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키타구구 조각글들 2
Live Forever (2024.8.5)
클리프는 이따금 깊은 숲에서 마을을 향해 내려온다. 그런 여흥이 필요할 때도 있다. 울창한 가지에 가린 산기슭에서 자신의 팔을 베고 누워 민가의 불빛을 바라본다. 그곳에 클리프와 같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 활달한 목소리와 발소리가 거리에 연신 울려퍼진다. 굴뚝에는 뭉게뭉게 연기가 오른다. 부엌에는 밥 짓는 김이 하얗게 피어난다. 향긋한 쌀 내음이 도달하기에는 숲이 너무 멀지만, 저녁 하늘을 머리에 이고 걷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쉽지 않은 심심풀이가 된다. 물동이와 나뭇단을 진 일꾼들과 부른 배를 안은 여인들이 지나간다. 뛰어가는 아이들을 뒷짐 지고 따라가는 노인들도 보인다. 다같이 클리프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삶을 누리는 모습이다. 일상사가 영원할 것처럼 평화로운 꿈에 흠뻑 담긴 채로.
클리프는 길게 누인 몸에 흘러다니는 전기를 느낀다. 손끝을 두어 번 까닥하면 충격파의 씨앗이 형성된다. 한 점에 모은 기운으로 저 근심 없는 마을에 대홍수를 일으킬 수 있다. 두 번째는 아마 첫 번째보다 더 쉬울 것이다. 심판의 날을 강림시킬 수 있는 힘을 지척에 둔 것도 새까맣게 모르고 천진한 웃음소리가 쏟아진다. 부모가 대문을 열고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부르는 것도 못 들은 체하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술래잡기에 열심이다. 지금쯤 치키타와 라의 첫째도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클리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화에 동참한다. 어둠이 깔리고 거리가 한적해지면 창문 너머 반짝이는 등잔과 솔불만이 마을을 밝힌다. 마치 밤바다에 떠다니는 윤슬 같이 몹시 황홀하게 보인다.
저들의 세상에 아무것도 준 것이 없고 받은 것이 없다.
불빛이 다 꺼지면 밤이 드러난다. 촛불 하나에도 가려지는 아슴아슴한 별빛이 그제야 함빡 쏟아져 내린다. 별 박힌 배경은 깊고 검푸르다. 숲속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클리프처럼 짙은 어둠이 익숙한 사람은 많지 않다. 광막한 밤하늘을 바라볼 사람이 아무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낭비일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밤하늘 아래 살아가고 또 스러지는 것이 낭비일까? 클리프는 호사스러운 물음을 누린다.
오르그가 클리프의 배 위에 동그랗게 꼬리를 말고서 함께 별을 구경하고 있다. 오르그는 클리프가 우주에 내린 까만 닻이다. 삼라만상의 무게중심이 오르그 안에 있다. 지금은 클리프도 오르그도 맑게 깨어 있지만 어느 한쪽이 잠든 채로도 긴 세월을 흘려보냈다. 오르그에게 빛의 구체를 몇만 개 먹였을 때는 주체할 수 없이 편안한 졸음이 몰려왔다. 저항할 방법이 없어 칠 년을 자야 했다.
이 밤은 청명하고 걱정이 없다. 그믐달이 동쪽으로 몸을 한껏 기울이고 시린 빛을 발한다.
오르그는 기다란 귀를 클리프의 심장께에 대고 있다. 클리프는 그곳에 있을 흰 빛이 오르그의 눈에 보이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저 별빛만큼 아름다운지도.
어딘가 (2024.7.30)
아아, 나의 구세주는 얼마나 볼품없었던가! 전설의 성배가 아름다울 것은 알았지만 그토록 꾸밈없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는 역청을 뒤집어쓴 듯이 새까만 털이 번들거리는 쥐 한 마리를 끌어안고 풀 속에 누워 있었다. 눈이 멀 듯한 한낮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마치 햇빛으로 구워지는 백자 같은 모습으로. 가시와 발톱에 갈가리 찢긴 넝마주이마저 명백한 상징이었다. 그 천이 세월을 입어 해져 간 기나긴 시간이 그의 몸에는 어떤 상흔도 남기지 못했다. 그의 피부는 밀랍 같아 그 젊음이 청년보다도 소년에 가까웠으며, 밝고 부드러운 머리칼은 흰 눈발이 내려앉는 겨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계절의 여린 새순이었다. 감히 구세주를 향한 걸음을 뗄수록 불로불사의 단서들도 나를 향해 한 발씩 다가오며 명징해졌다.
당신이십니까?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 이상의 물음은 모두 낭비였다. 구세주는 유리알처럼 옅고도 깊은 바다보다 아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널브러졌던 윗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에 아무런 미동도 없었으나 대신 검은 괴물이 앞으로 나섰다. 다람쥐처럼 둥근 꼬리를 부풀리고 짧은 등을 곧추세운 그것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의 신은 전능한 손을 들어 괴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형한 노란빛 눈이 경계를 누그러뜨릴 때까지.
어둠 속에서 제가 갈구하던 빛이십니다.
내가 나아가 큰절을 바치고 온몸을 떨며 고백하여도 신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도 무감정한 인상은 인간사를 초월한 채로 다른 평면에서 살아가는 천사와 같았다. 바로 그런 구원자가 끝에 이르러서 선사할 구원이 어떤 형태일지 어쩌면 나는 예감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곰팡이 떼는 오래 전부터 내 정기를 빨아먹고 지성을 망쳐 놓았다. 이미 나는 쇠잔하여 허물어지고 있었다. 한없이 미약해진 내가 신을 꿰뚫어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구세주는 참으로 무뚝뚝한 소년이었다. 존대를 거북해했으며, 좋아하시는 음식이며 풍경을 여쭈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하잘것없는 미물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이. 성 안의 모든 방을 다 열어 보여드렸지만 그의 마음에 찬 것은 가장 외롭고 초라한 단칸이었다. 돌바닥 한쪽에 짚단이 깔려 있을 뿐 텅 빈 곳이었다. 그는 그 방에 들어간 후로 나오지 않았고, 작은 괴물은 성의 화원을 바삐 돌아다녔다. 괴물은 흐드러져 만개한 야생화를 따다 물고서 쓸쓸한 처소를 꽃송이가 넘쳐흐르는 침대로 만들었다. 그 침대에서 나의 신은 잠만이 하나뿐인 희락인 것처럼 내내 잠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신의 깊은 심중을 조금씩 헤아려 나갔다. 그는 필멸의 존재들에게 박정하기만 한 악마가 결단코 아니었다. 봉우리를 찬란히 터뜨린 뒤 덧없이 떨어지는 꽃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런 깨달음이 용기를 주어서 나는 구세주의 가까이에서,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넋을 잃는 나날이 늘어났다. 수수께끼 같은 경이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어떤 도리로 이다지도 가냘픈 몸 안에 홀로 수만의 목숨을 추수하는 권능이 깃들었단 말인가?
그 많은 시신과 혼령은 검은 괴물을 위함이었을 뿐 신의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간신히 손에 쥔 금단의 술법들조차 그에게는 필요치 않았다. 자신의 몸을 먹이지도 돌보지도 않고서 그는 불로불사를 이루어 냈다. 대관절 이보다 더 신비한 불가사의가 있겠는가? 시간의 물살 위를 도도히 유영해 온 그의 발자취를 더듬노라면 나는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피안에 먼저 다다르기까지... 환각에 가까운 꽃향기 속에 소년의 가슴이 고르고 조용하게 오르내리는 모습은 나 역시 그 영원한 푸르름에 도달했다는 최면에 들게 했다. 그분과 나 오롯이 둘만이서, 이름 모를 언약의 땅에, 환상적인 외딴섬의 해안에...
새까만 수호자가 꽃구경을 나간 틈에 나는 신의 남루한 옷깃을 잡고, 대리석처럼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소년이 눈을 깜박일 때 산란하는 빛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방이었으므로 나의 모든 고백도 은밀한 것이 되었다. 창문은 천장 가까이 달린 것이 전부였고 하나뿐인 출입구는 안에서 굳게 잠글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그 방을 고른 것이었을까? 아무도 침범하지 않아 마땅한 은신처에서 내가 밀실의 봉인을 깨뜨리고 만 것일까? 모론 조정의 황제이자 성채의 주인은 그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도, 집 없는 소년에게 기거할 공간을 빌려주어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도 돌이켜 보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지만 기뻐하지 않았다. 나를 징벌하지 않았지만 내가 있으면 잠에 들지 않았다. 우리의 목소리는 공중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그때처럼 위대한 적요의 마법에 운명을 내맡기는 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높은 창으로 또다른 신이 우리를 굽어보다가 내게서 고개를 돌렸는가. 어디에도 없는 어딘가를 목격하였는데 내 종착지는 어찌하여 그곳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천상을 엿보고 낙원을 맛보다가 기어이 내 손으로 망가뜨리고 만 것일까? 아아, 비참한 최후에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슬픔이여. 내게 알맞은 결말을 두 손 가득히 받아드는 슬픔이여...
Going Home (2024.8.3)
돌아가자니? 클리프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라는 듯이 치키타는 말했다. 집에 가는 여정은 여러 날의 야영으로 이루어졌다. 치키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클리프를 멀쩡한 상태로 데려가기엔 너무 화가 나 보였다. 그러나 늑대를 막는 부적을 연신 써내려 클리프를 보호했으니 언행이 딱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그 부적을 치키타에게 가르쳤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치키타에게 알려 준 기술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정말 그랬는지는 불확실했다. 칠 년 전 무렵의 모든 사건이 불투명한 비눗방울 너머를 건너다 보듯이 몽롱하고 아스라했다. 그 단란하던 때가 돌아갈 곳인가? 그러나 그때도 클리프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가 되어 있었는데. 치키타가 몰랐을 리 없고. 그저 상냥하기만 한 사람처럼 보여도 치키타는 바보가 아니었다. 가끔은 그 점이 유감스러웠다...
라가 모닥불을 지핀 야영장은 숲을 감싸 덥히는 따스한 기온과 무관하게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깔깔한 침묵이 살갗에 모래알을 비벼댔다. 간단한 수프를 끓여서 요기할 때도, 걷거나 말을 탈 때도. 클리프가 여러 번 넋을 놓고 멈추는 바람에 치키타가 고삐를 잡고 말에 태워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날도 치키타는 돌아보기는커녕 머리를 질끈 묶은 뒤통수만 보여주었다. 눈을 떼지 않을 테니 각오하라더니, 클리프에게 눈을 두는 때가 없었다.
마지막 날에야 겨우 알았다. 클리프가 다른 데를 볼 때만 시선이 느껴졌다. 클리프는 부러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불편해지는 기분은 오래 전에 졸업했다. 그 사람이 치키타라 해도.
비현실감이 계속되었다. 발밑도 머릿속도 붕 떠 있었다. 잠도 오지 않는데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 같았다. 칠 년이나 잠을 잘 동안 꿈꾸지 않은 대가를 치르는 건가? 안식하면서도 저편에서 일렁거리는 과거의 기억들 틈에 언젠가는 치키타와 데라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섞여 있었다. 스쳐 지났던 잠깐의 온기가 그리워서? 차를 마시던 아침 식탁과 소꿉놀이 같았던 가업과 사소한 농담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었길래? 그걸 바라서 치키타의 집에 기거했던 것도 아니면서. 클리프의 집은 산과 들이었다. 아니, 클리프에겐 집이 없었다. 그런데 왜 치키타와 다시 만나야 한다고 느꼈는가? 페트라스 일당을 처치하는 데 협력을 받기 위해서가 이유의 전부였다면 좋았으련만. 클리프의 세상에서 오르그 말고는 전부 무가치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 줄 알았고, 그래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시간이 클리프의 삶을 무자비하게 연장시킬수록 그건 점점 더 힘든 일이 되어 갔다.
치키타가 문을 열고 클리프를 먼저 들여보냈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하릴없이 옛날로 걸어들어온 듯했다. 낯익은 나무 식탁에 귤을 담던 밀짚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클리프가 자주 쓰던 컵도 그대로였다. 문가에는 치키타가 쌀쌀한 날씨에 일을 나갈 때마다 걸치던, 하이카가 직접 바느질해 준 외투가 걸려 있었다. 수납장으로 쓰이는 궤짝 위에 니켈의 유골함과 마른 꽃을 꽂은 유리병이 있었다. 벽지의 얼룩, 마루의 패인 곳, 모든 것이 칠 년 전과 별다르지 않았다.
클리프로서는 그가 지금 느끼는 것이 사람들이 집에 돌아온 기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보통 인간들이 가진 정상적임의 잣대가 자신에게 없다는 것만을 뼈저리게 느꼈다. 밀어닥치는 향수를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아, 드디어 집에 왔구나, 내 자리에 돌아왔구나,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집 뿐이노라 하고 기뻐할 줄 아는 생애를 살아오지 못했다. 기껏해야 일 년 남짓 함께 살았다고 이곳에 클리프의 지분이 생겼을 리가 없다는 의구심만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그 동거는 나름대로 할 만했다. 가끔씩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에 꽤 가까웠을 것이다. 클리프에겐 이전에 없던 경험이었고, 부모를 잃기 전의 초기 생애와 닮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 여기가 클리프의 집이기도 하다니, 가당치 않았다. 나랑 약속했잖아. 언젠가 돌아온다고. 치키타의 말을 되감아 곱씹어도 와닿지 않았고 그 말이 현실이 된 것도 실감나지 않았다. 이곳이 클리프에게도 집이라고 확신하는 치키타도 유별났지만, 역시 클리프가 귀소의 감각을 모르는 것이리라. 이번에도 클리프가 문제였다.
현관에서 두 번째 방에 클리프가 쓰던 침대가 그대로 있었다. 치키타가 안쪽의 제 방에서 풀썩 앉는 소리가 났다. 그 방의 옷장에는 라가 먹어치우고 클리프가 부순 유골이 들어 있을 터였다. 이 집에 구구 가의 죽음과 삶이 모두 깃들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라와 니켈과, 아주 어쩌면 오르그와 클리프의 것도... 그런 곳이 집인가? 클리프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멀리서 무감하게 바라보고 또 무감하게 끝냈지만 좋든 싫든 이 집의 인물들이 클리프에게 가지는 무게는 남달랐다. 그 무게가 자신을 질식시키는 납덩이 같을 때도 있었다...
그렇다면 집이란 너무 무거운 이들이 있는 곳의 다른 이름이었다. 마음대로 잘라내 버릴 수 없는 족쇄. 그랬다간 반드시 혹독한 값을 바쳐야 하는 멍에. 치키타의 옷장 속이 칠 년간 어떻게 변했나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클리프는 옷장을 열어 보지 않았다.
언젠가 (2024.8.4)
“나는 이제 죽지 않아. 그건 너도 잘 알잖아?”
아무리 클리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흉내였다지만, 최근 그런 말을 내뱉은 것 자체가 무색해지는 밤이었다. 누군가 클리프 위에 세 발을 짚고 올라타서 한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이제 막 클리프보다 몸집이 건장하게 벌어지기 시작한 윤곽이었다. 달빛 아래 은은한 명암으로만 보이는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옷소매로도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내 목젖을 따라 실금이 그어졌다. 단도가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기 직전의 찰나로도 고민할 시간은 충분했다. 깨지 않은 척 그대로 당해 줄까 하는 선택지가 클리프 앞에 주어졌다. 그러나 기껏 돌아온 오르그를 고작 이런 일로 경악하게 할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클리프가 눈을 뜨자 남자는 흠칫 놀라 주춤했다. 당황한 어깨가 정직하게 움찔거렸다. 방어라면 모를까 공격에 있어서는 이 집에 사는 사람들 누구도 클리프를 상대로 승산이 없었다. 발란스가 잠행에도 이 정도로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그래 봐야 거기가 끝이었다. 오르그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오르그가 죽어갈 때의 클리프였다면 목을 관통당한다고 죽지 못하면서도 찔려는 주었겠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발란스는 역시 감이 좋았다. 물러날 때를 금방 깨닫고 클리프의 손을 힐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발란스는 금방 실토했다. 치키타가 가업으로 출타 중인 틈을 타서 새듀스의 숙원사업을 대행하려 했다고. 복수의 날을 갈아 온 새듀스가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주저하며 가슴만 앓기에 두고 볼 수 없었는데,
“내 의지가 부족한 건가...?”
발란스는 머리를 긁으며 한숨지었다. 클리프는 자신을 살인 미수한 용의자를 위로해 주는 기묘한 상황에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 넌 나한테 직접적인 원한이 없으니까.”
크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일전에 새듀스를 구하려고 치키타의 피를 채취해 파이에에게 바쳤을 때도 느꼈다시피 발란스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새듀스 대신 직접 손을 더럽히려던 오늘도 그런 극진함과 헌신적임의 일환이었다.
“좋은 남편이네.”
클리프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암살이 싱겁게 실패한 후 둘은 머쓱해진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달밤이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클리프는 신경을 곤두세우려 했지만 정신이 나른하게 무뎌진 탓에 잘 되지 않았다. 요즘은 하도 별일을 쉴새없이 겪었더니 주변이 조금 조용한 것 정도는 이상한 축에도 못 들었다. 오르그의 숨소리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 클리프는 쌕쌕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클리프도 오르그를 위해 사람을 죽이려 했고 발란스와 달리 성공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발란스처럼 다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르그가 나지막히 코를 골기 시작했다.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오르그는 꽤 시끄럽게 자는구나.”
발란스가 목소리를 낮추어 호들갑을 떨었다. 클리프는 발란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저기, 클리프.”
“왜.”
“너한테도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 치키타 형님한테는 오늘 말했지만 새듀스한텐 아직 비밀이야.”
“뭐길래?”
“새듀스가 곧 아이를 가질 것 같아. 요즘 부쩍 피곤해하더라고.”
클리프는 아이를 밴 여인을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치키타를 만나기 전에 혼자 산중에서 방랑하는 생활을 할 때, 이따금 마을 쪽으로 내려와 바라보면 임산부들이 신것만 찾거나, 그들의 남편이 새콤한 사탕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는 풍경을 보곤 했다.
“귤을 따다 줄까?”
클리프는 그렇게 제안했다. 발란스는 또 한 번 놀라더니 클리프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뜻 모를 시선이 불편해 클리프가 피부에 뾰족뾰족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아질 무렵에 발란스는 씩 웃었다.
“아직은 아냐. 입덧을 시작하려면 한참 있어야 할 거야. 그냥 뭐랄까, 내 직감으로 새로운 사람이 다가오는 걸 느끼는 거야. 난 감이 좋잖아? 하지만 나중엔 부탁할지도 몰라. 넌 야산의 귤나무를 다 알고 있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클리프가 오르그 다음으로 절친한 우의를 맺은 건 귤나무들이었다. 어떤 나무의 열매가 향그러우며 어떤 나무의 잎사귀가 가장 무성한지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었다. 인적 없는 산을 휘저으며 걷다 보면 가끔은 식물과 말이 통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오르그가 기운을 잃고 아무 말도 못하던 동안에는 정말로 귤나무들만이 그나마 클리프의 대화 상대였다.
“딸이야, 아들이야?”
“거기까진 모르겠네. 나한테 묻는다면 말야, 첫째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아들이어도 좋고.”
발란스의 얼굴에 금세 달콤한 꿈이 떠올랐다. 역시 행복에 젖어 들뜬 얼굴이 발란스에게 어울렸다. 그런 표정을 타고난 사람 같았다. 클리프는 턱을 괴고 점쳐 보았다.
“너를 많이 닮았겠지.”
“응. 클라후트를 닮아도 괜찮을 것 같아.”
“만난 적이 있어?”
“어렸을 때 자이셸 가와 주술 교류로 새듀스의 형님들을 다 만나 보았어. 클라후트도 결계 실력이 엉망이었지...”
발란스는 생각에 잠겨 클리프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생각 중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새듀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난 파이에가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아. 너랑 빼닮았냐 하면 그건 아닌데도, 어딘가 비슷한 인상이었거든.”
자신을 닮은 아이를 키우는 새듀스와 발란스를 상상하려 해 보아도 변변히 떠오르는 장면은 없었다. 화기애애한 가정을 담은 이미지 한 장도 채 그려내지 못하고 클리프의 마음속은 산란해졌다. 언젠가 새듀스와 가족이 되기엔 지나치게 많은 일이 벌어졌다. 클리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새듀스도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클리프를 처단하고 싶어하면서도 칼을 빼들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새듀스는 결의를 굳건히 다지고 클리프는 그녀의 손에 고분고분 죽어 주는 편이 훨씬 쉬울 텐데. 오르그만 아니었더라도...
모든 게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클리프는 느낀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너무 늦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떠나간다... 여상하고 가벼운 기분이었다. 발란스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읏차 하며 일어서더니 기지개를 켜고는, 진정 어린 말투로 연신 사과했다.
“네 상처는 아침에 라에게 봐 달라고 할게. 미안해, 클리프.”
“됐어.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클리프는 목을 만져 보았다. 아주 얕은 자상의 가장자리를 따라 벌써 딱지가 앉는 중이었다. 그럼 마저 잘 자. 클리프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당부를 무책임하게 남긴 발란스가 손을 휘휘 흔들고 나갔다. 침실에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를 걸어 두었다는 것을 클리프는 비로소 깨달았다. 귀뚜라미 울음과 풀잎을 흔드는 밤바람의 노래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클리프는 오르그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규칙적으로 들썩거리는 리듬이 깊은 안심을 안겨 주었다. 클리프는 내도록 같은 자세로 앉아서 서랍장 위에 놓인 흰 자갈이 내뿜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았다.
아침이 오자 늑장을 부리며 나갔지만, 별 수 없이 식탁에 먼저 앉아 있는 새듀스를 마주쳐야 했다. 졸음이 가시지 않은 두 눈동자가 클리프의 얼굴을 건성으로 훑고 내려가더니 화들짝 기겁하며 크게 뜨였다. 검붉은 실조각을 흘린 것처럼 기다란 상처 쪽으로 새듀스의 시선이 집요하게 쏟아졌다. 클리프는 비딱하게 몸을 돌려 눈길을 피하며 커다란 주술책을 펼쳤다. 발란스가 아직 간밤의 일을 털어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발란스가 비밀로 하길 바란다면 클리프는 비밀을 무덤까지도 가져가 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기 전에 귀가한 치키타의 눈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외투를 벗다 말고 클리프 쪽을 보자마자, 치키타는 날카롭게 미간을 좁혔다.
“다쳤어?”
무엇을 의심하는지 뻔했다. 새듀스의 범행 아니면 클리프의 자해. 치키타가 생각하는 둘 다 틀렸다는 게 우스워서일까, 갑자기 모든 게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클리프는 간단히 대답했다.
“귤나무 가지에 긁혔어.”
치키타는 반신반의하는 눈치로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클리프는 어깨만 으쓱였다. 발란스만이 좌불안석이 되어 서성이다가 끝내 헛기침하며 모두의 주의를 돌렸다.
“파이에가 죽기 전에 했던 얘기를 좀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서 그들은 함께 담담의 은신처를 찾아가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클리프는 파이에가 남긴 자갈을 손바닥 안에 꼭 쥐었다. 끝까지 걱정을 거두지 않은 치키타가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클리프, 출발하기 전에 상처를 봐야겠어. 도와 줘, 라.”
데라르는 치키타의 신임을 받을 때마다 흐음, 흐음 콧노래를 불렀다. 클리프는 다가오며 들여다보는 데라르를 뿌리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데라르가 말끔히 낫게 해 주어 없었던 상처로 돌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클리프는 목이 잘 보이도록 얌전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너를 모르고 (2024.8.5)
백 년과 그 다음에 이르도록 나는 그 아이가 가진 단면들을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그애는 이물질도 불순물도 없이 내부가 투명한 보석이면서도, 수없는 각도의 표면을 지녀서 여러 빛을 나타냈다. 표면이라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나만이 그 아이가 어떻게 깎여나가고 차오르며 다채로워졌는지를 더듬어 만지며 알아갔다. 그래서 나만이 그 아이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시간이 끌을 잡고 고독이 정을 들어 만들어낸 그애의 단면들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어. 도움을 받거나 사랑받은 적도. 그런데 그냥 그게 내가 타고난 건가 봐. 인간을 먹으면서 자라지 않았더라도 똑같았을 것만 같아. 이젠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내려놓을 길 없는 슬픔과,
"인간이 고깃덩이보다 대단한 무언가인 척하는 게 역겨워. 결국 뼈에 붙은 살일 뿐이잖아. 그런 주제에 요괴나 물고기나 귤나무보다 뭐라도 나은 줄 아는 게 가증스럽다고. 어쩌면 그렇게 뻔뻔하게 거들먹거리지?"
서슬 퍼런 분노와,
"사람들은 젊음이 너무 짧다고 한탄하더라. 그게 아니라 삶이 너무 긴 거야. 불사의 몸도 아니면서 왜 그런 걸로 괴로워하지? 젊음 이후를 감당하든지, 그렇게 못하겠으면 스스로 해결하면 되는 문제인데."
충실히 사실에 기반한 비관과,
"잔칫상에서 칼집을 내어 나비 날개처럼 펼친 돼지고기와 난초를 꺾어 올린 물고기 알을 보았어. 생명을 죽이는 걸로는 모자라서 사체를 치장하는 걸 즐기고 그걸 요리 문화라고 불러. 도대체 인간들의 잔혹한 탐욕은 어디서 끝이 날까? 인간의 위장이 약하다 해도 불에 지지기만 하면 충분하잖아. 인간이 요괴를 무서워하고 손가락질하는 거야말로 앞뒤가 안 맞는 거야. 그렇게 섬뜩한 짓을 해 대면서 섬뜩한 줄도 모르는 건 인간밖에 없어."
산 아래를 향한 깨끗한 혐오와,
"사랑할 게 없어서 사람을 사랑하다니..."
아이처럼 순수한 경외심. 이와 같은 것들이다. 그애의 찬란함이 내 삶을 가득 채웠다.
어린날 그애는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나를 붙잡고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했다. 앳되고 흥분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오르그! 그거 알아? 잔인한 인간일수록 더 오래, 더 충만한 삶을 누리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더라. 먼발치에서 마을과 도시를 백수십 년간 관찰한 그애의 결론이었다. 대자연 속에 은신한 풀꽃이 되어서. 인간이 독점한 땅만 아니라면 우리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었다. 무더위 아래 차가운 강에 발을 적셨고 까마득히 깊은 협곡을 굽어보았다. 부드러운 거품이 이는 바다를 헤엄쳐 해초를 따기도 했으며 망망한 대평원을 밤낮 없이 가로지르기도 했다. 냄비처럼 용암이 끓어넘치는 분화구가 점점이 박힌 화산자락의 등걸에 걸터앉아 번지는 노을 위로 날아가는 새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겐 천국과도 바꾸지 않을 금광이었다. 그애는 아무도 캐지 않는 나만의 다이아몬드였다. 누구보다 정다웠고 사려 깊었고 진실했다. 어떤 역사가도 기록하지 않을 소년의 목격자라서 내 생애는 영광으로 빛났다. 그 아이가 의미를 불어넣어 내 시간은 덧없지 않게 되었다. 목소리를 잃지 않았더라면 그애에게도 말해 주었을 것이다. 요괴의 떠도는 삶에 ‘누군가를 먹지 않는 것’이라는 목적이 생겼다고. 단 하나 구심점이 생겨 그 힘으로 종결을 향하게 되었다고. 나와 같은 요괴가 아니라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다만 백 년 짧은 생에 걸쳐서 어설프게 깨달아가는 사실이다. 삶의 지향은 죽음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서히 죽어갔다. 꿈속을 떠다니며 나는 막연히 어림했다. 유일하게 그애를 아는 내가 혼몽 속에 이지러지고 나면 아무도 몰랐던 우리의 발자취도 전부 사라지리라고. 우리는 잊혀질 것이라고.
클리프가 인간들의 세계사에 영구히 지워지지 않는 악명으로 이름자를 아로새기기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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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딱다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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