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2

녹음

울음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태연했다. 사람이 영원히 살리라, 그리고 불현듯 나비처럼 떠나가지 않으리라.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은 막상 상황이 들이닥쳤을때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상상속의 나는 엉엉 울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사랑을 울부짖기도 하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리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단 사실이었다. 무너져 일상생활조차 못하리라 생각했던 뇌 안의 나는 없었다. 나는 태연하고도 초연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현실성이 없었다. 둥둥 떠다니는 바닷가의 해파리마냥 나는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네 죽음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들어 내 애정에 서글퍼졌다. 열렬히 사랑하던 마음은 어디가고 나만 홀로 남아있는가.

간밤에 나는 네 사진첩과 네 옷가지, 책들을 분류했다. 이건 버릴 것. 이건 남겨둘 것. 나름 필요에 따라 분류한다고 했는데. 내게 남은 것은 네 사진첩과 네가 보지 말라 했던 노트, 가계부. 일기.. 그런 물질적으로, 네 흔적이라 칭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네 옷을 버리며 내 옷 몇개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반쪽을 잃어버린, 하나의 세트였던 옷은 이제 더이상 필요 없지 않은가. 입을 이가 없는, 내게는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옷. 그래, 버리며 아주 조금은 누가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죽은 사람의 옷은 다른이에게 주지 말라 했던 말이 떠올라 그러지는 못했다.

단 한가지 옷만을 남겨두었다. 내가 자주 즐겨 입던 너의 베이지색 코트였다. 이건 나도 입으니까, 이것만은 남겨놔야겠다. 입을 수 있을는지는 사실모르겠다. 네가 입어서 입은 옷이었으나 네가 없으니 뺏어있는 맛도 더 이상 나지 않을 듯싶었다.

첫사랑이고 6년이고 다 부질없는 시간이었을까. 나는 현관 앞에 짐을 내려놓았었다.

나는 약속장소에 도착해 무심코 커피 두잔을 시켰다. 카드를 받아들고 영수증에 적힌 금액을 보고나서야 깨달았다. 상대가 아직 무엇을 먹는지 모른다. 어제 잠을 못 잔 탓일까 무심코 네 몫까지 커피를 시켰나보다. 내가 즐기던 카페라떼와 커피를 잠 깨는 용도로 먹던 너의 아메리카노. 주문을 취소하려다가 멈추어섰다. 뭘 또 귀찮게 취소까지 해야하나. 네가 없으니 내가 먹지. 오늘 밤도 잠자기는 그른 듯싶었으나 이내 상관없다 판단하곤 자리에 앉았다.

나는 네 상사에게 받아든 녹음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이게.. 내 중얼거림에 네 상사는 그것이 너의 유품이라고 말했다. 네 손에 쥐어져 있던 마지막 물건. 손상되지 않게끔 손에 꽉 쥐고 있었다던 그 물건.

나는 네 소식을 일주일 전에나 들었다. 네 유골을 나는 어제야 받아들였고, 뭘 생각할 틈도 없이 너를 보내야한다 들었다. 타인에 의해 선고받은 너의 죽음과 네 장례식. 그것은 그리 현실감이 없었다. 슬픔 이전에 쉬고싶었다. 그저 쉬고만 싶었다. 내가 많이 무딘가보다. 아니면 너를 좋아하지 않았나보다. 어쩌면 참 쓰레기로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손에 든 녹음기에 자잘한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까끌까끌한 느낌이 영 좋지는 않았다.

보안 확인 차 먼저 듣게 된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군에 의해 보관될 물건은 아니라고 판단해 가져왔습니다.

네 상사는 딱딱히 그렇게 말했다. 아, 그래요. 무미건조한 답을 던지고 녹음기를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지긋 감았다 떴다. 눈이 피곤에 절어있음을 느꼈다. 꼭 너 같은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냐 너는. 내 태도가 너의 죽음을 슬퍼하는 줄 알았는지 네 상사는 잠시 자리를 비키겠다며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일어났다. 군에는 꼭 너같은 사람만 있나봐. 마른 세수를 하며 목을 문질렀다. 밤을 샌 탓인지 곧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데, 카페인은 어찌나 잘 들던지. 다시 녹음기를 내려보고 너를 생각했다. 안 들으면 섭섭해할거야?

녹음기에는 하나의 파일만이 있었다. 모래바람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네 가쁜 숨소리와 왜인지 달관한 편안할 지경인 목소리가 들렸다. 응, 듣고있어.

...처음 만난 날. 첫 인상은..그리 안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도, 나도. 서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날을 세워 반응했던 기억이 있어.

잠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이제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얼굴이 취향이었어.

네 짧은 웃음소리에 나는 픽 웃었다. 이게 진짜. 그래도 불평은 다 듣고 해볼게.

네 성격이 밝고, 쾌활해서. 빛나는 사람이라. 내 시선을 이끌었나보다. 나랑은 반대되는 사람이라. ...그래서 더 끌렸나봐. 너도 알고는 있겠지...

너는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 네 웃음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워. 넌 중얼거렸다.

내가 네게 담아놓지 못한 내 마음을 풀어놓은 그 날. 나는 네게 고백한 그 날, 취한 걸 후회한다고 얘기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나는 전혀 아쉽지 않고, 후회하지도 않아.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널 바라만 보고 있었겠지. ..이 녹음이 도착할 곳의 상대가 없었을 수도, 네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으려나 싶군. 네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가 그날 술을 마셔서 다행이야. 눈이 피로해서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험한 파견지역의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이게 끝인가 싶어 고개를 내려 눈꺼풀을 겨우 올리자 다시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밥은 잘 해먹고 있나? 몸 좀 챙겨라. 방에서 담배 피우지 말고.. 술도 많이 마시지 말고. 네 말 사이사이를 거친 숨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잔소리 할 때야 지금이? 녹음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녹음기는 침묵하며 거친 바람만을 내보내고 있었으나, 네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그렇군, 하며 딱딱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녹음기로 손을 뻗었다. 피곤함에 더 듣고싶지는 않았다. 그만 말하자. 내 속삭임이 무색하게도 녹음기는 지친 네 목소리를 내보냈다.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만 말하자, 그만 듣고 쉬고싶어. 그럼에도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나는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너랑 좀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었다.

내 손은 녹음기에 닿지 못했다.

조금 더.. 평범한 생활을. 하고싶었다. 너와 함께 살며...

그만, 그만 하자. 속으로 네 이름을 되뇌었다. 그만 말해도 돼. 외침이 야속하게 녹음기는 멈추어주지 않았다. 이걸 들으면.

매일을 너로 채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어. ..마트에서 카트를 미는 너를 조금 더 오래 보고싶었다.

제발, 나 피곤해. 그만... 중얼거리며, 너를 불렀다. 금방이라도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아침에 일어나.. 네 얼굴을 보고.

네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고만 있었다. 더 말하지 마. 제발.

네 고운 머리카락을, 손에. 만지고..

이걸 내가 어떻게 들어.

..너와 좀 더 오래, 행복하고 싶었다.

이걸 들으면 나 혼자 어떻게 버티라고. 입을 틀어막은 손이 축축히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묶어둬 잠식시킨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자각하지 못한 슬픔과 기피하려한 현실은 그제야 고개를 처들어 나를 바라보다 한숨에 삼켜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인간이라서.

호흡이 가팔라짐을 느꼈다. 울음이 목구멍에 턱 걸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너와 생을 보내지 못한 건 후회하지만.

알고 있다. 그럼에도 너는 다시 이곳에 설 것을 알아서.

그래도, 나는 이곳에 오겠지...

평소와 같았으면 넌 연인에게 불성실한 이기적인 녀석이라며 투정이라도 부렸겠거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널 사랑했을까. 왜 사랑해서 욕도 못하게 만들어.

사랑한다. 그러고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호흡소리마저 멎어가는 것이 담겨있었다. 나는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널 괜히 사랑했나보다. 널 괜히 마음에 담아 이지경까지 왔나보다. 그리 나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그때로 돌아가면 널 사랑할 내가 원망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퉁퉁부은 눈으로 네 짐을 마저 정리했다. 옷가지는 태우고, 책은 제 자리에 두고. 녹음기는 서랍 한구석에 두었다. 이걸 태연히 꺼내는 날이 올까. 내가 너를 보내고 온전히 멀쩡한 날이 올까. 문득 너와 사랑에 빠진 날이 떠올라 실없이 웃었다.

네 코트를 방 한쪽에 걸었다. 내가 입지는 못했다.

태연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네게 행복하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모습밖에 없었다. 네가 사랑한 나의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네게 조금 더 떳떳하게. 멋있게. 빛이 나도록. 좋아하는 이에게 멋을 부리는 아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랬다. 가끔 네 생각이 나면 나는 녹음기를 매만지고는 할거고, 차마 틀지는 못한 채로 네게 사랑을 속삭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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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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