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키타구구 조각글들

🎶 by A

낮잠 (2024.6.17)

클리프도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그래도 말수가 조금은 더 많았다. 지금보다 백 년쯤 어렸을 때였을까. 클리프는 기분이 좋으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곤 했고, 기분이 안 좋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자 클리프는 기분이 좋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분이 안 좋으면 웃는 사람이 되었다. 그 모든 게 내 잘못 같으면서도 그런 클리프의 모습까지도 나는 좋아했다.

페트라스의 조정에 들어온 클리프는 귤 향기도 맡지 않고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내가 준 귤을 아주 가끔씩만 먹었다) 차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처음 며칠만 함께 조정 안을 돌아다녔을 뿐, 이후로는 내가 폴짝폴짝 뛰면서 궁 안을 탐방하러 다녀도 따라오지 않았다. 클리프는 꽃을 두른 무덤에서 내리 잠만 잤다. 아무것도 클리프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영생의 비결을 물으러 오는 페트라스 말고는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았고... 치키타와 라도, 하이카도, 샹샹도... 누구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클리프는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건을 일으킨 때부터 조정에 들어온 지금까지가 내가 본 중에 가장 홀가분하고 편안한 클리프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 평화가 영속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불안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지만 여기가 클리프의 낙원 같았기 때문에.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우리 둘만의 세계가 클리프가 정말 바라던 바인 것 같아서. 클리프는 정말로 치키타와 라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은 걸까? 다시는 만나지 못한대도 아무렇지 않을까? 그들이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처럼, 우리가 모르는 둘의 생애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을까. 라는 인간이니까 언젠가 치키타와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클리프도 그런 걸 원한 적이 있을까? 나와 백 년을 한 걸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까. 내가 널 속였는지도 몰라, 클리프. 거짓말인 줄도 몰랐던 거짓말로. 날 용서하지 마, 클리프.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클리프는 반드시 눈을 떠서는 이렇게 나지막히 속삭였다. 오르그.

네가 인간이 아니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러면 나는 속절없이 내 까만 귀와 샛노란 눈, 뭉툭한 앞발을 기뻐했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 여윈 팔뚝에 힘껏 붙이면 흐르는 약한 전기가 클리프가 생생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침상을 장식한 시들지 않는 꽃들, 백합 안개꽃 국화에 맺힌 물방울보다 클리프가 더 향긋했다. 클리프에게서는 신비로운 목재 내음이 났던 것이다. 그 사건 이전에 긴긴 겨울잠에 빠져 있던 내내, 나는 클리프가 나를 올려놓고 다니던 귤나무 가지가 클리프의 팔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그래서 클리프의 팔에 기대면 아무 힘도 없던 그때와 같이 노곤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런 낮잠 속에서 자그마치 칠 년이 흘렀다.

고별 (2024.6.26)

죽어가는 데라르를 돌보던 어느 저녁이었다. 클리프는 모처럼 식사 테이블에 치키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치키타는 반쯤 먹고 남긴 접시 가장자리를 하고픈 말이 있는 사람처럼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클리프.”

“응.”

“해골의 땅 사건을 일으키고 나서... 괜찮았어?”

괜찮았냐고? 특이한 표현이었다. 클리프는 치키타의 주어가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죽은 사람이 괜찮았냐는 거야? 그런 걸... 나한테 물어 봤자.

“아니, 클리프 네가 괜찮았는지.”

“뭐... 오르그가 굶주리지 않게 되었으니까 안심했지.”

“아주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

“응.”

“그래서 후회한다거나, 죄책감에 잠을 못 이룬다든지 그러지 않았어?”

그 사건부터 모론 조정에서의 칠 년의 기억은 온통 흐릿하고 불분명했다. 클리프가 밀린 잠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몇 년간은 거의 깨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치키타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를 거였다. 그건 심지어 클리프 자신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때 네 마음이 어땠을지를 점점 자주 상상하게 되는 것 같아.”

“데라르 생각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가 아프니까 그런 상상이 드는 거야. 오르그가 죽어갈 때 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너한테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있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길이 있었나? 해골의 땅은 순수하게 오르그를 먹이기 위함이었다. 한때는 이 땅에 생명이 너무 파다한 것 자체가 클리프에게 염증을 일으켰대도 그건 훨씬 어려서의 일이었다. 인간을 증오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죽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사실이겠지만. 기실 이런 류의 문제에 클리프는 크게 흥미가 동한 적이 없었다. 다른 종에 비해서 인간이 살 가치가 있다는 걸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일은 그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저 오르그를 다시는 잃지 않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네가 먹고 있는 생선과 닭고기도 누군가 죽였으니까 상에 올라온 거야.”

“응. 알고 있어.”

클리프의 지적에도 치키타는 기분이 상하는 기색이 없었다. 클리프는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런데 이 음식은 다 어디서 나는 거야? 넌 데라르를 보살피느라 요리할 시간도 없잖아.”

“아, 발란스가 집에서 얻어 왔어. 샹샹 가는 대가족이라 끼니마다 음식을 잔뜩 준비해서 꼭 남는다고 하더라. 하이카가 보낸 떡도 있고. 예전 같은 진수성찬은 못되지만. 좀 먹을래, 클리프?”

“괜찮아. 식사가 조촐해져서 허전하겠네.”

“아냐, 그런 것쯤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지만, 데라르는 매일같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려내곤 했었다. 치키타는 잔칫상의 출처를 캐물은 적이 없었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클리프는 단 한 번도 그 상에 숟가락을 얹은 일이 없었다. 

그토록 나이브하면서도 어찌 보면 천 년을 산 현인처럼 골똘한 모습으로 치키타는 손끝을 모으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직도 무언가 하고픈 말이 남은 듯해 보였다. 그런 치키타를 놓아 두고 클리프는 오르그와 한 바퀴 산책을 나갔다. 담담을 만났던 뒷산을 크게 둘러 걷고 돌아오니 집안은 완전히 고요해져 있었다. 클리프는 잠든 치키타와 데라르 옆에 소리 없이 앉았다. 어느덧 매일 밤은 클리프 홀로 깨어 수호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날 클리프는 짤막한 꿈을 꾸었다. 데라르 옆을 지키다 보면 졸음 속에 깜박깜박 환영을 볼 때가 있었다.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귤나무가 가득한 과수원 속이었다. 오르그와 거니는 그곳이 마치 천국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한 번의 손짓을 일으켰다. 클리프가 했던 것과 똑같은 손짓이었다. 모든 귤나무가 벼락에 맞은 듯 한순간에 죽어 쓰러지고 말았다. 담담의 짓인가? 하지만 좋을 대로 해 보라지. 오르그가 건강히 살아 있으니 괜찮은걸, 하며 클리프는 옆을 돌아보았는데, 어느덧 클리프의 손에는 다시 시들고 마른 가지가 들려 있었다. 가지 끝에서 오르그의 머리가 떨어졌다. 끝없이 기나긴 추락. 물밑보다 더 깊이 만유의 원리에 의하여. 종국에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이... 클리프는 찰나에 깨어나는 동시에 결심한다. 이곳으로 가야겠다고.

눈을 뜨니 데라르의 작고 약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무엇인가 예감하는 듯 클리프를 올려다보며. 

클리프는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쳐 앉는다. 클리프가 해본 적 없는 말은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라에게, 치키타에게, 니켈에게, 새듀스와 발란스에게, 담담에게, ... 오르그에게. 모두에게 전할 말이다.

“라. 네가 죽으면, 분명 난 치키타나 새듀스, 발란스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거야...”

빨간 태양 아래 (2024.6.26)

(*해골의 땅 사건 때 클리프가 딱히 몸싸움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거적때기 차림이 됐는지 궁금해하다가...)

몇 번을 헛디뎠을까? 몇 번을 넘어졌을까? 몇 번을 눈을 뜨고 감았을까? 나는 잔가지가 수북한 들판에 쓰러져 있었다. 산중턱보다 민가에 가까운 비탈이었다. 마지막으로 실신한 곳이 여기는 아니었는데 어디서 어디까지 굴러떨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짜내어도 영원토록 미지로 남을 것이다. 생각은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자잘한 새털구름처럼 흩어진다... 눈꺼풀을 가눌 힘이 없어 도로 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나는 어쨌든 대단찮은 인간이었다. 대요괴와 삼백 년을 살았어도 장엄하고 막강한 생물로 변하지는 못했다. 마을 다섯에 도시 둘을 쓸어 버리고도 끄떡없을 줄 알았던 것은 어쩌면 자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몸이 버티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괜찮았다. 오르그와 최초에 계획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나의 심장은 공중제비를 넘는 나비처럼 팔랑거리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멈추지는 않았다. 날갯짓을 따라 잠에 빠지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삼백 년이 지나도록 허락된 심박수를 다 쓰지 못했다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 같았다...

다음번 의식을 차렸을 때는 사방에 물기가 흥건했다. 빗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의 물이었다. 절반은 오르그의 침이었고 나머지는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진동하는 쇠 냄새 속에서 오르그가 내 이마를 부여잡고 정신없이 핥고 있었다. 바라마지않던 광경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낭비한 보상이 될 만큼 내 피의 맛이 각별해야 할 텐데. 원하는 만큼 살도 뼈도 베어먹어 주길 바랐다. 다시는 오르그가 아무것도 자제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오르그의 작은 앞발이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아담한 사이즈 때문에 오르그가 어떤 괴력을 감춰 놓고 있는지 자꾸만 잊곤 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잃었는지 견딜 수 없이 추워져 갔다. 귓가에 세찬 바람이 윙윙거렸다. 오르그가 목놓아 절규하는 소리도 희미한 노래가 되어 나를 잔잔히 잠으로 떠밀기만 했다. 그런데 잠들지 말라고? 오르그는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잠들면 안 돼, 클리프! 안 돼! 안 돼, 가지 마! 무슨 말이야, 오르그. 나는 이렇게나 가만히 있는데. 글쎄, 아무데로도 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또 눈을 뜨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작열하는 광선 때문이었다. 그늘 한 점 없는 공터에 대자로 뻗은 나는 태양열을 정면으로 흠뻑 받아내고 있었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 뙤약볕에 누워 있었는지는 가늠하지 못했지만, 의식이 한결 또렷했고 눈앞을 알아볼 기운도 있었다. 내 소맷단과 밑단이 전부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가 있었다. 옷이 이 정도로 심하게 넝마로 전락하려면 숲에서 넘어지고 구르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천조각을 이빨로 뜯어내 이마에 동여매 놓은 것은 아마 오르그겠지. 오르그는 폴짝폴짝 뛰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무척 불안해 보였다.

“클리프, 클리프, 저쪽에서 많은 인간들이 너를 찾고 있어. 발견되면 곤란할 텐데. 클리프는 지금 너무 많이 지쳐 있잖아... “

오르그의 허기를 가시게 했다면 지치는 것 정도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럼에도 오르그는 내가 쉴 폭신한 침대를 만들어 주겠다고 줄기차게 우겨 댔다. 이곳에서 단 둘만이 계속 느긋하게 있고 싶었지만... 내게는 오르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저버릴 힘이 아주 오래 전부터 없었다. 어찌나 강경하게 고집을 부리는지 오르그가 가자는 대로 비틀거리며 일어날 도리밖에 없었다.

Time Stand Still (2024.6.26)

영원은 찰나와 같다. 지고의 행복은 한 점으로 압축할 수 있다. 오르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서로 완벽하게 닮아 있다. 생동하는 오르그와 곁을 나누기. 오르그의 숨결을 만끽하기. 귀하고 소중한 감정이 황무지에 밀려드는 바다처럼 충만하게 차오르는 경이를 느끼기. 서로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순간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행복은 본래 하나다. 시간은 크기가 없는 점이 되어 어디에든 멈추어 선다.

오르그와 함께 걷기. 시간의 무너짐과 흩어짐과 흘러감을 무릅쓰기. 그렇게 할 당위는 없다. 이유는 모른다. 종착지도 모른다. 목적이 필요하지조차 않다. 그러면 이대로 정지해도, 오랫동안 클리프를 품어 준 숲 어딘가에 푹 쓰러져서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 다시는 개의치 않더라도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르그가 그를 계속 정처 없이 걷게 한다.

그래서 클리프는 계속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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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미로운 딱다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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