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국가의 혼란이다. 백성들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므로 신전은 이를 극비로 숨긴 채 새로운 대신관의 후보를 추려나갔다.

마지막 사건에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파우스트 라비니아.

수습신관이었을 시절, 우연한 계기로 대신관에 눈에 든 그는 결국 추기경의 바로 아래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전례가 없던 일에 대해 질 나쁜 소문을 퍼트리던 이도 있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신관께서 직접 가르치며 옆에 붙여두던 아이. 신의 사랑을 받는, 햇살과도 같이 빛나던 파우스트 라비니아. 

어쩌면 곧 평민 출신의 최연소 추기경이 될 지 모른다는 기대까지 받고 있었다. 누구보다 정갈한 습관과 마음씨를 가졌으며 신을 사랑했다. 학문과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피가로'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따르고 있던 이.

그리고 대신관 피가로가 사라진 날. 마지막까지 옆에 있었던 존재.

신전에서는 그를 붙잡아 가두고 여러번 심문했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피가로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 그가 수상하다 여기었다. 

그가 구금되었던 순간, 추기경들은 대책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다.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 대신관을 하염없이 기다리느냐, 아니면 새로운 대신관을 세워놓느냐. 후자라면 누구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성직자라고는 하지만 그 중 여럿은 제 배를 채울 욕심 밖에 없는 자들이었기에 모두 자신의 파벌에 대한 추천만 늘여놓았다. 그러다가 그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파우스트 라비니아'를 추천하였다. '그는 대신관이 사라지기 바로 직전까지 옆에 있었던 인물일세. 거기다 평소 행실도 바르고 누구보다도 뛰어나 극찬을 받았지. 만약 대신관 피가로님이 돌아오신다 하여도 그자를 임시직으로 세웠다고 한다면 아무런 반대가 없지 않겠나.' 권력에 눈이 먼 자들도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는 대신관의 마지막에 함께했던 인물이지. 대신관을 해치려한 불온한 사람일 줄 누가 아는 가!'

결국 어느쪽의 주장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한명과 함께 투표수는 동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명이 '피가로님'께 직접 물어보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들 왜 그것을 이제야 생각했을까. 하고 뒤늦게 후회했다. 구금되어 있다 나온 파우스트는 영문도 모른 채 곧바로 제사 준비에 몰입했다. 피가로님의 눈물이 떨어져 만들어졌다는 호수의 성스러운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경견한 마음으로 음식도 먹지 않고 하룻동안 꼬박 기도를 올린 뒤에 의식이 시작되었다.

길고 하늘거리는 옷을 걸치고 앞으로 나가던 파우스트에게 문득 예전에 들었던 스승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글쎄…. 신이 바라는 게 진짜 그런걸까. 그런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네가 춤추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너의 춤선은 아름다우니 신께서도 분명 만족하실테지. 그래, 이왕이면 검무는 어떨까. 검 끝에 불을 붙이는 것도 좋겠어. 그렇다면 분명 신은 이를 보고 기뻐하시겠지.' 다정하고 상냥하던 그 말들.

파우스트는 제사의 의식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조각상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장식품의 용도지만 제대로 된 진검이었다. 번쩍거리는 날을 세워 촛불에 끝을 살짝 그을리자 불꽃이 붙었고, 파우스트는 유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몇몇 추기경들이 놀라 그만하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곧 조용해졌다. 그의 불꽃은 데일 것처럼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게 안을 밝히고 온기를 나눠주었다. 그가 그은 선대로 바닥에 불이 붙었지만 물건을 태우지도 않았다. 마치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것처럼, 성스러운 불꽃이었다. 모두가 놀라 입이 벌어진 사이에 신의 뜻이 내려왔다. '파우스트 라비니아'를 대신관으로 명한다.

이렇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신의 말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진짜였기에,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대신관이 되었고, 머지않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 후로부터 신의 목소리는 더이상 신전에 울리지 않았다.

이상, 3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


조용한 적막 속에서 가파른 숨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을 주르륵 흘린 파우스트는 허름한 옷소매로 이마를 문질러 닦았다. 신전에서 멀어진 이 마을은 아주 혹독한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처음 파우스트가 이곳에 다다랐을 때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인 줄로만 알았다. 눈보라 속에서 혼란한 상태로 떨고 있던 파우스트에게 늙은 노파가 다가왔다. 그렇게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되어있었던 마을에는 누군가 숨어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쓴 채로 목숨을 걸고 탈출한 탈옥수부터, 늙은 죄인, 그리고 팔려나가던 길에 도망친 어린아이들.

누가보더라도 질이 좋아보이는 고급옷감과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만든 옷, 아리따운 얼굴, 그리고 눈을 밟고 온 맨발. 그들에게 파우스트는 상당히 이질적이고 수상하게 느낄 법도 한데 너무나도 태연했다. 남의 과거까지 신경쓸 만큼의 여유가 되지 못했으며, 대신관의 모습을 보기는커녕 신전의 근처조차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파우스트의 신분이나 과거에 대해서 묻지 않았으며, 그저 늙은 노인과 아이들은 젊은 청년의 존재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정도였다. 낡은 집의 한켠을 내어주고 생존을 위해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파우스트의 노동력을 원할 뿐이었다. 사지가 멀쩡한 건장한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기 때문에. 이름없는 마을의 사람들과 파우스트는 꽤 좋은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무가 다 삭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집에서 낡은 모피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던 파우스트는 습관처럼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고 말았다. 지난 몇 번동안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위해 깨어났던 성직자의 아침은 굳게 자리박혀 쉬이 바꿀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마을에 할머니가 직접 바느질해 낡은 솜을 넣어 만들어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새벽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횡경막을 내릴 때마다 선한 숨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모두가 눈뜨지 못한 이른 새벽, 소복하게 쌓인 눈 위에 파우스트의 발자취가 남았다. 도망치며 어느 순간 구두가 벗겨지고, 곱던 발에 상처를 내었고, 그 상처에 눈이 닿아 살이 얼어붙으며 마치 화상 같은 흉터를 남겼다. 차가운 불꽃에 데인 것처럼 한 걸음을 나아갈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땔감이 더 필요하다.

불, 무언가를 태우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대가가 필요하다. 탈 것이 없으면 불은 아주 금방 사라지고 만다. 그때의 그 순간에 왜 불은 아무것도 없던 칼에 붙어 타기 시작했을까…. 파우스트는 떠오르는 잡념들을 떨쳐내고 발을 쩔뚝거리며 나무가 무성한 숲쪽으로 향했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하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땔감은 그정도 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파우스트가 머무르는 낡은 집을 허물어 쓰는 수 밖에 없는데, 이미 습기를 잔뜩 먹고 곰팡이도 여러군데 피어 그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사방이 숲이지만 노인들이 밖을 돌아다니기는 단차도 심하고 거칠었다. 여태껏 아이들의 손이 닿는 나무만 꺾어다가 말려 모았다고 하는데, 신전에 머물 당시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도 추울 것이라는 소리를 들어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신전, 신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늦은 감이 있지만 파우스트는 자신이 사라진 신전을 떠올렸다. 대신관의 자리는 함부로 비울 수 없다. 애초에 파우스트는 왜 추기경도 아닌 자신이 대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백성들이 혼란스럽지 않게, 자신의 부재가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기를 바랄 뿐. 더 이상은 신을 섬길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신께서 정녕 바라시는 것이 '그것'이라면 더는 돌아갈 수 없다. 파우스트는 굳게 다짐했다. 더는 기도든 제사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의 뜻을, 신의 사랑을 거부하겠다고.

젖지 않은 나무를 발견하고 힘껏 가지를 뜯어냈다. 그 순간에 다리 한쪽을 다친 듯한 고양이가 파우스트의 앞에 다가왔다. 다쳤구나. 파우스트는 조금 경계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천을 꺼냈다. 저 피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하면 당장 목숨이 위태로워보였다. 쪼그려앉아 하악질하는 고양이를 잘 붙잡고 뒷발에 끈을 꽉 묶었다. 그 천은 스승에게 선물 받았던 것이다. 신전의 것은 전부 버린 채 도망친 줄 알았는데, 그것이 남아있었다. 전부 태워 사라지게 하려 했지만 저 천은 불에 타지 못했다. 매듭이 묶인 채로 출혈이 멈춘 고양이는 저 멀리로 사라졌다.

'파우스트. 치료해주었던 고양이가 결국 삶을 이어나가지 못하여 속상한가 보구나. 표정이 좋지 않네. 신께서 창조한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답고 잔혹하지. 삶에는 결국 끝이 있기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것이란다. 그 고양이의 삶과 운명 또한 신께서 부여하신 것.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렴. 그 고양이가 다음 생에 더 행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에 대해 떠올리던 파우스트는 눈썹을 축 늘어트린 채 아래를 보았다.

'신은 어쩌면 아주 추운 지방에서 태어났을 지도 몰라. 그러니 제것들을 보살피고자 따뜻함을 만들고 온화한 날씨를 만들었을 거라는 게, 나의 생각.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때 파우스트는 무엇이라 대답했던가. 그것은 지금의 파우스트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대답을 들은 과거의 스승은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던 것. 이유를 몰랐던 그때는 그것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신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는 대신관. 왕보다도 귀한 신분을 가지며 막대한 권력을 손에 넣는 그 자리를. 그 감투를 써봤자 즐거운 일은 없었다. 오히려 듣고 싶지 않았던 진실만 알게 되어버렸다.

품에 한아름 나뭇가지를 안아 걸어가던 파우스트를 막아선 것은, 푸른 머리카락의 남성. 뒤로 놀라 자빠지려는 파우스트의 허리를 껴앉은 채 다정하게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동안 많이 야위었구나. 어서 신전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따뜻한 물에 몸을 씻도록 하렴. 그러면 내가 상처를 낫게 해줄테니.

파우스트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의 기억 속의 인물과 같지만 다르다. 내려다보는 시선의 거리감도, 입술도, 눈매도, 모두 같았지만 그의 눈동맨발이 닿는 지면마다 눈이 녹아내리고 새싹이 피어났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라고 할 수 없다. 날씨를 온화하게, 대지를 비옥하게. 파우스트가 아는 존재 중에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은 단 한명 뿐이다.

다가오는 피가로님의 발길에 파우스트는 뒷걸음질 쳤다. 동상에 걸린 발이 아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네가 혼자 씻기 어렵다면 이 스승이 친히 씻겨줄 수 있단다."

동이 트기도 전인데 주변이 눈부셨다. 점점 파우스트의 숨통이 조여졌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아. 돌아가지 않아. 절대로…! 날씨는 추운데 온몸에서 식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의 사랑을 받는 아이여. 내게로 돌아오도록 하렴."

그의 빛나는 눈동자는 파우스트의 영혼까지 꿰뚫을 듯 하였다. 파우스트는 자신도 모른 사이 눈 앞에 내밀어진 손위로 제 손을 포갤 뻔 했다. 저 멀리서 들린 날카롭고 탁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외로운 신과 그의 사랑을 받는 어떤 아이의 이야기.

천국으로 갈 수 없는 연옥에 대한 것이다. 

1.

교만

너는 결국 이 곳에 오게 될거야.

파우스트가 눈을 크게 한 번 깜빡거리자, 그 모습은 전부 사라지고 고요한 숲 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매일 그러하듯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환상이었을까. 그럴 지도 모른다.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이어나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여버렸을지도. 하지만 파우스트의 생각은 달랐다. 몸이 점점 고되고 힘들 수록 머릿속은 더욱이 선명했다. 돌아가? 하, 말도 안돼.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아. 답지 않게 한숨을 내리쉬다가 떨어트린 장작을 줍고자 바닥에 쭈그려앉았다. 발목 근처까지 오는 긴 상의가 눈에 젖을까 단단히 여민 뒤, 나뭇가지의 눈을 털 때 즈음이었다. 있을 리 없는 꽃들이 만개하였다. 여린 꽃잎은 매서운 바람에도 아름답게 흔들리며 저 땅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렸다. 마치….

'척박한 이 땅에  생명을 싹 틔우시고 마르지 않는 샘과 온기를 내려주시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권능하신 피가로님의 자비로 이루어져있다. 그 인자하심에 늘 감사를 잊지 않고 어떠한 시련이 닥친다하며도 전부 신의…'

'축복'과도 같았다.

파우스트는 얼굴을 구기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스승은 지옥과 천국에 대해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참혹한 바다의 품에서 벗어나 위험 산을 끝까지 오르면, 그곳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며.

무엇이 있냐 묻는 파우스트에게 스승은 무어라 대답했더라. 파우스트는 답을 알고 있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서만큼은.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와 문을 잠구었다. 다 삭아빠진 낡은 나무집의 뻑뻑한 자물쇠 따위가 누군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금쇠 하나로도 조금 안도했다. 파우스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하다가 주변을 살피고 옷을 한 겹씩 벗기 시작했다. 제일 위에 걸친 니트를 벗고, 원피스 같은 긴 상의를 벗자 맨 살과 하의만이 남았다. 손으로 등을 더듬자 매끈한 피부 위로 무언가 만져졌다. 흰 살결보다 조금 짙은 선홍빛 피부. 살이 찢어졌다가 붙은 불규칙한 모양의 흉터. 그 이외에는 닿는 것이 없었다. 튀어나온 무언가도 전혀 없었다. 파우스트는 그제서야 불안이 잠들었는지 상의를 잘 여미고 니트를 다시 입었다. 긴 한숨이 올라왔다. 마음이 조금 편해져서일까.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담요가 놓여진 바닥에 몸을 기대어 잠에 빠졌다. 길지 않은 꿈이 스며들었다.


파우스트.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이 파우스트를 깨웠다. 바로 보인 것은 푸른 빛이 도는 곱슬머리. 흐릿하게 스승을 바라보던 파우스트는 깜짝 놀라 상체를 세우고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리고 제대로 여미어 지지 않은 옷무새를 다듬었다. 태평하게 한낮에 잠든 것 뿐만 아니라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다니…. 대신관 피가로님의 제자이자, 주신 피가로님을 섬기는 사제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다. 벌겋게 물든 얼굴로 아무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 피가로는 웃음을 터트렸다.

파우스트, 낮잠이 꼭 태만한 것은 아니란다. 신은 낮을 가장 따뜻하게 만들었어. 그렇다는 것은 한 번씩 볕이 잘 드는 곳에 누워 휴식을 취하라는 뜻이 되기도 한단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직접 손으로 빗질해주던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바닥에 누웠다.

피가로님?

잠깐 내 휴식에 어울려주지 않을래?

토 달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문 파우스트는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눈을 꼭 감아 속눈썹이 내리앉은 얼굴을 빤히 감상하던 피가로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기도, 소리내어 해볼래?

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이번에도 파우스트는 거부하거나 당황하는 대신 묵묵하게 그의 뜻에 따랐다.

XXX년, X월 XX일. 하늘이 맑고 아름다운 날입니다. 피가로님의 자비처럼 온화한 대지는 오늘도 굶주린 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저희들을 이끌어주십니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주신 그 가르침을 항상 잊지 않고 평화롭고 찬란한 날들에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신전도 없는 곳이었으며 주신을 믿는 이, 하나 없었습니다. 태어나 아비에게 버림받고 그저 밭을 갈고 조부모님과 어머니를 모시며 살아갈 저의 운명은 피가로님을 만난 다음부터 바뀌었습니다. 신전에서 새어나오던 그 빛줄기, 누가 그것을 보고도 신을 믿지 아니하겠습니까? 그 빛에 이끌려 이곳에 당도하였습니다. 좋은 스승님을 만나뵈어 가르침을 받고 그 고결한 빛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아직도 저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보잘 것 없는 아둔한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지만, 허락하신다면 감히 피가로님의 뜻을 '사랑'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피가로님의 사랑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삶이 제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영광과 뜻을 받들어 오늘도 기도를 올립니다. 당신의 불꽃이.

그 기도가 잠잠해질 쯤, 피가로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아, 네가… -였다면 좋았을텐데….'

피가로의 첫 가르침은 기도였다. 틀에 박힌 기도문을 외워 읊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뱉는 거라고. 어린 파우스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파우스트는 들떠 밤새 외운 성서가 아닌, 자신의 순수한 감정부터 내뱉는 연습을 하였다. 그 빛을 본 순간, 쥐고 있던 소꿉친구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어요.

순수한 아이의 고백에 피가로는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해주었다. 네 안에는 불꽃이 있구나. 놀라지 말렴. 신과 같은 빛을 가졌다는 뜻이야. 이 세상에는 아둔한 자들이 너무나 많지….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알지도, 알고자 하지도 않은 채로 사라지지. 

그때 무슨 말을 했더라. 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 마음대로 찢었다가 다시 붙인 것처럼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절대로 그곳에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이를 꽉 문채로 잠금쇠를 풀었다. 그는 이곳에 오지 못한다. 그러니 걱정할 일도 없다. 어젯밤의 환영은 그저 몸이 피곤하여 헛것을 본 것이 틀림 없다.

오늘도 여기에는 눈이 올까. 문을 열었다. 날은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푸르기만한 하늘에는 태양이 높게 떠있었다. 문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향한 것을 보아하건데 상당히 늦은 시간임이 분명했다. 새벽부터 훤한 대낮까지 잠들었지만 피로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몸이 나른하고 무겁다. 파우스트는 빠른 걸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오늘 새벽녘에 땔감을 별로 구하지 못했으니, 어린아이들이 위험한 곳까지 땔감이나 먹을 거리를 구하러 갔을 수도 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성큼 걷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드물게도 노인과 아이, 이 마을의 모든 구성원이 모여서 화기애애한 모습을 풍기고 있었다.

늙은 노파는 파우스트에게 왔냐며 싱글벙글 웃으며 피곤할 텐데 좀 더 자지 그랬냐며 다정하게 맞이해주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마른 나무장작과 먹을 것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여기서는 보기 드문 잘 익은 과일과 푸릇한 채소들, 곡식은 깨끗하게 탈곡되어 몇 자루가 가득하게 들어있었다. 당장 요리만 하면 될 수준이었으며, 육류는 오래 보관하기 용이하도록 연기에 훈제되어 있거나, 바싹 말려져 있었다.

역시 젊은이가 있으니 다르다며 의심조차 않고 이미 요리를 시작한 노인들을 보며 파우스트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풀도 싹 틔우기 어려운 가혹한 얼음의 숲이다. 이런 곳에 저만큼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을 리가 없다. 만약 밖에서 구해온다고 해도 한나절만에 저렇게 손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곡식이나 식물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상함을 느끼는 것은 파우스트 뿐이었다.

뒤로 조금 물러나는데, 한 노인이 보글보글 끓은 스튜를 파우스트의 앞에 내밀었다. 잘 짜진 소젖과 야채, 그리고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노인의 눈은 이상할 정도로 광적이게 빛나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으니 이따가 먹겠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상했다. 갑자기 생겨난 먹을거리와 좋은 장작이라니. 연기가 제대로 먹혀든 것인지 마을사람들은 파우스트를 붙잡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파우스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생각했다. 예전에 수습사제였던 시절이었다.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오로지 신께서 내린 이슬만 먹고 가장 멀리에 있는 신전까지 걸어가야하는 고난의 행군길을 앞둔 상태였다. 손수 이런 혹독한 배움의 길을 내린 스승께서는 다정한 말투로 파우스트를 보며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세상에는 지상과 바다와 지하의 세계가 있고, 그곳을 통치하는 세명의 왕이 존재했어. 그 중 지하의 왕은 지상에 있던 한 여인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 그를 납치하여 지하로 데려왔지.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지하의 왕을 용납할 수 없었어. 그리고 자신의 딸을 직접 데려오겠다 나섰어. 아무런 상황을 모르는 그는 재차 음식을 권유하는 지하의 왕의 뜻을 따라 석류 서너알을 집어 입에 넣었지. 입안에서 흐르는 그 석류 알갱이는 시고 달콤하게 스며들었고, 지하의 음식을 먹은 자는 지상 위로 돌아갈 수 없어. 하지만 그는 삼킨 것은 고작 석류 서너알. 그는 지하와 지상을 오가게 되었지. 만약 내가 지하의 왕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았을 거야. 직접 석류를 찧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삼키도록 만들거야. 그걸 먹는 그 존재조차도 말이야.'

그때 피가로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셨더라?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뒤틀렸다. 올라오는 구토감을 억지로 참아내며 파우스트는 주저 앉았다. 신을 부정한다. 아니, 해야만 한다가 맞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공간도, 밟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파우스트 라비니아 본인조차도 피가로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니.

파우스트는 정말로 부정하고 싶었다.


안, 돼….

더듬거리며 짧게 끊기는 소리는 애원하듯 흐느끼고 있었다. 

안돼, 이런 건 있을 수 없어. 나는 순결을 맹세했다!

몸을 더듬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거부하려고 해도 그것은 잡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입술을 핥고 입안을 훑는 것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각. 파우스트는 두 눈을 꽉 감고 성서를 처음부터 한줄씩 읊기 시작했다. 흐느끼며 짧게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는 눈물이 배어있었으며, 음란했다. 허벅지를 핥는 듯한 감각이 서서히 올라오다가 잠시 멈췄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파우스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피로했다. 긴장감이 풀리니 한층 더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고문을 받는 것이 더 나았다. 온몸이 매질당한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그리고 아까전부터 계속 뜨겁고, 열이 올랐다. 파우스트는 천천히 속눈썹을 내리깔고 까만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아래를 부드럽게 파고드는 느낌에 꽉 감던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시련은 피가로님께서 주신 것, 하지만 극복할 힘도 함께 주어졌다. …그렇게 믿었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것은 파우스트를 헤집으며 괴롭혔다.

몇 번인지 모를 감각에 잃을 것 같은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신전은 뒤늦게 도망친 대신관 '파우스트 라비니아'의 노트를 발견했다. 아마 일기장으로 쓰인 듯한 그것의 존재는 극비로, 소수의 몇 명만이 이를 열람하였다. 그 내용을 읽은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용을 발설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열려던 추기경 중 한명은 직전에 독이 들어간 술을 마시고 성대를 잃었으며, 필서로 발설하려던 자는 채 한시간이 되지 않은 시경에 양손이 잘린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나머지 추기경들의 뜻에 따라 이를 금서로 지정, 아무도 읽지 못하도록 대신전의 아주 깊숙한 곳에 보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대는 '파우스트 라비니아'의 비밀을 읽을 자신이 있는가? 각오가 되었다면 아래를 열람해도 좋다. 

그날의 기적은 어떻게 된 일인지 나조차 알 수 없다. 모두들 신의 뜻이라 칭송하지만 아직까지도 그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피가로님의 공백을 메꿀 대신관이 되었지만, 이 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밑줄이 여러개 그어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어째서 피가로님은 모습을 감추셨을까? 나로서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다. 다만, 그 마지막 한마디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불에 지진 것처럼 아프다. 쓰라리고 따가워서 참기 어렵다. 밖에 나갈 수 없다. 대신관의 방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내보냈다. 때가 되면 음식을 이 앞까지 옮겨달라고 말한 뒤, 먹은 후 가져다 놓으면 되었다. 씻는 곳도 안에 있으니 문제는 없다. 사람들은 가벼운 변덕 즈음으로 여기며 별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방 안에 있는 것으로만 생활해야하지만 이곳은 피가로님이 사용하시던 방.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피가로님의 물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하얀색의 무늬가 없는 표지를 가진 노트를 꺼내고 깃털펜을 하나 가졌다. 만약 피가로님이 자신이 없는 사이 본인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한 것에 대해 벌을 내리시면 기꺼이 받아드릴 생각이다.

  

더 이상 나는 신관으로 살 수 없다. 사제로서의, 그리고 주신께 했던 맹세가 깨져버렸다. 타락한 신자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그 끝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형체가 없다. 보이지 않는 괴물과도 같다. 난폭하게 날 뛰며 나를 옥죄여온다. 그분은 나에게 실망하신 걸까. 아무리 기도를 읊어도 뜻이 다가오지 않는다. 실내는 어둡다. 이 갇힌 방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밑줄이 여러개 그어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이런 괴로움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오늘도 그것은 나타났다. 축축하고 끈적하며, 미끈하고 단단하다. 점점 익숙해지는 느낌에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불에 데일 듯한 뜨거움은 한결 나아졌다. (밑줄이 여러개 그러져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은 입을 맞추듯 부드럽게 피부 위를 맴돌다가 살을 뜯을 것 같이 변했다. 아무런 갈피를 찾을 수 없다. 이 안에서의 시간은 밖과 동일하지 않은 듯 하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을 때도 있으며,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하루가 지나간 적도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 하다. 하지만 빠르게 지나갈 때보다는 느리게 흐를 때가 더욱 많았다.

누군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미쳤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이번에는 몸을 감싸안은 그것이 품에 매달리는 게 마치 아이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형태로 하면 아직 작은 어린아이일 것 같다고. 그러자 측은해졌다. 혹시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난폭해졌을까.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듯이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랬더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계속 지켜보았지만 아직까지는 별 이상 반응이 없다.

 

그것은 이제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겨우 안심하려던 찰나, 등에 무언가 도드라졌다. 처음에는 작은 돌기같이 여겨졌다. 등의 도드라진 뼈, 그 바로 안쪽 부분에서 만져졌다. 금방 나을 거라는 희망과 달리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피부를 뚫고 단단한 뼈가 튀어나오며 찢어진 살결에 새살이 돋아났다. 그렇게 한바탕 통증과 싸우고 나면 또 다시 안에서부터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뿔처럼 튀어나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태를 갖추었다. 뼈와 뼈를 이어주는 인대, 그리고 근육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작게 쪼개어진 뼈들과 그 옆의 얄쌍한 뼈 두개, 그리고 두꺼운 뼈가 등을 이었다.

놀랄 틈도 없이 흰색의 깃털이 자라났다. 순식간에 자라난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날개 같았다.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 일부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다. 계속해서 의식하며 몸을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인간이 물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고작 72시간. 단, 3일 뿐이다. 날개가 돋아난 뒤, 며칠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갈 수 없는 문 앞에 기대어 누군가를 오기만 바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기다림 끝에 들린 발소리를 향해 물었다. 내가 식사를 거른지 며칠이나 지났지? 아마도 견습사제일 상대방이 대답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절망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동안 물도 음식도 먹지 않았는지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만 날개를 펄럭거리며 주저앉았다. 나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글씨가 쓰인  부분이 불에 그을려져 보이지 않는다.)

(빈 페이지만 존재한다.)

(빈 페이지만 존재한다.)

그 노트의 마지막 장에는 뭔지 모를 갈색으로 눌러붙은 글씨가 써져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의 교만인가?


부도덕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사랑을 깨우친 자는 천국으로 갈 지어다.

하지만 도덕과 부도덕에는 균열이 있다. 그곳이 연옥. 지옥에 갈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천국에 가지 못할 이들이 시련을 넘는 공간. 

그곳은 죄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산맥과도 같다. 한층마다 전부 다른 죄악에 쉽게 끝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연옥에 도착한 자들은 각자의 죄를 짊어진 채로 위를 향해 올라간다.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아래로 끌려가지 않게 간신히 힘을 주어 버티는 사람도 있고, 힘겹게 위로 조금씩 향하는 자도 있다.

'연옥의 끝에는 무엇이 있기에 천국에 다다를 수 있습니까?'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파우스트, 너는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테니까.'

'어디로 가야할 지 고민하지 말렴. 내가 너의 길찾이가 되어줄터이니.'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의 교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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