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스파/해리피터] Spidey Bells

크로커다빈 by 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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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레이미ver. 스파이더맨

해리 오스본 x 피터 파커

명품 구두는 그것을 신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진다고 하던가. 재벌의 삶이라 하면 흔히들 비싼 구둣발로 카펫이 깔리지 않은 맨 콘크리트 바닥을 밟을 일 없는 삶을 상상하겠지만 해리 오스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물론 해리는 여느 돈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이동이 필요할 때에는 개인 기사를 대동한 차량을 이용했고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의 개인 사무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보냈다. ‘명품 구두를 신는 사람은 걷을 필요가 없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해리의 구두 역시 눈과 비에 취약하고 흙먼지로 더러워져도 세탁조차 할 수 없는 내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구두를 신을 법한 사람이라면 구두 한두 켤레가 망가지는 일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해리는 종종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의 뒷좌석에 오르는 대신 정돈되지 않아 울퉁불퉁 거리는 콘크리트 길을 걸었다. 그나마 해리의 그러한 일탈이 날씨가 좋은 날에만 이루어진다는 점이 그의 값비싼 구두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이 이마를 간질이는 가을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직 영하로 떨어지기 직전인 겨울의 초입도 뉴욕을 걷기 좋은 시기였다. 거리의 가로수는 낙엽을 전부 떨구어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지만, 오후의 햇빛만큼은 따듯하게 어깨에 내려앉는다. 폐 속을 채우는 차가운 공기와 뺨을 쓰다듬는 포근한 볕의 어우러짐은 오직 겨울의 문턱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하모니였다.

그래서 해리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스케줄로 넘어가는 사이에 짧은 산책을 즐기고는 했다. 해리는 뉴욕의 번화가를 거니는 시간이 좋았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 중에 잠깐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순간이었으며, 지금보다 훨씬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학생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간혹 운이 좋을 때면,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타임 스퀘어를 가로지르는 스파이더맨을 향해 손을 흔들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미드타운이 아닌 다른 곳의 범죄를 쫓고 있는지 스파이더맨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해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한 만큼 청량은 공기는 유난히 더 맑았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에 놓인 형체라고는 고작해야 날아가는 새 몇 마리가 전부였다. 아무래도 오늘 미드타운은 평화로울 예정인가보다.

피터는 늘 뉴욕에서 가장 큰 회사를 운영하는 해리보다도 바쁘다는 듯 먼저 얼굴을 보여주는 일이 없었다. 거리를 거닐다 스쳐 지나가는 스파이더맨의 모습만이 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셈이다. 그리고 해리는 지금 막 그 기회마저도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쉬웠지만 익숙해진 일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무엇보다 평화롭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던가―어깨를 으쓱인 해리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거리 곳곳에서는 발랄한 캐럴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타임스퀘어에 늘어선 상점들 역시 경쟁이라도 하듯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안팎을 꾸몄다. 출입문에는 전나무 잎과 포인세티아로 만든 리스가 걸렸고, 색색의 전구와 가랜드가 붙은 유리벽 너머로는 오너먼트를 잔뜩 달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였다. 해리는 상점가의 장식들을 구경하듯 천천히 걸으면서 피터와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놓았던 어느 겨울을 생각했다. 비록 오래되어 칠이 벗겨진 싸구려 플라스틱 나무에 메이가 직접 바느질한 천 인형 몇 개가 전부였지만 해리가 떠올리는 크리스마스 트리란 늘 아담한 복층 주택의 거실 구석에 세워져 있던 그 볼품없는 트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올해도 결국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해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저택 메인 홀을 거대한 전나무 트리로 채워버릴 수 있겠지만, 늦은 밤의 어둠 속을 전구로 환히 밝히는 순간 함께 할 상대가 없어서야 무슨 의미가 있으랴. 트리는 고사하고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 사지 않은지 벌써 몇 년째였다. 범죄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던가. 아마 올 크리스마스도 파티는커녕 부재중인 피터의 집 앞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내려놓으면서 끝나게 되겠지.

해리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섭섭함을 느끼는 대신 올해에는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아예 날을 잡아 백화점을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만 지나친 고가품은 피터가 난색을 표할 것이다. 그런 것보다는 이런 상점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이 나았다. 이를테면 연말마다 할인 이벤트를 하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머플러나 뷰티 통합 매장에 납품되는 중저가 브랜드의 코오롱 같은 것들 말이다. 술을 마실 줄 안다면 질 좋은 와인도 괜찮은 선택이겠지만 알코올이라면 쥐약인 녀석이니 크닙실트나 델라피의 홀리데이 컬렉션 초콜릿이 더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초콜릿이라면 피터가 아닌 해리의 기준에서 ‘적당한’ 가격으로 고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이 들었다. 설마 하니 300달러짜리 초콜릿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좋아. 해리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이 정해졌다. 눈 속임용 보세 머플러와 시즌 한정 초콜릿 한 상자. 이 정도면 겉보기만으로는 제법 소박해서 피터도 별다른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상점가를 걷는 해리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해리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평소보다 훨씬 복작거리는 잡화점과 장난감 가게의 진열대를 차지한 크리스마스 상품을 구경했다. 작년 선물은 핸드메이드 스웨터와―물론 해리가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맞춤 주문이었다는 뜻이다―Silent Night Holy Night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동그란 오르골이었다. 사실 그 오르골을 고른 건 노랫소리가 아닌 모형 때문이었는데, 태엽 옆에 있는 작은 스위치를 켜면 눈 내리는 스노우볼 속의 자그마한 2층 집에 불이 켜지면서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해리는 그 집이 마치 지금은 요양원에 있는 메이의 옛날 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피터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유난히 기쁜 기색을 보였다. 아직도 그 오르골은 피터의 책상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리는 지난해 오르골을 샀던 잡화점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이곳 역시 다른 상점들과 마찬가지로 유리 벽 너머에는 작은 트리 장식이나 산타와 루돌프 인형, 양말이 걸린 난로 모형 같은 것들로 가득했다. 이미 올 선물을 정했기에 사려는 것은 없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오르골이 있었던 곳이니만큼 묘한 애착이 느껴지는 가게였다. 찬찬히 진열대를 살펴보던 해리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모형 하나에 해리의 시선이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해리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야, 이 멍청하게 생긴 건?”

빨간 옷을 입고, 마찬가지로 온통 빨간색투성이인 산타들에게 둘러싸여 하마터면 발견하지 못할 뻔했던 그것은 다름 아닌 스파이더맨 모형이었다. 물론 뉴욕에서 스파이더맨과 관련된 상품은 그야말로 넘쳐나는 수준이라, 차마 그 종류를 가늠하기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설령 반박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가장 가까운 코믹스 샵에 데려다 놓는다면, 매장 한 곳을 가득 채운 스파이더맨 굿즈를 보고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이렇듯 뉴욕에서 스파이더맨 모형을 발견하는 일은 절대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듯 평소와 조금 다른 스파이더맨의 모습이었다. 스파이더맨은 고양이와 뜨개실을 무릎이 올린 노부인이 연상될 법한 원목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커다란 방울이 달린 산타 모자를 쓰고서 어깨에는 색깔 전구가 휘감겨 있었다. 가슴 높이까지 어정쩡하게 들어 올린 양손의 한쪽에는 탬버린을 들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원숭이 인형이 북을 두드리듯 반대쪽 손으로 탬버린을 쳐댈 것만 같은 포즈였다. 누군가가 봤다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나는 이런 거 안 해'라고 말할 만큼 무엇하나 웃기지 않은 점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해리를 웃게 만든 것은 목을 연결한 스프링이었다.

결국 해리는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리본이 묶인 금색 벨이 문 위에서 딸랑거리자 “어서 오세요!” 점원이 활기찬 인사를 건네었다. 가게 안의 물건들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도 훨씬 더 다채로웠지만 해리의 관심은 오직 진열대에 놓인 스파이더맨 모형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해리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모형은 나무로 만들어 둔탁한 느낌이었고 색칠이 그리 섬세하지 못해 조잡하게 보이기도 했다.

장난을 치듯 검지 끝으로 스파이더맨의 미간을 꾹 눌렀다가 떼었다. 고개를 젖혔던 그것은 해리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스프링의 탄력으로 인해 덜렁거리는 머리를 앞뒤로 흔들어대었다. 그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워서 해리는 그만 풋,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에요.”

옆으로 다가온 점원이 냉큼 말했다.

“목각 인형은 전부 사장님이 직접 깎으셨거든요.”

모형의 꺼덕거림이 서서히 잦아들 때쯤 해리가 다시 스프링을 퉁겼다. 말없이 모형을 구경하기만 하는 모습에서 구매를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점원에 재촉하듯 물었다. “포장해 드릴까요?” 그러나 해리는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세워둘 곳도 마땅치 않을뿐더러 이런 조잡한 목각 인형을 굳이 사봤자, 결국에는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만 될 테다. 어느새 꺼덕거림을 멈춘 모형을 산타클로스 사이에 내려놓고 해리는 몸을 돌렸다.

 

 뜻밖에 들어간 잡화점에서 시간을 보낸 탓일까, 막간을 이용한 잠깐의 산책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말았다. 비서의 잔소리도 그만큼 길어지겠다고 생각하며 급히 회사로 돌아가자 아니나 다를까. 오스코프 정문에서부터 해리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회장실로 들어가는 내내 뒤를 따라붙으며 핀잔을 쏘아붙였다. 해리가 의자에 앉기 무섭게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놓더니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밀려 있던 보고서며 서류 등을 차곡차곡 책상 위에 쌓기 시작했다. “고작 십 분 늦었잖아!” 해리가 볼멘소리를 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덕분에 제 퇴근은 한 시간이 밀렸어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려서 얌전히 보고서 위로 고개를 숙인 해리에게 그녀는 한 마디를 더 덧붙이고는 바쁜 발걸음으로 회장실을 나갔다.

“그러니까 쇼핑은 휴일에 해주세요!”

탁. 문이 닫히자 해리가 보고서를 흩던 눈동자를 굴렸다. 책상 위에 내려놓은 자그마한 종이봉투에 해리의 시선이 고정되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고작 이까짓게 뭐라고, 차마 출입문을 나서지 못해 진열대 앞을 어슬렁거리며 고민하다가 결국 비서에게 훈계나 듣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해리는 회장실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살그머니 종이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꺼냈다. 몇 번을 봐도 웃기기만 한 산타 모자를 쓴 예의 모형을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자 또다시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온갖 서류로 빼곡한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데스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토이스토리였다면 있어야 할 곳을 잘못 찾았다며 탈출을 감행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해리의 집무실에 놓인 조잡한 목각 인형의 모습은 잘못 떨어진 물감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변과 자연스럽게 융화된 다른 물건들과 달리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이질감이 시선을 잡아끌고, 결국에는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고 마는 것이다. 마치 진짜 스파이더맨이 그랬듯이. 

 이 모형을 만든 사람은 거미줄이 붙은 붉은 복면이 스파이더맨의 얼굴인 것처럼 인식했겠지만 해리의 눈에는 그 아래에 감추어진 진짜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멍청한 산타 모자를 쓰고서 전구를 목도리처럼 휘감고 탬버린을 치는 피터 파커가 말이다.

턱을 괴고서 한참이나 모형을 들여다보던 해리가 스파이더맨의 머리를 살짝 옆으로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까딱, 까딱, 좌우로 고개를 흔드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이 그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웃거리는 익숙한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해리의 입꼬리가 유쾌하게 올라갔다. 해리는 마침내 만년필을 잡고, 서류에 사인을 시작하면서 최근 들어 뉴욕에 유행하고 있는 캐럴송을 흥얼거렸다.

Spidey Bells, Spidey Bells, Swinging through Mid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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