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막한거
비눗방울
평화로운 아침, 별 다를 것도 없는 하루의 시작, 평화로운 담배타임… 테라스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흡연하는 꼴을 보자니 빌은 왠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저야 나이를 먹을대로 먹었다지만, 사비나와 코니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지 않나. 이런 세상에서는 폐에 문제가 생겨도 쉽게 도움받지 못한다. 셋 중 가장 연장자인 빌은 무언가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이 이리되어도 젊은이들은 희망을 가져야지. 빌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코니와 사비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주본다. ‘저 늙은이(빌)가 또 뭔 등신같은(이상한) 생각을 하고있군…’
그날 오후. 사비나는 패물 반 물자 반을 털다가 해가 지는 것을 본다. 슬슬 돌아가야지. -코니 말에 의하면- 사비나는 다른건 몰라도 발 하나는 빠르니 적어도 20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이빌 최악의 좀도둑답게 지름길과 담을 이용해 빠르게 돌아가는데, 이런 세상에서 더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것이 사비나의 눈 앞에 어른거리다가 퐁 터진다.
다른 생존자라도 있는걸까? 하지만 이 방향은… 사비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본다. 혹시 몰라 몸을 숨기고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익숙하기 짝이없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온다.
“안해!!!!!!!!!!!!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진짜 노망이라도 났냐??!!!! 꺼져!!!!!!!”
코니의 역정에도 굴하지 않는 아름다운 남자, 빌은 언제나와 같이 웃으며 손에 든 비눗방울을 후 불어본다. 꽤 많은 비눗방울들이 하늘을 유영한다. 그 중 몇개는 사비나의 귀환을 알려주듯 사비나의 콧잔등에 부딪혀 사라졌다.
“오, 사비나 왔나?”
빌이 다가와 사비나의 배낭을 번쩍 들어준다.
“네에. 그런데 뭐 하고 있는거예요?”
“음? 하하. 별 거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매일같이 담배를 피우지 않나. 거진 중독수준으로 말이야. 그래서 가끔은 환기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이걸 챙겨와봤네.”
빌이 꽤 큰 비눗방울 통을 사비나에게 건네준다. 진정 하고싶었던 어릴적에 손도 대지 못해본 비눗방울이 너무나도 쉽게 제 손에 들어온다. 세상이 이리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사비나가 입을 우물거리다가 비눗물이 잔뜩 묻은 도구를 꺼내어 불어본다. 한 순간에 생겨난 수십의 비눗방울들이 하늘을 가리며 멀리 퍼져나간다. 딱히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천진하게 웃음이 났다.
“어떤가, 괜찮지?”
“뭐… 나쁘지는 않네요. 담배만은 못하지만.”
“자, 코니. 이제 자네 차례일세!”
“안한다고 했다…”
빌은 그러지 말라며 코니의 손에 비눗방울 통을 쥐어준다. 목에 핏대가 선 코니가 안한다며 기어코 통을 내동댕이쳤고, 깨진 틈 사이로 비눗물이 흘러나온다. 빌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간다. 흠… 짧은 침음이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야, 그냥 장단좀 맞춰주지. 그게 그렇게 싫냐?”
“어. 존나 싫어. 내가 왜 곧 뒤질 노인네 비위를 맞춰줘야되는데?”
“말뽄새 참 아름답다.”
사비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데, 현관문이 다시금 벌컥 열린다. 빌의 손에는 깨져서 쓸쓸히 버려진 통과 똑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코니 자네가 그럴 줄 알고 몇 개 더 챙겨왔지!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말하게!”
빌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사비나에게 통 하나를 넘긴다. 코니는 제 두피를 벅벅 긁다가 “아오!!!!!!!!!!!” 소리치며 도끼를 들고 뛰쳐나갔다.
코니가 사라진 집 앞은 매우 조용했고, 누가 불었는지도 모를 정도의 비눗방울이 마을을 떠다닐 뿐이었다.
2.칠면조가 먹고싶었던 사비나
사비나는 소파에서 뒹굴거리다가 제 발치에 놓인 달력과 눈이 마주친다. … … 그리고 벌떡 일어나 빌의 방 문을 똑똑 두드린다.
“무슨 일인가?”
“저희 추수감사절 챙겨요?”
“음? 벌써 시간이 그리됐나? 허허…”
여느때와 같이 다정함이 담긴 빌의 눈은 조금 서글퍼보였었나. 아마 가족을 생각했겠지. 사비나는 잠시 눈을 피한다.
“그래, 이런 때일수록 더 즐겁게 지내야지. 비축해둔 고기가 많으니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을거야.”
빌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다. 사비나 또한 그랬다.
“추수감사절??? 추우수감사저어어어얼??????”
“또 어디서 버튼이 눌린거야? 니 대가리 속에 지뢰가 없는 곳이 있긴 하냐??”
사비나가 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옆을 빙빙 돌린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일이 필요하지 않았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진짜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를 먹어요?” 라고 물었을 뿐이고, 빌이 웃으며 “그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못 올리겠지만 말이야.” 라며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 대화 속에서 대체 어느 부분이 코니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코니를 보며 위험신호임을 확인한 빌이 잽싸게 접시들을 정리했다.
“니네 언제부터 예수쟁이가 됐냐? 세상이 이 지경 이 꼬라지가 될때까지 손 하나 까딱 안한게 예수인지 신인지 하는건데. 왜? 아주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 이럴게 아니라 식전 기도도 할깝쇼? 아아멘이다. 이제 먹어도 되지?”
아하. 빌은 코니가 화난 이유를 단박에 눈치챘다. 아무래도 코니에게는 싫은 기억이었겠지. 멋쩍게 뒷목을 매만지며 사과를 하려는데, 사비나가 헹 하며 비웃는게 아닌가.
“도련님,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셔야죠. 누구는 한번도 못 챙겨본거 이 꼬라지인 세상에서라도 해보겠다는게 그렇게 마음에 안드십니까?”
“그러게 누가 하지 말랬냐? 나도 하기 싫었거든!!!!!!??? 별 거지같은… 이거 하면 기도해라 저거 하면 기도해라 하는 집안에서 퍽이나 하고싶었겠다 씨발!”
“어이구 알겠습니다 도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 할 줄 알았냐?? 너야말로 쓸모없다고 내팽개쳐져서 구걸해봐야 아이고 내가 배가 불렀구나 하지!!!! 네 말마따나 누가 하랬냐??? 진짜 보기드문 또라이네 이거!!!”
식탁의 다리는 용접된지 오래. 코니는 식탁을 붙들고 덜컹거리다가 에라이! 외치고 사비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할 말 없으니까 또 이지랄이네. 안 내려놔?!?!?”
몸통이 잡힌 사비나가 방금 낚인 생선처럼 펄떡거리다가 코니의 모히칸 머리를 덥썩 잡는다.
“너야말로 놔라??? 콱 좀비밭에 던져버린다!!!!”
“던져라, 던져!!!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물리면 제일 먼저 너 뜯어먹을거니까 목이나 잘 닦아놔라, 죽여버릴라니까!!!!!”
난장판. 그야말로 난장판인 이곳에서 빌은 서글픈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이럴 때가 되면 빌은 제가 다 속상해서 한숨을 푹푹 쉬곤했다. 이렇게 놔두면 또 사비나의 허리가 다치겠지. 슬쩍 일어나 코니의 머리를 꿍 내리찍고 사비나의 이마에 딱밤을 놓은 뒤 둘을 악수시킨다.
“존나 안 미안하다.”
“나도 등신아.”
“아아아악!!!!! 빌!!!! 이자식 힘주는거 봐요!!!!!!!!”
코니가 서로 악수한 손에 힘을 꽈아아악 주곤 쿵쿵대며 방으로 올라간다. 사비나는 가련한 제 손을 주무르며 호호 불고있었고 빌은 여러모로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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