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러시아 멘베 조각글 (2)

“연말 무도회는 잘 다녀왔어요?”

루이 엑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끈을 꼼꼼히 맨다. 매년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공작부인의 주관으로 열리는 연말 무도회는 귀족이 되고자 꿈꾸는 모든 평민들의 꿈이었다. 루이 엑토르에게는 그저 평범한 연례행사였을 뿐이었지만.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작은 한숨을 쉰다. 하루 정도 영혼이 바뀌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쁘지 않았어. 불꽃놀이 빼고 크게 볼 건 없었지만.”

“불꽃놀이 빼고 크게 볼 게 없었다라. 굉장히 기만적이네요.”

“아, 내가 원래 불꽃놀이를 좋아해서 그래.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길지는 않았지만-폭죽으로 장난치다가 선생님한테 호되게 혼나고 대나무 지팡이로 신명나게 얻어맞았지.”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언젠가 책에서 읽어 봤던, 부활절 날 타오르는 피렌체의 회전불꽃 이야기를 떠올린다. 관료가 되기에 급급해서 그랜드 투어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 조금 아쉬워졌다. 외국 도시들에 대한 로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곳과는 다른 환경을 한 번 체험해 보고 오는 것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무슨 생각 해?”

루이 엑토르의 말에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젓는다.

“아뇨, 별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잠깐 어떤 말로 둘러대야 할지 몰라서-그랜드 투어를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하면 루이 엑토르는 분명 ‘그럼 그냥 직장일랑 때려치고 여행을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라고 할 테니까-말을 고르던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괜찮은 화제를 찾아낸다.

“…당신 생각. 혹시, 요즘 아버지랑 무슨 일 있어요? 당신을 둘러싼 소문이 무성하던데요. 연말 무도회에서 둘이 서로 인사도 안 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아니? 별 일 없어. 무슨 소문을 들었길래?”

“둘이 싸웠다고요. 루이 베를리오즈랑 당신이랑.”

“아아, 정말 별 건 아니야. 아버지께서 주선해주신 혼사를 내가 시원하게 까버렸거든.”

루이 엑토르는 정말로 별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들지조차 않고 신발끈을 팽팽하게 당겼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조심스럽게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을 법한 떠보기용 질문을 던진다.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아니, 그건 아니고 상대 여자를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어서.”

“그게 뭐 어때서요?”

“흥정하고 사고팔리는 기분이잖아. 그래서 난 지참금 이런 것도 안 좋아한다고.”

흥, 못말리는 로맨티스트지. 흥정하고 사고팔리는 기분이라.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전부 매겨진 가치에 따라 사고팔리는 존재 아니던가.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아아, 그래요. 상대 여자가 지참금으로 얼마를 제시했길래? 어지간히 자존심 상하는 액수였나 봐요.”

“액수 때문에 자존심 상한 건 아니야. 60만 루블이랬으니까.”

“60만 루블?”

“그래, 60만 루블.”

60만…이 얼마더라. 그러니까. 펠릭스 아브리모비치의 월급이…120루블이었던가. 50개월 일하면 6000루블이니까… 500개월…5000개월… 일해서 받는 월급으로만 따지자면 40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뭐, 애초 월급으로 먹고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작 만나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건 비상식적이라 생각한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분이 평민이었어요?”

“아니, 귀족.”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린다. 차라리 평민이라서 거절한 거면 납득이라도 했다! 보기보다 까다롭고 눈 높은 사람이다, 루이 엑토르는! 그의 이 낭만주의적인 기질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면 그가 평민이라도 마음에 들었더라면 수락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60만 루블에 귀족이라니, 자신에게라면 평생 집안일을 도맡아서라도 잘 모셨을 조건의 여자였을 텐데.

“그런 여자를 거절했어요?”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뭐가 부족해서 돈에 팔려가야 하나?”

모든 게 부족하다 생각하는데. 신분 빼고.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교양부족, 키 부족, 재능 부족, 외모 부족인 자신의 친구를 바라본다.

“내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너희 누나만 해도 연금이 10만 루블이라던데? 너야말로 돈에 팔려갈 급은 아니잖아.”

에휴, 그런 소문은 안 나는 법이 없군.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한숨을 쉬며 잠깐 모자를 들어올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다. ‘팔려갈 급은 아니잖아’ 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답한다.

“외조부께서 꽤나 부자셨거든요. 아직 어머니께서 독일에서 사실 적에 러시아 귀족에게서 청혼이 들어온 적도 있다 하셨었죠. 결국 가난한 은행가와 결혼하는 쪽을 택하셨지만요.”

그때 그냥 그 러시아 귀족이랑 결혼하시지. 물론 그랬으면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겠지만. 펠릭스는 두꺼운 털 장갑을 만지작거린다.

“가난이라기엔 너희 아버지께서 돈을 잘 굴리신 것 같던데?”

“원래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시지만 러시아로 오시자마자 깨달으셨죠. 당신의 힘으로 우리 가족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부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 아랫세대가 스스로를 지키는 법은 오직 결혼이나 관료제를 통한 신분상승이라는 것도요.”

루이 엑토르가 얼음 위로 크게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았다. 끄트머리가 살짝 말려올라간 은빛 날이 빛을 받아 쨍, 하고 눈부시게 빛났다. 아름다운 모습이라기에는 너무 팔다리가 짧았지만 사지를 잘 다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루이 엑토르는 느긋하게 뒤로 스케이트를 타며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신분상승을 해 봐야 프랑스 혁명처럼, 세상이 뒤집어엎어지면 무슨 소용이야?”

“당신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는 제 보편적인 관점을 통해 설명을 해 봐야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입아프게 설명하지 않겠어요.”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빙판에 발을 디뎠다가 다시 설원으로 발을 옮겨버린다. 역시나 얼음이 깨질 것 같아 두려웠다. 루이 엑토르는 무릎을 굽혔다가 가볍게 뛰어올랐다가 다시 빙판에 착지했다. 양 팔을 벌린 모양새가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얼음은 보기보다 단단했는지 루이 엑토르의 체중을 잘 지탱해 주고 있었다.

“진정한 재산은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정신 아닌가-이 말이야. 물론 너희 아버님께선 그 정신도 훌륭하게 물려주신 것 같지만 말이지.”

“그렇다고 해도 제게 몇십만 루블을 아무 조건도 없이 주실 분은 아니시죠.”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아주 조심스럽게 빙판에 발을 올렸다가, 생각보다도 미끄러운 빙판에 바로 앞으로 넘어진다. 다행히 손바닥이 땅에 먼저 닿는다.

“아하하, 천하의 펠릭스 아브라모비치 멘델스존도 못 하는 게 있었구만!”

“조용히 하세요. 남들한테 소문내기만 해 봐요.”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기어일어나 두 팔을 몸 옆에 붙이고 선다. 바로 무게중심이 잡히지 않아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잡는 모습을 루이 엑토르는 금방이라도 웃다가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무튼, 내 요점은.”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스케이트를 신었지만 여전히 스케이트를 타며 빙판을 미끄러져간다는 느낌보다는 걷는 듯한 걸음걸이로 얼음을 찍어누르며 가장 가까운 나무에 손을 짚는다.

“지금이라도 가서 싹싹 빌라는 거예요. 60만 루블을 받는 귀족 여자 구하기가 쉬운 줄 알아요? 딱히 비호감인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바보같은 선택을 해요.”

“미녀가 아니라서 그래.”

“어이가 없네.”

“난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끌린다고.”

루이 엑토르는 드라마틱하게 가슴 위에 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며 한 발을 축으로 해 빙빙 돈다. 아주 발레를 한다, 발레를.

“그럼 사이드에 아름다운 정부를 들이면 되는 거잖아요.”

“아름다운 사람을 어디 감히 정부 따위로 들여놓는단 말인가! 아름다운 이는 아름다움에 걸맞는 찬사를 받아야지, 비밀스러운 골방에 두고 죄악에 적셔야 하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말해 보게나, 펠릭스 아브라모비치! 너라면 아름다운 이를 정부라는 추잡스러운 이름 아래 둘 것인지!”

갑자기 연극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예스러운 말투였다. 펠릭스 아브리모비치는 눈을 굴리며 절로 미끄러져가는 바람에 점점 벌어지는 다리를 다시 좁혀놓으려 애쓴다.

“아무래도 그러지는 않겠죠. 전 정부를 두는 타입은 아니라서… 의미없고 지루한 결혼을 해서 시들시들해 간다면 차라리 또 모를까요.”

“아아, 하기사 우리 펠렌카는 그런 고지식한 인간상이었지. 참말로 일등 남편감이야.”

“그런 애칭 안 쓰거든요.”

“하하, 그럼 뭐 이제부터 내가 써야겠네.”

루이 엑토르는 얼음을 날로 긁으며 곡선을 그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펠릭스 아브라모비치의 앞에 서서 손을 내민다. 그의 손가락에 있는 인장 반지를 보자 괜스레 고마운 마음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누가…루이 엑토르처럼 해주겠는가. 동정이 아니라 순수한 친애.

“요즘에는 말야, 스케이트를 잘 타는 것도 여자들한테 어필할 좋은 기회라고. 우리 삼촌도 연대에 있을 적 스케이트로 이름 날려서 여자들 뻑 가게 만들었다 그랬어.”

“어휴, 입만 열면 천박한 소리. 차라리 닥쳐요, 루이 엑토르.”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 엑토르는 펠릭스 아브라모비치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를 빙판 위로 이끈다.

“닥치면 스케이트를 어떻게 타는지 설명을 못해 주잖아. 달린다는 느낌으로 그냥 한 발을 내딛고, 미끄러지게 두고, 또 한 발을 내밀어서… 그렇지.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말고 저기 멀리를 봐.”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히며 루이 엑토르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려 한다. 지시를 머리로 하나하나 생각하자 발이 꼬였다. 펠릭스 아브라모비치가 휘청이자 루이 엑토르도 순간 균형을 잃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순발력을 발휘해 다시 펠릭스 아브라모비치에게도 흐름을 되찾아준다.

“저어기 맛있는 블린 집이 생겼던데,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타고 나면 거기서 내가 한턱 쏠게. 어때?”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루이 엑토르가 주의를 분산시키려 말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소짓는다. 가끔씩 놀랄 정도로 통찰력 있는 사람이란 말이지.

“좋죠. 블린은 언제나 맛있으니까요.”

“그래그래,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켜줘야지. 돈 있는 자들의 책무 아니겠어?”

“뭐라니… 하여간 혓바닥은 참 기름져요.”

“기름진 혓바닥이긴 해도 혹시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죽창이 꽂힐 정도로 기름지지는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섬칫한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웃지 않기에는 너무 웃긴 말이라서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웃음을 크게 터뜨린다. 순간 또 균형을 잃자 루이 엑토르가 하이 참, 잘 좀 해 봐-라며 펠릭스 아브라모비치의 허리를 잡아준다. 그럼 웃기지를 말든가! 하고 대꾸하며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아까보다는 빙판이 조금 덜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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