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일시적 게이 서비스

빵준 / 가짜커플사기단


* 로코입니다 (글쓴이새끼의 뉴런사랑과 개그욕심)
* 허구입니다 (글쓴이새끼의 0에 가까운 고증과 무한한 상상력)
* 무지성입니다 (글쓴이새끼 그잡채)

ㄴ주의 문구를 쓰고 나니까 뭐 거의 디폴트 값이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성준수가 언제부터 얼빵하게 생긴 허구의 털북숭이 병아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지는 전영중도 모를 일이었다. 내일 너랑 무슨 일이 있어도 용산구 네버랜드 애니멀 유니버스 안에 위치한 전국의 유일한 삐약이 팝업스토어를 가야겠다고 선포하는 성준수의 말에, 살짝 두통이 난 전영중은 전화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른다.

"그래서... 몇 시까지 나가면 되는데."

"첫 타임이 9시니까. 오픈런 하려면 8시까지는 왔으면 좋겠는데. 너 뭐로 올 건데."

"어... 8시까지면 출근 시간이니까 버스도 지하철도 지옥이어서 크게 상관 없을 듯. 근데 준수야 잠시만, 나 아직 동의한 적 -"

"와씨, 찾아보니까 너네 집에서 45분 넘게 걸리네. 야 안 되겠다. 내가 내일 데리러 갈게."

"? 준수야? 나 아직 동의ㅎ,"

"내일 7시 반까지. 너네 아파트 정문에 서 있어. 그 벤치 있는 쪽에. 어딘지 알지?"

"편의점 건너편? 아니 근데,"

"어. 거기."

"저기요? 나 아직 동의한 적 없다니까?"

"아침밥은 내가 쏜다. 입장료도 내가 내. 그럼 내일 보자."

"준수야? 혹시 드디어 귀가 먹은 거니? 나 아직,"

"아 맞다. 옷 잘 입고 와라. 꾸며서. 어두침침하게 입지 말고."

"준수야말로 옷장에 검은 옷밖에 없지 않나. 내 패션 간섭하기에는 준수도 내공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데. 그리고 야, 내가 언제 너랑 -"

"어어. 그래도 신경은 쫌 써서 입고 나와라. 데이트룩까지는 아니어도 최소 부모님이랑 나들이 가는 것처럼."

"...."

"이거 중요해, 이해했어?"

"...준수야, 남자 둘이서 놀이동산 가는데, 아니, 놀이동산 내부에 있는 삐약이 팝업? - 참고로나이거에대해서도할말있어, 너해명할게많아 - 가는데, 대체 왜 옷에 신경 써야 하는 거지?"

"...."

뭔가 찔리는 것이 있어 보이는 침묵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흐른다.

"이거, 막. 알고 보니 여소 이런 거면 너 진짜 죽는다?"

"그런 거 아니야."

"너랑 나랑 둘이 가는 거지?"

"어, 어어."

"근데 왜 옷을 차려입어?"

"누가 차려입으래. 그냥, 적당히 단정하게 꾸미라고."

"너 입에서 나온 거면 그 두 개가 같은 거 아냐?"

"...."

정곡을 찔린 건지 한 번 더 침묵이 흐른다.

"준수야, 너 말발로 나한테 안 돼. 싹 다 부는 게 어때?"

"아 씨발..."

"오 초 준다. 오, 사,"

"영중아..."

전영중이 흠칫한다. 뭐라고? 영중아? 영중아아?

"한번만 봐주면 안 되냐... 이상한 거 진짜 아니니까 그냥 속는 셈 치고 한번만 하라는 대로 해줘라. 부탁한다."

말문이 막혀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지금 이거, 혹시... 애교? 그런 건가. 묘하게 웅얼거리며 늘어지는 힘없는 말투, 성준수 치고는 자존심을 거의 전부 접어둔 것 같은 멘트. 정말 어이가 없다. 지금 남자한테 남자가... 그것도 귀엽고 예쁠 거 하나 없는 덩치 크고 자존심 센 성준수가 이러면...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전영중?"

"...조수석 미리 데워놔. 그리고 내일 가는 길에는 다 설명해."

"어어, 땡큐. 낼 봐. 무르면 죽어."

혹시나 말을 바꿀세라 빛의 속도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와다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성준수다. 쟤는 정말... 뭐 저렇게 노빠꾸지.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신경이 긁힌 전영중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취방 주방으로 향한다. 라면 다 떨어졌나. 오, 너구리 있다.

일시적 게이 서비스

전영중 X 성준수

"타."

"어..."

7시 반이나 되었지만 꼭두새벽에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전영중은 어기적어기적 성준수의 아반떼에 탑승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준수 아버지의 아반떼였다. 거의 20년 가까이 한 가족을 모신 고물 차에서는 친숙한 냄새가 났다. 성준수 가족 특유의 냄새. 어쩌면 성준수 가족의 분위기를 전영중이 코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지도 몰랐다. 어렸을 때 뒷자리에 성준수랑 성지수랑 함께 셋이 나란히 앉아 놀러 간 곳이 참 많았다. 농구 스케줄로든, 여행으로든 전국에 유명한 웬만한 곳은 다 들렸던 것 같은데. 성준수는 어렸을 때도 불편한 가운데 자리를 항상 자처해서 앉았다. 말로는 성지수랑 전영중이 나란히 앉으면 어색할 수 있으니까 자기가 가운데 앉아야 한다고는 했지만, 그게 성준수 특유만의 쓸데없는 배려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을 전영중은 알았다.

약속대로 좌석은 따뜻하다. 아침에 괜히 일찍 눈이 떠져, 5분이나 먼저 나와 추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영중이 시트에다 몸을 녹이며 얼어붙은 손을 비빈다.

"추워?"

"아니,"

"구라까지 마, 지금 너 코끝까지 빨갛다."

"와, 준수야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그리고 네가 신경 써서 입고 오라고 해서 이 날씨에 코트 입고 있는 거잖아. 양심 어디 갔어?"

전영중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은 성준수는 신호를 기다리며 히터를 켜고 지도에 용산 네버랜드를 검색한다. 신호를 흘깃 보고 직접 몸을 뻗어 히터 방향을 조절해주기까지 한다. 몸을 바로 한 뒤, 찌뿌둥한 긴 목을 양쪽으로 꺾어 스트레칭을 하는 성준수를, 전영중은 최선을 다하여 쳐다보지 않는다. 왜 갑자기 그렇게 훅 넘어오는데. 진짜 간 떨어질 뻔했네...

"뒤에 아침밥 있어. 꺼내 먹어."

"내가 개야?"

"뭔 개소리야? 배고플 것 같아서 기껏 사왔는데, 입이 험하다. 알아서 조용히 처먹어라."

"진짜 말만 들으면 깡패 새끼가 따로 없어, 준수야."

전영중이 뒷좌석 위에 있는 검은 편의점 봉투를 향해 손을 뻗는다. 매점에서 배부하는 가장 큰, 대용량 사이즈의 봉지는, 뭐가 그리 많이 들어가 있는지 차고 넘치려고 한다. 야무지게 안전벨트까지 차고 있는 뚱뚱한 봉지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첫번째 제물인 하늘보리는 순식간에 전영중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꼴깍꼴깍, 시원하게 물이 넘어가는 소리에 성준수가 힐끗 쳐다보지만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물이 넘어가니 본격적으로 입맛이 돌기 시작한 전영중이 20cm 소시지를 2초 컷한다. 이런 건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것을 성준수도 알았는지 아예 15개 짜리 한 봉지가 들어있다. 전영중이 성준수가 보나 마나 대충 데웠을 뜨뜻미지근한 핫바 하나, 꼬깔콘 한 봉지, 야채 크래커 두 팩, 닭가슴살 샐러드 한 판을 해치우고, 맥반석 계란을 두 입 안에 삼키고 있을 때쯤, 보다 못한 성준수가 기어이 한마디 한다. 너 그러다 체해, 병신아. 좀 씹어서 먹어.

"둔두 단소리 오늘 돔 그르타,"

"삼키고 말해."

"으음, 아주 몇 번 씹어서 삼켜라 밥 먹은 다음에 손 씻어라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지 그래?"

"밥 먹고는 손 닦아. 이 차에 먹을 거 흘리면 둘 다 죽는 거야."

"헐.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헐,"

"미친? 흘렸냐? 야, 잠만, 어디,"

끼이이이이익,

"운전에 집중해! 구라야, 미친! 성준수, 씨발, 운전에 집중하라고!"

"야이씨, 그딴 구라를 왜 치는데!"

"너는 제대로 운전면허 딴 거 맞아? 누가 도로에서 눈 떼고 운전하래?"

양측의 씩씩거림이 진정되고 나서야 차 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전영중은 조금 더 천천히 음식을 먹었으며 성준수는 주변 도로를 잘 응시하고 운전하였다. 배가 좀 차니 성준수의 차림새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 전영중이었다. 아까부터 어쩐지 좌측에서 수상한 빛이 나는 것 같았는데, 정면으로 압도적인 비주얼을 마주하니 약간 체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바지, 목폴라, 가죽 재킷. 반 정도 까서 뒤로 넘긴 머리. 얼마 전 구원중고 4인방과 함께한 술자리 술게임에서 개같이 멸망하여 뚫었던 귀에는, 달랑거리는 은색 귀걸이까지 걸려 있었다. 심지어... 저거 눈에 색도 조금 칠한 건가? 충격에 빠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눈으로만 꼼꼼히 스캔한 결과, 전영중은 섀도우를 조금 검출해내고 만다. 성지수가 아침에 일어나서 해준 건가? 이런 미친 꼴값... 이라기엔 반박 불가능하게 잘 어울렸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최고의 흑역사가 될 수도 있었을 법한 과한 착장이었겠지만, 성준수가 하니 그저 패션이자 트렌드였다. 길거리에서 봤으면 전영중도 아이돌로 착각했을 것이다, 정말로.

얘가 이렇게까지 입고 나왔다고? 이거 진짜 무슨 병아리 팝업 가는 거 맞나. 의심의 싹이 다시 튼다. 전영중이 인스턴트 만두를 한쪽 볼로 씹으면서 나무젓가락으로 항의하듯 성준수를 삿대질한다.

"우리 네버랜드 가는 거 맞아?"

"내비게이션을 봐봐라, 어디 가는지."

잠시 후, 우회전입니다.

절묘한 순간에 네버랜드로 가는 길을 안내한 내비게이션 때문에 말문이 막힌 전영중은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한다.

"우리 둘만 가는 거 맞지?"

"맞다 했다. 의심 고마해라."

"너 겨우 부산에서 2년 산 것 가지고 사투리 쓰지 마, 웃겨. 서울 사람이 들어도 어색해 죽겠어."

"어쩌어어라꼬. 니이! 보단 내애가 더 오래 살았! 다이이가. 서울짜아슥이 뭘 안다꼬 지랄지랄지라알이고?"

"아 성준수 존나 킹받아... 너 원래 이랬었나? 저거 공태성이지, 아씨 진짜 킹받아..."

"어쩌라고 씨발아. 내 말투 지적하지 마. 그리고 공태성 그 썩을놈은 무슨."

성준수의 엉터리 사투리 작전에 휘말려 대화의 주도권을 놓쳐버린 전영중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세 번째로 추궁에 도전한다.

"이거 혹시... 그거 아니야?"

"그거?"

"그거 있잖아..."

"...뭔데."

어라? 어라라? 얘 왜 쫄려하지? 왜 갑자기 긴장하지?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혹시나 먼저 말할까 싶어 잠시 기다려 봤지만 성준수는 알아서 이실직고하지 않았다. 결국 나보고 내 입으로 물어보라는 건가. 가볍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꺼내려던 질문이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나온다.

"성준수... 이거... 데이트야?"

"아씨..."

그대로 성준수 귀가 붉어지는 꼴을 황망하게 쳐다본다. 입술이 곤란한 듯 튀어나온 성준수는 고집스럽게 도로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씨... 눈치 개좋네."

전영중이 눈을 끔뻑거린다.

"준수 미쳤어?"

"미안하다."

"아니 너랑 내가 무슨, 엥 사과할 건 없는... 그래도 진짜 미친 거야? 이거 농담이야?"

"설명해줄게."

"지금 설명이 중요해? 나 너무 황당하잖아, 준수야. 어제저녁에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일단 나와보라고 우기길래,"

"야, 씨바거, 나 지금 진짜로 쪽팔리니까 잠깐만 입 닥치면 안 되냐?"

"닥치라는 거 진심이야?"

"아오 씹, 하 미안. 좀, 좀만 가만히 있어 봐 나 말 좀 하게."

성준수한테 있어서는 이게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과임을 너무 잘 알았기에 전영중은 팔짱을 끼고 복잡한 심경으로 성준수의 해명을 기다린다.

"저번 시즌 우승했을 때 지수가 운동화 사줬잖아. 그거 알고 보니 걔가 올 한 해 짬짬이 과외해서 번 돈이었대."

"갑자기? 말 돌리지 마."

"아씨 끝까지 좀 들어라, 쫌. 걔가 근데 삐약이라고, 얘가 유튜브 크리에이턴가 콘텐츠인가 하여튼 하는 캐릭터 있는데, 요즘 완전 빠져 살고 있거든. 근데 얘가 친구랑 잡아놓은 해외여행이 팝업스토어 판매 기간이랑 겹친다고 해서... 내가 대신 가서 사 올까 했지. 걔 곧 생일이잖아."

"그래 이제 준수가 왜 이렇게 팝업에 집착한 지는 알겠어.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뿐만이 아닌데?"

"그러면 말을 끊지 좀 마, 씨발. 입장권 존나 빨리 팔려서 못 샀단 말이야."

"...그러면 우리는 지금 왜 용산으로 향하고 있는 거야? 참고로 난 담 같은 거 넘을 생각 없어."

"한 번만 더 말 끊으면 씨발 나 말 안 할 거야."

"미안 미안."

성준수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지 심호흡을 크게 들이마신다.

"근데 커플 방문 이벤트 표가 있길래 응모했더니 당첨됐다."

"뭐?"

"못 들은 거야, 못 알아들은 거야."

"솔직히 너무 충격받아서 둘 다인 것 같아. 모쏠인 준수가 커플 이벤트에 응모했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들었을 리가 없지."

"씨바거... 맞다고. 팝업창에 커플 한정 응모 이벤트가 뜨길래 혹시나 하고 했는데 됐다고. 그래서 나한테 지금 커플 전용 입장권 있다고, 시발새끼야."

"...."

"...."

"...와, 진짜 황당하다."

"...."

황당하다는 사실에 성준수도 동의했는지, 별다른 변명을 하지는 못한다. 단, 혹시나 지금이라도 전영중이 차에서 뛰어 내릴까 봐, 한 번 더 조수석 문의 잠금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

"와, 성준수 진짜 장난 아니다."

"...해줄 거냐?"

"너 진짜 지수 아끼는구나?"

"씨발 아니야. 그냥 3살 어린 애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거야. 소름 끼치니까 그런 말 하지도 마라."

"그건 소름 끼치는데 동성의 이십년지기 소꿉친구랑 같이 커플 행세하면서 에버랜드 투어하는 것은 안 소름 끼쳐?"

"...그것도 솔직히,"

"됐어, 대답하지 마."

아무리 젊었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봐야 한다고 해도 이것은 좀 아니지 않나. 내가... 성준수 남친? 행세, 라니...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그냥 소름돋고 어이없고를 떠나 비현실적일 지경이었다. 마치 제삼자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영중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은 성준수가 설득을 시작한다.

"야 솔직히... 내가 너랑 진짜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깐 입장할 때만 여친, 아니 남ㅊ, 씨발 애인인 척 해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그냥. 눈 꼭 감고 한 번만 해줘라. 그렇게 깊게 고민할 것 아니잖아."

누가 그렇게 깊게 고민할 일 아니래 성준수... 이게 어떻게... 다시 한번 황당함에 동공이 흔들렸지만, 전영중은 성준수가 쏜다고 하는 말에 용산에서 집까지 다시 돌아갈 돈조차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운명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전영중이 이 미친 짓에 응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성준수의 대사에 있었다. 여친, 그랬지, 방금? 그니까 지금 전영중이 거절했거나, 성준수에게 친한 여사친이 있었다면 지금 조수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성준수라면 애니멀 유니버스 입장을 위해서 길거리에서 여성 한 명을 무작위로 섭외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상상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결국 전영중은 넓은 아량으로 성준수를 위해 일시적인 게이 서비스를 해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하... 준수 너는 진짜 상상을 초월한다. 이게 근데 먹히기나 하겠냐?"

"못 먹힐 게 뭐가 있어. 내가 사귄다는데."

"...."

"...."

"...너 되게 편견 없네. 너답다."

"이 새끼가 그게 무슨 말이지?"

"됐고, 너 나한테 빚지는 거다."

"고맙다. 내가 오늘 세 끼 다 산다. 대신 할 거면 제대로 해."

전영중의 호의를 냉큼 받아먹는 성준수가 아주 조금 얄미워서 괜히 괘씸죄로 이것저것 더 요구한다.

"간식도 다 사."

"어."

"저녁으로 한우 먹을 거야."

"어."

"욜 진짜? 감당할 수 있어?"

"어."

그래도 한껏 마음이 가벼워진 건지, 네 통장 잔고를 0으로 만들어주겠노라는 선포에도 성준수는 덤덤하게 대답한다. 전영중이 팔짱을 끼고 성준수를 가만히 쳐다본다. 저 평정심을 괜히 건드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참자... 참자...

"그래, 우리 준수 말 잘 듣네. 오늘 형님 잘 모시고 다녀야 한다."

"뭐라고 했냐 씨발? 다시 지껄여 봐. 뭐?"


당황한 직원이 성준수 뒤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전영중을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전영중은 어깨를 으쓱하며 빡친 마누라 어차피 나도 못 말리니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남편의 태도로 일관한다. 결국 직원의 흔들리는 동공은 다시 성준수의 얼굴로 향한다. 정말 이 공격적으로 잘생기고 키 큰 두 남자가 커플이라고? 이 여성은 순간 자기가 어제 새벽에 팬픽을 너무 많이 읽다가 자서 눈에 필터가 쓰인 것이 아닌지 다시 한번 의심해봐야 했다. 그래, 분명 내 귀가 잘못된 거야. 앞으로는 무조건 3시 이전에는 자자. 여자가 다시 한번 발랄하게 말한다. 손님~ 이 입장권은 커플 전용입니다. 성준수도 다시 한번 무표정으로 대답한다. 네, 알고 있습니다.

다시 두 사람의 숨 막히는 대치가 벌어진다. 직원분께서는 키가 기껏해야 백육십 초반인 것 같았지만, 머리 위에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덩치의 그늘이 드리워져도 둘을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 뒤 친구분과... 커플... 이시라는 거죠?"

"애인이라니까요."

"아~ 네."

이제서야 전영중이 차 속에서 왜 자신에게 편견 없다고 했는지 슬슬 깨닫기 시작한 성준수였다. 한국 사람들은 존나 보수적이었다. 성준수가 전영중이라 사귄다고 하고 전영중도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었지, 그걸 의심하는 심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상황이 생각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자 인상이 한층 더 험악해진다.

"그래서 안 들여보내 주시겠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러면 제가 얘랑 사귀는 걸 인증이라도 해야 합니까?"

"음..."

"아니 ㅆ, 하. 뭘 고민하십니까, 쟤가 여자였으면 그냥 보내주셨을 거 아닙니까."

"손님, 진정하시고요,"

밀린 줄도 밀린 줄이지만, 소란스러운 소동과 성준수의 화려한 얼굴과 착장에 의하여 이미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점점 뒤에 서 있기만 하는 게 뻘쭘해진 전영중은 성준수의 팔을 가볍게 붙잡아본다. 누가 보면 얘가 진짜 억울해서 화내는 줄 알았네. 아니, 화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준수야, 진정해."

"아니, 지금 이분께서 우리 사이를 의심하잖아? 내가 빡이 쳐, 안 쳐."

무슨 일이야?

저기 게이 커플을 안 보내준다고 항의하는 것 같은데.

여기 동성애 차별해?

그렇다기보다는 사기 치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 보내주시는 것 같은데.

에바임.

저게 사기 같아? 지금 저 존잘님 얼굴에 분노가 가득한데.

다 됐고 저렇게 생긴 남자 둘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둘이 사귀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었구나...

정신차려 미친년아.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할 때쯤에는 이미 직원이 매니저를 불러온 상황이었다. 대환장하는 성준수를 보며 전영중은 머리를 굴린다. 얘가 이 추운 날씨에 고혈압 걸려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얘네 부모님께는 대체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 것인가. 전영중 머릿속에 성준수 어머님의 대노한 얼굴이 순간 스친다. 전영중의 세포들이 비상 버튼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얼굴을 붉히고 핸드폰에 뜬 온라인 티켓을 들고 횡설수설하고 있는 성준수 어깨 너머로 전영중이 팔을 두른다. 마찬가지로 전혀 설득당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매니저를 향하여 전영중이 가능한 가장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인 줄 모르고 아까부터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너무하시네요. 사귀는 거 맞으니까 들여보내 주시겠어요? 이거 이미 추첨이 된 거 번복하는 것도 규정 위반일 텐데."

"아..."

매니저가 성준수의 왼쪽 어깨를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전영중의 손과 그의 눈웃음을 여러 번 쳐다본다. 전영중마저 이렇게 나오니 약간 헷갈리는 눈치이다. 왼쪽 뺨에 성준수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제발 그가 니 지금 뭐하냐 씹새야, 나 드디어 미친 건가, 와 같은 표정만 안 짓고 있길 바랐다. 박수도 손이 맞아야 치는 거다 준수야...

매니저의 표정이 점점 아리송해져 갈 때쯤, 전영중이 강수를 둔다. 어깨 위의 손이 스르르, 등 뒤로 떨어져, 성준수의 날개뼈와 갈비뼈 뒤를 천천히 쓸고 허리라인을 타고 빙그르르 돌아가 왼쪽 골반 부근에 안착한다. 티켓 직원이 말한다. 오 맙소사. 매니저가 성준수 허리와 전영중 손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전영중의 뻔뻔하고 시원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약 10분 만에 편견이 가로막고 있었던 네버랜드 애니멀 유니버스의 철통같은 입구를 뚫은 전영중과 성준수였다. 혹시나 아까 일로 분위기가 불편해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럴 일은 없었다. 아직도 분노가 완벽하게 가시지 않는 성준수가 커플 입장권 전용 자주색 팔띠를 매만진다. 야씨, 늦었어. 지금 팝업 열린 지가,

성준수의 표정이 갑자기 경악으로 물든다.

"씨바거, 사람 붙여놓은 거 아니야, 저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야..."

성준수를 따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더니, 아까 분명 매니저 뒤에서 정문을 지키고 있었던 커다란 공룡 탈을 쓴 자가 1초 늦게 반응하며 미행을 멈추고 서둘러 포즈를 취하며 인형인 척한다.

"저거... 뭐야?"

"씨발 존나 몰라."

"우리 따라오고 있었어?"

"그런 것 같다 씨바거."

"준수야, 셋 세면, 조금만 뛰어볼래?"

"하나, 둘,"

"야, 왜 네가 세. 내가 셀 거야."

"진심이냐 영중아."

"셋, 둘,"

"닌 왜 거꾸로 데. 셋 하는 순간 뛸 뻔했잖아, 새꺄."

"준수야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리,"

"뛰어!"

성준수가 냅다 손목을 낚아채고 뛰는 바람에 크게 휘청인 전영중이 결국 육두문자를 내뱉는다. 준수야 씨발 미쳤어어어?

한참을 뛴 둘이었다. 둘 다 운동하는 새끼여서 그런지 체력은 좋았지만, 워낙 사람이 - 그것도 키가 훨씬 작고 소중해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 많아서 그런지 마음 편한 도주를 할 수가 없었다. 헉헉거리며 다다른 곳은 비교적 사람이 없는 반달가슴곰 우리 앞이었다.

"준수, 와, 숨이 차? 이게? 하하하, 너 체력 바닥인 건 여전하네."

"흐억, 하, 지랄하지마새끼야, 헉 헉, 니도 힘들어하고, 있잖아, 하,"

"너만 할까? 너 지금 밀면 쓰러지게 생겼는데."

"지ㄹ,"

"...뭐라고?"

"헉, 씨발..."

"왜 그래, 뭔데,"

성준수 눈이 흔치 않게 휘둥그레졌길래 전영중이 뒤를 돌아 그의 시선을 쫓는다.

"저거, 설마..."

"아까 그 공룡인 것 같은데, 설마 쫓아왔냐? 또라이 새끼, 진짜 씨발 또라이 새끼."

"준수야 놀란 건 알겠지만 여기 아기들도 많은데 욕하는 건,"

공룡이 움직이지도 않는 새까만 눈을 부릅뜨고 전영중과 성준수를 향해 다가오는데, 흡사 거미줄에서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하는 불쌍한 파리들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는 포식자의 비장함과도 같았다.

"씨발 준수야 저거 왜 이렇게 빨라."

"전동 보드야 새끼야 저거 전동이야!"

"미친,"

"뛰어!"

왜 뛰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었으나 우선은 뛰라고 강력하게 소리치는 본능에 몸을 맡겨 둘은 뛰고 뛰었다. 와중에 성준수는 팝업스토어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암기해 놓았는지, 갈림길이 나오면 망설이지 않고 길을 골랐다.

...인 줄 알았으나.

전영중이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공작새 우리를 세 번째로 지나쳤을 때였다.

"준수야, 헉, 헉, 너 길이 어딘지 알아?"

"헥, 헥, 말걸지마씨발, 흐억, 죽을것같으니까,"

"아니, 그래, 도, 어디 가는, 지는 알아야지,"

"그냥뛰고있는건데? 아오, 아, 씹."

발바닥이 찌릿찌릿하고 폐가 버거운 가운데에도 성준수의 대답을 들으며 기가 찰 정신머리는 남아있었다. 한심한 자식아, 적어도 잡혀서 쫓겨나기 전에 성지수 선물은 사야할 것 아니야... 순간적으로 너는 진짜 나 아니면 어쩔래라는 조금 뜬금없는 생각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전영중은 성준수 팔목을 낚아챈다.

"거기 가면 또 사자 우리잖아, 준수 병신이야?"

"아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팝업스토어 앞에는 긴긴 줄이 있었다. 호흡 부족으로 눈도 오직 깡 하나만으로 뜨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성준수가 이를 보고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전에 전영중이 그를 대기 인원이 두 팀 정도 되어보이는 옆줄로 끌고 간다.

"멓야. 먼뎃헥,"

"위에 이벤트 당첨 전용이라, 고 쓰여 있잖아 준ㅅ, 켈록, 준수야."

"아씨발다행이닭,"

겨울에 땀 흘리며 도착한 팝업스토어 쇼핑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된다. 성준수가 가격 높아 보이는 물건은 손에 잡히는 대로 죄다 쇼핑카트에 담았기 때문이다. 비싼 게 좋은 거라는 인식이 가져온 대참사 같았는데, 이를 보면서도 전영중은 정말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부리 위에 하트 vs 머리 위에 새싹."

"준수야... 부리 위에 하트 있는 애는 누가 봐도 중세 시대 하층 희극인 같이 생겼잖아."

"오케이 그럼 얘로 간다."

성준수가 망설임 없이 새싹병아리를 쇼핑 카트에 담는다. 전영중은 그 사이에 카트 안에 있는 벼락 맞은 병아리가 그려진 정말 못생긴 공책을 구원해 내고 그 대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귀여운 아기 병아리 모양의 초를 담는다.

성준수가 담는 디자인이 하나같이 점점 더 기이해지자 결국 죽을 각오를 하고 소신을 표했던 전영중이었다. 처음에는 니가 뭐냐며 극대노를 하던 성준수는 전영중이 자기가 고른 상품들이 재고가 몇 개 남지 않은 이유가 다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니 적당히 간섭하라는 짜증으로 화를 한 단계 낮추었고, 어떤 여성 분이 지나가다 전영중이 고른 인형을 보고 어머 이거 어디서 집으셨어요? 라 물으며 호들갑을 떨기에 (아마 높은 확률로 인형이 아니라 인형을 들고 있던 성준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었겠지, 전영중은 확신할 수 있다) 결국 전영중의 안목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영중의 조언을 얌전히 듣는 단계를 넘어서 모든 선택을 맡기는 상황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었다.

성준수가 양손에 조그마한 병아리 액자를 하나씩 들고 진지하게 전영중에게 어느 것이 더 귀여워 보이냐고 물어보던 때였다. 대답을 하려고 하는 순간, 수많은 인파 사이로 슬쩍 보이는 매점의 입구에서 파란색 인형 탈이 보이는 듯하였다...

"- 근데 이 액자가 이쁘다고 해도 좀 실용성이 없어 보이지 않냐? 가격도 좀,"

"준수야."

"왜."

"뒤에..."

"씨발? 따돌린 것 아니었어?!"

결국 시간이 없는 관계로, 성준수는 쇼핑에 대한 총책임을 전영중에게 양도했다. 졸지에 쇼핑 카트를 손에 쥐게 된 전영중은 성준수의 명령하에 얼떨떨하게 다음 진열장으로 넘어가 쇼핑을 진행하게 된다. 성준수는 이미 골랐던 물건을 카운터에서 한 차례 빠르게 계산하고 다시 전영중에게 돌아온다.

"야, 설마 이미 산 물건인데, 커플 아니라고 막 반품하라 그러지는 않겠지."

"여기 규정 몰라... 나 여기 어렸을 때 너랑 오고 처음 와봐."

"그건 나도 그런데... 씨발."

"그래도 쟤가 줄을 서고 있기 망정이지."

어느새 일반 대기 줄 두세 번째에 자리를 잡고 희번뜩한 눈으로 전영중과 성준수를 쳐다보고 있는 공룡과 눈이 마주친다. 성준수 손에 들린 쇼핑백을 포착한 순간, 눈에 광기를 띄운 공룡은 어디선가 나타난 무전기를 뚱뚱한 세 손가락으로 받쳐 들고 뭐라고 흥분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저거 뭐야, 쟤 지금 뭐라는 거야. 뭐 하는 거야."

"우선 이것도 계산하자. 빨리."

"전영중 저거 진짜 이상한 새낀데? 좀 줴패야 정신을,"

"너야말로 정신 차려 준수야, 너 농구 안 할 거야? 빨리 계산하고 와."

"왜 우리한테만 지랄이야, 여기 있는 커플들 중 우리만 구란가 지가 어떻게 알,"

결국 성준수를 끌고 계산대로 간 전영중이었다.


(1) 이미 바닥난 체력으로 (2) 한겨울에 (3) 코트/가죽바지를 입고 (4) 양손에는 5kg이 넘는 병아리 굿즈를 한가득 들고 (5) 사람 넘쳐나는 거리를, (6) 장신의 남자 둘이 (7) 장시간 뛰어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GG를 친 것은 성준수다. 길 가장자리의 돌담에 풀썩 주저앉으며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언젠가부터 같이 뛰고 있던 성준수가 사라졌기에 좌우를 살피다 뒤를 돌아본 전영중이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본다. 저래서 경기는 어떻게 뛰려고, 병신. 에휴...

나름대로 호흡을 진정시키며 성준수 앞까지 다시 터벅터벅 걸어간다. 습관처럼 극딜을 박으려고 입을 열지만, 성준수의 흉흉한 눈빛은, 말 잘못하면 옆집 사자 먹잇감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서 자제한다.

전영중이 성준수가 양손으로 소중하게 꼭 쥐고 있던 쇼핑백을 가져간다. 항의라도 하려는 듯 잠깐 굳은 손가락은 전영중의 잠깐만 줘보라는 말에 힘을 푼다. 양손에 쇼핑백 두 개씩 짐을 전부 든 전영중이 고개를 까딱한다.

"오래 뛰고 바로 앉아 있으면 안 좋아."

"알아, 말 걸지 마, 콜록,"

"퍼져서 앉아 있길래 모르는 줄. 일어나서 좀 걸어."

"아이씨..."

불평은 하지만 그래도 전영중이 시키는 대로 일어나 조금 걷는다. 하도 시달려서 그런지, 저 뒤에서 전동보드 소리의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조금 걷다 보니 성준수의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돌아온다. 전영중이 길 한 구석에 작은 음식 부스를 턱 끝으로 가리킨다.

"가서 뭐 좀 사서 마시고 와."

"넌 뭐 마실 건데."

"제일 비싼 걸로."

"씨바거..."

말은 그렇게 해도 전영중의 말에 크게 부당함을 못 느꼈는지 성준수는 순순히 지갑을 꺼내서 부스로 향한다. 인파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교란작전은 큰 키 때문에 진작 포기했었다. 꿩 대신 닭 그래도 안 되면 병아리라는 심정으로 전영중이 위장술을 위해 선택한 장소는 낙엽이 다 떨어진 엉성한 나무 근처 벤치이다. 나무가 코트 색이랑 그나마 비슷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성준수는 생각보다 순식간에 돌아온다.

"씨바거,"

"왜, 또 쫓아왔어?"

"일어나지 마, 일어나지 마, 가만히 있어 봐."

얼마나 급한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 성준수가 전영중 오른쪽 자리에 재빠르게 앉는다. 손에는 기다란 매장용 컵 하나가 들려 있다. 네 것 살 시간은 있었고 내 것 살 시간은 없었어?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성준수가 빨대를 꺾어 전영중 입에 물린다.

전영중이 눈을 깜빡이며 뭐하냐는 듯 쳐다본다.

"빨아."

"?"

"아 뭔, 마시라고."

우선 시키는 대로 한다. 쪽쪽 빠니 단 맛이 올라온다. 눈썹 하나를 올리고 성준수를 쳐다보니 해명이 돌아온다.

"저게 제일 비싼 거랬는데. 무슨 피스타치오 아몬드 민트 녹차... 그런 거였어."

"나쁘지는 않네."

"그래 보여 씨발 잘도 처먹네."

"갑자기 왜 시비지?"

성준수는 대답도 않고 허공에서 빨대를 하나 더 뽑아낸다. 그리고 전영중의 빨대가 꽂혀 있는 구멍에 함께 쑤셔 넣는다.

"준수... 뭐해?"

드디어 미친 건가...?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성준수는 이미 음료를 빨기 시작한다. 빨대를 감싼 분홍빛 입술과 꿀렁거리는 목울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까 성준수가 답답하다는 듯이 전영중의 손을 잡아 들어 컵에 감싼다.

"...잡으라고?"

이마 밖으로 가출이라도 할 듯 하늘 높이 굴러가는 눈알을 보니까 성준수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잡았어야 했나 보다. 전영중이 컵을 잡은 순간 성준수가 손을 떼니, 영락 없이 성준수한테 음료를 먹이고 있는 꼴이 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전영중은 괜히 뒷목이 홧홧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 전영중 뒤를 한번 힐끗한 성준수가 빨대에서 입을 땐다. 입술에서 나는 쪽, 소리가 괜히 민망하게 들린다.

"아오... 이거네."

"준수야, 너 혹시 아까 음료 사러 갔다가 머리 다치고 돌아온 거야? 아까부터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

"저 공룡 새끼 봐라. 접근 안 하잖아."

전영중도 슬쩍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본다. 정말 성준수 말대로 파란 공룡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 젖은 빨래처럼 흐물흐물해진 손에 든 무전기는 간신히 공룡 옷에 부착된 집게로 연명하고 있었다.

"우리 둘이 커플인 척 하면 되는 거라고, 씨이발, 진짜 사람 귀찮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네."

"준수는 여기 사람들 속여서 VIP 입장권 얻어낸 것은 기억 안 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만 구라겠냐."

전영중은 이벤트 입장 줄에 서 있던 알콩달콩한 커플들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는데...

"그래서 지금 한 음료를 둘이 나눠 마신 거고?"

"야야, 나도 이게 될 줄 몰랐어."

"이게 로맨틱한 거야? 침만 섞이고 좀... 그런데."

"저 공룡은 충분히 헷갈리고 있는 것 같은데."

전영중은 다시 공룡을 쳐다본다. 급하게 무전기를 들어 대형 머리를 좌우로 휙휙 돌려가며 상황을 설명하는 꼴이, 충분히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긴 하다.

"...넌 연애도 안 해본 주제에 이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성지수한테 했다가 이런 건 애인한테 하는 거라고 혼난 게 한두 번이어야지."

긁으려고 한 질문이었으나 의외로 성준수는 평온하게 대답한다. 전영중이 코웃음을 친다.

"와, 차 속에서 데이트라고 말한 거 컨셉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심이었구나, 준수야?"

"아니 씨발, 이게 어떻게 내 진심인데? 내가 사람 붙여달라고 했냐고, 씨바거 진짜 존나 환장하겠네."

"너 이렇게 나한테 자꾸 화내면 들킨다. 준수 나한테 신세 져서 여기까지 왔는데 산 거 다 뺏기고 쫓겨나면 볼만 하겠다."

"설마 쫓아내겠냐고."

성준수가 고개를 양옆으로 우두둑 꺾더니 일어난다. 쇼핑백 네 개를 모두 집어 든다. 전영중까지 얼떨결에 일어나자 공룡탈이 허둥지둥 무전기를 허리에 꽂으며 전동 보드를 대기시킨다.

"저 씨바거는 저거 배터리 다 떨어질 때까지 따라오려나 보네, 징압다."

"쇼핑백 하나도 안 든 게 이제 좀 마음에 걸리나 봐? 알아서 다 들고."

"어차피 내 짐이잖아, 새꺄. 그리고 너 손 하나 남은 걸로 할 거 있어."

"양심이 뒤졌네, 준수. 또 뭘 시키려고."

"이쪽으로 와,"

"여기?"

"어. 이제 내 허리 잡아. 아까 게이트에서 했던 것처럼."

"미쳤어?"

"이 동네 자체가 존나 제정신 아닌 듯. 나 더는 뛰기 싫다, 영중아. 가자."

이 정도 시비에는 더 이상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성준수였다.


허리에 손은 신의 한 수였다.

미친 공룡에게 쫓기기 전, 그러니까 애니멀 유니버스 입장 전까지 네버랜드 안을 활보하며 성준수와 전영중이 받은 번따 제의는 통합해서 26번이었으나 (전영중 8, 성준수 18회로 압도적인 성준수의 승리였다) 전영중이 성준수의 허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걷기 시작한 순간 그 횟수는 기적적인 3번으로 줄어들었다 (성준수 3회로, 전영중은 정말이지 성준수보다 자기가 조금 더 게이같이 생긴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덕분에 둘은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관광을 할 수 있었고, 그제야 어렵게 따내고 더 어렵게 지킨 입장권이 돈값을 하게 된다. 공룡은 여전히 둘의 뒤를 따랐지만 둘이 커플 행세를 하면 할수록 전동보드로 순간이동 기술을 선보이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호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구경을 하면서 싱거운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오, 늑대다."

"늑대."

 좌측의 늑대 우리의 팻말이 두 사람의 눈을 동시에 사로잡는다.

다른 건 그냥 지나쳤다 해도, 이건... 눈 한번 마주쳤을 뿐인데 전영중과 성준수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안무라도 맞춘 듯, 발걸음을 90도 돌려 늑대 야외 방사장으로 향한다.

실외 방사장은 둥근 원 형태로, 콜로세움을 연상케 했다. 늑대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소리 지르지 마세요, 밀치지 마세요와 같은 팻말이 사방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늑대들이 대부분 취침하고 있어서인지, 구경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평균 키 190인 두 사람은 사회적 악이 되지 않기 위해 뷰는 조금 버리더라도, 그 누구의 시야도 가리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늑대를 전영중이 냅다 가리킨다.

"지국민 닮았다."

"으음."

"안 그래?"

"글쎄..."

"그럼 저 옆에, 이휘성."

"오. 좀 있다."

"눈꼬리 좀 처진 게."

"이휘성이 처진 눈이었나?"

"...아닌가?"

"그걸 기억도 못하냐."

"그럼 준수도 이거 맞춰 봐, 그럼 인정. 지국민 눈이 유쌍이다 무쌍이다."

"...무쌍."

"운 좋다? 그럼 저 새는 어때. 저 비둘기. 박교진."

"오... 오?!"

"있지? 있지?"

"씨발 존나 똑같이 생겼어, 눈 작은 것부터 - 와 머리도 졸라게 각졌네. 야, 야 저거 찍어놓자, 개웃겨."

동물원이라는 그 장소 자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 어려지고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일까. 실없는 소리를 하며 늑대 구경을 한참 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풀어진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고 있고 성준수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전영중도 자기 광대가 내려간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나 지금 왜 이렇게 행복하지...? 라는 본질적인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있는데, 성준수가 고개를 돌리며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야, 저 털 색깔..."

채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두 눈이 마주치니, 전영중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성준수 허리에 팔을 가볍게 둘렀던 게, 자세가 영 전영중이 뒤에서 끌어안는 꼴이 되어버렸다. 겨울바람에 맞서 말하려다 보니 얼굴도 성준수 귓가에 너무 밀착했나 보다, 눈앞에 성준수 얼굴이 가득 담긴다. 추위에 발개진 코끝과 광대가 흰 피부색과 대비되어 더 붉게 보이며, 남자 주제에 더럽게 길고 섬세한 속눈썹이 한올하놀 보인다. 가까운 거리에 당황해 말을 하다 말고 눈만 끔뻑거리는 성준수와 역시나 상황 파악 중인 전영중이 잠깐 서로를 쳐다본다. 갑자기 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손끝에 느껴지는 성준수 허리의 감촉도, 코에 훅 끼치는 비누향의 체취도, 성준수의 움직임에 귀밑에서 잘게 짤랑거리는 은귀걸이도, 전부 전영중의 뇌를 이상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춥냐?"

"어, 어?"

"얼마나 추웠으면 이렇게 붙어 있고 지랄이야. 야야, 들어가자."

전영중의 품에서 스르르 벗어나 퇴장하는 성준수를 전영중이 눈으로 약간 멍하게 쫓는다. 입을 운영하는 기관은 다행히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 말은 알아서 나온다.

"지금 네 귀가 더 빨갛거든? 그리고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입고 나왔는데..."

더 이상 둘의 발자취를 따라오는 수상한 공룡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동굴처럼 꾸며놓은 실내로 들어와 히터 바람이 잘 나오는 구석진 비상구 앞에 성준수는 전영중을 세워 둔다. 잠자코 호의를 받아드리고 있는데 성준수의 여전히 붉은 광대며 귀 끝이 눈에 들어온다. 성준수는 생긴 것처럼 추위를 참 잘 탔다. 바닥에 쇼핑백을 내려놓은 채, 흰 손가락을 서로 꼼지락거리며 녹이고 있는 성준수를 향해 전영중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을 내민다.

"준수야 제발 머리 좀 써. 차가운 걸로 차가운 게 녹여져? 아무리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만 했다고 해도,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됐어, 씨바거."

"줘보라니까? 넌 무슨 멋 부리느라고 주머니도 없는 재킷을 입고 나와, 이 날씨에."

"필요 없다니까, 니 손은 얼마나 따뜻하겠냐고, 야,"

"내 별명 중 인간 핫팩 있었던 것 같은데. 초딩 때 누가 붙여줬던 별명 같은데. 아 누구였더라."

"아 됐어, 기껏 녹인 손으로 차가운 거 잡아서 뭐하게, 아오씨 하여간 말 졸라게 안 들어요."

결국 막무가내로 성준수의 얼음장 같은 손을 자기 손 사이에 포개어 잡은 전영중이었다. 반항도 잠시, 태생적으로 따끈따끈한 커다란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성준수의 불만 가득한 불평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변한다. 결국 조용히 자기 손을 전영중에게 맡기는 성준수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보랏빛 조명이 얕게 비치는 어두운 동굴의 은밀한 한 구석. 히터에서 새어 나오는 조용한 바람 소리. 포개어 잡은 손. 아까와 같이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전영중이 혹시나 소리가 날세라 신경 써서 조용히 침을 삼킨다. 차마 성준수의 눈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애매하게 인중 정도를 쳐다본다.

성준수의 혀가 불현듯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온다. 자연스럽게 살짝 벌린 입술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자, 혀가 건조한 윗입술을 재빠르게 핥고 놀리듯 순식간에 다시 사라진다. 지금 성준수의 눈을 쳐다보고도 이성을 붙들고 있을 자신이 없어, 전영중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계속 입술만을 바라본다. 그 입술이 움직여 모양을 만들며 뭐라고 한다. 전영중은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에휴. 어쩌면 본인에게 하는 건지도 모르는, 무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쉰 입술이, 점점 가까워진다. 전영중은 확신이 필요했다. 이제서야 눈을 올려 성준수를 바라본다. 아무리 주변이 어둡다고 해도 성준수의 눈빛에 열기가 가득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는 성준수는 이미 전영중의 입술에 입술을 쪽쪽 여러번 눌러댄 후였으며, 이제는 아주 대담하게 혀를 사용해 전영중의 입술을 핥고 있었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부드러운 혀가 외설스러운 소리를 내며 자기 입술과 마찰할 때마다 머리 어딘가가 굉장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으며, 입술이 촉촉해지는 만큼 등줄기 또한 전기가 통하듯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 독촉에 이기지 못하고 입을 벌려 성준수의 혀를 허락해 주었을 때는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육체를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과, 이를 그냥 느껴야 한다고 소리치는 육체. 처음에는 지금 성준수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을 하는 이성이 우세를 차지하는 듯했지만, 곧이어 기억력을 담당하는 뇌의 장치가, 너도 고개 숙이고 입술 붙이지 않았냐? 라고 배신을 때림으로써 상황이 역전되는 듯하였다.

성준수는 분명 키스를 서툴게 했는데, 혀도 꼭 지같이 움직이는 방식에 있어 사람을 굉장히 꼴리게 했다. 따라서 전두엽과 고간과 심장이 동시에 불타는 몽롱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전영중은 지금 자기 입술을 빠는 사람이 성준수라는 사실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뜬 실눈에는, 성준수의 꾹 감은 눈 밑에 부채처럼 펼쳐진 긴 속눈썹이며, 행위에 집중하며 잔뜩 찡그린 얇은 눈썹이 들어온다. 순간 예쁘다는 형용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필사 전영중이 병신이자 좆의 노예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설마 이것도 연기라기에는 지켜보는 공룡도 없었고, 추워서 입을 맞붙이고 있는 거라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아니, 발끝까지 온몸이 달궈지긴 했으니 목적 달성인 건가. 성준수의 차가운 손이, 언제 탈출했는지 전영중 목선을 타고 올라가 귀를 만지작거린다. 처음에는 차갑고 낯선 감촉에 움찔 떨었던 몸이, 나중에는 다른 자극으로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적극적으로 달려들던 주제에 성준수가 먼저 입술을 떼 잠깐 숨을 거칠게 들이마신다. 폐활량 한심한 건 키스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딱 죽지 않을 정도의 산소만 삼킨 후, 성준수가 다시 전영중의 입 안에 혀를 미끄러지듯 집어넣는다.

무엇보다도 전영중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성준수의 숨소리였다. 언제부터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성준수의 셔츠 아래로까지 침범한 전영중의 손은 천천히, 조금씩, 마른 근육을 위아래로 쓸어보고 있었다. 손 아래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간지러웠는지 조금씩 내빼려고만 했던 몸이, 입천장을 제대로 긁은 혀 때문에 전영중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어 허리를 꽉 쥐자, 심하게 비틀린다. 동시에,

아흑,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성준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이게 무슨... 미친. 좆이 반응하는 위험을 느끼며 전영중이 온 힘을 다해 성준수를 밀쳐내듯이 제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야, 헉, 잠깐만, 아까 전속력으로 뛰었을 때보다 더 숨이 모자라 보이는 성준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전영중이 냅다 도주한다.

"야, 어디가, 야!"

급한 대로 가장 먼저 보이는 화장실에 들어가 가장 가까운 칸을 박차고 들어간다. 엥 방금 그 찌질하고 어이없는 내 행동은 뭐였지? 곧바로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다. 성준수가 전영중을 쫓아와 입장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지 성준수가 전영중을 크게 부른다. 큰 한숨과 함께 타일 바닥에 부츠 힐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유일하게 사람이 들어 있는 칸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오... 이 새끼가..."

다른 말이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성준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 그도 그럴 게, 쟤도 지금 혼란스러울 것이다. 지금 놀이공원에서 함께 게이커플인 척 하던 불알친구랑 키스를 한 것이 둘의 현실이었다. 그것도 격하게.

성준수는 끝까지 아무 말이 없다. 결국 발소리가 들리며, 굳게 걸어 닫힌 문 밑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사라진다.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에 이어, 철썩철썩, 물이 무언가와 세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린다. 휴지가 꽤 과격하게 뽑힌 뒤, 쓰레기통으로 곤두박질친다. 성준수는 다시 전영중 칸 앞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세면대 앞에 가만히 서서 한동안 고민하더니, 답지 않게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많이 놀랐나 보네."

전영중은 이미 오늘 후회 스펙을 쌓을 만큼 쌓았다. 성준수와 키스를 한 것도 모자라, 무슨 겁탈 당한 여중생처럼 도망가 화장실 칸 안에 숨었다. 이것은 몇 년이 지나고도 떠올리면서 이불을 찰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 느낀 수치심을 합친다고 하여도, 같이 사고를 쳐놓고 찌질하게 화장실 안에 숨어 있는 자기와는 반대로 태연하게 상황을 수습하는 성준수를 보며 느낀 창피함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미안하다."

전영중이 눈을 꾹 감는다. 쪽팔림과 후회가 물밀려오듯 자신을 덮쳐온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나도 사과를 해? 근데 이제 와서? 개쪽팔린다... 아 진짜 내가 왜 튀었지. 존나 존나 찌질하다 전영중 진짜...

"많이 역겨웠...냐?"

애매한 어투에 위화감을 느껴 눈을 뜬다. 줄임표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압축되어 담겨있었다. 성준수가 저렇게 무엇인가를 억누르듯, 짓씹듯이 말을 뱉는 일은 흔치 않았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에서부터 자기를 보호할 때밖에 없었는데, 전영중이 알기로는 세상에서 성준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은 성준수 자기 자신 뿐이었다. 혹시, 얘도 지금 쪽팔려서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닐까. 성준수도 마찬가지로 착잡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아주 조금 사라진다.

"...그래. 안에서 토하고만... 있지 말아라. 나 아까 거기에 있을게."

"...."

"천천히... 처리하고 나와."

퇴장하는 성준수의 발소리가 조금 힘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전영중은 제 코가 석 자다. 전영중은 사타구니 사이의 불룩한 실루엣을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그리고 성준수가 완벽하게 퇴장하자, 신경을 손에 얼굴을 묻고,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일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하다. 설상가상으로 내리기 시작한 눈은 더욱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뒷좌석은 올 때와는 다르게 편의점 음식 대신 병아리 굿즈로 가득 차 있다. 저녁으로 소고기 외식을 하자는 약속은 한물 건너간 지 오래다. 약간 출출해진 전영중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성준수가 건네주었던 자판기 커피를 호호 불면서 조금씩 마신다.

길이 막힌다. 꼬리물기가 심해 창밖으로 거의 몇십 분 째 같은 거리를 내다보고 있던 전영중이 입을 천천히 연다.

"준수야,"

"...어."

"나 할 말 있어."

"...어."

평상시 같으면 답답해 뒤지겠으니까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처말하라고 했을 사람이 본인이 뜸을 들여가며 단답형으로 대답을 한다. 성준수도 반드시 아까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소리다. 긍정 회로를 멋대로 돌린 전영중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한다.

"너무 놀라면 안 돼. 준수 가뜩이나 운전도 못하는데 감정조절 못해서 눈길에 미끄러져 봐. 황천길 오르는 거 한순간이야.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

"씨바거..."

"...."

"...어."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을 수 있나?"

전영중의 주의가 무색하게 성준수가 당장 도로에서 눈을 떼고 전영중을 황당하다는 듯 쳐다본다.

"씨발? 그 애매한 문장은 뭐야 니 속마음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어... 그러게. 준수야, 신호 켜졌어, 신호. 놀라지 마라고."

"아 씨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머리카락을 헤집은 후, 성준수는 다시 안전 운전에 집중한다. 숨죽인 목소리 아래로 쌍시옷의 향연이 이어진다.

전영중 또한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한다. 연애를 많이 해본 것도, 사람을 많이 좋아해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확실히 정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을 생각해 본다면. 전영중은 성준수를 위해 아침 일찍 꾸미고 나왔으며, 성준수와 함께 커다란 공룡을 피하여 동물원을 함께 뛰어다녔으며, 성준수 대신 관심도 없는 병아리 굿즈 쇼핑을 대신 해주었으며, 성준수와 함께 온종일 게이 커플인 척하고 다녔으며, 성준수와 키스를 나눴다. 비록 망한 가짜 데이트였어도... 전영중은 오늘 하루가 정말 즐거웠다. 단 한 번도 집에 가거나 다른 사람과 다른 곳에 대신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차려입은 성준수는 예뻤고, 그와 한 키스는 역겹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친구인데 내 눈에 예쁘고 키스했는데 꼴리면 그게 좋아하는 거 아닐까. 전영중은 결론을 내린다.

"나 너 좋아하는 거 맞는 것 같아... 으아아 준수야 차! 차! 놀라지 말라고!"

"악 씨발! 내잘못아니다! 야 여기서 끼어들면 어떡하냐 뇌에 하자 있는 새끼야!"

"준수야, 들은 것 맞지? 나 너 좋아,"

"들었어, 들었어."

"반응이 왜 그래? 성준수 미쳤나."

"나도 너 좋은 것 같다 씨발 야! 벤츠면 다야 씹새끼야?"

"하... 진짜 미쳐... 준수 가만히 있어 봐."

전영중이 창문을 내리니 펑펑 쏟아지는 눈이 차내로 들어온다. 하지만 따뜻한 온기에 닿자마자 녹아내려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영중이 고개와 어깨 절반을 차 밖으로 꺼내어 문제의 벤츠를 찾는다. 위협적인 각도에 서 있는 놈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길래 전영중은 고개를 틀어 운전자와 눈을 똑바로 마주친다.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손으로 님이 마땅히 양보하셔야죠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제야 벤츠를 포함한 주위 운전자들이 매너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전영중에게는 다시 성준수와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

"준수도 안 역겨웠어?"

"역겨웠으면 내가 그렇게 물고 빨았겠냐..."

전영중이 잠깐 고민한다.

"그럼 잠깐만 차 세워볼래?"

"미쳤냐? 여기서?"

"준수야, 너 말 못 알아들어?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갓길에 세워야지."

"알아들었어 씨발, 근데 여기서 갓길을 어떻게 가냐고."

"...잠시만 있어 봐."

전영중이 다시 한번 차 밖으로 몸을 빼고 교통정리를 한다. 덕분에 성준수네 아반떼는 순식간에 안전한 갓길에 도착한다. 성준수가 기어를 바꾸고 전영중을 의문에 찬 눈빛으로 쳐다본다. 전영중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우리 키스하자. 서로 좋아하는 채로. 이리 와봐."

"하... 미친놈..."

말은 이렇게 해도, 이미 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넘어가고 있는 성준수였다.

* 용산구 네버랜드 애니멀유니버스 커플 이벤트는 사전에 커플 각각의 이름을 입력해야지만 응모할 수 있습니다. (대충 빵짝준이었단 말입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