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전력] 낙원으로

키워드 : 낙원

젊은 군인 류청우는 배에 올라탔다. 제물포에 정박한 이 기선은 오전 9시에 출발하는 하와이 행 선박이었다. 배는 몇날 며칠을 걸려 그를 ‘하와이’라는 지상낙원으로 데려다줄 터였다.

‘3년…….’

머리 위에서는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류청우는 따가운 볕에 눈살을 찌푸렸다. 목멱산 아래 위치한 남별영에서도 한여름 한낮에는 군인들의 훈련을 멈추도록 했다. 더위나 먹고 헥헥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3년, 그가 지낼 하와이는 일년 삼백육십오일 한낮에 일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와이는 춥지도 덥지도 않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어느 절기든 직업을 구하기 용이하다고. 그는 서울 곳곳에 고시된 광고를 떠올렸다. 설마 타국의 사람들에게 거짓말까지 해서 데려오려고 하지는 않았을테다. 조선이 지금은 승냥이들 떼에 괴로운 처지에 놓여있으나 미국, 그곳은 군자의 나라가 아닌가. 류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참말로 뜰 수 있다는 말이오?”

“거참, 이미 떠있지 않소? 걱정 말고 아이나 잘 챙겨서 들어가시오.”

“허어, 쇳덩어리가 어떻게 움직인다는 건지, 참…. 관리 양반, 이 배에 너댓 명 타는 것도 아니고 수십 명은 탈텐데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걱정 말래두! 수십 명이 아니고 수백 명이 타도 거뜬하답디다.”

류청우의 뒤에선 수민원 관리와 한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떠나려는 건지 남자의 옷자락을 자그마한 아이 하나가 꼭 붙잡고 있었다. 수백 명은 거뜬하다는 관리의 말에도 남자는 근심어린 얼굴이었다. 난간 앞에 서 배 아래 찰랑거리던 바닷물을 바라보던 류청우도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이미 계약서는 작성했고 배에도 올라탔다. 게다가 집에 편지까지 남겨두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큰 돈을 벌어 떳떳하게 조선에 돌아올 것이다. 류청우는 멀리 육지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초가집은 새로 들어선 서양식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애써 그 위에 낯익은 조선의 풍경을 덧입혔다.

류청우는 그리운 조선을 눈꺼풀 안쪽에 꼼꼼히 담고 지하의 객실로 내려갔다. 커다란 방이 둘, 각각에 문이 둘씩 달려있었다. 류청우는 고민하다 그중에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갑판 위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내려온 탓인지 이미 방 안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낮은 이들과 함께 방을 써야한다는 게 어색한지 연신 헛기침을 하는 양반이 있었고, 잽싸게 자리를 차지하고 널찍하게 공간을 차지한 평민들이 몇 있었고, 이 큰 배에 탔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운지 방의 한가운데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몇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곳을 빼고는 사람들이 전부 있었다. 출입구가 가깝다는 것만 빼면 다른 구역과 비슷할 텐데 사람들은 굳이 좁은 공간에 끼어 있기를 선택했다. 류청우는 이상함을 느끼며 남은 공간에 짐을 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사내가 그를 불렀다.

“군인 나리. 이쪽으로 오는 게 어떻소?”'

아까 갑판 위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괜찮습니다. 이쪽이 더 넓군요. 그쪽이야 말로 이쪽 공간을 더 쓰는 게 어떻습니까?”

남자의 옆에 앉은 부인이 치맛자락을 꼬옥 붙잡았다. 왜인지 두려운 기색이었다. 그녀는 제 아들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군인 나리, 그쪽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아십니까? 백정놈의 자식이랍니다. 백정의 자식이면 그 놈도 백정인 거지요.”

좋은 일을 했다는 듯 당당한 말투였다. 그 말에 류청우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체구가 작은 사내 하나가 다리를 쭉 펴고 옆으로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서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남자였다. 그 사내가 누워 있는 바람에 사람이 하나 있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라 류청우는 생각했다.

백정의 자식. 그 사내를 두고 백정의 자식이라 말했다. 비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십여년 전 갑오년의 개혁에 이미 신분제는 없어지지 않았나. 양반도 상놈도 천민도 이제 평등해진 것 아니었나. 류청우는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양반의 자식과 상놈의 자식이 나란하게 앉아있었다. 공간을 차지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그저 몸뚱어리였다. 류청우는 작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불안한 기류에서 쉬이 잠들지는 못했으리라.

‘이 대화도 듣고 있겠구나.’

류청우는 저 사내가 안쓰러워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산짐승 같았다. 활을 쥐면 귀를 쫑긋거리고 맹렬하게 도망가는, 사냥꾼의 기척에 예민한 산짐승들. 이곳 배에는 그를 도살하려드는 사냥꾼들뿐이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날랜 사냥꾼이었던 류청우는 이곳에서만큼은 사냥꾼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대놓고 두둔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조용히 대답했다.

“신경 써주어 고맙습니다. 하지만 당신들 자리를 빼앗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나 같은 덩치가 그쪽에 간다면 필시 비좁게 느껴질 겁니다.”

남자는 류청우의 말에 제 구역을 곁눈질했다. 이미 자리엔 그의 일가족 외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 남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류청우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가족의 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최대한 자리를 확보하려는 심산이겠지, 짐작했다.

 

멀리서 뿌우우, 하고 기선이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시끄러운 모터 소리가 시작되었다.

‘정말 떠나는구나.’

서울도 한 번 떠나본 적 없는 그는 며칠 전 처음으로 인천 땅을 밟아보았다. 조계지와 개항장, 조선이면서도 조선 같지 않은 풍경에 놀라 몸을 웅크렸던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아예 조선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전국 팔도를 가보기도 전에 이역만리 길을 먼저 떠나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어쩌자고 양인들의 배에 올라탔지. 신미년에 평양을 공격한 이양선도 불에는 쉽게 타오르지 않았나. 이 배도 바다 한가운데에서 불이 붙는다면……. 류청우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짙은 초록으로 칠해진 천장을 바라보는 건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그 색은 바다도 불길도 아닌 집 앞마당에 심어진 감나무 이파리를 닮아서……. 그걸 바라보고 있으니 그저 설익은 감이라도 한 입 베어 먹고 올 걸 그랬다는 아쉬움만 남았다.

‘괜찮아, 이미 그곳에 가서 지내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가 누운 이곳 지하 2층의 객실에도 사람은 많았다. 무려 100여 명이 탑승한 배다. 그는 무모한 선택을 한 게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3년 뒤에 돌아오면 번 돈은 부모님께 드리고, 얼마는 남겨두고 유람이나 다녀볼까. 그는 애써 설렘으로 두려움과 긴장을 저어 멀찍이 치워 보냈다. 누웠으나 잠이 잘 오지 않아 그는 자리에 누운 채로 눈만 꿈뻑거렸다. 지하의 객실은 볕이 들어오지 않아 밤이 깊어가는지 해가 밝아오는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도통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하루 두 끼 끼니를 알리러 일본인 선원이 내려오는 걸로 하루가 또 흘러가는구나 알아차릴 뿐이다. 일단 두 차례의 식사를 모두 마쳤으니 저녁은 지났을 것이다. 아마 밤이겠지. 류청우는 어둠에 적응이 된 눈으로 가만히 주변을 보았다. 앞에서 작은 산짐승 같은 사내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두려워하는구나. 하지만 류청우는 구태여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옆에 누운 남자의 두려움에 안도했다. 너도 나와 같구나.

제물포를 출발한 배는 며칠 뒤 일본에 도착했다. 나가사키에 정박한 배는 3일 뒤에 다시 출항한다고 일본인 통역이 알렸다. 그리고 출항 전에 신체검사가 있다고 예고했다.

‘적합하지 않으면 돌려보내겠다는 거구나.’

객실에는 밤이면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류청우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그가 신체검사에서 통과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계약서에 柳靑祐, 이름 석 자를 적는 순간 운명은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다. 그의 근처에서 사흘 밤을 보낸 작은 사내는 신체검사라는 말에 눈에 띄게 놀랐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 만약 사내가 나가사키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그로서는 좋은 일이 될 터였다.

‘이 자리에 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지.’

류청우는 그 보답이라도 할 겸 그에게 물었다. 마침 아침 식사 시간이기도 해서 말을 걸기는 쉬웠다.

“무언가 염려되는 점이라도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묻는 것입니다.”

“아니, 큼, 아무 일도 아닙니다.”

놀란 듯 목소리가 높이 튀었다. 그간 대화를 나눈 적이 없기에 류청우가 말을 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대답했다. 목소리는 가늘고 맑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듯 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류청우는 그의 문제를 곧장 알아차렸다. 분명 조선에서 배에 오를 때는 나이를 속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배는 하와이에서 노동할 인력을 구하는 배였다. 성년도 지나지 않은 어린 사내를 태워갈 리 만무했다.

‘덩치라도 제법 컸다면 속이는 게 어렵지는 않을 텐데.’

류청우는 제 짐에서 무게가 나갈 만한 물건이 있나 고민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대신 제 몫의 아침 식사에서 밥을 조금 덜어내었다.

“걱정이 없으시다면 식사라도 많이 하세요. 저는 어제 저녁 식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속이 더부룩합니다.”

그리고 사내의 접시에다 옮겨주었다. 류청우의 행동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사내는 당황한 기색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사내가 밥 먹는 걸 멀거니 보던 류청우가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군요.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이고 하니, 이름이라도 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게 될 텐데. 저는.”

“박, 문대입니다.”

류청우가 제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남자는 제 이름을 꺼내놓았다. 류청우는 방긋 웃고 끊겼던 말을 이었다.

“저는 류청우입니다.”

류청우, 박문대는 작게 중얼거렸다.

“글자는 글월 문을 씁니까?”

그는 류청우의 물음에 작은 토끼처럼 자꾸만 놀랐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큼, 아뇨, 따뜻할 문에 햇빛 대…….”

낯선 이와 대화를 하는 게 어색한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따뜻할 문에 햇빛 대. 참 다정한 이름입니다. 어쩐지 햇빛도 없는데 당신 곁에 있으니 따뜻한 것 같더라니요.”

떠나온 계절은 한여름이었다. 더운 게 당연한 계절이다. 다들 더워서 하루종일 땀을 삐질거리고 있지 않나. 객실 안에 가득한 더운 공기에 숨이 막힌다해도 모자란데, 따뜻하다니…….

박문대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에 자꾸만 놀랐다. 백정의 자식에게 이름을 묻는 것도 그렇거니와 다정한 이름이라니. 글을 배우라며 제게 이름을 물었던 신부님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대신 신부님은 달을 가리키며 그를 ‘문’이라고 불렀다. 제 이름은 햇빛이지 달빛이 아니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서양말을 할 줄 몰라 말하지 못했다. 대신 신부님이 건네는 십자가를 받았다. 십자가는 달빛에 하얗게 반짝였다.

박문대는 류청우와의 대화에서 신부님을 떠올렸다. 큰 키에 큰 덩치, 검은 옷을 입고 그를 내려다보던 신부님처럼 류청우도 큰 키에 큰 덩치였다. 밥을 많이 먹으면 그들처럼 커질 수 있을까, 박문대는 류청우가 덜어준 밥을 꾸역꾸역 삼켰다. 주위의 시선이 따가웠다. 류청우는 몰랐지만 주변에선 백정의 자식과 가까이 앉아 대화하는 군인을 다들 흘낏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박문대만 시선을 알아차렸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조선을 떠나왔지만 조선인들은 제게 백정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참아야했다. 눈물이 빠져나가 몸무게라도 줄어들면 큰일이었다.

 

박문대는 무사히 신체검사를 통과했다. 보따리에 챙겨둔 십자가를 몰래 바지춤에 넣어둔 것이다. 그래봤자 몇 그람 차이는 나지 않았겠지만, 그는 다른 물건도 아니고 십자가인 덕이 크다고 여겼다. 그는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신부님에게 배운 대로 성호를 그었다. 이제 다른 이에게도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저를 보고 고민하듯 갸웃거리던 일본인 브로커에게 신원을 보증해준 이가 있었다.

류청우. 객실에서 내내 그의 곁에서 머물렀던 남자이다. 아침에는 잘 먹어야 더 크지 않겠냐는 듯, 제 식사를 나누어준 남자이기도 했다.

박문대는 짐을 챙겨 날래게 객실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자리를 잘 잡아놓고 있으면 남자도 만족할 터였다. 분명 저보다 훨씬 큰 덩치이니 널찍한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는 이번만큼은 제 처지가 마음에 들었다. 짐승의 피로 먹고 사는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배에서만큼은 괜찮았다. 역시나 그가 객실 안에 머리를 들이자 경계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처음 자리를 펼쳤던 출입구 쪽의 구역으로 갔다. 그곳엔 이미 한 두 사람이 드러누워 있었다. 그들은 욕을 몇 마디 중얼거리다가 다음으로 류청우가 들어오자 조용해졌다. 류청우는 이번에도 박문대의 옆에 짐을 내려놓았다.

“…나리, 자리 좀 더 쓰셔요. 이쪽이 더 넓어요.”

“글쎄, 자리를 같이 쓰는 건 괜찮지만 좁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나리가 아닙니다.”

박문대는 류청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청우’ 이름 석 자를 부르는 게 어색해서 괜히 나리라고 불렀다. 저번에 어떤 남자도 그를 군인 나리라고 부르지 않았나. 그런데 류청우는 제 말을 부정했다.

“저번에 군인 나리라고…….”

박문대는 고개를 들어 류청우를 보았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띠우고 있었다. 그 미소엔 어딘지 모를 장난기가 서려있었다.

“퇴역 군인입니다. 게다가 양반 출신도 아니고요. 그저 나랏밥을 잠깐 먹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처럼 먼 땅에 일꾼으로 가고 있지요.”

“예……. 그렇군요…….”

박문대는 그와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워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건 아버지, 그리고 서양에서 온 신부님을 빼고는 없었다. 그러니까 멀끔하게 생긴 조선인과 대화를 나누는 건 그가 처음이라는 말이다. 원래 말을 하는 게, 얼굴을 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박문대는 제 짐을 만지작거리다가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나리,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아까?”

류청우는 그새 잊은 모양이었다. 친절한 사람 같아 보이기는 했으나, 호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릴 수 있나. 박문대는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호의를 받은 것 또한 대화를 나눈 것처럼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은인에게 고작 그런 걸로 서운해해서는 안 되지. 박문대가 말했다.

“아까……. 제 신원을 보증할 수 있다고 한 거요. 감사했습니다.”

“아아, 도움이 되었습니까?”

“네, 그 일본인, 저를 돌려보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스무 살이 못 되었다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요.”

류청우는 짐을 정리하는 척 더 가까이 붙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대화가 들리지 않게 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박문대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당신의 은인인 거지요.”

“예? 예, 그렇지요.”

“류청우. 나리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양반도 아닌데 나리로 불리니 곤란하군요.”

박문대는 놀라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정말로 류청우의 얼굴에 장난이 가득했다.

“농입니다. 대신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정말로 나리는 아니라서요.”

“예, 나, 아니, 청우 형님.”

배에서 류청우는 박문대를 살뜰하게 챙겼다. 마치 원래부터 호형호제 하던 사람처럼. 밥 시간이란다, 더 잘 먹으면 키가 좀 더 클 거다, 육지에 도착하면 단련하는 방법을 알려주마. 그의 잔소리는 가끔 아버지보다도 심했다.

‘어차피 육지가 아니라 섬일텐데. 그래도 알려줄까.’

박문대는 잔소리에 대꾸하지는 못하고 대신 갑판으로 올라갔다. 류청우는 어린 강아지를 마당에 풀어놓은 사람처럼, ‘날이 더우니 너무 오래 나가있지는 말아라.’ 했을 뿐이다. 박문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갑판 위에 섰다. 그리고 먼 바다를 보았다. 가도 가도 시퍼런 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평온한 바다가 두렵다고 했다. 평온한 바다가 낮에는 검은 속을 숨기다가 밤만 되면 제 등에 탄 여행객들을 잡아먹으려 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다의 아가리에 몸을 들이밀고 싶다고도 했다. 심청이처럼. 그런 사람들은 유독 밤에 잘 흐느끼곤 했다. 사람이 밤에 우는 소리는 대나무 이파리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같았다. 어딘지 음산하고 가슴이 미어졌다.

‘아가, 듣지 마라.’

박문대는 지난 밤 류청우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려는데 그 남자는 단단한 허벅지를 제 머리 아래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으로 귀를 막아주었다. 그 덕에 바닷물에 질식하고픈 마음은 사라지고 작은 서운함만 남았다.

‘…아가 아닌데.’

박문대가 보기에 류청우와 저는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론 서로 밝힌 적은 없으니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서너 살 정도 차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은 편한 것보다 두려운 게 더 큰 상대였다. 언제든 떠날 것만 같은 남자.

‘그 사람도 바다가 두려운 걸까?’

바다를 겁내는 사람들은 대개 갑판에 올라오지 않았다. 류청우 역시 나가사키에서 지하의 객실로 내려온 이후 한 번도 갑판 위로 향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문대는 정말로 류청우가 바다를 겁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덩치로 바다 같은 게 뭐가 무섭다고.’ 사실 박문대는 워낙 무서운 게 많았기에, 그에게 파도치는 태평양 바다쯤은 두려운 축에도 못 끼었다.

박문대는 이렇게 갑판 위로 올라오면 한나절 이상 머물렀다. 그는 먼발치에서 일본인과 서양인이 대화하는 걸 듣길 좋아했다. 조선에선 제 집인 듯 왜말만 쓰던 놈들이 배에서는 서양말을 썼기 때문이다. 박문대는 뭐라도 들어놓으면 도움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귀담아 들었다. 목적지인 하와이까지 가는 데에 대략 14일이 걸린다는 것도 뱃사람들의 대화를 듣다 알게 된 것이었다. 대화가 지루해지면 그는 바다를 구경했다. 바다는 물인데도 짐승의 피처럼 붉지 않았다. 흐르는 건 온통 시뻘건 것만 보아왔다. 투명하던 시냇물도 피 묻은 칼을 담구면 금새 붉어졌다. 바다는 파래서 하늘과도 같았다. 바다 저 끝에서부터 시작된 하늘이 반대쪽 바다에서 만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조선은 어디든 산으로 가로막혀서 하늘이 자꾸만 끊어졌다. 두 분 부모님을 묻은 곳과 제가 있는 곳의 하늘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든 이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문득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어졌다. 부모님께로 바닷물이 밀어다주지 않을까,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짠 바다의 향이 밀려왔다. 간밤 들었던 눈물의 향기……. 박문대는 어젯밤 귀를 막아주던 남자의 큰 손에서 짠 바다 냄새를 맡았다. 그는 어쩐지 그 향기가 그리워져 다시 갑판 아래의 선실로 내려갔다.

“오늘도 구경은 잘 했니?”

박문대가 돌아오자마자 류청우가 말을 걸었다. 류청우는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는 사람의 웃음이 두려웠다. 사실은 그게 저를 비웃는 게 될까봐. 잘 해주니 실실 웃는 게 천한 백정 놈 자식새끼답다고. 류청우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까봐. 박문대는 고개만 끄덕하고는 제 자리로 가 앉았다. 하루 중 짧은 대화가 끝났다. 박문대는 제가 끝내버린 대화가 못내 아쉬웠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류청우를 흘낏거렸다. 뭐하던 사람일까. 조선에 살아도 찾는 데가 많을 것 같은데 왜 다른 나라까지 가서 일꾼 노릇을 하려는 걸까. 사연이 있나. 시야 안으로 양반 하나가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곧 계단을 밟는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용변을 보러 가는 모양이었다. 가족 전체와 하와이 행을 선택한 그 남자는 배 안에서도 양반 노릇 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앞을 지날 때마다 쯧, 하고 혀를 찼다. 천한 아래 것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다면 나가사키에서라도 배에서 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저 남자는 자신과 같은 자리에 있지 않은가. 박문대는 깨달았다. 이 배에 탄 사람 중 사연 없는 이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다들 각자의 사정과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조선을, 대한제국을 벗어나고 있다. 다만 그가 궁금한 것은 류청우 하나뿐이었다.

 

아직 열흘은 더 남았으니 그 안에 이것저것 물으려던 박문대의 계획과 달리 그는 요 며칠 류청우와 말 한 번 섞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 남자는 그를 피하고 있었다. 박문대는 억울했다. 이럴 거면 친절하지 말지, 무릎베개는 뭐였는데, 형이라 부르라며.

‘이유가 뭐야. 아니, 내가 백정이라서 그러는 걸 텐데.’

지금도 그 남자는 그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는 종종 긴 대화를 했던 터라 박문대는 이 상황이 비참하게 다가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남의 호의 따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는 흰죽을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애써 화를 달랬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선실로 돌아왔다. 선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악취가 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나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졌고, 사람들은 일주일이 넘게 씻지 못했다. 더군다나 뱃멀미로 인해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는 간밤의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옷감과 철썩거리는 맨살의 마찰음, 그리고 신음 소리.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쾌쾌하고 시큼하고 지저분하기까지 한 냄새보다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왜 어제는 귀를 막아주지 않았을까.’

그는 바닥에 누워 생각했다. 처음 받아 본 호의는 그에게 공허함을 남겼다. 원하진 않았지만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얼굴을 가로질러 떨어졌다. 몇몇 사람들이 다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침을 무겁게 삼키고 훌쩍거림을 멈췄다. 발걸음 소리에 맞춰 심호흡을 했다. 그랬더니 곧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밤중에는 괜찮았다. 그가 아니더라도 우는 사람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해가 지지 않았고, 그는 남들에게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언제 잠든 건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인지 모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노란 불빛이 문밖에서 깜빡거렸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그는 다시 잠을 잘지 아니면 일어날지 고민하다가 주먹 안에 무언가 들어있다는 걸 눈치 챘다. 조심스럽게 주먹을 펴보았다. 육포였다. 종이로 정성스럽게 감춰진 육포 두 조각이 있었다.

‘누가 이런 걸 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류청우? 하지만 그 남자는 더 이상 가까이 지내지 않는데. 그는 그를 바라보고 누운 류청우의 맨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진한 눈썹이 근심이라도 있는 듯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나를 미워할 거면 속이라도 편하든가.’ 그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두어 번 눈을 끔뻑거리다가 일어나서 보따리 안에 종이를 넣었다. 육포는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가 준 것인지 모르는데 괜히 먹었다가 탈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 누웠다. 전날 제대로 먹지 않아 몸에 힘이 없었다. 눈이 스르륵 감겼다.

 

- ……나리 자식이오?

-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어리고 말랐는데,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머리맡에서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문대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누군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류청우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제 머리를 넘기는 남자가 류청우일까 싶어서 그는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손길이 다정했다.

 

- 저 아가 나리 자식이 아닌 건 나도 알고 있소. 그저 나리께서 그리 살뜰히도 챙기니 하는 말이오. 그러니 저것과 붙어먹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겠소.

- 말조심 하십시오. 아이가 들을까 겁납니다.

- 차라리 저 백정 아이한테는 나리 첩이 되는 편이 낫지 않겠소?

- 말을 가려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나리도 알고 있잖소. 저 꼬마 하나 잡아먹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내 놈들이 요 며칠 나리 눈치만 보고 있는 걸. 댁과 엮여 안 좋은 소문나는 게 사내 놈들한테 먹히는 것보다야 차라리 낫지 않냐는 말을 하는 거요. 물론 댁도 소문의 대상이 되는 게 맘 편하지는 않겠지만…….

어느새 상대는 류청우를 댁으로 지칭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인지 자꾸만 언성이 높아졌다가 줄어들었다. 귀만 열고 듣고 있던 박문대는 자꾸만 눈을 뜨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잡아먹혀? 내가?’

말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운 것과 별개로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 제게 붙는 뒷말은 별로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상처 받지 않겠습니까. …첩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는 게 좋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하죠.

박문대는 애써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 나리 뜻이 그렇다면야. 그래도 아이는 곁에 두는 게 좋겠소. 아랫도리 사정을 해결하지 못하니 그 놈들이 열이 받은 모양이오.

- 예, 알겠습니다.

- 얼른 올라가시오. 백정 아이는 내가 챙겨서 올라갈 테니. 이러다 우리 셋 다 굶겠소.

남자의 말에 이마를 덮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리고 요 며칠 그를 깨우던 남자가 말했다.

“일어나거라, 이 눔아. 아침 식사 시간이다.”

박문대는 이제 일어난 사람처럼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일어나 남자에게 꾸벅 목례했다. 남자는 그가 일어난 걸 확인하자마자 계단으로 향했다. 박문대는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짧은 시간동안 박문대는 많은 걸 생각해야 했다. 류청우가 저를 피한 이유라든가, 저를 잡아먹고 싶어한다는 남자들이라든가 하는 것들. 거기에다가 잡아먹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 같은 것까지.

‘같은 남자한테 그런 짓이 가능할리 없잖아! …그렇지만 잡아먹는다는 게 당연히 그런 의미로 쓰인 말은 아닐 거잖아.’

박문대는 같은 남자에게 아랫도리를 놀릴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알고는 있었다. 이 세상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이 배에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 일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자나 어린 아이들은 탑승이 거부되었고, 선실마다 한두 명 있는 여자들은 제 짝이 있는 혼인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한 둘 쯤은 같은 성별을 가진 이에게 흥미를 보이는 남자가 있을 지도 몰랐다. 아니면, 남의 여자를 건드렸다가 칼이라도 맞을 바에야 어린 남자 하나 건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게다가 높으신 분들 중에 남첩을 들이는 게 취미인 사람이 있다고도 들어본 적 있었다.

“아!”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 보니 마지막 칸에서 박문대는 넘어지고 말았다. 계단은 단차가 균일하지 않게 엉망으로 만들어져있었다. 그래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제껏 어두운 밤중에도 한 번도 넘어진 적 없었는데, 배에 머무를 날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볼썽 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단단한 철로 된 계단에 부딪친 정강이가 눈물이 핑 돌만큼 아팠다. 고개를 들자 멀리 류청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고 있었다.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 배식 줄 끄트머리에 선 그도 박문대에게서 눈길을 떼어냈다.

첩.

제가 그런 취급을 받는 걸로 상처 받을까봐 그가 자신을 피한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간 맛보았던 따스한 손길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더 큰 상처였다. 박문대는 눈물을 대충 훔치고 입안을 씹었다. 그러고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배춧잎을 씹었다. 된장을 얼마나 적게 푼 건지 국물보다 눈물이 더 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밥을 국에 말아 꾸역꾸역 삼켰다. 그래도 전날보다 식욕이 돌았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전부 삼켰다.

‘그런 말 들어도 괜찮으니까, 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볼까. 어차피 하와이에 도착하면 다신 못 볼 지도 모를 텐데…….’

계단에서 그랬던 것처럼 류청우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배식량이 부족하다며 서양인 배식 담당에게 시비를 거는 사내들이 몇 있었을 뿐이다.

‘좀 도와줄까. 아냐, 괜히 도와줬다가 욕만 먹을 수는 없지.’

박문대는 짜증내는 조선인들 곁에 있었다가 저까지 같은 패로 몰릴까봐 곧장 객실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박문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쓱 살피더니 그의 뒤를 따랐다. 지하 객실로 내려가는 계단. 그 앞에서 한 남자가 박문대의 입을 손으로 막고 그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화장실 옆에 있는 창고로 그를 밀어 넣었다. 그 창고는 식료품을 보관할 때 쓰는 곳으로 조리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배식이 끝난 지금은 서양인들의 식사 시간이었다. 남자들은 그들이 밥을 먹는 동안엔 이곳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용해 잠깐동안이나마 재미를 볼 작정이었다.

가장 덩치가 큰 남자는 버둥거리는 박문대를 바닥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곧장 그의 위에 올라탔다. 박문대는 기를 쓰고 몸부림쳤다.

“군인 나리한테 대준 것처럼 우리한테도 좀 대주지 그래?”

“그런 적 없어! 사람 살려!”

박문대가 소리를 지르자 문을 막고 선 왜소한 남자가 킬킬 거리며 웃었다.

“우리가 뭐 진짜로 잡아먹는다니? 그냥 한 번 재미 좀 보자는 건데. 형씨, 빨리 좀 끝내. 한 번에 우리 둘 다 끝내야 할 것 아니오?”

“정 급하면 주둥이에라도 물려주든가.”

배 위에 올라탄 사내는 기어코 한 손으로 박문대의 양손을 결박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박문대의 얼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진짜 제 입에 남자들의 성기가 박힐까봐 겁났다.

“조용해지니 좋구만. 그래, 소리는 지르지 말고, 대신 신음은 내야 한다.”

계속해서 그는 몸을 비틀고 벗어나려 했지만 육중한 남자의 몸을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바지가 허벅지까지 벗겨졌다. 수치심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나올수록 몸에선 힘이 빠졌다. 남자가 몸을 가까이 붙인 순간 밖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문대야!”

류청우였다. 박문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류청우는 창고 문을 두드렸다. 문을 잠그지는 않았는지 류청우가 문을 쾅쾅 두드릴 때마다 문 앞에 선 남자가 앞으로 밀렸다.

“에이씨, 첩이라더니 사실이었구먼.”

결국 남자는 바지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발버둥치는 데에 힘이 다 빠진 박문대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있었다. 류청우는 창고 안에 들어오자마자 남자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이게 무슨 무뢰배 같은 짓이오!”

“무뢰배가 무뢰배 같은 짓 좀 해보겠다는데 방해한 게 누군데.”

류청우의 고함에도 남자는 겁먹지 않고 빈정거렸다. 류청우가 주먹을 올리고 나서도 빈정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나리네 첩 울지 않소. 지금 무뢰배 한두 놈 잡아 족치는 것보다 그게 먼저일 것 같은데.”

“내가 당신들의 얼굴을 기억하겠소.”

“애인 없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

류청우는 분노를 겨우 삼키고 두 사람을 밀쳐 바닥에 누워 헐떡이는 박문대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그를 안아들고, 다친 데는 없는지 확인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품에 안고 달래는 동안 두 남자는 이미 밖으로 도망쳤다.

이틀 사이에 몇 번을 울어야 하는 건지. 박문대는 류청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생각했다. 이렇게 지켜줄 거면 차라리 피하지 말지. 처음부터 이 남자가 저를 피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들이 나쁜 놈이라서가 아니라, 류청우가 저를 피해서. 박문대의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그만큼 그는 억울했고, 미워할 상대가 필요했다. 그걸 아는지 류청우는 계속 박문대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아가. 내가 너를 계속 지켜봤어야 했는데. 앞으론 이런 일 겪지 않도록 곁에 붙어있으마. 응? 내가 미안하다.”

선원이 창고를 정리하러 올 즈음에야 박문대는 눈물을 그쳤다. 하지만 한참 울어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바람에 류청우에게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선 바다 향기가 강하게 났다. 매일 맡던 소금 향기가 얼굴 위에서 또 흘렀다. 그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이 수치스러웠다. 더군다나 이 남자 앞에서 울게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당장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류청우는 박문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박문대가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비틀면 더 세게 힘을 주어 벗어날 수 없게 구속했다. 그래서 그는 배 아래로 몸을 던질 수 없었다.

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은 3년이라고 했다. 그때가 되면 박문대도 성인이 되었다. 이 젊은 남자의 나이를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약관의 나이를 지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남자를 담았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남자를 비추었다. 박문대는 눈을 찌푸렸다. 바닷물의 향기에도 쉽게 흔들렸고, 뜨거운 태양에는 자꾸만 물러졌다. 제가 이리 약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저 어리기 때문일까. 그러면 3년 뒤면 저를 붙들고 있는 이 팔뚝만큼 단단해질 수 있을까, 박문대는 생각했다.

* 일단 드랍. 나중에 시간 날때 다시 잇겠습니다. 총총..

카테고리
#기타
  • ..+ 1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