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키타구구

클리프, 주방에 가다

🎶 by A

타이밍이 안 좋았다. 하필이면 새듀스와 발란스도 오랜만에 자이셸 가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자리를 비운 며칠이었다. 치키타는 하루 종일 데라르의 빨래를 하고 씻기고 약을 바르느라 무리하는 것 같더니, 결국 몸살이 나 버렸다. 밤마다 데라르를 안고 자던 치키타가 그때만은 감기를 옮기면 큰일이라며 한사코 데라르와 떨어지려 했다. 치키타는 베개와 이불을 들고 나오더니 아무 방으로나 쏙 사라졌다. 개미굴처럼 방이 끝도 없이 있는 집이었다. 도대체 구구 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일까?

집이 몹시 조용했다. 가끔 치키타의 기침 소리나 오르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클리프는 책을 읽다 말고 이따금 라가 자는 방을 들여다보고, 치키타가 자는 방도 들여다보았다. 아침나절을 내리 끙끙 앓던 치키타는 오후가 되고서야 좀 기운을 차린 듯싶었다. 클리프가 문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 코맹맹이 소리였지만 제대로 문장의 형태를 갖춘 질문이 돌아왔다. 

“라는 어때?”

“잘 자고 있어.”

코흘리개처럼 훌쩍이는 치키타를 보며 클리프는 스물 몇 살의 그가 얼마나 어린지 실감했다. 클리프의 긴 생에 비추어 보면 스무 해 정도는 눈 깜박하는 새에 흐르는 시간이었다. 클리프는 그 나이에 어땠던가? 인간 기준의 청춘이 클리프에게도 특별히 더 빛나는 시기였나. 오르그를 만나고 난 다음이긴 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별달리 기억나지 않았다.

“클리프, 부엌에 귤 있어?”

“없는데.”

요즘은 오르그가 건강을 되찾아서 귤나무를 자주 서리해 올 필요가 없어진 탓이었다. 몸이 아프니 상큼하고 달콤한 게 당기는가 보지. 클리프는 해가 중천에 뜬 창밖을 가늠했다. 지금 다녀오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다 줘?”

“아냐. 괜찮아. 아무거나 먹을게.”

클리프는 침대에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앉은 치키타를 잠깐 관찰했다. 코 밑을 얼마나 닦아냈는지 코끝과 인중이 붉었다. 눈빛은 생생해졌지만, 생리적인 눈물로 눈가가 촉촉했다. 아무거나 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죽이나 수프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아픈 것 같지도 않았다.

“먹고 싶은 게 있어?”

다시 아무거나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자기 몫을 챙기려 나서는 일이 없는 치키타는 웬일로 고민했다. 마음이 약해져 있구나, 클리프는 생각했다. 감기 기운이 어린아이를 더 어린아이로 만들고 있었다. 치키타에게서 놀랍도록 투정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므라이스...”

인간을 싫어하는 이유라면 클리프는 주저없이 수천 개도 댈 수 있었다. 그 기나긴 목록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저런 어리광... 치키타는 뒤늦게 입을 합 막았다. 

“아냐 아냐, 괜찮아. 그냥 쉬어, 클리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클리프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됐어. 해 줄게, 오므라이스.”

그럼 또 싫다는 말은 안 했다. 치키타의 눈은 도리어 조금 초롱초롱해졌다. 하기야 라가 아파서 식당을 털어오지 못한 뒤로 치키타가 먹은 것이라곤 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도 허겁지겁 삼킬 수 있는 간편식뿐이었다. 클리프는 오므라이스라는 걸 만드는 법을 물을까 하다가 관두었다. 목이 잠긴 환자에게 말을 계속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해결하기로 하고, 방을 나와서 구구 가의 서가를 뒤져 보았다. 가문에 전해오는 비술서를 빽빽하게 꽂아 놓을 공간도 부족한 탓에 다른 서적은 단 한 칸에 몰아넣어져 있었다. 클리프의 눈길이 낡고 손때 묻은 요리책 한 권에 닿았다. 손가락으로 팔랑거리자 오래된 종이가 햇볕을 받아 부서질 것 같았다. 

오므라이스를 찾아 클리프는 조심히 페이지를 넘겼다. 드디어 찾아낸 요리법 한 귀퉁이에는 옅은 연필로 치키타의 부모 혹은 조부모가 메모를 해 두었다. ‘치키타는 당근을 좋아함! 완두콩은 자꾸 골라내지만 몸에 좋으니 많이 먹이자.’ 문장 끝에 스마일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 치키타를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했던 모양이었다.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클리프는 치키타에게 완두콩을 많이 먹이기로 했다. 그들의 해골을 산산이 부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였다.

오므라이스라는 것을 눈대중과 손대중으로 만들었던 듯 요리법은 자세하지 않았다. 클리프는 첫 문장의 동사에서부터 막혀서 한참을 거기 머물렀다. ‘갖은 야채부터 작게 썰어넣고 볶는다.’

볶는다가 뭔데... 클리프는 이런 류의 음식과는 좀 다른 걸 먹고 자랐고, 그다음엔 산에서 오르그가 따주는 과일이나 먹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음식이 필요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볶는다... 볶는다라... 되뇌며 클리프는 터덜터덜 주방으로 향했다.

일단... 일단 불을 켜자. 클리프는 아궁이에 불을 때는 법을 몰랐다. 어려서는 알았을 텐데 그런 일을 하지 않은 지 거의 삼백 년이라 깨끗하게 잊었다. 부엌에 들어온 일이 없어 성냥의 위치도 모르는 탓에 주술로 장작에 불을 붙였다. 금세 따끈한 열기가 너울거려서 클리프는 한숨을 돌렸다. 그 다음엔... 클리프는 벽에 걸린 주물팬을 불 위에 올려놓았다. 식탁에는 모시천을 덮어 놓은 찬밥이 있었다. 치키타는 그걸 조금씩 덜어서 라한테 죽을 끓여 주곤 했다. 저걸 볶으면 되겠지.

“오르그,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으으음. 모르겠는데. 오므라이스는 먹어 본 적이 없는걸.”

어깨에 앉은 오르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요리법을 충실히 따르고 잘 되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갖은 야채... 달구어지는 팬을 뒤로 하고 클리프는 뒷마당으로 가 텃밭을 살펴보았다. 나무 심지를 휘감으며 보기 좋게 자란 콩나무 줄기에 콩깍지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따서 반을 가르니 야들야들한 풋콩이 와르르 쏟아졌다. 클리프는 한 손 가득 콩알을 움켜쥐고 들어와 몽땅 팬에 내던졌다. 콩깍지는 먹는 건지 아닌지 몰라서 반 정도만 잘라 넣었다. 한 가지만으로는 갖은 야채라 할 수 없을 텐데... 다행히 집에 당근은 있었다. 흙을 털고 한 입에 들어가는 크기로 썬다고 고생깨나 했다. 소금도 치고, 토마토도 보이길래 두어 개 넣고, 푸성귀도 뜯어 뿌렸다.

그러는 새 시간이 꽤 흘렀다. 오므라이스라는 것은 그리 자비롭지 않아서, 또 무엇을 넣어야 갖은 야채인가 두리번거리는 클리프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클리프! 밥이 냄비랑 하나가 되고 있어! 이거 신기하네!” 오르그의 새된 환호에 얼른 돌아보니 찬밥이 팬 바닥에 눌어붙기 시작했다. 등에 굵은 줄기로 땀이 흘렀다. 불 앞이 더워선지 식은땀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클리프는 물을 조금 부어 보았다. 이제 타지는 않지만... 자작한 국이 되고 말았다. 오므라이스가 뭔지는 몰라도 국물 요리는 아닌 것 같았다. 오르그가 앞발로 클리프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클리프, 클리프, 긴장 풀어. 어깨가 딱딱해졌잖아. 걱정 마, 잘 될 테니까!”

오르그를 정말 사랑하지만 때로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다. 클리프는 물을 다시 덜어냈다. 다른 액체를 찾다가 기름과 간장을 발견하고 몇 숟가락씩 넣었다. 간장이 지글지글 타면서 달착지근한 냄새가 퍼졌다. 이건... 이건 꽤 그럴 듯했다. 식당을 지나칠 때 맡아본 냄새와 비슷해서 클리프는 조금 용기를 되찾았다. 행운이 클리프 쪽으로 다시 윙크를 해 오는 것 같았다. 간장에 물든 밥이 얼룩덜룩 까매지는 건 딱 그만큼 불길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다 익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열을 꽤 오래 가한 기분이 들어, 일단은 밥을 빈 그릇에 옮겼다.

다음은 소담스럽게 쌓여 있는 계란을 두 개 집어들었다. 요리법에서는 지단을 만들어 덮으라고 했는데 눈치로 보면 계란을 가지고 넓게 부침개를 부치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센불과 중불과 약불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요리법에 적혀 있지 않았으므로, 계란을 깨넣자마자 치이익 하며 밑부분이 타들어갔다. 클리프는 적잖이 당황했다. 마음이 급해져서 손을 뜨거운 무쇠팬에 넣고 계란을 만지려는데 오르그의 꼬리가 얼른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그러다가 다쳐, 클리프! 인간은 불을 조심해야 해.” 화상을 입는다고 어떻게 되는 몸은 아니었지만 클리프는 습관적으로 오르그의 말에 복종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빈 접시로 팬을 긁어서 계란을 뒤집었다. 도자기는 불에 구워지니까 뜨거운 팬에 닿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한 거였는데, 접시는 흠집이 가득해졌고 계란 부침개에는 거뭇거뭇한 부스러기가 잔뜩 일었다. 오르그는 뒤늦게 폴짝 뛰어내려 서랍을 마구잡이로 열더니, 길쭉한 도구 하나를 찾아 가리켰다. “이걸로 하는 게 아니었을까?” 클리프가 발란스에게 물어 그 물건의 이름이 뒤집개라는 것을 배우고 오르그의 말이 맞았다고 확인하게 된 것은 그날 밤에 가서나 이루어졌다.

어쨌든 계란 이불이 완성되었다. 노랗고 까만 보풀이 가득한 것이, 몇 세대를 물려주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빨고 또 빨아 댄 이불처럼 생겼지만. 클리프는 볶아놓은 밥 위에 이불을 올려놓았다. 그것으로 뭔가가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이게... 오므라이스?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데 그게 치키타고?

클리프는 오므라이스를 노려보았다. 요리를 망친 건지 클리프에게 식욕이라는 감각이 없는 건지 구미가 전혀 당기지 않았다. 그래도 먹어 보지도 않고 상에 낼 수는 없어, 전체적인 모양이 상하지 않도록 귀퉁이를 조금 떠서 맛을 보았다. 역시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판별할 능력이 클리프에게는 부족했다. 클리프의 입에는 아주 짰는데, 애당초 인간들이 적당하다고 느끼는 염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몰랐다.

심사위원이 한 명 더 필요한 듯해서 오르그한테도 한 숟갈 먹여 보았다. 오므라이스의 한가운데, 계란이 가장 덜 탔고 밥에 밴 갈색이 그나마 맛깔스러운 부분으로. 계란에 커다랗게 구멍을 냈더니 가뜩이나 먹음직스럽지 못했던 요리가 더욱 못생겨졌다. 하지만 제일 좋은 부분은 무조건 오르그 몫이라는 게 클리프의 규칙이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어, 치키타. 오르그는 한참 오물거리다가 형체를 잃은 밥덩이를 클리프 손에 뱉어냈다. 오르그는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다.

“맛있는 것 같은데?”

클리프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가, 

“클리프 주변의 공기가 닿아서 맛있는 건가?”

그대로 도로 버렸다. 때맞춰 치키타가 비척비척 거실로 나왔다. 

“우와. 좋은 냄새가 나네, 클리프.”

물 한 잔을 따라주고 클리프는 기진맥진해 주방 벽에 기대섰다. 치키타의 맞은편에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치키타는 누군가 손수 만들어 준 오므라이스를 받아 보는 것이 오랜만인지 한동안 말을 잃고 감격했다. 목소리에서 글썽거림이 느껴졌다.

“정말 고마워, 클리프... 감동받았어. 은근히 상냥하다니까. 잘 먹을게.”

감사는 먹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고 해도 늦지 않다고 클리프는 생각했다. 오므라이스를 한 술 크게 떠넣더니, 치키타는 선하고 잔잔하게 웃었다. 팔 년 전쯤 인간의 맛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클리프와 데라르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맛있다.”

“거짓말.”

“정말이야.”

치키타의 숟가락은 꾸준히 놀려졌다. 오므라이스는 어떻게든 모조리 치키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아주 맛있어. 고마워, 클리프.” 치키타는 여러 번 그렇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다 먹고 나서는 조금 더 쉬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고 싶어 보였다. 그건 클리프가 잘 알고 자주 느끼는 감정이라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날 저녁, 귀가한 발란스는 팬에 조금 남은 볶음밥을 맛보더니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악 맛없어! 이거 누가 만든 거야? 굉장히 엉망이잖아! 이게 도대체 뭐야, 치키타 형님!”

“저기, 발란스...”

치키타가 말문을 열기 전에 클리프는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저쪽 방에서 책 좀 더 읽고 올게.”

“응, 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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