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실브님 커미션 / 파이널 판타지14 데릭 드림 (열두신 신화 특대 스포)
검은 장막의 숲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무심한 듯 서늘한 바람이 제 손끝을 스쳐 지나가며 세상의 이야기를 더욱 또렷하게 들려주고, 머리 위로 떠오른 메느피나의 사랑이 자애롭게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잠든 세상에 너무 눈부시지 않고 은은한 빛을 내려주는 시간이었다. 다만, 그런 시간에도 A는 쉬지 않고 에오르제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쪼개진 후 머나먼 의지가 만들어낸 별의 관리자, 에오르제아의 열두 신. 그중에서도 여행신, A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은 끊임없이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에오르제아를 알고, 인간을 지켜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쪼개진 세계가 일곱 번의 재앙을 맞으며 합쳐지던 세월 속 A는 그에 익숙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삶이 되어있었고,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오늘도 묵묵히 대지 위를 거닐며 제 목소리와 닮은 바람과 함께하고 있었다. 풀벌레와 어느 새의 울음소리가 실려온 바람만이 변함없이 자신을 어루만져지던 그때,
“...!”
A는 막 자신의 곁에 도착한 바람에서 흔하진 않지만 자신에겐 굉장히 익숙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간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그 바람의 손을 잡고 돌아가자, 포대로 꽁꽁 싸매 어지간하면 발견할 수 없을 풀숲 깊이 놓여있는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지간하면 발견되기 어렵게 숨겨진 인간 아이라... 흉흉한 시절이었다. 일사바드 대륙에서 새로 건국된 갈레말이라는 국가가 마도기기라는 무기로 순식간에 주변국을 점령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에오르제아와도 국지적인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 근처 알라미고 왕국이 점령당했고, 그 옆인 이 숲에도 제국군이 종종 목격되고 있었다. 아이를 놔두고 도망간 걸까? 아이가 안전하길 바랐는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생명이 꺼지길 바란 건지 이 깊숙한 곳에 두고 간 저의를 알 수 없어 기분이 밍숭맹숭했다. 인간은 사랑스럽지만, 또한 이기적이기도 하니까. 이런 면을 보면 언제나 씁쓸해 지곤 했다.
아무튼, 인간의 죽음은 막을 수 없어도 탄생을 축복해주고 싶은 게 신의 마음이기에 A... A는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이의 여정이, 인생이 여기서 끝나길 원치 않기에 며칠 전 본 근처 인가에 데려다 줄 셈이었다. 아이에게 어떠한 여정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축복을 해줘야-
“!”
아이의 눈을 본 A는 깜짝 놀라 그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에 불안한 흔들림을 느낀 건지 아이의 얼굴이 불길하게 구겨졌고, 가뜩이나 고요해진 이 숲에서 터져 나온 울음소리를 가리기 위해 A의 힘을 꺼내야만 했다. 인간사엔 개입하지 않고, 정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아기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아이를 진정시킨 A는 다시 한번 아이와 눈을 마주쳤고, 익숙한 푸름을 가진 에테르를 그 눈에 담았다. 이런 영혼을 가진 이를 자신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허구한 날 자신을 불러들여 매사를 곤란하게 만들던 이였지만, 상냥했고 늘 남들의 행복을 바라던 좋은 사람이었다. 멸망의 끝까지 저항하다 그 흐름에 휩쓸려버린... 자신의 친구. 베네스 님을 이어 아젬이 되었고, 그대로 마지막 아젬이 되어버린 자. 이전처럼 진한 영혼은 아니지만 그 색깔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진 않았다. 과거의 조각이 그의 끊어진 이름을 읖조렸다.
“B... 오랜만이네.”
* * *
“아젬, 제발 나 좀 적당히 불러. 나도 내 일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알았어?”
A, 아니 그의 원형인 A가 소금물로 뒤덮인 머리를 털며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해가 저문 바닷가는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고, 식어버린 공기는 온기가 있는 모든 존재에게서 그것을 탈취하고자 했다. 방금 바다에서 나온 몸은 이 상황에 가장 알맞은 희생양이었다. 삽시간에 시원함을 넘어 싸늘해진 몸이 재채기를 내뱉고자 했고, 그를 막기 위해 코끝을 누르다 손가락에 걸린 가면이 무참히 모래에 처박혔다. 그러니 그자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좋을 리 없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무엇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본인이 있는 곳으로 불러와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처리하게 하고선, 태연하게 인사나 하며 문제는 끝났다는 듯 유야무야 넘기곤 했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듯 저렇게 태연하게 인사나 하러 오곤 하니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감사 인사도 듣고 문제도 해결했잖아. A 네가 없었으면 어려웠을걸?”
“어떻게 바닷속에서 활을 쏘라고 할 수가 있어? 날 명계로 보내려는 속셈이야?!”
“아니라니까 정말~ 다음에는 좀 더 안전한 곳에서 부를게. 지금은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알겠지?”
“부르질 말라니까-!!!”
대체적으로 이런 식이었다. B... 그러니까 현재의 아젬 말로는 A가 가장 쓰기 좋다는 이유로 (B는 이에 오해하지 말라고, B의 전투 패턴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자주 도움을 요청하는 사이라고 정정했다.) 허구한 날 그를 온갖 사건의 중심부로 불러들이곤 했다. 그 베네스가 소개해줬기에, 멋진 사람이라 생각해 단숨에 마음의 벽을 허물어버린 것이 실수였다. 아니 적어도, 그가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도 되냐고 물었을 때, 기꺼이 협력하겠다고 약속해선 안 됐었다. 그 결과가 어떤가. 아젬인 그가 도움이 필요할 만한 일은 자신의 일상은 물론, 보통의 상식까지 아득히 뛰어넘은 부류라 해결하는데 항상 애를 먹었고 늘 제 일이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다. 물론 그가 불러주면 늘 신선하고 자유로운 느낌마저 들긴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는...
“그 녀석은 어떻게 해도 고칠 수가 없어. 포기해.”
같이 불려나온 C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A는 시선을 옮겨 참담한 빛깔로 그를 향했으나, 그에겐 당연할 정도로 닿지 않았고 여느 때처럼 현지 사람들과 악수하며 감사 인사나 받고 있었다. 내가 말을 말지. A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C의 말처럼 이런 성향은 바꿀 수 없는 부류일 테니까. 아젬 본인의 소임대로 사람들을 돕는 일환이니 더더욱 그러겠지. 생각해보니 결국 자신만 바보 같아져서 A는 한숨을 내쉬며 모래사장을 툭툭 찼다. 얼마 전에 해양원에서 만들었다는 생명체가 옆으로 뛰어가며 사라져갔다. 혀끝은 여전히 짭짤했고 어쩐지 쓰기까지 했다. 바다는 짜기만 했던 게 아니었나? 항상 좋은 일만 있진 않았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힘들고 지쳤다. 정말 싫었다.
“아저씨-!”
“?”
“여기에 아저씨, 여기!”
“... 설마 나, 말하는 거니?”
그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구한 아이였지. 대충 사정 청취가 끝난 모양이었다. 운 나쁘게도 판데모니움에 가야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생명체가 엘피스에서 탈출했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이 부근에 자리를 잡았고 마침 그곳에 놀러 온 아이를 붙잡아버렸던 것. 그 생명체에겐 열 감지 기관이 있어 인간이 접근할 수 없었고, 여러 시행착오 끝에 A가 그 괴물의 머리에 무지막지한 화살을 날려 숨통을 끊은 덕에 종결되었던 것인데... 구해낼 때까진 끊임없이 울더니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의 입가가 누그러졌다. 아젬도, 이런 모습을 보고 싶기에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겠지. 아이는 힘차게 끄덕거리며 그에게 어떠한 액체가 든, 나무통 같은 물체를 내밀었다. 그 아이의 말로는 코코넛이라는, 이 근방에서 자라는 식물의 열매라고 했다. 그 안에 든 과즙이 맛있다고 말하며 구해준 보답이라고 덧붙였다. 평소라면 그다지 받을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쳤고 입안이 깔깔했기에 무엇이라도 짜지 않으면 넣고 싶었다. 그렇게 먹은 코코넛의 맛을,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어땠냐고?
- 그때부터, 아젬이 부르는 날을 계속 기다렸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말이다.
* * *
A는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떨쳐냈다. 생각지도 못한 에테르를 마주한 덕에 굉장히 먼 옛날의 기억을 오랜만에 보아 그런지 그 눈빛은 따스하고 애틋했다. 알고 있다. 이 아이는 그때의 아젬, B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그가 세계와 함께 조각나며 생겨난 그의 조각 중 하나며, 그가 될 수 없는... 아니 그저 그 자체로 충분한 인간일 뿐이었다. A는 인간을 꿰뚫는 눈을 살포시 떴고 이내 아이가 걸어나갈 ‘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이는 그와 달리 조용한 성향이고, 타인을 무서워하며 엮이고 싶어하지 않고 싶어하기에, 그 걸음은 대체로 고독했다.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순간이 많지 않고 이유 없이 걸어가기만 하는 삶이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오랜 시간 속에서 쌓인 경험이 그런 생에선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몇 번이고 충고했다. 어차피 불행에 점철된 미래라면, 지금 끝내는 것이-
“- 거봐, 세상에 무의미한 일은 없다니까? 맛있지 않아? 물론 코코넛의 이데아도 보존되어있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지만, 편하게 만들어서 먹는 것보단 어렵게 지켜주고 먹는 게 더 맛있잖아.”
“......”
A는 약하게 입술을 깨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옛 기억이 들춰진 탓일까, 이 아이에게서 B를 비춰보는 걸 넘어 그라고 자꾸 인지해버렸다. 항상 필요하다며 자신을 불렀던 B. 하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엔 불러주지 않은 너. A는 아마도... 미련이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에스티아가 아니듯이, 자신도 A가 아니라 A이었다. 인간의 여로에 순풍을 불어주고, 희망을 기원하며 노래해 주는 방랑신 말이다. 그의 미련엔 미안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것뿐. 그의 입술이 나직이 열리며, 튕기는 현은 다정한 음색으로 맴돌았다.
-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네 여행이, 네 길이 가시밭길이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그 끝엔 코코넛처럼 더 행복한 미래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우리는, 그런 너를 믿기로 했다.
이내 신은 그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주 미약한, 푸른 바람이 그의 손에 맴돌았고 그의 눈은 바람의 에테르로 은은하게 빛났다. 소망이 아이를 따를 바람에 새겨졌고, 기원이 살아가며 마시는 모든 공기에 머물겠지. 그것이 특별한 효과를 주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바람에서 님이 말했듯이,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끝내 종말을 넘게 될 이들이니까.
“언젠가 네가 이런 선택을 한 나를 원망하더라도, 얼마나 길지 모르는 방랑이 되더라도, 그 끝에... 네 자신의 모험을 찾아내기를, 여행신의 축복을 담아 기원한다.”
숨을 들이쉰 그는 평범한 A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제 봤던 보육원에 도착했다. 아직 전선하곤 거리가 있었고, 정령들이 머물고 있었으니 당장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푼돈을 원장에게 맡겼으니 쫓아내진 않겠지. 적어도 그 아이가 사리분별을 할 수 있을 때까진 키워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제 그 아이의 운명은 그 아이에게 달렸지만 말이다. 문득 A는 고개를 들어 올렸고 머나먼 하늘이 그 눈에 담겼다. 긴 밤이 끝나고 아제마의 불길을 살라 먹은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A는 몸을 돌려, 다시금 미지로 나아갔다. 길고 긴 여정 끝에, 언젠가 한 번쯤 스칠 수 있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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