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키타구구]안녕安寧
TONO 작가님의 [치키타 구구] 2차 창작
※ 공백포함 약 12,000자
※ 라미 잉크 ‘클리프’를 보고 씁니다
오르그와 백 년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다. 백 년 채 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만이 기억난다. 아직 오르그가 통통하고 털이 윤기 나며 보드랍던 시절. 백 년이 곧 채워지면 오르그에게 몸을 내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던 때였다.
이례적으로 비가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장마가 길어지고 있었다. 흐리고 우중충하며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 길어졌다. 클리프는 오르그를 어깨에 얹고 푹 젖어서 풀을 헤집고 다녔다. 허리까지 올라온 풀을 헤쳤다. 클리프의 한 걸음 한 걸음에 풀잎이 부서질 때 그 틈으로 비명을 지르는 듯 눅눅하고 척척한 풀 냄새가 피어올랐다. 갈 곳이 없으니 어디를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빗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바람에 따라 눕는 풀숲을 헤집었다. 사람이 오가지 않아 길이 없었다. 겨우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오르그와 비를 피했다. 굵은 빗방울이 수직으로 몸을 떨어트렸다. 그런 날을 이틀 정도 보내다가 언덕 위의 외딴 집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이 사는 건 아닐까. 클리프가 흙과 벽돌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 다가서려 하지 않자 오르그가 작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클리프. 비를 많이 맞아서 네 몸이 너무 차가워. 난 그게 너무 걱정 돼.” 클리프는 오르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이틀을 비에 젖어서 밤을 보냈는데 오늘마저도 시커멓게 무너지는 밤을 바깥에서 견디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결국 몸 피할 곳을 찾던 둘은 언덕을 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집에는 사람이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완전히 폐가였다. 어둑하던 하늘이 완전히 빛을 잃었다.
클리프와 오르그는 오래 전 사람이 버리고 간 폐가에 들어왔다. 문을 열자 놀랍도록 냉랭하고 습한 내음을 머금은 공기 얼굴에 훅 끼쳤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과 공기를 문질러 닦아낸다. 집안에 들어서자 클리프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린 빗물이 슬프도록 동그란 웅덩이를 이루었다. 클리프가 가진 옷은 한 벌이 전부라 그대로 말려서 다시 입어야 한다. 며칠 전부터 제때 말리지 못한 옷에서는 악취가 스멀스멀 풍겼다. 찝찝하고 추웠다. 오르그는 클리프의 발치에서 그 작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빠르게 빗물을 털었다. 클리프는 끝까지 닫히지 않는 문을 등지고 서서 머리카락과 옷의 물기를 짜냈다. 옷에서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꾹꾹 눌렀다. 신발을 벗어 벽면에 세워두고 맨발로 축축한 흙바닥에 섰다. 이 집이 만들어진 지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는 모르나 조악하고 원시적인 느낌이 났다.
이마로 가닥가닥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클리프는 제 손바닥으로 뺨을 지그시 눌러본다. 오르그의 말처럼 피부가 차갑다. 감기에 걸려서는 안 되는 일인데. 클리프는 난로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에 집안으로 터덜터덜 들어왔다. 불붙일 만한 것이 있는지는 나중의 문제였다.
거미줄이 쳐진 천장과 벽돌 너머로 쏴아 쏴아, 비바람이 소란스럽게 불어온다. 폐가의 안쪽에는 작은 벌레들과 쥐 따위가 잔뜩 죽어 있었다. 사람이 여럿 지낼 수 있을 만큼의 널찍한 크기, 비와 바람을 충분히 막아주고 잠을 잘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사람이 집을 버리고 살아도 다른 방랑자들이 들어와 살 만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입김이 연하게 새어나올 만큼 차갑고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처음엔 조금 의문이 들었다. 기어 다니는 벌레나 허공에서 안개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희뿌연 것의 낌새가 이상했다.
- 클리프.
의문은 금방 풀렸다. 공기가 써늘한 것이 비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더니. 클리프는 오르그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간다. 오르그와 클리프가 함께 땅을 파헤치자 땅바닥에서 사람의 백골 다섯 구가 나왔다. 그들은 산 채로 묻혔던 것 같았다. 시취가 풍기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이 집안의 땅에 묻혀 있었다. 안쪽이 텅 빈 해골 근처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남아 있기도 했다. 클리프가 머리 하나를 꺼내 드니 안에서 골수 따위를 먹으며 지냈던 평범한 지네가 파르륵 떨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형태가 온전한 뼈 중 두 구는 성인, 두 구는 열이 조금 넘은 듯이 보이는 아이들, 마지막 하나는 아주 조그마한 뼈였다. 처음엔 동물의 뼈인 줄 알았으나 옆에서 오르그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이였다.
달빛은 구름에 가려졌고 시커먼 밤이 집안에 켜켜이 차오른다. 집안에는 부옇게 떠오른 무언가가 언뜻언뜻 클리프의 눈에 스쳤다. 클리프의 어깨로 폴짝 뛰어오르던 오르그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집은 저주를 걸기 위해 버려진 제물의 용도였나 봐.” 그 사실은 클리프에게 아무런 감상도 남기지 못했다. 클리프가 움직이는 데에 문제가 없으니 이 집엔 더 이상 저주가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비가 그칠 때까지 이 집에서 오르그와 보낼 수 있다. 사람 다섯, 더군다나 갓 태어난 아이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누군가를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알 수도 없는 것이겠지. 클리프는 뺨을 긁으며 꺼낸 해골을 다시 땅에 묻었다. 그 모습을 오르그가 옆에서 지켜본다. 죽은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땅 속에서 깨끗하게 잘 썩었다. 이렇게 잘 썩을 수 없다고 여겨질 만큼 잘. 막 저주가 펼쳐졌을 당시 그 술법이 강력해서 식인요괴들이 인간 시체의 냄새를 맡았음에도 다가오지 못했던 것 같다.
클리프가 마저 어둑한 집안을 살폈다. 긴 시간 불을 지피지 않은 난로가 하나 덩그러니 있고,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누렇게 변색 된 이불과 썩고 마르고 흩어져 과거 짚더미였던 존재가 널빤지 위에 쌓여 있다. 불을 지펴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일단은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 대강 먼지를 털어낸 의자에 걸쳐두었다. 바닥에서 자고 내일 아침이 되면 널빤지를 치워볼까 생각했다. 계속 비를 맞았고 오래 걸었다. 빗물을 털어내어 한결 뽀송뽀송해진 오르그를 품에 끌어안는다. 그 딱딱하고 납작한 품이 기분 좋았다. 오르그도 눈을 꼭 감는다.
클리프는 작게 하품을 한다. 덮어서 몸을 데울 만한 게 없어도 클리프는 시야가 부옇게 번질 만큼 피로했다. 이대로 잠들 수 있을 듯하다. 오르그가 까맣고 작은 앞발로 차가운 클리프의 뺨을 만졌다.
- 클리프. 춥지 않아?
- 오르그가 있어서 괜찮아.
진심이었다. 클리프는 오르그와 함께 잠이 든다. 백 년 가까이 살아도 비에 젖으면 체온이 떨어지고 피곤해지는 몸이라니. 인간이란. 인간의 인생이란.
*
다음날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호수 근처의 마을 하나가 빗물에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는데 이 기세로 퍼붓는 비를 보면 거짓은 아닐 테다. 클리프는 덜 마른 옷을 다시 몸에 걸치고 집안을 살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사물이 풍화 되듯 저주는 희미해졌고 집안은 어수선했다. 눈에 띄게 어질러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으나 망자의 기운이 흉흉하게 남아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그랬지만 클리프에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바깥에서 스며드는 공기에 간신히 비를 피하게 된 실내마저 눅눅하다.
유리 없는 창 너머로 오르그와 함께 비오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빗방울은 공중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고인 웅덩이에서 튀어오르는 물방울은 아주 잠깐의 물고기 모양의 보석처럼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비오는 바깥을 구경하니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바람이 불어왔다. 해가 뜬 건 아니다. 오르그는 집의 문을 열어두었다. 클리프는 물기를 머금고 불어오는 바람에 꿉꿉하게 젖은 옷을 펄럭이며 말렸다. 말려도 말려지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보려는 행위였다. 집안에 남아있는 그릇을 전부 꺼내 마당에 내어 둔다. 오르그와 빗물을 받아 마시며 실내에서 빗소리를 즐겼다. 이때에도 영감은 나쁘지 않아 이 집안에 어떤 것이 남아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감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클리프가 오르그의 뺨에 소곤거린다.
- 이 집안에 뭔가 있다는 느낌은 들어. 저주의 기운이 남아있는 걸까.
- 역시 클리프는 감이 좋아.
하지만 걱정 마. 저주에 휘말려 죽은 어린 망령이 남아서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뿐이야. 많이 아프고 무섭고 억울했을 테니까. 그래도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아.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거든. 곁에서 조잘조잘 떠들던 오르그의 조그마한 발바닥이 클리프의 미간 사이를 톡 누른다. “나중에 이 이마에 혼을 볼 수 있는 제 3의 눈이 생길 거야.” 클리프는 멍하니 오르그를 올려다보다가 농담으로 하는 소리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오르그가 먼저 노란 눈이 초승달처럼 접히도록 키득키득 웃었고 따라서 클리프가 아하하 웃는다. 하지만 클리프의 영감은 점점 더 좋아질 테니까. 혹시 모르지? 그 말에 클리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살면서 그런 건 바란 적도 없고 조금도 필요하지 않으니까 생겨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다. 클리프는 오르그를 품에 꼬옥 안았다. 이토록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식인요괴라니.
비가 멎고 해가 잠깐 떴다. 간만의 맑은 빛이었다. 클리프와 오르그는 햇볕 아래에서 춤을 추며 몸과 옷을 가뿐하게 말렸다. 길쭉한 팔다리를 쭉 뻗어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이땐 아직 어렸다. 발바닥이 마당의 웅덩이를 철벅철벅 밟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젖은 나무를 흔들어 물방울을 바닥에 후두둑 떨궈냈다. 자잘한 소리가 뒤섞여도 이 집 마당은 아주 조용하다. 오르그의 숨소리와 클리프의 발소리와 가끔 서로를 향해 웃는 소리가 허공에 차랑차랑 울렸다. 내리쬐는 햇살에 공기가 깨끗하게 반짝거린다. 아주 잠깐의 여름 햇살. 그 빛에 기대어 클리프는 간절히 바란다.
얼른 백 년이 오길. 오르그의 작은 입으로 나를 잘근잘근 씹어서 삼켜 먹어주길. 먼 산 끄트머리에 산안개 틈에서 작은 무지개가 떴다. 빛깔 고운 무지개는 클리프가 눈으로 보기 전에 사라진다. 하늘은 다시 어둑해지고 비가 내린다.
*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남아 있었다. 오래 전에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부유하는 먼지처럼 떠올랐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한다. 그것의 이름도 잃은 지 오래다. 기억도 나지 않으면서 어째서 존재하는 것일까. 원래 기억하지 못하면 엄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나. 사라져야 할 것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그냥 다른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나. 클리프는 그 모든 것이 지겹다. 지겹고…… 놓아버리고 싶다. 클리프는 결국 감기에 걸렸다. 오르그가 작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디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클리프의 이마에 빗물에 흠뻑 젖은 지푸라기를 엮어 수건처럼 올려놓았다. 지푸라기에 고인 빗물이 클리프의 눈가를 타고 흘렀다. 이마보다 더 낮은 곳으로 똑똑 떨어진다. 처음 만났을 때 왜 클리프의 눈에서 소금물을 흘리느냐고 묻던 오르그의 커다란 발전이었다.
클리프는 가능하다면 이 세상을 구성하지도 못할 만큼 작은 먼지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만 되었다는데도 이토록 오래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었다. 죽지 못하고 산다는 건 무상하구나. 이토록 어렵구나. 생명이 존귀한 데에는 죽음과 혼돈의 역할이 가장 크구나. 클리프는 혼돈 속에서 살아간다. 이 삶에 법칙이 하나 있다면 질서 있는 혼돈일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아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클리프가 처음으로 만난 낯선이. 그와 연인이 되면서 다정함을 배우고 설렘도 경험하고 충만함도 느꼈다. 그것들이 다 사라져버린 후에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음에도 요괴에게 몸을 내어주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가 서성거렸다. 엄마도 아빠도 인간이었는데 죽은 사람을 먹었다는 이유로 식인귀라고 불리었다. 그럼 어떻게 살았어야 했을까. 우리 부모님은 살기 위해 살았는데. 당신들도 태어난 아기도 굶어죽일 수 없어 그만큼 최선을 다 하였는데. 이보다 더, 무엇을 어떻게…….
오르그와는 늘 좋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도 나쁠 게 없었다. 클리프는 종종 쓸쓸했고 외로웠으므로 오르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열이 다 떨어진 후 몽롱한 정신으로 클리프가 오르그의 뺨에 대고 눈을 깜박거린다. 오르그. 다음엔 네가 사용하는 파지직- 하는 전기 마법을 알려줘. 너를 더 알고 싶어. 네가 경험하는 세계를 나도 알고 싶어. 클리프가 중얼거리면 오르그는 끝이 말린 까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후후 웃는다. 응, 가르쳐 줄게. 클리프는 내가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영민하니까 이런 기술 같은 건 금방 배울 거야. 살아있는 생명에는 모두 전기가 흐르거든. 오르그는 클리프의 손바닥에 아래에서 몸을 웅크렸다. 오르그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지 꼬박 삼십 년이다. 클리프의 마음도 모르고 오르그가 담요처럼 손바닥 아래에서 클리프에게 속닥거린다. 나는 클리프가 너무 좋아.
*
이 집 뒷마당에는 귤나무는 없고 비파나무 두 그루가 음울하게 자라고 있었다. 음산한 공기 속 새큼한 향이 뭉클뭉클 퍼져왔다. 클리프와 오르그는 귤나무를 찾으러 가는 대신 잠깐 동안 뒷마당에 열린 비파를 뜯어 먹었다. 노랗게 익은 과육은 귤보다 작고 안에 커다란 씨가 있어서 껍질을 벗기고 앞니로 갉아먹어야만 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클리프도 오르그도 히죽히죽 웃었다. 클리프에게 먹을 것이나 영양소가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르그가 유달리 걱정하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이 쓰였다. 드물게 아래로 길쭉하고 옆은 통통한, 노오란 비파열매를 찾으면 오르그에게 너의 눈과 닮았다며 보여주었다. 비파나무는 귤나무와 형태는 다르지만 잎이 푸르다. 햇볕을 오래 보지 못했음에도 비파는 매우 달고 향이 좋았다. 과육이 아삭아삭 씹히고 새큼한 향에 입에 자연히 침이 고였다. 식감은 몇 년 전에 먹어본 살구열매를 떠오르게 한다. 향기롭지만 떫은맛이 나는 몇몇 알이 있긴 했지만 못 먹고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비가 쏟아졌다. 습기가 짙고 밤바람이 차가워도 꽃이 열리고 열매가 맺힐 만큼의 기온. 정처 없이, 방향도 모른 채 오르그와 함께 걸어왔는데 이곳은 남부의 어느 지역인 듯하다. 열린 창문 틈으로 비에 젖은 촉촉한 땅과 시원한 풀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와 이불처럼 클리프를 덮었다. 푸근한 여름밤 냄새였다.
*
클리프와 오르그가 그 집에서 무탈하게 지낸 지 세 계절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 가까스로 비가 그쳤다. 숲은 사람이 오갈 수 없을 정도로 풀이 무성해졌고 함께 지내고 있는 집의 언덕도 흙이 으스러져 걸어오기에 편하지 않았다.
해가 뜬 어느 날, 늙고 앙증맞은 노인 하나가 클리프와 오르그의 집을 찾아왔다. 사람이 올 것이라고 생각도 못해 클리프는 잔뜩 경계한 얼굴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걸음이 불편한지 목발을 짚고 있었지만 그것에 익숙한 듯했다. 노인은 문 안쪽에서 푸른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소년을 보고 잠시 홀린 듯 멈춰 섰다. 노인의 긴 치마에는 여름 풀잎의 초록으로 물이 들었고 머리카락은 나뭇잎과 잔가지가 달라붙어 엉망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당에 들어서며 사나운 눈초리의 클리프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이 집에서 죽은 이들의 뼈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들을 제가 거두어도 될까요. 묻어둔 뼈만 챙겨서 오늘 바로 언덕을 내려갈 테니 지내시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실 거여요.
자그마한 노인의 부탁에 오르그가 먼저 클리프의 손등을 꾹 눌렀다. 클리프는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문을 열었다.
오르그는 노인이 마음에 든 것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숨어 있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노인은 오르그를 보아도 전혀 놀라지 않았고 가져온 것들을 꺼내서 보여준다. 건조를 시킨 얇은 육포와 오면서 딴 산딸기를 선물처럼 클리프에게 건네주었다. 눈으로 빙긋 웃으며 오르그를 쓰다듬는 손길로 짐작하니 오르그가 식인요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노인은 다시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호미와 손으로 느릿느릿 땅을 파며 작은 노랫말처럼 이 나라의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오르그는 그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요괴의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의 연약하게 뛰는 왼쪽 가슴 아래의 심장에서 옅은 빛이 번졌다가 사그라드는 것을 응시했다. 오르그가 자리를 떠나지 않아 클리프도 의자를 끌어와 흙을 긁어내는 노인을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노인은 클리프와 오르그가 떠나지 않자 자신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말하기 시작했다.
- 벌써…… 70년이 넘게 흘렀네요. 이 집에 살던 남자는, 뭐랄까 희대의 망나니였지요.
노인은 어른의 뼈를 끄집어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클리프의 노인의 목소리가 의외로 듣기 좋다고 생각한다. 이 집에서 죽은 남자는 자기 자신과 아내, 그의 세 아이의 영혼까지 긁어모아 사람 하나를 괴롭히고 죽이는 저주를 완성했다고 한다. 남자는 죽었지만 저주한 대상은 이번 생에도 고통 받고,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그 다음다음의 생에도 어려운 삶을 살겠지요. 노인은 한숨을 쉰다. 그렇게 끔찍한 저주였으니 몇 십 년 간 사람들이 이 집을 드나들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잠시 몸의 균형을 잃은 듯 노인은 땅을 짚고 숨을 색색 내쉬었다. 다시 몸을 세워 땅 속의 뼈를 끄집어 올렸다.
- 나는 이 집 첫째아이와 친구였답니다.
노인의 이야기는 마음에 걸리거나 기분 나쁜 부분 없이 대체로 평범했다. 다섯 구의 백골을 전부 보자기에 올려두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흙이 묻지 않은 손목으로 닦았다. 클리프와 오르그가 옆에 내려앉아 노인의 힘이 부족해 허술하게 묶은 보자기를 다시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클리프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 늘 꺼려해 왔지만 함께 있는 노인은 곧 죽을 사람 같아서 그런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클리프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 오랫동안 이 아이를 만나고 싶었겠네.
가장 작은 뼛조각을 가장 작고 보드라운 손수건에 모으는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과 대야 등으로 받아둔 빗물이 마당 옆에 나란히 줄지어져 있었다. 클리프와 오르그가 마시는 물이었다. 받아둔 빗물 중 하나로 흙 묻은 손을 꼼꼼하게 씻어낸 노인은 젖은 손을 그의 낡은 치마에 닦았다. “이 집에 아직도 비파나무가 있지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노인은 뒤뜰에 향했다. 사시사철 파란 비파나무는 노인을 알아보는 듯 초록잎을 반짝인다. 나뭇잎을 손바닥으로 쓸어주며 노인이 말했다.
- 처음에 이 집에 들어섰을 때 당신이 있어서…… 죽은 그 아이가 살아 돌아온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얼마나 반가웠나 몰라요.
죽은 그 아이. 먼 곳을 응시하던 클리프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는 듯이. 노인도 따라 미소를 띤다. 뒷마당을 비추는 햇살은 무심했고 발아래 밟힌 마른 풀들은 바스락거렸다. 오르그는 클리프의 어깨에 올라와 조그만 노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노인의 두근두근 느리게 뛰는 심장 아래에서 비치는 그 하얀 빛을 삼키고 싶은 걸까. 클리프는 오르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지만 오르그는 얌전히 꼬리를 살랑거렸다. 오르그는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호의적이다. 배가 고프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조금씩 무게가 줄어 가벼워진다. “클리프의 주변 공기가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아까 나눠먹은 비파 덕분에 배가 부른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식인요괴는 노란 눈을 깜빡였다. 오르그는 인간들을 지켜볼 때마다 몸 안의 전기가 재빠르게 지릿지릿 울렸다. 클리프는 오르그의 안에서 일어나는 전기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클리프는 오르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노인은 빈 가방 속 뼈 담은 보자기를 소중하게 차곡차곡 쌓으며 클리프를 보았다.
- ……아마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 싶어서 이름을 안 물어봤는데. 그래도 역시 이름을 물어보고 싶군요.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 클리프.
클리프. 입술 안쪽으로 이름을 중얼거린다. 노인은 네 명의 뼈를 가방에 담고 가장 조그마한 아기의 뼈를 품에 안아 들었다. 보자기를 안는 모습이 살아있는 갓난아기를 대하는 듯 염려가 느껴졌다. 발이 불편할 텐데도 가져온 지팡이를 멀리 던져두고 짚지 않는다. 품에 안은 보자기를 양손을 받치기 위해서. 마당을 나서기 전에 노인은 머뭇거렸다. 기, 기분 나쁠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요.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도는 것이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아이에게 당신의 이름을 붙이고 묘비에 새겨도 될까요…….
*
안녕히 계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노인이 왔다가 땅에 묻힌 다섯 구의 뼈를 모두 뽑아간 그날 새벽은 이 집에 들어온 처음으로 쥐 죽은 듯 잠잠했다. 어슬렁거리던 저주 받은 영혼들이 백골과 함께 모두 떠나버렸다. 오르그가 클리프의 곁에 왔다. 오르그의 따뜻하고 가벼운 몸과 윤기 사그라든 검은 털이 클리프의 뺨에 문질러진다.
- 그 할머니가 아기의 엄마였던 거야.
아주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열 달을 채워 출산을 했겠지. 그리고 그 망나니라고 하던 남자에게 낳은 아기를 빼앗겼을 테고. 어째서 그런 인간들이 존재해? 어떻게 그들이 짝짓기와 번식을 할 수 있는 거야, 클리프? 클리프는 그 어렵고 복잡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그저 웃었다. 인간이란 클리프도 알 수가 없는 외부의 존재였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느껴본 적이 드물다. 제대로 만나서 대화해본 인간이 부모님과 산 너머에 살던 그 여인 한 명 뿐이었으니. 향기로운 비파나무가 뒤뜰에 서 있던 이 집에서 오래 지내지는 못할 것을 예감했다. 비도 멎었느니 이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클리프라는 이름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의외로 그 사실은 클리프를 안심시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죽지 않는 식인요괴에게 이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 노인은 얼마 안 가 죽었을 것이다. 처음 이 집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혼과 몸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애매한 상태였다. 이 집에 와서 뼈를 거두어가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남기고 사념이 흐릿했다. 아마 저주로 인해 아기의 뼈를 거두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중년에는 내내 몸이 아팠을 것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빼앗긴 열몇 살 된 여자아이가 지금껏 살아남아, 이 집에 걸린 저주가 흐릿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노인은 죽고 나서 아기의 묘 옆에 묻혔을까. 동그랗게 몸을 작게 말아 잠든 오르그가 제 가슴에 얹혀 잠든 것을 확인한다. 클리프는 눈을 굴려 집의 천장과 벽을 본다. 오르그와 지내는 데에 익숙해져서 거대한 저주로 사람들이 죽은 집이라는 것도 잠깐 잊었다. 한 사람이 70년이 넘도록 애달파 그리워한 공간이라니. 부담스러워 질식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이름 그 까짓 게 다 무엇이라고. 다 죽어가는 노인에게 이름 하나 적선해주어 그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이름에 무게를 두지 않은 덕분이었다. 클리프는 눈을 감았다. 졸리지 않았지만 피곤함을 달래는 데에는 효과가 좋았다. 기억에 남아있는지도 몰랐던 엄마의 품속에서 맡은 촉촉한 젖냄새가 먼 곳에서 풍겨오고 등을 두드려주며 불러주던 자장가가 귓가에 스르륵 들려온다. 그것들이 클리프를 눈물처럼 감싼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는데 누워있는 널빤지에 습기가 고여 쿰쿰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노인도 아기의 묘비도 잊혀질 것이다.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성묘하지 않을 테다. 그 무덤 위로 풀이 자라고 덩굴이 올라 그 아래에 사람이 묻혔는지도 모르게끔 짙푸른 풀잎으로 휘감겨 사라지겠지. 그리고 그 노인과 클리프는 아주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아챘다. 이전부터 클리프는 자신의 몸이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건 꽤 전에 알았지만 정말로 요사스러운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괴와의 백년이란 이런 의미로구나. 오르그에게는 비밀이지만, 오르그와의 백 년이 끝난 뒤엔 클리프를 ‘클리프’로 존재하게 하는 건 아무 것도 남지 않길 바랐다.
오르그의 두 방향으로 갈라진 도톰한 꼬리가 클리프의 목덜미에 얹혀 따스하다. 곧. 곧이다. 얼른 우리의 아름답고 감미로운 백 년이 끝나길. 오르그의 작은 입안에 나의 생명이 삼켜지길. 그런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오르그를 바라보면 불쑥 이름 모를 감정이 치민다. 시간이 멎은 듯 감각이 허물어져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진다. 어둡고 푸르른 봄밤이 깊어 간다.
오르그. 그 산에서 만난 너와, 내 머리보다 높게 자란 그 귤나무가 나를 살렸어.
*
오르그는 클리프의 외로움을 삼켜준다. 먹고 먹고 또 먹어 클리프가 쓸쓸하지 않아 한다면 좋을 텐데. 인간의 외로움이란 마치 영혼과도 공생하는 존재 같아서 인간의 내면 깊게 가라앉아 심심할 때마다 고개를 쳐들고는 한다. 클리프의 손은 따뜻하고 피부는 부드럽고 아주 가끔 쓴맛이 날 얇고 긴 금발을 입안에 집어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오르그는 꼬옥 참았다. 대신 클리프의 어깨에 매달려 뺨을 부빈다. 클리프. 너무 좋아. 있지, 나 말이야. 더는 쵸롤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 클리프와 백 년을 시작해서 정말 다행이야. 아아,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네 주변 공기가 나를 살게 해. 그러니까 부디 걱정하지 마.
식인요괴와 함께 지내는 클리프는 혼란스럽다. 밤낮으로 오르그와 함께 하며 백 년이 되길 기다렸다. 오르그가 왜 인간을 먹지 못할까. 속상하고 두려워진다.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가까워졌을 땐 클리프는 제 안의 모든 것들에 흥미를 잃었다. 오르그만이 걱정이었다. 클리프는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았다. 비를 흠뻑 맞아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깨끗한 혼돈이 되어간다. 작고 단단한 압으로 뭉쳐 이 땅에 발을 디뎠다.
- 오르그. 새 나뭇가지로 바꿔줄까?
- 아니. 지금 이 귤나무가 좋아.
오르그가 나뭇가지가 아니라 제 어깨에 올라타 주기를 바랄뿐이었다. 이백 년 하고 오십 년 정도가 흘렀을 때 귤나무 위에 타고 다니던 오르그는 바싹 말라 비틀어져 나중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던 듯하다.
클리프는 십여 년을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작고 조그마한 오르그를 보자기에 싸들고 갓난아이처럼 품에 안았다. 불현듯, 잊고 있던 노인이 떠올랐다. 죽어 가면서도 아기의 뼈를 거두기 위해 젖은 숲을 헤쳐 기어이 언덕을 오른 노인을. 손이 닿으면 파스스 부스러지는 뼈를 꼼꼼히 싸매들고 느릿느릿 산 아래로 내려가던 노인을. 오르그가 담긴 보자기는 솜처럼 가벼웠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삼백 년이 흐른 뒤에는 오르그와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졌다. 클리프에게는 곁에 머물러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클리프는 오르그가 없으면 삶이 너무…… 여전히 지겨웠다. 숨 쉬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몇 십 년 동안 오르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아주 잠깐 만나는 일은 클리프를 비관적이게 한다. 삼백 년을 너와 지내면서도 이 삶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너도 알잖아. 오르그는 클리프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걸까. 클리프는 그런 오르그가 제멋대로이고 자신은 아주 욕심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욕심은 부릴 수 있는 거 아닐까. 너는 정말로 나를 다시 외톨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 오르그? 원망에 사무치면 자꾸만 못된 생각이 들었다.
*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을 때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불쾌한 감정이 덕지덕지 응어리진 인간들을 오르그에게 먹이고 싶지 않았다. 클리프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오래 고민했다. 어떤 인간을 먹어도 오르그는 제 모습으로 돌아올 테지만 주의를 기울여 좋은 것들로 준비하고 싶었다. 클리프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느슨하게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계속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오르그. 나는 저번에도 말했지만 오로지 이 세상에서 너만이 제일 좋아.
오르그. 그 노인은 70여 년 전에 죽은 자신의 아기 옆에 묻히면서 그나마 행복했을까?
클리프의 마음을 읽은 듯 나무 막대기에 매달린 오르그의 머리가 부르르 떨렸다. 그래, 오르그의 불빛이 꺼진 게 아니다. 영원의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바깥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강물이 불어 넘치고 숲 너머 요괴들이 울적하게 울부짖었다. 치키타와 라는 함께 침대에 파고들어 꿈결을 헤매고 있다. 성질이 온순한 계절이라 누군가 뒤척여도 평온한 고요가 지켜지는 밤이다. 홀로 잠들지 못한 클리프는 눈을 휘며 웃는다. 기다란 막대 위에서 마녀의 저주에 걸린 공주처럼 잠에 빠진 오르그. 클리프는 길게 뻗은 귤나뭇가지의 각도를 기울인다. 온기가 없는 오르그의 까만 귀와 귀 사이에 길게 입을 맞췄다. 부디 걱정하지 말라던 그 말을 믿었다. 이제는 오르그를 굶겨 박제된 존재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삼백 년을 넘게 살아온 인간 클리프가 무슨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잠든 오르그는 몰라도 좋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르그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고 해도, 클리프는 두 번 다시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클리프는 작대기에 정수리를 대고 눈꺼풀을 느릿하게 뜨고 감길 반복한다. 푸른 눈동자와 검푸른 동공. 그 속에 깃들었던 탁색의 심연. 그렇다면 클리프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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