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네 말에서 소주향이 나서

결혼한 지 1년만에 첫키스하는 빵준

* 한 입으로 세 말하는 여자 레전드

* 빵준절 기념으로 지각이지만^^ 어떻게든 완성해서(…) 올립니다

* 야메 노개연 롴콬? 아 이게 코미딘가 아뇨 다시 보니 안 웃긴 듯 여튼. 빵짝준 보고 싶어서 썼습니다 제가 빵짝준을 좀 많이 좋아함 그냥 본인도 본인 마음 잘 모르는 것 같은 빵준 뇌절이라 보는 제가 마음이 힘들면 내립니,

* 부제 엄마 직장 상사 아들램이랑 어쩌다 결혼한 전영중

어머니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영중은 과장 조금 보태 하루아침에 성준수 남편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마땅히 뒤따라와야 하는 설명은 두 가지가 되겠다. 성준수가 누구이냐, 그리고 전영중이 왜 그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가.

한 문장으로 요약해 정리하자면 성준수는 어머니가 다니는 대기업 이사님 아들이셨다. 어머니는 다른 기업에 말뚝 박을 줄 알고 계셨다가, 경기 침체 한 번에 그 회사가 쫄딱 망해버리자 늦은 나이에 성준수 아버지네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이제 갓 대리가 된 사람이 무슨 일로 이사 얼굴을 보기나 하겠는가. 하지만 전영중 모께서는 아들과도 상반되는 E력을 보유했고, 문어 다리처럼 뻗어나간 인맥을 통하여 이사님 관련 고급 정보를 알아내셨다. 이사님께서는 본인이 직접 겪은 것이 있어서인지 돈은 없어도 좋으니 성격 좋고, 훈훈하게 생긴, 실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얌전하고 교양있는, 절대 사고 치지 않을 조신한 일반인 사위를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50 가까이 되는 나이에 새로운 회사에 취직해 폭풍 승진을 한 사람답게 전영중 어머니는 엄청난 추진력, 친화력, 인맥을 보여가며 전영중과 성준수를 위한 선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어도 두 사람 모두 정확히 아는 부분이 없다.

전영중, 성준수 모두 단순한 일회성 선 자리라고 생각했는지, 첫 만남에서는 별 특별한 내용이 오가지는 않았다. 정확히 누구네 아들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께서 어딘가의 거물이다, 정도로만 소개받은 성준수에 대한 전영중의 감상은 짧았다. 하얗다, 잘생겼다, 까칠하네.

그리하여 집에 돌아가서 어땠냐는 어머니의 말에는 동일 감상을 남겨주었는데, 어머니가 성준수의 정체를 공개하고 둘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것이 아닌가. 전영중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서 쌍시옷을 입에 올렸다. 그래봤자 뭐해. 결혼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고, 그들이 동거할 집도 엘리베이터 오르듯 자연스럽게 저 높이로 승진을 한 전영중 어머니가 알아서 다 준비해놓았다. 혼란해하는 아들에게 그가 던진 말은 딱 하나였다. 너는 졸업 준비나 제대로 하라고. 그렇다, 도비로 일하고 있는 대학원에서 박사학위조차 따지 못한 전영중은 이십 대 중반에 유부남이 될 운명이었다.

하여튼 간에. 전영중이 다시 성준수를 봤을 때는 결혼식 날이었다.


성준수 쪽에서 많이 아쉬울 결혼이었다.

적어도 전영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탈인간급으로 잘생겼거나 성준수 수발을 들거나 성준수 향하는 총알 앞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기라도 했으면 몰라. 분명 양산형 로맨스 소설들이 말하는 재벌 쪽에서도 매력 있는 혼이라고 느꼈을 텐데. 문제는 성준수의 잘남이었다. 전영중이 잘난 구석이 있었으면, 성준수는 같은 부문에서 배로 뛰어났다. 아니, 뛰어나지 못한 부문이 있었을 때에는 우월한 정신력으로 신경을 쓰지도 않음을 확실히 했다. 아니, 어쩌면 성준수는 전영중이 그를 의식하는 반만큼도 전영중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제게 향해지는 관심을 뒤로하고라도, 성준수의 더러운 성질은 매력적이었고, 그의 강단은 빛났으며, 날카로운 생김새는 관능적이었다.

함께 살다 보면 자연스레 그 남자의 매력이 더 느껴졌으며, 이사님이 먼저 나를 원했던 거라고, 당당한 마음가짐을 가졌던 전영중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사님 취향을 뒤로하고, 이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정략혼을. 어찌 보면 어머니께서 정말 하늘에 있는 별을 딴 것이라고 할 법 했다.

거칠고 사납지만 때론 다정하고, 부끄럼을 타지만 그런데도 불타는 성질머리나 단호한 열정으로 무장한 성준수를,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전영중으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거 삼 주 째, 제가 후원하던 아이들에게 온 편지를 읽으며 씨바거 그 돈 노는 데 쓰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씨바 욕을 하다가도, 새벽에 목말라 거실로 나와보면 책상에 앉아 투박한 손글씨로 일일이 답장을 써주고 있는 성준수를 보며 전영중은 위기감을 느꼈다. 저 무던한 섬세함. 이러다 내가 사랑이라도 하겠구나. 침실이라도 분리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직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결혼한 부부를 어머니께서 배려한 부분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안다면 걱정하실 이사님께는 비밀이었고. 성준수는 전영중과 그렇게 친하지 않은 상태였다. 가끔 밥 같이 먹고, 대화 하고, 한 공간에 있으면 어색하지 않은 정도.

전영중은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거리를 벌리고, 그대로 유지하고자 다짐했다. 괜히 분에 맞지 않는 사랑이라도 했다간 존나 망할 터이니.


성준수는 어떤 일도 대충 하지 않았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밤 11시 이후에 집에서 보지 못한 기억이 없었으며, 몸에서 누군가의 향이 묻어난 적이 없었다. 집에서 받는 전화는 전부 사무적이었고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빨라 전영중이 그를 피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무언가라도 느꼈는지 최선을 다해서 잘 하지도 못 하는 말을 걸어왔다.

분명 성준수가 저보다 사회성이나 외향성 등이 떨어지는 것 같았고, 그 사실을 근거로 거리를 두는 것이 제가 마음만 먹으면 쉬우리라 판단했는데, 오판도 그런 오판이 없었다…. 방심할 때면 성준수는 전영중 방문을 두들겼다. 나와서 같이 밥 좀 먹자, 어디 좀 가자, 이것 좀 보자. 처음에는 진땀 빼며 핑곗거리 찾던 전영중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고등학교 때 고백해오던 여자아이들 철벽 치던 기술이 절로 나왔다. 미안, 시작은 사과로. 내가 일이 있어서, 사유는 간결하고 뭉뚱그려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거절은 확실하게.

전영중이 기회도 틈도 주지 않고 철벽을 치니 성준수도 하는 수 없었다. 1달 가까이 되었을까. 성준수도 제 할 도리를 이만하면 다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조금 풀이 죽은 건지, 자존심이 상한 건지.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전영중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전영중은 내심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드디어, 이 혼의 균형이 맞추어졌음을, 뻔했던 결말이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시간이 흘렀다. 하염없이. 결혼식을 올렸던 겨울을 지나,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집은 고요했다.


전영중이 초저녁에 집에 있을 이유는 거의 없었다. 우선 그 시간대에는 연구소에 처박혀 있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그게 아니어도 술자리에 끌려 나가거나 교수의 자잘한 업무를 수행하기 바빴다. 자연스레 일이 바빠질수록 성준수와의 갑작스러운 결혼 생활도 머릿속에서 휘발되었다. 가끔 동료 도비 1, 2 따위가 니 마누라는 어쩌려고 그러냐, 이러다가 이혼장 날아온다, 와 같은 드립을 쳐댔지만, 전영중 마누라는 전영중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을 뿐에 이혼장 이야기는 이사님께서 마음만 바꾸신다면 생각보다 끔찍하게 가능성 높은 이야기되었기에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날에는 전영중은 술을 마셨다.

하지만 오늘,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일찍 해방된 전영중이었다. 사유는 불명확했다. 그도 그냥 실실 웃으며 오늘 같은 날 두 번 다시 없으니 형수님 실컷 구경하라는 동료 노비, 아니 도비에게 전달받았을 뿐이다.

집에 들어와 폰 좀 하다가. 평소에는 들춰보지도 않을 책 한번 훑어보고. 결국 침대에 누워 멍을 때렸다. 평상시에는 제발 10분이라도 좋으니 잠 좀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만큼은 괜스레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또 술이나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방이 있는 1층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려갔다. 졸려, 졸리고 피곤한데, 잠이 안 와. 두통까지 살짝 이는 상황에서 주방에 들어서니 싱크대에 기대어 제 손에 든 와인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성준수가 눈에 들어왔다.

“어.”

“뭐야.”

뭐긴 뭐겠어. 이 집 사니까 그러고 있겠지. 피곤함에 절어 조금 속도가 느려진 한심한 머리를 탓하고 있으면, 전영중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성준수 시선이 따갑게 와닿았다. 성준수도 못 본 새에 다크서클이 한 층 어두워지고 턱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요즘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닌 듯했다.

대치 아닌 대치 상태가 벌어졌다. 충분히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열고 언젠가 구비해두었던 소주를 꺼내고, 문을 닫고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묵직한 시선 하에 눈이 안 떨어지고 발이 안 움직였다. 성준수가 입을 연다.

“같이 한잔할래?”

“아니, 괜찮아.”

그새 습관처럼 튀어나온 반사적인 거절.

성준수가 싱크대에 무게중심을 실어 더 편한 모습으로 걸터앉는다. 느긋하게 손에서 와인잔을 굴리는 모습, 가늘게 뜬 눈, 무표정한 안면 근육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기세에 눌리는 기분이다. 재차 권유한다.

“한잔만 하고 들어가.”

“제안은 고맙지만 나 바빠, 할 거 있어.”

“음…. 할 거 뭐.”

보통 이렇게까지 물어보는 경우는 없었다. 전영중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성준수 좌측에 놓아진 와인병을 가늠한다. 그리고 성준수의 평소보다 붉은 듯해 보이는 살갗. 술이 꽤 들어갔나보다.

“있어, 연구소 관련.”

성준수 입꼬리가 뒤틀린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전영중이 눈을 깜빡인다. 거리낌 없이 냉소적인 태도에 상당한 당황을 느낀다.

“됐고, 야, 따라와.”

그렇게, 성준수는 싱크대를 떠나 식탁을 향하여 걸음한다. 전영중이 반사적으로 쫓아갔다. 입 밖으로 말이 쏟아진다.

“너 방금…뭐라고 했어?”

“따라오라고.”

…아니 듣긴 들었는데, 그래도 조금 기분이... 아니, 기분 나쁠 수 있는 거 아닌가? 충분히. 명령하는 성준수 태도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전영중은 어그로에 단단히 이끌려 식탁 앞에까지 따라오고 만다. 어느새 성준수가 식탁 모서리에 거꾸로 진열되어 상시 대기 중인 와인 글라스를 뒤집는다.

“앉아.”

“나 바쁘다고.”

“앉으라고.”

“나 바쁘다니까?”

“우리 엄마 귀에 너랑 나 결혼 생활 어떤지 알리기 싫으면, 앉아.”

숨을 들이킨다. 분노가 목 끝까지 타오른다. 위에서 찍어누르듯 무시하는 태도. 어쩔 수 없이 해준 듯한 결혼의 주도권을 재차 상기시키는 내용. 전영중의 자존심은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가장 최악인 것은 이것이었다. 성준수 어머니 귀에 말 잘 듣고 착하고 정 많은 일반인 서방이 알고 보면 제 소중한 아들을 1년 간 냉대했던 말단 대학원생이라는 소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이혼서류에 도장 찍히는 것 한순간일 것이라는 게 사실이라는 상황. 성준수의 협박이 정말 효력이 있다는 사실이 전영중을 더 분노하게끔 했다.

그것도 그건데,

숨을 내쉰다. 성준수의 흐리멍덩한 동공. 조금씩 새는 발음. 멋대로 전영중 와인잔에 붉은 액체를 좔좔좔 따르면서 잘게 떨리는 손.

저거 생각보다 제정신이 아니네.

대체 무엇이 매 순간 맨정신으로 주위를 통제하기 좋아하는 성준수를 진탕 취하게 만들었을까. 어느 정도의 사고가 인생을 침범해야 성준수가 술의 알딸딸함에 온몸을 맡기게 되는 걸까. 이런 모습을 보면 또 마음 한구석이 약해지면서, 묘한 충족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 손 떨려서 씨발거리며 집중해야지만 와인 하나 제대로 따를 수 있는 정도의 정신머리인데도 나를 찾았다 이거지. 성준수의 약한 모습을 보면 근원 모를 불쌍함이 분노를 억눌렀다.

전영중이 스르륵, 테이블 의자에 착석했다.

“근데, 갑자기 왜.”

“뭐? 아….”

전영중 말 한마디에 고개를 쳐들고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다 쨍,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와인잔 내부와 병 입구가 충돌한. 전영중이 말하면,

“너 취한 것 같아.”

“…혼자 마시기 싫어.”

그래서 외로워….

묘하게 대답 아닌 대답이 돌아왔다. 뒷말은 삼켰으나 너무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성준수는 귀까지 달아올랐지만 전영중 눈을 피하지 않았으며, 표정은 전혀 부끄러운 사람의 고백처럼 보이지 않았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투정 부리는 어린 아이.

아. 아무리 성준수랑 사이가 어색하다고 하고 제 인생이 바쁘다 해도 명색이 1년 차 부부인데. 아직 한참 좋을 때. 전영중은 짧게나마 반성했다. 성준수가 이딴 거 신경 안 쓰고 막 사는 날라리면 몰라. 이 녀석은 꼭 쓸데없는 곳에서 고집을 부리고 지조를 지킬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왜 너 자신을 나라는 족쇄에 가두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성준수를 향한 냉대는 성준수라는 인간 특성상 조금 가혹한 행위였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민이 한 번에 잊힐 정도로 치고 들어오는 것은 성준수의 저돌적이고 퍽 유치한 발언이다.

“너 나 싫어?”

“어?”

“싫냐고.”

“…아니?”

잔뜩 놀라 아무 말에 내뱉은 것과 가까웠지만 성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표정이 조금 덜 경직된 것 같기도 하고.

“난 너 안 싫어.”

“…그래.”

“너랑 결혼한 것도 싫진 않아.”

“…아.”

“근데 넌…”

다시 한번 성준수가 뒷말을 삼킨다. 지금 전영중이 입에 갖다 대지도 못한 이 와인은 도수가 과연 얼마일까. 얼마나 마셨기에 평소에는 이말 저말 대담하게 뱉어내는 애가 저토록 말을 하염없이 삼키고 있을까. 취해서 주위가 붉어진 눈이 전영중을 노려본다. 당황스럽게도, 전영중은 순간 성준수가 삐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제가 잘못한 자각이 없는 것도 아니니 우선 성준수를 달래야 할 것만 같아서, 허락도 없이 말이 입 밖으로 샌다.

“나도 싫지 않아.”

전영중의 대답에 성준수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나 도 싫 지 않 아 여섯 음절에 가득 담긴 공손한 격식을 읽었는지 눈만 굴리고 한숨을 내쉬며 제 잔에 있는 와인을 소주 들이키듯 목구멍으로 넘겼다. 도로 빈 잔에는 남은 병을 구십 도로 뒤집어엎었다. 철철철철, 묽은 용액이 유리벽을 때리는 소리가 대찼다. 잔에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음료수가 주위에 방울방울 튀었다. 성준수는 쏟아져 내리는 폭포에만 눈을 고정해, 제 소매가 젖어가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전영중이 행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한마디 선포가 떨어진다.

“나 혼자 자는 거 싫다, 전영중.”

내포한 의미가 설마 그것이 아니길 바라며. 곤란하게 웃는다.

“아…. 근데 나 잠자리 예민한 거 알잖아. 이제야 내 방에 익숙해졌는데 준수 방에서 같이 자는 거 적응할 때까지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어려울 것 같아, 미안.”

“밥도 혼자 먹기 싫어….”

“우리가 일하는 시간대가 안 맞는데 어떡해.”

쾅, 빈 병을 성준수가 와인잔 옆에 내리친다.

“씨발 난 왜 안 되는 건데.”

함의를 모르기에는 주어진 상황이 있었고, 정확하게 알기에는 성준수의 사정을 잘 몰랐다. 예민한 곳이 찔린 전영중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결국 동거하며 처음으로 그 쓸모를 하게 되었던 와인잔은 전영중 입술에 한번 닿지 못하고 다시 식탁으로 향한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우리 엄마 상사 아드님이셔서? 금수저 자존심 채워주는 건 딱히 전공이 아니라서. 세상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정말로 시간이 안 돼서 안 된다는 것을 어떡해? 아 물론 내가 되는 시간도 안 된다고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남는 시간까지 너에게 쓸 정도로 너를…. 아니 그것보다 우선 정략결혼 상대가 너밖에 없었는데 왜 너는 안되는 거냐고 묻는 건데, 그리고 정략혼이니까 어색하고 불편한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고를 후보는 많았다. 어쨌든 진심을 뺀 나머지 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잠시 고뇌하던 전영중은 이 모든 말을 꾹 삼키기를 선택한다.

“준수야, 너 좀 취했다.”

성준수의 한숨이 서럽다. 허공에 휘휘 내젓는 손에는 취객의 엇박이 실려 있었다. 휘-청휘청.

“알았어. 가. 됐어.”

“그래. 적당히 마시다 자.”

전영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와인잔은 그대로. 성준수가 눈을 감는다. 꾹 감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안구를 덮듯이. 마치 전등이 너무 밝아 동공을 그 빛으로부터 살포시 가리는 것처럼.

“됐다고.”

“잘자.”

“그래, 꺼져.”

터덜터덕 제 방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성준수가 처음으로 제 뭣도 아닌 직급을 입에 올리다시피 했다. 네가 내 엄마 직원 아들이라고….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가장 곤란했던 부분을 한번 물리치니 자신감이 생긴 전영중이었다. 끝까지 성준수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의사 표현을 분명하게 한 것 같아 후련했다. 하지만 동시에 - 그 큰 덩치를 가진 주제에 사람 사는 곳이라기에는 너무 하얗고 깨끗한 주방에서 왜 그렇게 자그마해 보이는지, 심기가 불편했다.

그날 밤 오랜만에 12시간 이상의 잠을 확보한 전영중은 언제나처럼 약 네 시간 가량의 잠을 뒤척여가며 잤다. 성준수가 아주 약간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그 짧은 교류 안에 마음에 걸리게 했던 사실이 아니꼬워서….


걸었다.

전영중은 거의 울다시피 도비 1, 2, 3의 품에 파고들어 서로를 얼싸안았다. 연구실에서는 한동안 코맹맹이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 교수를 제외한 그 어떠한 정식 기구도 단체도 인정해주지 않는 로봇의 위대한 첫 한 걸음이었다. 물론 세 번째 발자국까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휴대폰을 꺼낸 도비들의 영상에 담겼고, 네 번째 발걸음에서는 맥없이 옆으로 넘어져 전사했지만, 그래도. 성과는 성과였다.

그리고 큰 성과에는 교수님의 열린 지갑과 함께 목구멍에 소주병이 따랐다.

얼마나 마셨을까. 정말 가늠이 되지를 않았다. 돌아가며 쪽잠 자고, 코딩하고, 기계 조립하고, 뜯어고치고. 정말 박사 학위가 뭐라고 인권이 그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씻고 면도를 한 전영중은 안 그래도 피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고 있었던 이성이 술 한 병과 함께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끔찍하게도 스스로가 한심해질 것을 알았지만. 현실 도피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황홀했다.

몸도 마음도 발음도 유들유들해진 전영중이 기가 막히는 귀소본능을 발휘하여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언제 봐도 낯선 2층짜리 천장에 웃음이 실실 샜다. 실실 새던 것은 어느새 박장대소로 변했다. 신발이 잘 안 벗겨져서 입술을 오므리고 신발끈 하나하나를 풀어 물건을 전체 분해했다. 너덜너덜해진 천을 옆으로 치우다 보면 눈앞에 성준수가 있었다. 내려다보는 그 눈빛은 현관 전등과 정확히 역광이어서 잘 보이지도,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성준수 얼굴을 보니 왠지 웃음이 식었다. 다만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니어서 적당히 눈웃음을 지어줬다. 살가운 인사도 잊지 않고.

“어, 준수. 안녕.”

심란해 보이던 성준수는 이 대사에 제대로 미간을 구겼다. 뭔가 끔찍한 것을 증명받은 눈치였다.

“대체 씨발 얼마나 마신 거야 전영중….”

“조금,”

엄지와 검지를 모아 성준수 눈앞에 들이미는 전영중을 성준수가 살살 뒤로 밀친다.

“이게 어떻,”

손가락 사이의 간격이 순식간에 배가 된다. 전영중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많이?”

“하….”

“그래도 집까지 알아서 들어와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럴 때는 차라리 그냥… 하, 됐다.”

성준수가 눈을 피한다.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대충 이 새끼 취하고도 발음 존나 정확하다는 이야기와 비슷했다.

“상태 괜찮냐?”

“난 좋지. 준수는?”

“나?'”

“어, 너.”

별 질문도 아니었을 뿐더러 만취한 자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라 먹금할 만도 했다. 그런데도 성준수는 고심해서 조심스럽게 문장을 구사했다.

“오늘 일이… 조금 빡세긴 했는데 집 가서 쉬니까 좋아졌어.”

“아… 어떡해.”

갑자기 비이성적인 미안함과 안됐음이 온몸을 확 물들었다. 전영중이 눈썹 늘어뜨린다. 나 때문에 쉬는데 나온 거야?

“….”

성준수가 빤히 전영중을 바라봤다. 표정이 오묘했다. 입술은 꾹 다물고, 안면은 굳었으면서, 눈만큼은 애처롭게 일렁이고 있는, 전영중이 생전 그 누구한테서도 보지 못한 표정이다. 결국, 성준수가 입을 뗐다.

“그래 병신아… 누가 적당히 시끄러워야지.”

“아 그랬구나, 미안해.”

또박또박 발음한 전영중은 - 귀소본능이 딱 현관까지만 작용하는지, 집 안에 오니까 몰린 잠이 쏟아졌는지, 아니면 가까운 거리에서 흐릿하게 풍기는 성준수 살 내음이 뭔가 안정감을 부추겼는지 - 그대로 기절하고 만다.


전영중을 2층까지 끌어다 침대에 놓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생각보다 덩치가 크고 무거웠다. 집은 두 명 사는 주제에 또 쓸데없이 넓어 가지고. 땀까지 흘려가며 전영중을 등에서 소파로 쏟아놓으면 성준수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아예 누워 등을 시원한 대리석에 가져다 대고 숨을 헉헉 내쉬었다. 기절을 해도 참…. 성준수가 받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앞으로 이 사람한테 술을 권하는 자가 있다면 전부 족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흐흐흐흐. 웬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틀어 소파 위를 쳐다보면 저 커다란 덩치가 꿈속에서 실실 웃어대고 있었다.

자연스레 생각이 방향을 튼다. 무슨 꿈을 꾸길래. 누구 꿈을 꾸길래. 괜히 몸을 일으켜 전영중 얼굴을 한번 쳐다보면 풀어진 얼굴이 꽤 행복해 보였다. 미간 사이에 주름도 없고. 눈도 예쁘게 접혀 있고. 광대도 과감하게 상승해서는. 이참에 얼굴 구경을 실컷 해봤다. 물론, 전영중의 웃음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성준수를 포함한, 전영중이 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두에게 내오는 상냥하지만 선을 긋는 표정. 그런 표정도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진하게 웃는 모습이라니. 신선했다. 심장이 불쾌하게 쿵쾅거린다.

현관에서의 전영중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성준수가 슬쩍 손가락을 내밀어 전영중 미간을 들쳐 올려본다. 살살. 이렇게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눈을 떴었지. 저를 빤히 쳐다보는데 그 오로지 저를 향한 관심에 심장이 엇박자가 났었다. 애초에 전영중이 눈에 들어온 게 그것 때문이었다. 이 사람의 몰입력. 한 번에 한 가지 것만 진하고 강력하게 바라보는 집착과 열정. 회사가 대학과 협찬을 맺어 제공해준 랩에 몇 날 며칠 틀이 박혀서 관성에 이끌리듯 한 가지 실험만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던 끈기. 아버지한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직원도 아니고 직원 아들인 것 같다는 말에 얼마나 속이 썩고 애가 탔는가. 대화 한번 못해보게 생겼다고. 물론 양측 모두 한 치 앞 알 수 없는 부모님을 둔 탓에 어쩌다 결혼까지 해버렸지만. 하여튼 대화 한 번 제대로 못 하는 것은 여전했다.

성준수가 하나 놓친 것이 있었다면 전영중의 몰입이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 관심을 먼저 끌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대상은 커녕 그저 그 주위를 빙빙 맴도는 수많은 행성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전영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어찌나 확 떴으면, 죄지은 거 하나 없는 성준수가 흠칫하며 놀랐다.

“아씨,”

“성준수?”

“…그래 나다, 병신아.”

전영중이 이마를 찌푸린다.

“네가 왜 여기…”

“같이 사니까?”

“왜…?”

“니 남편이니까, 새끼야.”

“…왜?”

성준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애매하게 시야에 걸리는 행성이 될 바에는 질량이 너무 작아 중력의 영향마저 받지 않는, 까마득한 먼지가 되는 경우가 훨씬 나았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라도 싶었다. 전영중이 제가 궤도에 오른 것을 안 순간 뒤집힐 힘의 판도를, 따라서 제가 느끼게 될 위태로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몰라, 새끼야.”

“너 그때 외롭다고 했잖아… 아직도 그래?”

“…씹.”

“우리 키스해볼까?”

“갑자기.”

전영중 눈에 초점이 없었다. 걔가 웃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은.”

“...”

“음 뭐 이렇게라도 노력해봐야지, 다른 건 안 되겠는데…”

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분명 저 칼날 같은 입을 막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전영중 멱살을 끌어다 잡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술에 꼴아있는 놈은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가만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정말 좆 같은 것이, 이 사실도 혀를 열심히 굴리다 보니 무언가 이상하기에 골똘히 생각하다 중간에 깨달은 것이었다. 근데 그게 뭐. 얘가 안 움직이면 내가 움직이면 되지. 성준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정도 취한 거면 이 새끼 내일 기억도 못한다. 전영중 시야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분노하면 이런 허접한 추리로 달랬다. 이 기회에 전영중을 예뻐해 줄 수 있는 만큼 실컷 예뻐해 줘야지. 물론 나는 너한테 예쁨…까지는 몰라도 관심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긴 하지만. 네가 못하겠다는데 나라도 해봐야지. 결국 끝나고 보면 목구멍 넘어간 음식처럼 그게 그거이지 않을까.

쪽, 쫩, 쪽. 입술을 떨어뜨리고 두 손 모두 사용해 전영중 입술 제 입술 모두 박박 닦는다. 숨이 조금 차서 초까지 세어가며 박동수를 줄이기 위해 심호흡했다. 가슴이 한계치로 들쑥날쑥했다. 하아…. 성준수가 가느다랗게 내뱉는 숨에 전영중 붉은 눈가가 살짝 어둑해졌다.

“준수야….”

“뭐.”

“…나랑 잘래?”

“….”

“나 지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성준수가 전영중을 쳐다봤다. 눈에 힘을 담아 쳐다본다. 꼼꼼히 얼굴 전체를 훑고 다시 한번 취한 자의 흐리멍덩하고 축축한 눈을 쳐다봤다. 이게 무언가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전영중 또한 정답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성준수는 전영중을 잘 몰랐지만, 이 정도는 알았다. 지금 저 새끼는 몹시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뭐 그것도 당연히 그건데….

“아니.”

“왜, 외롭다며. 나 너한테 자지는 서는 것 같은데.”

“너 취했어. 안 서.”

“서.”

“너 취했어.”

“준수야….”

전영중의 눈이 다시 한번 애처롭게 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시야에 잔뜩 껴서 초점이 흐트러진 게 눈앞의 성준수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나, 나 이렇게 더는 못 살겠어.”

“야,”

“차라리 섹파로라도 지내는 게….”

한숨과 함께 성준수가 소매를 걷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아 정체성을 잃은 정도의 꽐라를 정신 차리게 하는 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손끝까지 힘을 조절하여 빠른 속도로 전영중 양 뺨을 쳤다. 챱, 챱. 찰진 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렸다. 전영중이 찬 바람이라도 맞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꺄, 너 내일 후회하지 말고 닥치고 얌전히 기어들어 가서 자라.”

전영중을 소파에 두고 걸어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가슴이 아려온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전영중은 그날 자기가 했던 말, 성준수가 했던 말, 자기가 했던 행동, 성준수가 했던 행동.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준수를 볼 때마다 무심하게 감겼다 떠졌던 눈매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마냥 화들짝 날카로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성준수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어쩌면 이제 전영중을 더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그저 제 욕심이 연장하는 사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언 1년 가까이 전영중과 부부로 살았다. 이렇게까지 붙잡아봤는데도 진전이 없었다. 성준수는 낭만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다. 아닌 건 아니었다.

이러한 자각이 든 순간, 괜찮을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르게 솔직히 괴로웠다. 마음이 괜스레 핫핫해져 술집을 찾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순식간에 누군가에게 꽂혀, 만나보고자 상황을 마련하고, 옆에 두며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어보자 노력해본 적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런 만큼 끝까지 실패한 것도 처음이지만. 텅 빈 상실의 기분은 술이 메꾸어주었다.

위스키가 목을 태우며 꼴깍 넘어가는 기분을 만끽하는 성준수 시야에 누군가 들어온다. 준수? 준수 아이가.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반가운 얼굴에 표정이 한껏 풀린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를 마주하니 혹시나 다칠까 봐 스스로 꽁꽁 묶어두어 경직되었던 마음이 느슨해진다. 그러다 보니 전에 쌓아왔던 설움이 터져나갈 것 같기도 하고. 시원하면서도 허전한 기분이었다. 서로 마주 앉고 한참을 소소하게 떠들며 술을 홀짝대었다. 결혼 관련 이야기는 감정적으로 예민한 상태에 술까지 들어갔으니 혹여나 제가 추잡하게 울기라도 할까 봐 성준수가 적극적으로 회피했다.

말하다 보니 시원한 감정이 이겼나보다. 딱히 재밌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마음 편한 사람과의 대화여서 그런지.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대화는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집에 들어갈 때까지 잔잔하게 들뜬 기분은 유지되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자정이었다. 

집에서 먼 술집이 아니었기에 걸어오면서 초겨울 바람을 실컷 맞은 성준수 볼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오랜만에 새 공기를 마주한 상쾌함에 눈꼬리는 조금 더 헤프게 휘어졌다. 그런 상태로 우연히 문 앞을 지나가던 전영중과 눈이 마주쳤으니.

대치 상태가 한 번 더 이루어졌다. 전영중 표정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분명 실험실에서 본 전영중은 언제까지 솔직하고 읽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1년이 지나도록 성준수를 바라보는 눈길은 흡사 의미 없는 낙서가 된 벽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아, 그래도 오늘은 성준수가 찔리는 것이 있었으니. 매일 못해도 10시까지는 꼬박꼬박 들어오고, 누구랑 만나러 갈 때는 전영중이 매번 알겠어, 건조한 한마디로 일관하여도 꼬박꼬박 어디 갔다 온다고 문자를 보내왔는데, 오늘은 전부 그러지 않았으니. 그리고 지금 성준수는 누가 봐도 술에 취한 꼬라지였다. 뭐라도, 한마디라도, 하지 않을까.

전영중 눈매가 미세한 반응을 보인다. 눈 아래 부근 애교살이 조금 상승하면서 찡긋, 눈을 불쾌하게 찡그린다. 지금 한껏 스스로에게 솔직해진 성준수마저 제가 전영중의 어떤 반응을 바라는지 자신도 확실하지 않았으나 그 불쾌하다는 반응이 조금 기꺼웠던 것 같다. 조금만 더, 무언가를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재밌게 놀았어?”

“…어.”

“그래.”

그렇게, 전영중이 등을 돌린다. 발걸음이 조금 끌리는 게 할 말 다 못한 사람의 것은 맞았지만, 그게 성준수 눈에 들어올 리가. 오랜만에 가벼웠던 마음이 한순간에 쿵 하고 내리 앉으니 성준수도 욱하는 마음이 빠르게 치솟았다. 저게… 저게 진짜 뭔데 이렇게 기분을 좆같게 만들지? 마음의 근본은 전영중에 대한 애정과 호감이라는 것을 알긴 했으나 어쨌거나 지금 그 아웃풋이 짜증과 분노인 만큼 성준수는 거칠게 신발을 벗어던지고 쿵쾅거리며 2층으로 저벅저벅 올라가는 전영중 뒤를 빠르게 쫓았다.

“야. 이 새끼야.”

뒷옷을 단단히 잡아 끌어당기면 전영중이 놀라서 왜? 뭔데,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뭔데 그래….

야심차게 사람을 붙잡고 운을 떼기는 했으나 성준수는 언어와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확한 포인트가 짚이지를 않았고, 그나마 확실히 알겠는 감정마저 어휘력이 부족하여 입 밖으로 시원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성준수가 할 수 있는 것은 마구잡이로 더듬으며 이것저것 마음속 답답함을 짧은 감탄사와 수식어구로 표현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성준수가 말할수록 전영중의 표정이 더 애매모호하게 변한다. 말하는 성준수도 입과 뇌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강력해, 온몸에서 힘이 서서히 빠지는 무기력감에 빠져들고 만다. 회의감이 든다. 말이 늘어진다. 그래, 말해봤자, 뭐. 어쩌라고. 모르겠는데. 자기도 모르겠는데 전영중이 알 리가 있나. 성준수는 포기한다, 결국.

“하 씨발 됐다….”

허접한 마무리와 함께 뒤를 돈다. 도로 1층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 눈알이 황당하도록 건조하게 느껴진다.

저 멀리서 전영중이 굳은 채로 자리에 우뚝 서 있으면, 주방에서는 와인이 와인잔을 거칠게 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거슬려서. 붉은 액체가 무신경하게 허공에서 수직 낙하를 하여 요령 없이 잔을 채우고, 넘치고, 주변에 튀길 것이 신경 쓰여서. 전영중은 내려가 보았다. 저도 모르게.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성준수 뒤를 따라 계단을 거슬러 1층으로 내려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이미 취한 듯했는데. 와인을 그 사이에 얼마를 처삼킨 건지, 눈이 허무하게 풀린 성준수가 대리석 식탁에 볼을 눌러붙이고 냉장고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감정을 빼앗긴 듯 지독한 무표정이었다. 전영중이 피식 웃었다. 의식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웃겨서 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냥, 보는 저도 다 허탈해서 픽, 바람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준수야,”

목소리가 부드럽다. 성준수한테는 처음 써보는 목소리,

“성준수.”

냉장고 앞, 성준수 건너편에 앉아 똑같이 시원한 테이블 표면에 얼굴을 붙여본다. 단단하고 매끈한 표면이 부드럽다. 반쯤 빈 와인잔 너머로 성준수를 응시한다. 부분부분 붉게 물든 성준수 또한 원본처럼 빛나게끔 잘생겼다. 다만 굴곡진 눈이나 입술 끝이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애달파서. 네가 그러면 계속 착각하게 되는데.

정을 안 주려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는 해야 팔려 온 기분이 들지 않아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얘가 외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직위로 얻어 따낸 남편이든 뭐든 되어 존엄성이 망가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랬다가 버려지는 모멸감은 꼭 참을 수 없었는데….

세 번째로 불러본다.

“준수야.”

미동 없는 성준수는 전영중이 저를 쳐다보는 대로 계속하여 빤히 전영중을 그저 쳐다보고, 또 쳐다본다. 눈에 읽히는 포기에 가까운 심정이 문득 두렵게 느껴진다. 전영중이 마른 입 안을 한번 핥는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응?”

“….”

“아버지가 데려온 와이프가 살갑지도 않고, 너 눈에 쏙 들려고 애교 부리는 것도 아니어서?”

“….”

“그렇다기에는 네가 나를 너무 봐줘. 헤어지든가, 못 해 먹겠다 하든가. 왜 1년 가까이 그대로 두는데. 왜, 우리 엄마 때문에? 우리 엄마가 불쌍해? 우리 집 너네 회사 아니어도 잘 먹고 잘살아, 나 우리 부모님 충분히 부양할 수 있어.”

“….”

“대체 너한테는 내가 뭐길래 그러는 거야, 응?”

“….”

“한 번만, 한 번만 솔직하게 말해주면 안 될까?”

성준수는 대답이 없다. 손을 천천히 들어, 손끝만 한번 까딱 움직인다. 가까이 와보라고. 간신히 평정을 유지한 전영중이 얼굴을 가까이 했다. 천천히 뻗은 손은 전영중 머리카락에 닿는다.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굳이 한 가닥만을 집어 올려서 팅, 팅. 탄성력을 실험하며 가지고 논다. 갑자기 성준수 입이 열린다. 피식, 유치하고, 조금은 히스테릭한 웃음이 샌다. 참을성을 끌어올려서 기다려준다. 저 예쁜 입술 사이로 웃음 말고 제대로 된 말,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야,”

성준수가 느릿하게 운을 뗀다.

“우리가 벌써 1년 차 부부인데, 뽀뽀 한 번 안 해본 게 말이 되냐.”

전영중이 인상을 쓴다. 우리가 저번에 했던 건 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본인에게 흑역사였기에 모른 척 성준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성준수 눈빛은 흐리멍덩한 주제에 한 번도 전영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지금 해보까… 뽀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자기 딴에는 결론을 내린 건지 손을 들어 올려 전영중 목뒤에 따끈하게 안착했다. 목덜미가 단단히 고정된 것 같으면서도, 충분히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 있는 악력이었다. 취기 어린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우면 전영중은 눈을 꾹 감아버렸다. 달콤하디 쓴 와인 향 훅 끼치는 성준수 말투가 무심하게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곱씹으면 간절하게도 들렸다, 사람 참 헷갈리게….

다시 입술이 맞닿는다. 전영중이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성준수가 바로 입술을 움직여 서로 뭉갠다. 전영중 뇌 한편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촉감과 마찬가지로 애정 꾹꾹 눌러 담아 쪽쪽 뽀뽀한다. 혀를 밀어 넣어 입 구석구석을 어루만져 준다, 가히 애무하듯. 전영중은 가슴에서부터 뜨거움이 울컥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가만히 내리 앉아 파르르 떨리는 성준수의 속눈썹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이 들자,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처음으로 움직여서 성준수 것과 겹쳐 문지르고, 감아 옭아매고. 성준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혀 한번 움직여준 것이 다인데 겁탈이라도 당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 몸을 파르르 떨고, 진동하는 손끝으로 전영중 머리채를 쥐어 잡고. 마치 설마 움직이리라 상상도 못했던 것처럼. 제 키스에, 애무에, 애정에 보답하리라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처럼. 전영중이 혀를 빨아오니까 성준수가 으응, 무언가의 의사를 표하며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틀어쥔다. 전영중은 무시하였다. 지금 하는 이게 무엇이든, 여기까지 왔으니 그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담이 무너진다. 그리고 담 뒤에 그득그득 쌓아두었던 감정, 무시해왔던 마음의 소리와 함께. 그럼에도 아직 듣지 못한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이렇게 너를 그냥 가져도 되는 걸까. 너를 좇았다가 상처받는 건 죽어도 싫거든, 그럴 바에는 죽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내 자존심이, 내 자존감이, 내 심장이, 그것만은 허용 못하겠어….

뭐가 됐든 애처롭게 한 번, 두 번, 제 입술을 물어보는 성준수의 외로움을 전영중은 착실히 채워주었다. 지난 세월 사죄하듯 온 기운 다 담아 집중했다. 사심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너무 이상적인 꿈과도 같아 불안하리만치 기뻤다. 전영중은 성준수만의 따뜻한 온기가, 맞닿은 살갗이 되어주었다. 이 남자의 남편이 될 때 등 떠밀려 약속했던 것처럼.

흥분감이 일었다. 미간을 좁히며 키스에 집중했다. 볼이며 귀가 후끈후끈했다. 조금만 더, 더. 붙잡고 제대로 좀 빨아보려고 성준수 고개를 양손으로 잡았다. 각도를 돌리려고 하는데, 머리채가 세게 잡히더니 성준수 얼굴이 손아귀 밖으로 빠져나갔다. 당황해서 작은 두상을 그대로 놓쳐버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는 눈빛이 아직도 조금, 취한 사람의 것이다. 열감이 오르긴 했는데, 여전히 몽롱하고 방황하는 그런 눈.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금 성준수는 무척 씁쓸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나 할 말 이...쒀.”

“해.”

“네가 물었잖아. 왜 너랑 결혼했느냐고….”

“응.”

한껏 어눌해진 말투. 말이 양옆으로 잔뜩 새어 와인 범벅이 된 책상에 흘러내린다. 하쒸,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 욕도 해가면서, 성준수가 말한다.

“내가 너 좋아서 그래써…. 너 봤는데, 내가 누구냐고, 한 번만 만나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

“결혼까지 할 줄은 진짜 몰랐어, 물론 난 좋지만… 이게 아닝데. 아, 아씨발 미아녜 내가 그때라도 이건 조금 아니라고 해써써써, 하씨, 아니 했었었었ㅅ, 서야 하는데, 그러면 안 했을 텐데. 내가 이기적이어서 그런 거야, 이게 다. 씨발.”

“….”

“그런 거니까아아아.

“….”

“너의 1년 반, 낭비한 거 조온나게 미안하다….”

문드러지는 미소가 추락했다. 할 말 다 하고 긴장이 전부 풀렸는지, 성준수가 곯아떨어졌다.


성준수는 숙취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온갖 안 좋은 술자리 습관이 든 것일 수도 있겠다. 소주에 탄산 말아먹기, 요령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폭탄주 제조하기, 숙취 해소제 효능 무시하기. 뭐 그런 것들. 그렇게 해도 다음날 멀쩡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성준수라고 해도 자고 일어나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몇 시간 전부터인지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전영중과 눈이 마주치니 저를 덮쳐오는 폭력적인 두통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씨발, 아야.”

“어 깼… 준수야? 괜찮아? 준수야,”

“아 두통, 아씨발씨발씨발, 너 여기 왜 있냐?”

전영중이 입을 다물었다. 성준수의 상태가 아직도 걱정스러운 듯, 한쪽 입꼬리 끝으로 혀가 빼꼼 나왔다가 사라졌다. 눈썹을 찌푸린다.

“준수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는구나?”

성준수가 코웃음을 친다. 그럴 리가.

“아니, 내가 지껄인 헛소리 한 글자 한 글자 전부 기억 난다 씨발. 그거 말고. 니가 왜 여깄느냐고. 짐 싸고 어디 저 멀리 꺼진 게 아니라.”

“왜 헛소리는 준수가 했는데 내가 짐 싸고 꺼져.”

받아치는 목소리 톤이 꽤 안정적이다. 성준수가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꿈이라면 필시 깨야 했다. 두통 때문에 정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으니까. 전영중이 혀를 츳츳 차면서 스르르 성준수 옆자리를 차지하며 눕는다. 마셨던 숨이 콧속에 갇혀 새어 나오지를 않는다. 아, 너무 가까운데, 얘 왜 이러지, 아 씨발…. 눈만 또르르 굴리고 있으면 두툼한 팔이 성준수 허리에 감긴다.

“더 자… 아직 여섯 시야. 이따 낮에 네가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뭔 할 말?”

“네가 나 왜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게 됐는지….”

이거…… 그래서, 기회인가? 설마.

관심인가?

순간 울컥함이 올라왔다. 아직 어둡기 망정이지 성준수가 빠르게 고개를 틀어 커튼이 빈틈없이 쳐진 창을 바라보았다. 코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아, 이게 정말… 정말 되는구나.

“아씨….”

“그래야 나도 맘 놓고 편히 좋아할 거 아니야. 응, 준수야? 나 봐봐….”

1년 간 안 보여 저를 하염없이 애타게 하던 인간이 자기를 봐달라는데 성준수가 어떻게 안 보는가. 표정 관리에 실패해 벅차다 못해 무너진 그 표정 그대로 몸을 돌려 전영중을 쳐다보았다.

“나도 확신을 줘, 네가 날 안 버릴 거라고….”

“절대씨발존나, 그럴 일 없어, 아씨발… 병신아, 그걸 왜 말해야 알아 당연히, 아… 씨바알….”

“입 거치네… 어휘력이 딸리는 건가.”

미운말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 무엇보다 화사한 전영중의 허물어진 미소였다.

* 취중진담이 수상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커플

* 그냥 쌍방삽질이 보고싶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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