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전할 수 없을 말 (1)
6년 간의 장례식을 마치며
참 이상하죠. 편지 쓰는 법을 분명 당신께 배웠던 것 같은데, 막상 펜을 잡으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떠오르는 대로 씁니다. 모자라더라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쭉 편히 쉬고 계셨잖아요.
아버지, 당신이 30년 간 가르쳐준 모든 것은 저를 좀 더 사람 답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법과 윤리를 비롯한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요.
어쩌면 그래서 책임감 강했던 당신의 모습을 토대로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어갔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든 총을 한 발도 쏘지 못한 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은 이유가 무엇일지 저는 압니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총으로 가족을 해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마지막 산행으로 예정되어 있던 로키 산맥에 함께 가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항상 가기 싫다며 불만만 늘어놓고 툴툴대기만 하던 못난 자식이기에 더욱 후회가 됩니다.
제가 먼저 어딘가 가자고 하면 금방 얼굴에 웃음꽃이 피던 당신의 주름진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생각이 납니다.
영감님 나이 들어 피부 관리도 안 한다고 어머니가 잔소리할 때마다 듣기 싫다며 욕실로 도망가던 당신의 모습이나,
결국 서랍을 뒤적여 팩을 찾아 꺼내 뭐가 더 좋은 거냐고 저에게 묻던 당신의 모습도요.
아버지, 저도 남자입니다. 그런걸 알리가 없잖아요.
결국 지나가던 리오라가 이게 엄마가 쓰는 거라며 작은 손으로 손수 치덕치덕 붙여줄 때 활짝 웃어버리던 당신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그러다 웃으면 팩 떨어진다고 잔소리를 듣기도 했죠.
리오라는 저희 어머니를 닮아 참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아이였어요.
아이는 아이 답게 해맑게 세상을 뛰어놀기만 하면 되는 건데, 참……. 모든 게 저희 뜻대로 되는 건 아니었죠.
가끔 먼 지역에 있는 사촌들과 강에서 그물 낚시를 하며 놀던 얘기를 할 때의 당신은 퍽 행복해보였어요.
그럴때면 우리때문에 너무 삶의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을 볼 때면 늘 애정어린 눈빛으로 맞이해주는 당신이 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전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집을 할렘가 쓰레기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지만, 그랬어요. 그만큼 생활에 대한 감각이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그 쉬운 쓰레기 버리기도 못했던 저를 이만큼 만들어놓은 건 당신입니다.
밤에 찾아오는 악몽 속에서 잠들기 어려워하는 우리 남매를 두고
늘 신은 우리 곁에 있다며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얘기하시던 목소리와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기억납니다.
처음엔 신을 찾는 그 목소리가 첫번째 악몽이었던 그 집을 떠올리게 해 두렵기도 했었죠.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요. 같은 것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람이 되진 않는다는 걸 알게 해주셨죠.
믿음은 강요가 아닌 자유에서 오는 것이라는 그 말을 듣고 자라 어느 틈에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었죠.
그게 그리 좋았던 적은 없었지만. 이제는 신이란 존재보다 그저 당신이 저희 곁에 있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당신의 기도하던 목소리나, 늘 들고 다니던 손 떼 묻은 성경책과 묵주가 아직도 눈 앞에 선합니다.
어머니의 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다던 LP와 턴테이블에 꾸준히 공을 들이는 모습에서 사랑하는 존재를 대할 때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애정은 강도가 아닌 빈도에서 오는 것이라는 걸요.
특히 잔고장이 잦은 오래된 물건일수록 평소에 더 세세히 주의를 기울여야 된다고 당부하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사람도 그렇다고요.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잔바람 속에 오고 가는 건 쉽지만, 한 번 영영 떠나버린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단다. ”
언젠가 그 말씀을 실천해볼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제 곁에도 오길 기대했던 적이 있었어요.
다정하신 당신 두 부부의 모습을 보며 그랬던 적이 있었드랬죠.
하지만……. 아시잖아요. 전 결혼은 글렀어요. 죽기 전에 연애나 해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면 당신이 제게 그렇게 말해준 적은 없지 않느냐며 혼을 내셨겠지만,
혼자 남겨진 아들의 마지막 반항이라고 생각하고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LP 하나쯤은 남겨서 가져올 걸. 그래야 만나러 갈 때 챙겨갈 선물도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이 말을 들으면 아마 당신은 “네 얼굴만 볼 수 있다면 되었다.” 하시겠지만요.
아직도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엘튼 존 노래를 들어요.
사실 제 취향은 아니지만요. 듣다보니 그것도 좋더라고요.
어머니가 해주시던 애플 파이는 어느 곳에 가서도 똑같은 걸 먹어볼 수 없었어요.
그러게 레시피를 요리도 못하는 다르시한테 왜 가르쳐주신 거예요. 저한테나 알려주시지.
아직도 잠 못들 때면 당신이 뺨을 쓸어주며 불러주던 자장가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아요.
녹음이라도 해둘걸 그랬나봐요. 수면제를 먹어도 당신 자장가만 못하더라고요.
가끔 엉뚱하고 이상한 곳에서 예민하게 굴었을 저 때문에 손이 많이 갔을텐데
안 된다는 말 없이 최대한 맞춰주려 노력해주신 거 알아요.
잠귀가 밝은 저를 깨우지 않으려 저희 방 앞을 지나갈 때에 슬리퍼도 벗고 깨끔발로 지나가던 당신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런 것들을 어찌 애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당신께 받은 많은 것들을 세상에 갚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로는 다 못 전할 것 같지만, 이 모든 일에 감사드려요.
다르시, 내 유일한 피를 나눈 혈육. 1초 일찍 태어난 걸로 유세떨던 누나야.
10년 전에 빌려간 100달러 못 갚아서 미안. 아버지가 빌려가놓고 안 갚는 걸로 기억하고 있던데, 그거 사실 나야.
끝까지 리오라 나 대신 챙겨줘서 고마워. 리오라가 누나도 참 좋아했지. 고모 언제 오냐며 나보다 더 많이 찾더라.
우린 서로 느끼는 게 달라서 참 많이도 싸웠지. 주로 내가 화내는 쪽이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 지옥같던 시간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었어.
항상 당하고만 있던 내 앞에 나서준 건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항상 내가 맞는 것보다 누나가 더 앞에서 많이 맞았던 것 같아.
미안해. 남자인 내가 더 나섰어야 됐던건데.
이런 말하면 누나는 “쫌생아, 내가 누난데 그럼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냐?” 이러고 주먹이나 내밀었겠지만…….
주변에서 뭐라하던 자기 길만 개척해나가던 누나의 모습이 나한텐 많이 멋져 보였어.
그 무대뽀같은 기질로 나를 두들겨 팰 때도 많았지만.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래도 그 덕을 가장 많이 본 게 나니까. 내가 이해해 줘야지. (열 받으면 살아돌아와서 한 대 때려보시든가.)
쓰레기 같은 놈들 불알 다 깨트릴 땐 나도 속이 시원하더라.
그래서 그런가. 우리가 헤어지게 되었을 땐 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하지만 그대로 누나가 날 잊고 살았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나는 항상 걸림돌 같던 동생이었으니까.
누나는 영민하고 똑똑했으니까 나보다 더 자주 좋은 사람들 눈에 띄었는데, 내가 있어서 같이 입양가지 못했던 적이 많았잖아.
사실 이렇게 말은 해도 나는 내심 누나가 나를 챙겨주길 바랐던 것 같아.
그래서 나랑 찢어지고 난 뒤에 뉴욕에 있다는 소식을 듣곤 스토킹 했던 걸지도 모르지.
우리가 서로 남매가 되어서, 될 수 있어서, 네 이름이 나와 같은 로웰로 끝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누나가 파트너 변호사 되었을 때 축하파티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버렸네.
있잖아…….
나 그동안 사람도 많이 죽였어. 테러리스트에 중범죄자지. 그 이유가 비록 악마에 홀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살인은 살인이야. 그 죽은 사람들 중에 누가 선인이었든 악인이었든.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었다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지.
내가 자백하겠다고 했으면 누나는 누구보다 먼저 내 변호를 맡아줬겠지.
최대한 모든 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적게 받는 쪽을 권해줬을 거고 말이야.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내 모든 죄를 인정한다는 이유로 내가 행한 죄의 값이 줄어드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악마에 홀렸었다고 해도 그들은 한 때 모두 사람이었어. 마귀가 들려서 아예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태도 아닌, 그저 사람.
내가 죽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들도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요즘 그런 생각에 밤만 되면 잠을 못 이뤄.
하지만 누나는 그런 잡소리 집어치우고 네 살 길만 찾으라며 내 입을 막았겠지. “넌 너무 쓸데없이 남 생각만 해.”라면서 말이야.
그 단호하던 목소리가 오늘따라 그립네…….
누나가 약혼자랑 전화로 싸우던 목소리조차 다시 듣고 싶은 걸 보면, 정말 중증인 것 같아. 그렇게 듣기가 싫었었는데.
곧 있으면 듣게 되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봐.
또 보자, 내 누나이자 친우. 다르시.
리오라, 사랑스러운 우리 꼬맹이.
아빠가 널 너무 많이 보고 싶어해서 어쩌지? 그래서 널 보내주지도 못하고 내 옆에 계속 붙잡아 두고 있어.
미안해. 우리 사랑스럽고 착하기만 하던 꼬맹이는 진작에 천국에 가서 아저씨, 아줌마, 고모랑 같이 놀고 싶었을텐데.
게일런 앞에선 날 삼촌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다가 단 둘이 있을 때만 몰라 와서 아빠라 불러주던 네 수줍던 모습이 오늘따라 생각나네.
언젠가 한 번은 꼭 말해주고 싶었어. 네가 세상에 원치 않게 태어나고 버려졌다고 해서 그 세상이 널 마음대로 쥐고 흔들게 두어선 안 된단다.
아빠도 너처럼 미혼모에게서 나고 버려진 사람이었어. 비단 아무렇게나 아이를 버려두고 간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점은 고마워 해야겠지만.
결국 우리 손을 놓은 사람들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게 더욱 마음이 갔단다.
네가 나만큼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기만 하길 바랐던 내 마음이 오히려 독이 되진 않았을까 곧잘 걱정을 했어.
같은 동네에 사는 꼬마애들을 부하 삼아서 영웅 놀이를 하던 네 모습을 보기 전까진 그랬지.
우리가 친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나이 차이가 서른 살이 넘게 나는 언니 오빠가 어딨겠니.
어머니는 적당히 자신의 자식이 직접 키우기가 어려워 맡기고 갔다고 네게 설명해 주었지만…….
사실은 같은 성당에 다니던 신도 중 하나가 입양을 부탁한 거였어. 그 여자도 참 불쌍했지.
변고를 당해 품게 된 아이인데 제때 알아차리지도 못했었으니.
네 탄생에는 누구의 죄도 없어. 있다면 성폭행이나 저지르는 그 못된 사람이 문제인 거지.
너는 누구보다 사랑 받을 자격이 있고, 또 누구보다 많은 걸 받은 아이란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리라 생각한단다.
까치발을 들어 내 뺨에 입을 맞추어주던 네 모습이 생각난다.
수줍음이 가득 찬 두 뺨이 가득 패이도록 웃으며 날 잡아보라며 도망치던 네 모습도 생각난다.
너무 멀리도, 너무 빠르게도 가지 않던 네 배려가 이제는 느껴진다.
내가 너무 이르게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랬던 거려니. 그렇게 막연히 생각해봐.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놓지 못했다. 나마저 널 떠올리지 않으면 정말 이 세상에서 없어질까봐.
마귀에게 잡아먹혀 영혼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네가 영영 사라져버릴까봐.
내 유일한 희망이자 빛이었던 아이야.
네가 없어진 뒤 내게 광명은 깃들지 않고 검붉은 폭풍만이 몰아치더구나.
그 한 가운데에서 네가 혹시라도 돌아올 수 있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그 기다림 끝에 혹시라도 네가 나 없는 사이에 돌아왔다가 다른 놈들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집마저 태웠어.
차라리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단 마음도 있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버린 너였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견딜 수가 없었던 듯 해.
백합과 함께 태어나 여름을 가지고 왔던 네가 떠난 뒤 내 세상은 쭉 겨울이었단다.
하지만 겨울이라고 해서 모든 게 꽁꽁 얼어붙어있는 것만은 아니듯.
몰아치는 눈발을 뚫고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언제 어느때나 있기 마련이지.
결국 나는 네 빈자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단다.
비단 그 빈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면 네가 좀 더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아이야. 다음 생엔 부디 축복 속에서 태어나 이 생에 못다한 삶을 마음껏 누리다 갈 수 있길 기도하마.
지금까지 욕심껏 네 손을 붙잡고 있던 이 아비의 미련을 용서해주지 않겠니.
사랑하고, 또 많이 사랑했던 우리 딸. 나만의 천사야.
아프지 않고 항상 행복하길 바라.
항상 널 사랑하는 아빠가.
있잖아요. 게일런, 아르델리아. 다르시. 저 많이 외로워요.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같은 후회의 말을 담고 싶지는 않지만요.
저에게 모멸감을 견디는 것보다 분노하는 법을 알려준 당신들이 그립고, 죄책감만을 홀로 떠안는 대신 사과하는 법을 알려준 당신들이 보고프고, 세상이란 거칠고 검은 폭풍우 속을 헤매일 때 고독이란 작은 돛단배 대신 사랑이란 거대하고 튼튼한 범선을 타고 지나갈 수 있게 해준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배의 닻은 당신들을 잃으면서 함께 가라앉아 버렸어요.
슬프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그러면 당신들이 돌아와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미련했죠. 제정신이 아니라 말해도 부정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들이 없는 세상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당신들을 잃기 전까지의 43년 간의 세월은 도저히 저 혼자선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나는 아직 당신들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떠나버렸잖아요.
그래서 한때 당신들이 참 밉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원망같은 건 할 수 없었어요.
그보단 그리움이 더 컸죠.
지금도 눈만 감으면 화목하게 떠들던 당신들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데, 내 눈에 선한데.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겠나요.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들은 제 꿈에조차 나와주지 않더군요. 그게 서운했어요.
하지만……. 제가 당신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봐요.
이제는 떠나 보내야 될 때가 왔음을 알아요.
당신들을 죽인 악마와 마귀들은 거의 모두 사라졌어요.
악의 뿌리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놈의 이마에 제 총알이 궤적을 그리며 뚫고 들어갔을 때,
저는 통쾌하기보단 허망했어요. 이렇게 간단히 없앨 수 있는 존재였는데…….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그리 쉽게 떠나가야만 했던 걸까요?
나보다 살아있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들인데.
나보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당신들인데.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어야 했는데.
내가 내 손으로 목숨을 구해주었던 사람들을 보며 유치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들이었다면. 나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텐데.
당신들이 들었다면 분명 크게 혼을 냈었겠죠.
그게 괴로워서 절 더 괴롭힌 것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상관 없어요.
고통스럽던 시간은 모두 지났고, 인간을 해치던 것들은 더이상 쉽게 세상에 그 마수를 뻗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게일런, 아르델리아. 다르시. ……. 리오라.
때 이르게 당신들을 만나러 간다고 해도 너무 혼내진 말아주세요.
나에게 지난 50여년 간의 세월은 너무도 혹독했고……. 가혹했으니까요.
이만하면 당신들이 내게 주었던 빚은 세상에 다 갚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만 쉬고 싶다고 하는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시면 안 될까요.
못난 아들이라고 욕하셔도 괜찮아요. 그러실만 하니까요.
혼내실거면 만나고 나서 혼내주세요.
지금은 그저……. 조금만. 이렇게요. 쉬었다 가고 싶어요.
6년 간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아들이지만,
이제서야 어리광을 좀 부려봅니다.
항상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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