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

첫 번째는 아니고 마지막은 더욱 아닐 어느 날의

여기 눈먼 양떼의 목자를 보라.

청년은 느즈막히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세안을 한다. 밖으로 나서 카페로 들어가 타인이 차려준 아침을 먹는다. 자본주의의 좋은 점이란 삶의 많은 부분을 외부에 위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간단한 청소는 마법으로 할 수 있고 식사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가 직접 손을 더럽힐 일이라곤 많지 않다. 피를 흘리는 것 또한 다른 사람의 몫이다. 적어도 죽음을 먹는 자들은 직접 목숨을 걸고 전선에 나가 전투를 치른다. 그 과정에서 팔을 잃기도 하고 다리를 잃기도 하고 더러는 목숨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더욱 비겁하다. 누군가 피를 쏟을 때 그는 안전한 거리에서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은 채 전투가 끝나길 기다린다. 모든 게 끝나면 한 마디를 뱉는다. “비리네요.” 군데군데 새붉게 얼룩진 채 뒤집히고 깨진 보도블럭은 그에게 겨우 그 정도의 감상을 준다.

바쁘게 사는 행세를 한다. 아니면 너는 왜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느냐는 지적이 틀림없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돌아다니고 글을 쓰고 아부를 하고 사람을 모으며 해골 문양을 알선한다. 독특한 위트가 있는 제안서를 써서 마왕에게 올린다. 몇 개는 승인되고 몇 개는 기각된다. 어느 쪽이든 좋다. 중요한 것은 마왕이 그의 제안서를 직접 읽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집단을 이끌어가고 있음에 도취된다. 그는 미래를 설계하는 손이고 존재하지 않는 신의 제사장이다.

펜을 들고 신나게 글을 써내려가는 청년은 머릿속에서 들끓는 발상에 옷을 지어 입힌다.

“감히 누구도 마왕에 반하는 말을 할 수 없도록 영원한 침묵을 내립시다. 죽일 필요도 없어요. 불필요하게 자비를 베풀지 않되, 순교자는 최소한도로 유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보기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이미 다 지나간 공포에 시달리며 혀를 잃은 채 거리를 떠도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한때 불사조 기사단이었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진다면, 그 누가 다시 반역하려 하겠습니까…….”

도취되고 들뜬 나머지 기획안을 올리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던 거다. 전투가 끝난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계단의 고요함을. 벽면마다 메아리치는 자신의 발소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어둠의 무게를. 제발 아니어라, 모르는 사람이어라,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법정에 들어선 순간 보이는 당신의 얼굴 앞에서 까마득히 떨어지는 심장을. 당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누르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손을 보탰기에 원수라면 원수인 자에게 매달려 이곳에서 같이 도망쳐 달라고 애걸할 것을. 줄글은 줄글에 불과하매 이루어지기 전까진 일어나지 않은 일이므로.

청년은 형이 집행되었다는 증서에 서명한 후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다.

비밀 하나: 사람은 생각보다 입체적이라, 아주 가끔 죄책감을 느끼는 일도 가능했다. 그는 그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비틀거리며 지붕에 올라 달을 잡으려고 애쓰다 떨어질 뻔했고 집에 가선 잠을 설치는 일 없이 푹 잤다. 쥘 딜루티 린드버그는 실로 합리화에 능한 자였다. 당신이 눈앞에 얼쩡거리지 않는 한 그는 당신을 잊고 지낼 수도 있었다. 아니, 잊고 지낼 생각이었다! 기껏 아버지를 팔아넘긴 뒤 구역질하며 자기연민인지 후회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 아니까! 그는 뒤돌아 보기는커녕 지하세계에 발 한 번 딛지 않는 오르페우스로 살고 싶었다. 삶은 눈부시고 볕은 따뜻했다. 당신이 그의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비밀 둘: 그는 열일곱 살의 당신이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듣는 순간부터 당신의 소망을 배신하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우리 열일곱 살이에요. 저도… 저희도,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수업 시간에 깨어 손을 들고 칭찬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소소한 취미를 갖고 싶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고, 졸업하면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해 보고 싶어요. 제게 유독 상냥한 누군가가 저를 좋아하는지, 혹은 “좋아하는”지 밤을 새워 꽃잎점을 쳐 보고 싶고요. 언젠가는 저희 부모님이 저를 낳아 길렀듯 저도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허나 설령 세상이 당신에게 기적적으로 상냥하게 굴어 당신이 어느 날 정착해 아이를 낳는데 성공한대도 아이는 당신의 노래를 듣지 못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만약 세상이 저를 죽인다면, 저는 당신이 울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마법의 좋은 점은, 그것을 “정말로 원해야” 실현된다는 점이에요.

쥘 린드버그는 에스마일 시프를 눈먼 총탄으로 배반했다.

글이란 마법과 같으면서도 달라서 “정말로 원하지 않아도” 실현되기 마련이었으며 살해당하는 이를 반드시 기명 처리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포격과 다를 게 없었다. 숫자들, 끌려가고 죽어가고 잊혀지는, 무의미한 숫자의 행렬들.

비밀 셋: 사람은 정말로 입체적이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기껏 비친 적개심이 멱살을 잡는 것에 그치고 당신의 얼굴에 공포가 스쳐지나가는 순간, 당신이 “죄송합니다”라고 종이에 적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정말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정말로 자신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당신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가 불쌍했다가 도로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널을 뛰는 감정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다. 그런데 왜?

아주 많이 우세요. 아주 많이 힘들어하고, 그 고통에 잠겨 며칠을 허우적대세요.

당신은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한다. 코트 자락 밑단을 그러쥔 채로. 쥘 딜루티 린드버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당신을 바닥으로 떠밀고 그만 그만 제발 좀 내가 가해자처럼 느껴지게 하는 짓은 그만하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는 데 성공한 그가 긴 망설임 끝에 입을 연다.

“…… 당신이 그러더라도 난 울 수가 없어요, 에스마일! 앞으로 살아갈 모든 순간 동안 나는 행복해야만 해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요. 단 하루도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해선 안 되고, 기껏 편승한 권력에서 허무하게 도태되는 일도 있어선 안 돼요. 내가 주저앉아 후회하는 순간 내가 버린 모두가 꼴 좋다 조소하러 돌아올 테니까.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미안해할 순 있어도 심장이 찢어져라 고통스러워 할 수는 없어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이런 망할, 제발 울지 좀 마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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