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1

태엽을 감는 아이

푸른 머리가 늘어져 인형의 목을 덮고 있었다. 태엽이 돌아가기를 가만히 기다리며 아이는 다리를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있었다. 태엽이 완전히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손을 움직여보고, 무릎을 굽혔다 피는 등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행동이 신기한지 아이는 인형의 얼굴을 보려 몸을 붙였다. 그 순간이었다. 아이는 인형의 붉은 눈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인형은 아이를 눈에 담은 채로 활짝 웃었다.

“안녕?”

인형의 환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웃음에 아이는 차마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인형은 아이를 기다려주듯 가만히 웃었다. 다락방 창문으로 볕이 뉘었다. 빛에 반짝이는 단발의 푸른색 머리카락과 은은한 웃음에 아이는 넋이 나간 듯 인형을 멍하니 응시했다.

“만나서 반가워.”

아이가 정신을 차린 건 인형이 한 번 더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았고, 인형은 의자에서 내려와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보다 조금 큰 키의 인형은, 허리를 굽혀 아이에게 눈을 맞추었다.

“나의 번호는 C야. 너는?”

아이는 입술을 달싹였다. 작은 소리로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흘렸다. 온과 C의 첫 만남이었다.

가동을 시작한 C는 온을 위해 설계된 양 온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너는 좋아하는 게 뭐야?’, ‘집 안내해주면 안 돼?’ 등의 질문은 많았으나 온은 대답이 버거운지 침묵을 유지한 채 바닥을 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온의 모든 신경은 C에게로 쏠려있었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니 편하게 대해도 좋다는 C의 말에도 온은 머뭇거리며 C의 행동을 신경 쓰고 있었다. C의 태엽을 감는 것을 뻔히 보았음에도 온은 C가 인형임이 실감 나지 않았다. C의 푸른 단발머리는 사람의 머리카락과 같이 찰랑거렸다. C의 다정한 웃음은 온보다도 부드러웠다.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네가 편할 때 얘기해 줘.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온의 마음을 알아챈 듯 배려하는 어투에 C는 얼굴을 들었다. 여전히 빛나는 웃음이 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은 귀 끝을 붉힌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하루가 가고, 온은 침대에 머리를 뉘었다. 달빛이 창틈으로 들어와 캄캄한 방을 밝혀줘 두렵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쉬이 잠들 수 없어 온은 몸을 뒤척였다. 평소라면 이렇게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눈을 감았겠으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온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자신의 머리맡 옆에 앉아있는 C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는 잠을 자지 않아?”

“나는 잠을 잘 필요가 없어.”

온은 처음 하는 질문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C는 개의치 않는 듯 잔잔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혼자 깨어있어야 하는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은 어쩐지 입안이 텁텁해짐을 느꼈다. 형용할 수 있는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한 듯 온은 입을 우물거리다 C에게 물어왔다.

“그래도, 그러고 있는 건 쓸쓸하지 않아?”

“너는 쓸쓸하구나, 혼자 깨어있는 것이.”

온은 입을 앙다물었다. 쓸쓸하지 않다 말해야 할아버지가 걱정하지 않을 텐데. 온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C는 몸을 옆으로 눕혀 온을 바라보았다. 온은 C의 알 수 없는 행동에 혀로 입술을 적셨다.

“쓸쓸하면, 내가 네 옆에 누울게. 네가 잠을 청할 동안 눈을 감고 함께 해줄게.”

인형은 거짓을 고하지 않도록 설계되어있어 신뢰를 주는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할 터였다. 그러나 온은 그것이 청의 진심처럼 느껴졌다.

“...너는 이름이 뭐야?”

“나는 이름이 없어. 그러니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돼.”

번호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알 수 있었다. C는 온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온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온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나 방에는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온에게는 모든 것이 여전히 낯설었다.

“밤이 무서워?”

C가 물어왔다. 온은 알 수 없었다. 온은 이것이 무서움과는 결이 다른 감각과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온의 머리로는 알 수 없었다. 온에게는 너무나 깊고, 또 얕으며,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온에게 두려운 밤을 함께 해 줄 존재는 없었다. 온이 어둠이 몸을 누르는 마냥 몸을 웅크리자 C는 온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가까이 다가온 C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빛났고, 머리카락은 은은히 반짝거렸다.

“어서 자야지, 그래야 내일 일찍 일어나지.”

온은 망설인 끝에 눈을 꾹 감았다. 온의 손을 잡는 C의 온기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온은 C의 온기가 차갑지 않았다.

해가 밝고 C가 한 일은 온을 좇는 것이었다. 온은 C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달콤한 아카시아 향이 은은히 번져왔다. C는 쪼그려 앉아 꽃을 살피는 온을 보고는, 그 옆에 함께 앉았다. 온은 말없이 C의 행동에 입술을 모았다가, 이윽고 C를 바라보았다.

“...왜 따라다녀?”

C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렇게 설정되어 있어. C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온은 고개를 다시 꽃으로 떨구었다.

“있지, 너는 뭘 좋아해? ...좋아하는 거 있어?”

C는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C에게 좋아하는 것은 설정되지 않은 정보였다. C는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C는 온이 좋아하는 걸 좋아할 거라 말했고, 온은 고민하다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걸 알려줄게.”

온은 C에게 손을 내밀었다. C는 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온이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온은 쿠키를 만들어 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분명 맛있을 거라며 말하는 온을 따라가며 C는 그저 웃었다. 어차피 C는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말하지 않고 C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C의 생각 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는지, 위험하지 않냐는 물음에 오븐을 다루는 것은 익숙하다 답하고는 웃었다. C에게 요리는 꽤 생소한 일이었다. C는 턱을 받친 채 온의 생소한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제 기다리면 돼.”

온은 오븐에 트레이를 넣고 C를 향해 몸을 돌렸다. C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옆에 놓인 의자를 두드렸다. 할 일이 없어진 지금은 온에게 다시금 익숙하지 못한 침묵을 가져다주었다. 온은 어색하게 C의 곁에 앉았다. C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온은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잠시 흘겨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다시 정면을 응시하기를 잠시. 온은 꺼낼 말을 찾으며, 눈을 도르륵 돌렸다.

“어젯밤은 무서웠니?”

온이 망설이던 차였다. C의 말이었다. 온은 고개를 들어 C를 응시했다. 온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으로 잠드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은 흐릿하게 웃었다.

“아니, 무섭지 않았어.”

다행이다, 말하는 C의 답이 들려왔다. 그 짧은 한마디가 온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왔다. 대화는 다시 오 가지 않았으나, 온은 무거웠던 마음 한편을 편안히 내려놓았다. 어색했던 침묵은 곧 부드럽게 온을 감싸왔다.

타이머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온은 곧 의자에서 내려와 오븐 앞으로 향했고, C는 그런 온을 뒤따라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븐을 열자 달콤한 과자의 향이 뿌연 김과 함께 두 사람의 주위를 채웠다. 온은 부엌 장갑을 끼고 완성된 쿠키가 담긴 트레이를 꺼내 내려놓았다.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음식을 만드는 것은 온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온은 들뜬 마음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급하게 접시를 찾았고, C는 트레이에 손을 올렸다.

“뭐 하는 거야!”

온은 화들짝 놀라며 트레이에 닿은 C의 손을 잡아챘다. 검게 그을어진 손을 보며 온은 울상을 지었다. 아프지 않냐 묻는 온에 C는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인형이니까.”

그러나 온은 울상을 지은 채 C의 손을 매만졌다. 하지만 다쳤잖아. 자신이 마치 사람이라도 되는 양 그리 이야기하는 온을 멀뚱히 보던 C가 말했다.

“너는 상냥하구나.”

온은 놀란 눈을 하며 두어 번 눈을 끔뻑였다. 횡설수설 말을 더듬는 온을 보고 C는 웃었다.

“그을음은 닦아내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약하게 만들어진 몸은 아니니까.”

C는 힘을 주어 그을음을 닦아내었고, 크게 손상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검은 그을음은 금세 닦여나갔다. 온은 심하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눈썹을 내려 안도의 웃음을 지었고, C는 웃음을 지었다. 너는 역시 상냥하구나. C의 말에 온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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