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키타구구]경계境界

TONO 작가님의 [치키타 구구] 2차 창작

※ 공백포함 약 19,000자

※ 클리프과 담담 구구에 대하여


1

긴 잠에서 막 깨어나 눈을 뜬 기분이었다.

몸이 아파 클리프를 막아설 수 없는 라 라므 데라르에게만 일방적인 작별을 전하고 구구 가를 떠났다. 클리프와 오르그에겐 고향이 없으니 목적지 없이 어디를 가도 좋다고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걷다가 걷다가 이곳에 왔다. 쓰러진 통나무 너머, 클리프가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했을 아주 얇은 금이 새겨진 허공을 앞에 두고 오르그가 말했다. “저 너머로 가볼까?” 그 통나무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공간이 유리처럼 산산이 깨지거나 클리프의 몸이 이리저리 통로 벽에 부딪치는 일은 없다. 다만 완전한 암전이 이어진다.

잔잔히 부서지고 멀어지는 소리와 짭조름한 냄새가 가장 먼저 클리프를 반겼다. 눈꺼풀 밑으로 연한 빛이 새어들어와 그제야 눈을 뜬다. 오르그가 곁에서 클리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리프와 오르그가 도착한 곳은 넓게 펼쳐진 바다였다. 해무 속에서도 공기가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멀리서 갈매기가 날았다. 이건 이상하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정신이 몽롱한 부스러지는 모래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오르그는 클리프의 종아리 근처에서 몸을 기웃거리며 표정을 살폈다. 클리프는모래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머리카락과 옷에서 떨어져 내리는 모래가 치키타의 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밀가루 같았다.

“다행이야! 클리프가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

폴짝 뛰어올라 클리프의 어깨에 자리 잡은 오르그가 이어서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 멀쩡히 살아있는 인간이 올 수는 없을 테니까. 나도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야. 이런 곳이 있다고 들어보기만 했어.”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클리프는 오르그의 말에 괜히 꼬투리를 잡으려다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이었다. 나 자신이 ‘멀쩡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여전했다. 죄책감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 클리프의 등 뒤에 얹혀 있는 듯하다. 악몽을 꾸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숨이 가빠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클리프는 바닷바람을 훅 들이켰다. 와본 적 없는 곳. 클리프가 한결 느슨해진 표정으로 인적 없는 바다를 둘러본다.

클리프와 오르그는 해변처럼 보이는 ‘어딘가’에 왔다. 바다는 클리프와 오르그의 방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파도를 보내고 다시 거두어간다. 작은 물고기나 갯강구나 꽃게 등 해변에서 보일 만한 동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클리프는 더더욱 이곳이 실제 존재하는 바다가 아님을 깨달았다. 살아온 땅의 바깥. 이름도 없고 주인도 없는 바다. 어린 시절 클리프는 전쟁터 산자락에서 살아 바다를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는데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슴이 얕게 두근두근거린다. 전기가 돌 듯 갈비뼈 안쪽이 저렸다. 어쩌면 자신의 아빠와 엄마가 바닷가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갑작스레 일어난 나라 간의 전쟁을 피해 산으로 들어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먹먹한 기분이 들어서 클리프는 숨을 삼켜야만 했다. 클리프의 턱뼈 아래에서 오르그가 속삭였다.

“클리프. 저기를 봐.”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소년이 멀찍이 서 있었다. 그는 클리프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바닷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멀리 서 있는 클리프와 눈이 마주쳤다. 흰 옷과 맨발. 길을 잃은 듯 멍한 얼굴. 소년이 허리를 숙여 알갱이가 거의 보이지 않는 모래를 손으로 퍼 올렸다. 스르륵 모래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와 공기 중에 흩날린다. 클리프에게 서서히 다가오며 소년이 한숨처럼 말한다.

“이상해요. 난 분명히…… 술 취한 아빠를 피해 엄마와 도망가고 있었는데요.”

소년은 손바닥을 탈탈 털어냈다. 클리프와 오르그는 소년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소년은 외관 상 클리프보다 어려보였다. 십대 초중반 쯤 되었을까. 소년은 신기한 동물을 본 듯 오르그를 흘끔거렸지만 눈여겨 보지는 않는다. 다시 클리프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쑥스러워서 미소를 짓는다. 손톱으로 약하게 뺨을 긁었다.

“으음, 엄마가 나이가 많아서 몸이 안 좋으시거든요. 엄마를 이불로 감싸 업고 산을 넘느라 좀처럼 빨리 갈 수가 없었는데.”

소년은 말을 멈추고 하얀 상의를 걷어 제 배와 깨끗한 팔다리를 보았다. 가지런한 손톱을, 찢기지 않은 옷을 내려다 본다. 하나도 얼얼하지 않은 얼굴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누굴 만났는지 기억이 안나요. 늦은 밤이었던 것 같았는데. 산에 살던 식인요괴였던가……, 아빠였을까…….

“나는 결국 죽은 건가요?”

소년은 미지근하고 건조한 이마와 뺨을 제 손등으로 문지른다. 자신이 업고 있던 엄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소년의 질문에 클리프와 오르그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소년은 채근하지 않았다. 자신의 맨발과 멀쩡한 손바닥을 보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미소는 바다내음과 함께 파도처럼 클리프와 오르그에게 밀려왔다. 클리프는 소년처럼 평온한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이 아이는 십수 년 쯤 살았을까. 늙은 어미를 등에 업고 산을 넘다가 이곳에 왔는데도 어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언제나 죽음은 클리프의 가까운 곳에 존재했지만 이처럼 선명하기는 처음이었다. 소년의 심장 안쪽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찬란한 빛이 새어나온다. 오르그는 그 빛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클리프와 오르그는 바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다.

2

삶의 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경계의 바다로 왔다. 늙고 병 든 자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갓난아이까지 모두 이곳에 도달한다. 그들은 가느다랗게 이어져가는 생명의 끈을 매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잘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댄다. 겁먹은 듯 조심히 하얀 모래를 사뿐사뿐 밟는다. 생전의 건강하던 모습으로, 팔다리가 온전한 채로, 조금도 아프지 않고 불편한 곳 없이. 그들은 멀리 서 있는 클리프와 오르그를 바라보다가 쏴아 소리내며 밀려오는 바람을 한껏 맞는다. 누군가는 이전의 소년처럼 클리프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누군가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바다에 풍덩 빠져 헤엄을 친다. 또 누군가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파도에 발을 내딛기도 했다. 흔적을 남기는 파도와 젖은 모래, 클리프와 오르그, 흐린 하늘과 짙게 검푸른 바다, 일렁이는 안개 속에서 불꽃처럼 튀어오르는 빛을 그들 모두 찬찬히 둘러본다. 긴장했던 어깨를 푹 늘어뜨리고 어느 누구도 할 것 없이 늙은이처럼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안도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네요. 마지막으로 대화할 수 있는 당신도 있고요.” 그들이 클리프를 보며 웃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클리프는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클리프의 무표정을 다양하게 해석했다. 그들이 읽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보았다. 오해도 분명히 섞였겠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생활 중 제일 좋은 점을 꼽아보자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우기거나 이대로는 안 된다며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련스럽도록 순진하게 그들 자신이 서 있는 경계를 경이로워 하고 신비로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들 모두 비슷한 말을 전한다.

“이런 기분인 줄 몰랐어요.”

*

클리프와 오르그를 돌아보며 홀가분한 얼굴이 되는 사람들.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걱정이었는데 더는 걱정 되지 않는다던 사람들. 오르그에게 순진한 미소를 띠며 그들 심장 속 빛을 꺼내어주는 사람들. 경계의 바다에서 바깥으로 훌쩍 내려간 오르그가 그 빛을 삼키는 것을 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사람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 심장 속 빛을 잃으면 그들은 서서히 파도의 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들이 향해야 하는 더 먼곳을 위한 길잡이는 또 다른 영역의 존재들이다. 클리프는 경계의 바다에 머무르다 떠난 이들이 오르그에게 허락한 빛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클리프가 빛을 받아 삼키고 몸에서 소화를 시키는 동안 클리프는 얇은 막 너머로 비치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어느 날은 입맛이 씁쓸한 감각이 들어 스스로도 놀라웠다.

인간이 너무너무 미웠던 것 같은데……. 클리프는 경계에서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름은 하나도 모르지만 표정은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소년부터, 방금 전에 떠나 보낸 늙은 노인까지. 하나의 빛나는 점이 되어버리는 이들을. 한 명 한 명의 사람을 안다는 것. 얼굴도 모르는 수만 명의 뇌를 터트려 죽여 심장의 빛을 끌어모았던 클리프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도 해골의 땅에서 일어난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지만. 클리프는 웃으며 빛 속으로 사그라지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본다. 그들이 사라지면 클리프는 아주 조금 앓는 소리를 내며 오르그의 이마에 한참동안 뺨을 문지른다. 오르그도 클리프의 뺨에 얼굴을 마구 부빈다. “으응? 어디 아파, 클리프? 어디 아파?” 오르그가 걱정해주는 목소리가 마음의 응어리를 녹인다.

*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클리프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기억이 있다. 우리 엄마와 아빠도 떠나는 순간에는 무섭지 않았으려나. 그들이 살아온 삶과 그들이 키워낸 하나 뿐인 아들의 운명을 걱정하진 않았을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클리프는 늘 방긋방긋 웃었다. 집안에는 늘 퀴퀴하고 지저분한 냄새가 섞여서 풍겼지만 엄마도 아빠도 바깥에서 놀다가 들어오는 클리프를 안아줬다. 함께 식사를 하고 한 이불을 덮었다. 너는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어린 클리프도 어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그들을 사랑하며 그 또래의 어린아이처럼 행복했다. 그들이 나눠준 사랑이 있던 덕분에 클리프는 오르그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차올라 가슴을 뻐근하게 하면 걸음이 느려진다. 우뚝 멈춰 서게 된다. 사과 받지 못하고 용서 받지 못하던 시기. 그 뒤에 오르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폭신폭신한 모래를 밟으며 배가 든든해진 오르그를 품에 안고 클리프는 짧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혹은, 그렇게 행복했기 때문에 들이닥친 불행의 영향이 컸던 게 아니었나. 곧은 나뭇가지가 꺾이듯 성격이 변하고 물이 얼어붙듯 마음이 차가워져 버린 게 아닐까. 식인귀 사냥은 정말 대단했지.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도 그토록 원한 깊은 표정을 짓지 않았을 거야.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우리가 했던 선택이 그렇게나 잘못된 거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르그와 치키타가 내려줬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인간이든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라고.

바다는 비슷비슷한 날씨가 이어진다. 짠내를 머금었지만 텁텁하진 않은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과 함께 먼곳에서부터 뽀얀 거품을 끌어안은 파도가 밀려온다. 얇고 넓은 소금물. 눈물처럼 투명한 바다의 거대한 손끝이 모래사장을 스르륵 부드럽게 쓸었다. 우린 아주 많이 닮았고 조금씩 다르다. 그 조금씩 다른 부분이 영영 타인을 이해할 수 없게 한다.

클리프는 품안의 오르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보드라운 손짓이었다. 바람이 불규칙적으로 불어온다. 경계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가 한 방향에 고정되어 있고 바다에 노을이 물들지도 않았다.

3

파도를 바라보는 한 여인이 바위를 등지고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맨발 끝에 파도가 찰랑찰랑 밀려왔다. 여인은 아름다운 얼굴에 눈썹이 하얗고 숱이 적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이마에는 작고 얇은 바늘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미역처럼 검고 긴 머리카락이 뺨을 스치고 허공에서 너울너울 춤을 춘다. 바람이 심장에 빛이 남지 않은 담담 구구가 그곳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클리프는 오르그와 해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저 여자가 왜 여기에?

“담담…… 구구?”

“어머……?”

부름에 놀라 고개를 든 담담은 클리프를 곧바로 알아보고 미소지었다. 담담 구구가 맞다. 다시 봐도 적응되지 않는, 라 라므 데라르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클리프는 삼백 년을 넘게 살아서 웬만한 일에는 그러려니 하는 평온한 목석의 표정을 짓지만 담담의 얼굴만 보면 발바닥에서부터 열이 차오른다. 태도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오르그와 단 둘이 있을 때 보이는 우아한 느긋함을 찾기 어려워진다. 이때의 클리프가 너무 낯설어 오르그는 숨을 죽인다. 클리프 가까이의 찌릿한 공기를 조용히 낼름거리며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담담은 태평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뜬다. 쏴아, 파도 소리가 나부끼고 해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갈매기 울음이 끼루룩 들려온다.

“이런 곳에서 만나네.”

오르그도 안녕? 담담은 자신보다 네 배는 더 살아온 식인요괴를 친구처럼 대하며 손을 흔들었다. 클리프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담담에게서 뒤를 돌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당황한 오르그가 클리프에게 어딜 가느냐고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기 싫었다. 담담은 클리프를 불러세우지 않고 그의 길고 얇은 묶음 머리가 흔들리는 걸 물끄러미 보았다. 어휴 저 고집불통…… 등 뒤에서 담담이 자신을 비웃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건 클리프의 착각이다.

담담은 이미 죽었다. 이미 죽어서 클리프와 오르그가 도와줄 것도 없고 심장의 빛을 나눠받을 수도 없다. 죽은 여자가 으스스하게 살아돌아온 것처럼 바위 곁에 앉아 있다니. 파이에도 그랬지. 어딘가로 도망간 줄은 알았지만 요괴가 되어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담담의 죽었던 그해의 그 밤을 클리프는 또렷이 기억한다. 자신이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유리처럼 투명한 영혼이 모여들어 라 라므 데라르에게 함께 가자고 권하던 웅웅대던 목소리. 하나의 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던 영혼들. 담담의 주술이 풀려 제 본 모습으로 변해버린 데라르를 치키타가 따뜻한 물로 씻기던 소란스러움. 하늘엔 가느다란 초승달이 뜨고 계절이 변해 공기가 꽤 싸늘했던 것도.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고 시간 감각마저 흐릿해지는 경계에 담담 구구가 왔다.

4

해가 지고 떠오르지 않아 날짜가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체감 상 며칠이 지났다. 역시나 담담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따로 클리프와 오르그에게 말을 걸지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흰 거품을 일으키며 발끝을 살짝 적시고 몸을 뒤로 쭉 빼는 파도만을 응시하거나 해변의 보슬보슬한 모래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이따금 앉아서 꾸벅꾸벅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이 땅에 살아온 이들 중 바다를 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클리프도 그들이 바다를 보며 황홀해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담담은 마찬가지로 먹지도 않고 잠을 자거나 눈을 뜨면 그저 바다만 바라보았다. 클리프가 쓰러진 통나무를 건너 이곳 경계에 온 것처럼 죽은 담담도 어느 세계의 틈을 벌려 이곳에 온 게 아닐까 싶었다.

*

클리프는 담담이 사라질 때까지 내버려두려고 했지만 오르그가 먼저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담담 구구가 어쩌다가 이곳으로 왔는지 물어봐야겠어.”

상냥하고 귀여운 오르그. 오르그는 삼백년 전에도 숲을 헤매던 맛 없는 인간에게 귤을 따다 주던 식인요괴였다. 아주아주 오래 산다는 건 나와 타인의 구분이 조금 흐트러지는 일인 듯하다. 클리프는 오르그가 이 세상 그 어떤 요괴보다 도량이 넓고 관대한 요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선선히 손을 내밀어주는 오르그를 보면 클리프는 자신이 얼마나 꽉 막혀 있는 편협한 인간인지를 알게 된다. 귀찮고 성가신 요괴를 많이 만들어 내고, 그 요괴들이 인간을 먹어치워도 눈길 하나 깜빡거리지 않는 냉혈한 여자에게 오르그가 다가간다. 오르그의 친절을 여자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두 번도 세 번도 죽일 수 있다고 마음 속으로 이를 갈았다. 담담은 반가운 미소를 띠며 오르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오르그.”

“담담 구구. 이곳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여긴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데.”

“음 글쎄, 어쩌다 보니…….”

그도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 죽은 이에게도 여전히 ‘정신’이라는 게 남아 있는 건가. 담담을 보고 있자니 클리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담담은 아주 익숙하게 오르그를 안아들었고 오르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손바닥에 앉았다. 헉, 하고 숨을 삼킨 클리프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런 클리프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담담은 오르그의 두 갈래로 나뉘어진 꼬리를 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구였지. 싱싱이 말해준 것 같아. 아주 예전에 오르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정말?”

“응. 나와 ‘백년’을 했던 식인요괴 중에 오르그의 이름을 모르는 요괴는 없으니까.”

클리프는 담담의 옆에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눈길이 닿은 담담이 고개를 돌려 클리프에게 싱긋 웃는다. “가까이 와줄래, 클리프?” 클리프는 몇 걸음 다가와 담담의 곁에 앉는다. 클리프가 손을 짚고 앉는 만큼 모래의 형태가 무너진다. 오르그는 담담의 손바닥에서 다람쥐처럼 뛰어 클리프에게 온다. 클리프는 담담의 손길이 묻은 곳을 닦아내듯 엄지의 도톰하고 넓은 부위로 오르그의 이마와 눈두덩이를 꼼꼼히 문질러준다. 담담은 클리프와 오르그를 눈으로 훑었다. 여기까지 클리프는 ‘식인요괴 중에 오르그를 모르는 요괴가 없었구나-’ 하며 클리프는 기쁜 듯 오르그의 이마를 살살살 긁었으나,

“나도 오르그와 백년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 말에는 또 눈꺼풀이 파르륵 떨렸다. 멀리 갈매기가 끼욱끼욱 울었다. 클리프가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애쓰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뭐라고?”

“어머 몰랐니? 오르그는 아주 유명한 식인요괴였는걸. 아주 오래 살았고 현명하며 모르는 게 없다고. 그애들끼리 하던 우스갯소리로 ‘요괴 중의 요물’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야.”

그애들. 담담은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함께 몇십 년씩 살아온 요괴들을 떠올린다. 클리프는 기가 차는 듯 미간을 꾹 찡그리면서 말을 고른다. 담담 구구가 오르그와 백년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진심일 리 없다. 클리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려는 수작인 것 같다. 지금 와서 수작을 거는 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담담은 오르그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한다. 그와 함께 했던 요괴들을 겹쳐 보고 있는 듯이 눈빛이 푸근했다. 그렇게 몇 분 같이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클리프는 담담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다.

“넌 오백 년이나 살면서 나와 치키타 외에 맛없는 인간을 본 적 없다고 했지만, 오르그가 만난 요괴 중에 ‘치치’라는 인간 여성과 백년을 한 요괴가 있어. 그에 대해서는 몰라?”

“흐음, 그래? 그런데 그 여자는 이미 죽지 않았을까? 뭐가 궁금한 건데? 맛 없는 인간이라는 건 실제로 존재해. 나와 너처럼.”

클리프를 바라보던 담담이 빙그레 웃는다. “치치라는 여자가 구구 가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듣고 있던 오르그가 말을 이어간다. 클리프의 무릎에서 가장 알맞은 자세를 찾느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담담은 그 말에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눈에 힘을 아예 풀어버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르그가 계속 말한다.

“그 인간은 백년을 하던 중에 그만 절벽에서 떨어졌어. 죽기 직전이라 자긴 이제 틀렸으니 그냥 자길 잡아 먹어달라고 말했대. 녀석은 치치를 먹어버렸고.”

“음…… 그렇구나.”

담담은 다정한 목소리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흥미 없다는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혼잣말처럼 말을 속달거린다. 입을 가리며 눈을 가늘게 뜬다. 후후후…… ‘맛 없는 인간’이 몇이나 있었던…… 어느날 갑자기 그들이 전부 사라졌던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상관이 있겠어……. 담담의 말끝이 느려진다. 클리프를 곁에 둔 채 담담은 바위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잠든 것 같았다.

5

얼마 후 담담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 사이 클리프는 다섯 명의 사람과 만났다.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그들의 슬픈 듯 평화로운 눈을 바라보며 오르그가 심장의 빛을 먹은 날이었다.

담담은 여전히 바위에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바라본다. 해변에는 침묵이 가득했다. 클리프가 깨어난 담담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곳 경계에 온 이후로 클리프는 늘 감정의 온도차가 크지 않았으나 담담 구구의 얼굴을 보는 건 불쾌와 짜증을 자극한다. 클리프가 인간을 싫어해도 ‘싫어하는 인간’이 있었던가. 애초에 인간보다 오르그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건 상황이 어쩔 수가 없지 않았나. 클리프에게도 식인 요괴는 무서운 존재라는 말을 듣고 자라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또 인간이라는 존재를 아예 몰랐으므로 두려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과거에는 그러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클리프.”

담담은 웃으며 클리프에게 손짓했다. 다가오라는 것 같았다. 경계는 담담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그는 꿋꿋이 이 땅에서 해파리처럼 살아간다. 담담 구구는 어째서 사라지지 않을까.

“클리프. 파이에가 너를 꿰뚫어봤다고 생각해?”

이전에 클리피가 맛 없는 인간에 대해 물어본 것과 비슷한 어투로 담담이 묻는다. 클리프는 머리에 얹은 오르그의 배가 빵빵해졌다는 것을 느끼다가 천천히 담담의 질문으로 의식을 돌린다. 파이에? 아주 잠깐 완전히 잊고 살았던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애가 있었지. 클리프는 파이에에 대해 아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파이에가 남긴 말들은 오래 곱씹어 보고는 했다.

“적어도 내가 인간에게 느꼈던 감정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되었지.”

“흐음…… 파이에가 들었다면 정말 기뻐하겠네. 그애는 너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했으니까.”

담담의 목소리는 노래처럼 감미로웠다. 클리프는 그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오르그만이 담담과 클리프의 대화를 흥미롭게 귀 기울이며 수염을 움찔거렸다. “파이에는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어. 오해와 착각 속에서 너를 열렬하게 사랑했지. 넌 사람들 틈에 어울려 살았으면 지금보다 더 훨씬 잘 살았을 거야. 이제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클리프는 이 말에 소름이 돋을 만큼 기분이 나빴고,

“네가 기분 나빠할 것을 좀더 말해보자면 우리는 조금 닮은 것 같아.”

이 말에는 정말 기분이 나빠서 구역질이 넘어오기 직전이었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고작인 장기들이 담담의 말에 뒤틀려 각각 비명을 내질렀다.

“뭐? 당신,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너무 오래 살아서 노망이라도 난 것 아니야?”

“음…… 그야 그렇잖아. 인간의 곁을 떠나서 식인요괴와 함께 평생을 보내는 음침한 인간이 너와 나 말고 또 어디 있겠어?”

“치키타는?”

“응? 그애는 줄곧 인간과 더불어 살았는걸. 자신이 요괴라고 착각한 라 라므 데라르와는 십여 년 정도밖에 지내지 않았고. 그마저도 그 아이가 온전한 인간이 되길 선택했으니까 치키타 구구는 계속 인간들과 살았던 셈이지.”

클리프는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찬다. 인간은 삼백 년을 살아온 인간과 오백 년을 살아온 유령의 대화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클리프는 언성은 날카롭게 높아지고 담담은 졸린 듯 띄엄띄엄 이어가지만 둘 중 누구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르그는 클리프가 어디까지 흥분할 수 있는지 흥미진진하게 살펴보았다. 작은 심장이 도근도근 움직이는 게 클리프의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담담은 발치까지 밀려오는 바다 거품을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나는 인간이 싫어. 인간 중에서도 제 안위 밖에 모르는 치들을 가장 두려워했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내가 아주아주 오래 살아도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싫었어. 끝내 그들과 섞여들어 살지 못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난 혼자였어.”

“너도 네 안위만을 신경쓰면서 마구잡이로 요괴를 만들어냈으면서? 데라르가 너를 죽여주길 원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그애 하나만 만들어내지 그랬어?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때까진 너도 주술을 부리는 구구 가의 사람이었을 테고. 네가 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를 않아.”

“음…… 그건…… 그러니까…… 외롭잖아.”

너무 뻔뻔하다. 클리프는 데라르의 얼굴을 가진 여자를 무턱대고 싫어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백 년을 넘게 살았다면 뭔가 손톱의 때 만큼이라도 클리프가 가늠할 수 없는, 의연한 대답이 돌아오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파이에를 요괴로 만든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이상 더는 부정적인 감정을 쏟을 필요가 없을 줄 알았다. 제일 열이 받는 건 담담이 하는 말은 발끈하게 하더라도 클리프가 직접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삼백 년을 살아온 클리프도 오르그가 이 세상에 없다면 죽는 것이 낫다고 실감했으니까. 치키타와 라의 곁에서 오르그가 되돌아올 방법을 찾고 싶었지만 무엇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수만 명의 인간을 죽이고자 마음 먹었을 만큼 클리프도 함께 하고자 하는 존재가 있었다. 이 땅의 인간들과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고, 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도 서로 비슷했을 것이다. 십대 중후반 즈음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생명과 자연에 흥미를 잃었을 테고, 인간이 지긋지긋해서 곁에 있는 요괴만을 각별히 사랑했을 것이 뻔하다. 두 명의 인간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클리프는 그저 한 명의 나그네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사내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인간이 죽는 만큼 수 많은 인간이 태어난다. 깊은 동굴 속에서 오르그와 함께 은둔했다가 마을을 내려가면 자신을 전혀 모르는 이들과 섞여 살아가는 그런 방법을 누가 모르나. 그러나 클리프는 세상의 모든 인간과 오르그 중에 오르그를 택한 인간이다. 죽은 인간 뼈에 붙은 살점만을 뜯어먹으며 살다가 귤이라는 시큼하고 달달한 생물을 맛 보게 해준 오르그였다. 너무 많은 병사가 죽어 사방에서 시취가 풍겨도 그게 고통스러운지도 모른 채 자랐던 클리프에게 새콤한 귤냄새를 맡게 해준 오르그만이 특별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식인귀 사냥꾼이 되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다치게 하고 클리프를 죽이려고 했다. 자신과 함께 앞으로 80년만 더 살아보자고 권해준 건 오르그 뿐이었다. 오르그는 클리프에게 미래를 주었는데 다른 인간들은? 매일같이 전쟁이 일으켰던 인간들은? 척박한 땅에 살아가야만 했던 가족들을 못 본척 해온 인간들은? 매서운 생각이 클리프의 목구멍 안쪽을 찔러온다. 그들만 생각하면 여전히 바늘이 송곳처럼 부풀어 올랐다. 몸안에 뎅그렁 뎅그렁 굴러다니며 클리프를 아무렇게나 푹푹 찔렀다.

클리프는 옆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모래에 그와 함께 했던 요괴들의 이름을 쓰는 담담을 훽 쏘아본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 여자는 꺼림칙했다. 니켈 샹샹이 몇 번 만나지 않은 자신을 대놓고 꺼려했던 것처럼 클리프도 이 여자의 곁에서 호흡하기도 싫었다. 담담은 자신이 적은 요괴들의 이름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부드러운 모래를 톡톡 털어낸다. 후, 입으로 바람을 불어 남은 모래를 멀리 날려보낸다.

“클리프. 너는 오르그를 잃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클리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오르그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일이었으니까.

“나도 오르그가 인간을 먹지 않아서 말라 죽을 지경이 된 적이 있었어.”

“그 고통이 내가 겪은 고통보다 가볍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오르그를 잃은 건 아니잖아.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을 무시해도 될 만큼 넌 오르그가 소중했으니까.”

진저리가 나는 듯 클리프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뜬다. 다 아는 과거, 이미 지나가버린 사건, 더는 후회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나는 어째서 너를 위해 그 정도도 하지 못했을까…….”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인가. 이불에 감싸듯 바람을 품에 안으며 담담이 그와 함께 ‘백년’을 하던 요괴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말. 클리프는 담담 구구가 어째서 이 경계에서 머무르는지 알 것만 같다. 다 괜찮은 줄 알았으면서. 죽는 건 무섭지 않고 그저 졸리다고만 했으면서. 자신이 만든 모든 아이들과 함께 떠났으면서도.

클리프가 한숨처럼 차갑게 말한다. 머리카락 주변에서 빛이 튕겨오 오르고 사라진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파도는 해변에 머무르며 모래를 적신 그림을 그리고 한번도 땅에 앉지 않는 갈매기들이 잊지 않고 울음을 흘린다.

“담담 구구. 너랑은 말이 안 통해.”

“그래? 난 우리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하고 싶은 말만 하니까 그런 거겠지.”

흐릿한 하늘과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바다 사이 어딘가를 가늠하는 듯 담담은 먼 곳을 바라본다. 담담의 시선과 상관없이 클리프는 오르그의 볼록 나온 배를 아주 약한 힘으로 쓰다듬는다. 빛을 머금고 소화하는 데에는 바깥의 시간으로 약 하루가 걸린다.

“난 나의 가족들을 모두 잃은 느낌이었지. 난 너무 외로웠는데…… 용기가 없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고 말하면 믿어줄래?”

담담이 웅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라 라므 데라르가 떠올랐다. 데라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운 나머지 수 많은 인간을 죽였다고 말했다.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인간으로 허기를 채웠지만 혼란만 깊어졌을 것이라고 속상한 듯 말하던 치키타의 모습이 겹쳐진다. 치키타는 라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우리가 늘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치키타는 라 라므 데라르를 아끼고 사랑했다. 배려심이 많지만 유약하지는 않아서 재미있는 아이였다. 구구 가를 한동안 떠나 있었던 클리프에게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클리프를 형처럼 뒤따라오던 그애를 잠시나마 생각했다.

삼백 년도 전의 일이지만 클리프도 가족을 잃었다. 가족처럼 가까워진 이들을 두고 떠났다. 그게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선택이 자신의 의지대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어떤 선택에도 옳고 그름은 없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그야 내가 직접 변명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곳에 없으니까. 너는 이렇게 죽은 이의 마지막 말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 경계에 있는 것 아니었어?”

“너처럼 이렇게 쓸 데 없는 말을 많이 하는 인간은 없었어. 게다가 넌 이미 죽어서 심장 속 빛도 잃었으니까 더 볼 일 없고.”

“어머나, 쌀쌀맞아라…….”

구름 사이에 얇은 햇살이 들이친다. 담담은 저런 곳에 태양이 있었나, 하는 얼굴로 구름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이쪽저쪽 움직인다. 잘 보이지 않자 바다의 일렁이는 표면 위로 꿈틀꿈틀 부서지는 햇빛을 보며 후후 웃는다. 졸린 것처럼 목소리가 가물가물하다. 클리프. 그래도 말이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명이 주어져도 이번 생애처럼 요괴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하지 않겠어……? 이 삶이 후회되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지껄이든지.”

클리프는 바위에 등을 기댄 담담을 내버려두고 자리를 떠난다. 담담은 클리프의 뒷모습에, 클리프의 가슴팍에 안겨 어깨 너머로 자신을 보는 오르그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오르그의 꼬리가 담담의 손동작과 비슷한 속도와 각도로 흔들린다. 클리프는 흰 모래를 밟는다. 계속 걸었다. 모래가 신발을 덮는 감각을 느끼며, 파도가 밀려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저 여자는 정말 기분 나빠…….

6

담담이 자고 깨어났을 땐 근처에 인기척이 없었다. 오랜 시간 동굴 속에서 늘 혼자 지내왔기에 아무도 없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담담의 입에서는 “클리프? 오르그?” 라며 작은 부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금방 그와 함께 백년을 시작한 요괴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운다. 챤다르…… 기디…… 파르고…… 모코…… 싱싱…… 모두 다 어딜 갔을까. 왜 나는 이곳에 혼자 오게 된 걸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담담은 젖은 모래를 밟는다. 길게 해변을 따라 걸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손으로 만져지지 않으면. 내 곁에서 온기를 나눠주지 않으면……. 바스라질 것처럼 작은 소리로 허공에 속삭인다. 클리프와 오르그를 찾기 위해서 모래 위에 곧 지워질 발자국을 새긴다.

*

바다에 작은 돛단배가 떠밀려 왔다. 사람 하나 겨우 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배 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정확히 담담이 앉아있던 경계의 해변에 배를 댄다. 파도가 배 아랫면을 철썩철썩 때렸다. 가야할 길을 이탈해버린 담담을 꾸짖는 듯, 유달리 바람이 세다. 배를 빤히 보던 담담은 고운 모래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담은 주변을 살폈다. 클리프와 오르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라 라므 데라르를 데리러 갔을 때처럼 그에게는 이별에 절차가 필요하다.

담담 구구도 태어날 땐 분명히 혼자서 엄마의 산도를 기어나왔을 텐데. 500년 전이라 그런 건 기억나지 않는다. 죽을 땐 단 한 시라도 혼자이고 싶지 않아 제 손으로 만든 식인요괴들을 다 데리고 떠났다. 요괴들은 육친처럼 담담을 사랑한다. 죽는 순간까지 담담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 그건 오르그가 클리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닮지 않았나. 담담은 빈 배에서 멍한 시선을 거둔다. 바람이 불면 배가 기우뚱 한쪽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 이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걸까. 담담은 고개를 뻗어 흐린 하늘을 본다.

담담의 맞은 편에서 클리프는 바깥의 사람을 보내주고 오르그와 빛의 ‘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르그는 아주 오래 살았고 똑똑하지만 맛을 표현하는 방식은 형편 없었다. 빛을 머금으면 말이지. 입천장에서는 촥- 하고- 번쩍번쩍- 하고 찌르르- 하고 혓바닥에서는 샤르르-하고 파라락- 하고…… 클리프가 우뚝 멈춰 섰다. 담담과 그 뒤로는 작은 돛단배가 보인다. 배? 클리프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린다. 배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담담이 클리프의 곁에 와서 나지막하게 말한다.

“난 저 배를 타고 돌아가야 하나 봐.”

“배를 타고 왔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도 알겠지만 난 여기에 있으면 안 되어서…….”

“빨리 가. 어디로 가는 배야? 지옥?”

“글쎄. 지옥 같은 덴 무섭지 않은 걸?”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얼른 가버려.”

“그래. 이젠 정말로…… 우린 아마 또 만나지는 못할 거야.”

후후, 웃음 소리가 작아진다. 담담이 작은 목소리로 쓸쓸하게 중얼거린다. “난 바보야. 라 라므 데라르에게는 치키타가 그런 걸로 불행해지지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나는 또 내가 만든 망상에 빠져 버려. 내 선택이 그애들이 불행했을 것만 같아. 그애들은 나와 ‘백년’ 따위 하지 않았으면 행복했을 텐데.”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 듣지 못했다. 클리프는 담담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걸 바라본다. 라 라므 데라르가 원했던 모습.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인간. 어느 시기 이후로 성장을 멈춰버린 클리프에게 ‘우리에게도 죽음이 있다.’고 알려준 사람. 두 사람은 늙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걸까. 담담은 우두커니 서서 아무도 태우지 않은 배에서 시선을 돌려 클리프와 오르그를 본다. 무채색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담담의 옷자락과 결 좋은 머리카락들을 마구 흩날린다. 클리프의 머리카락도 오르그의 검은 털도 바람이 어루만진다.

“아아……, 클리프.”

스스로 몇 번이고 죽으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담담은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제 목숨을 끝내줄 라 라므 데라르를 만들었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아니었던가.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500년이라는 시간은 나라는 존재를 바닷바람에 으스러질 만큼 연약하게 만드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켜켜이 쌓인 담담 구구의 시간이 휘발되어 저 멀리 날아간다. 저건 늘 보아왔던 홀가분한 미소인가, 삶에 미련 가득한 울음인가. 클리프는 알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나 이 세상의 무엇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라 라므 데라르처럼 담담이 웃는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게 너무나 무서워…….”

7

기묘한 만남 이후 담담 구구는 이 땅에 나타나지 않았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클리프와 오르그의 시간 개념은 이전보다 더욱 허물어진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보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더 무섭다던 여인이 남긴 선물은 경계의 바다에 가느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어디서 어떻게 이 땅에 심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담담은 나무를 주고 떠났다. 클리프는 그 초록잎 무성한 존재가 담담의 나무라는 걸 보자마자 알았다. 밝은 해가 들지 않는 경계는 식물이 자라기 힘들다. 이곳에는 비옥한 땅과 흐르는 물이 없다. 경계에 홀로 우뚝 자란 푸른 나무가 이질적이었다. 열매도 맺지 못할 것처럼 가느다란 가지의 나무는 경계에 뿌리를 내렸다. 지독하게 외로워서 몇 번이고 이성을 잃었던 여자의 선물인 만큼 클리프와 오르그가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나무다. 하여간 징그러운 여자. 클리프는 오르그 몰래 얼굴을 구기며 귤나무를 노려본다.

“이건 귤나무잖아!”

와아, 오르그가 기쁜 목소리로 감격했다.

*

조금 더 시간이 흘러 귤나무엔 청록색 귤이 맺혔다. 혼자 조용히 꽃 피우더니 바람에 이리저리 꽃가루가 수분 된 것 같았다. 초록색 귤은 해무에 가려진 느슨한 햇살 아래에서 노랗게 익어갔다. 생전 담담 구구가 오백 년간 ‘백년’을 했던 식인 요괴들을 품는 것처럼, 그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 식인요괴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귤나무 가지에는 푸른 이파리가 달리고 큼지막한 귤이 열린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귤나무는 꼭 담담 구구를 닮았다. 익지도 않은 귤을 까먹으면 떫고 신 맛이 난다. 담담의 몸을 뜯어먹는 기분이었다. 담담이 기쁜 듯 웃는 소리가 클리프의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온다.

클리프는 오르그의 작은 몸을 손바닥에 얹는다. 오르그의 온기와 무게가 클리프를 숨 쉬게 한다. 클리프는 자신과 함께 이 경계로 끌려온 작은 존재를 끌어안았다. 제 뺨을 기댄다. 오르그가 호응하며 새까만 콧등을 클리프의 뺨에 슥슥 문질렀다. 좁은 면적이지만 안정적인 온도와 도톰한 몸. 까맣고 부드러운 털. 커다란 귀. 노란 눈동자. 오르그는 살아있고 건강하다. 그것만이 클리프의 동력이자 위안이다.

“클리프가 정말 좋아.”

식인 요괴에게 ‘먹기 아까울 만큼’ 클리프는 사랑받는 중이다. 오르그는 영영 클리프를 먹지 못할 것만 같고 그것이 사실이 되면 어떡하나 고개를 떨군다. 조금 더 세게 오르그의 작은 등을 손바닥으로 꼬옥 눌렀다. 삼백 년 간 익혀온, 오르그가 가장 좋아하는, 딱 적당한 압박감의 손이다. 오르그는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클리프가 있는 힘껏 힘을 주면 작은 뼈가 부러질 것 같다.

클리프가 오르그를 잃는 상상만으로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느낌으로 경직되어 버린다. 오르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르그.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저 나무가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나 이곳에서도 달콤한 귤향기가 넘쳐날까……. 질문을 목 아래로 꾹꾹 눌러 참으며 클리프가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오르그가 정말 좋아. 오르그가 제일 소중해.”

*

경계에 온 이후로 클리프는 굳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천여 명이 넘는 인간들의 빛을 오르그에게 먹였다. 그 중에 발란스 샹샹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크고 건장한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이른 결혼 후 득녀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큰 딸아이는 벌써 출가를 해도 될만한 나이라고 한다. 자라나는 두 아이도 있고 새듀스와도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사고가 생겨 발란스는 경계의 바다에 왔다. 그는 클리프를 만나 반가워하며 호쾌하게 웃었다. 치키타와 라가 너를 만나면 정말 좋아할 거라고. 이 바다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이들처럼 가뿐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 또한 클리프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다고.

8

경계의 바다에서 클리프와 오르그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 이들이 있다. 오르그의 보드라운 털을 매만지던 클리프는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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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의적인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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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있는 금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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