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파이
아지트가 하나 있다.
눈을 감고 평평한 길, 울퉁불퉁한 길, 질퍽한 길, 갈라진 길, 부드러운 길을 순서대로 걸어가자 커다랗고 하얀 나무문이 보였다.
주머니 속 열쇠를 꺼내 들었다. 고리에 달린 장식이 햇빛에 반사돼 오색 빛깔로 영롱히 변한다. 조그만 열쇠를 구멍에 넣고 찰칵 소리가 나게끔 돌리자, 문이 슬며시 열렸다.
문 안쪽의 공간은 마치 바깥세상과 분리되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오랜만에 찾아온 아지트를 한껏 느꼈다. 발밑을 뒹구는 풀잎들의 속삭임이 좋았다. 장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천막이 좋았다. 저편에서 유유히 흔들리는 그네가 좋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어느새 찬바람에 꽤나 노출된 귀가 아렸다. 천천히 천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의 선을 들어올리고 내리고, 간단한 방법을 통해 들어온 천막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한가운데에 있는 구멍 뚫린 의자에 조심히 앉았다. 나름대로 편안하니 마음에 들었다.
외투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봉지를 꺼내 들었다. 접착면을 떼어 내자 아직 따뜻한 사과 파이가 한 손에 잡혔다. 반절 정도만 밖으로 꺼내 모서리를 살짝 베어 물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 속에서 조용히 그 맛을 느꼈다. 입속에 미처 넣지 못해 삐져나온 부스러기가 좋았다. 어렴풋이 나는 계피향도 평소와 달리 싫지 않았다. 바삭한 겉면 사이로 파고들어온 사과잼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잊게 해 줬다. 마침내 마지막 한 입까지 다 먹은 후에도 부드러운 황금빛 위로는 한동안 몸 안에 머물러 있었다.
천막 밖을 바라보니 희뿌옇지만 여전히 밝게 내리쬐는 햇빛이 보였다. 바람은 조금 잔잔해진듯 싶다가도 곧바로 천막을 내리치곤 했다.
아무도 없는 아지트는 꽤 아늑했고, 또 평화로웠다.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 밖에 나가보니 각각 석탄과 치즈를 닮은 색의 고양이 두 마리가 아기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석탄 같은 고양이가 더 많이 울었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처음엔 사진을 몇 장 찍다 금세 되돌아왔다.
천막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본 해는 어느덧 산의 나무 뒤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 앞에 선 채로 빵 봉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네를 타면서 바람을 쐬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공기가 차가웠고 벌써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봤던 걸로 추정되는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문 안쪽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고양이는 몇 걸음 다가가자마자 멀리 도망쳤다. 완전히 바깥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아마 나처럼 사람이 없는 곳에서 무언가 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약간은 빠른 걸음으로 총총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자물쇠를 걸어 잠근 후 부드러운 길, 갈라진 길, 질퍽한 길, 울퉁불퉁한 길, 평평한 길을 돌아 걸어갔다. 집으로 향하는데 어쩐지 올 때보다 몸이 좀 더 가벼운 느낌이었다. 아마 마음이 좀 더 가벼워져서 그런 것 같다.
잘 쉬었다 갑니다
23.3.27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