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린드버그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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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주의: 우발적인 친족 살인, 전쟁의 묘사, 자기 합리화, 경제적 취약계층을 향한 몰이해적/시혜적 태도/타자화

맹세코 제 잘못은 아니었어요.

아, 아. 물론 알고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그닥 무결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온 거. 나중에 역사가들이 두고두고 욕할 수도 있겠죠. 예전에 제 좋은 친구 루드비크는 조지 오웰의 글을 두고 ‘트로츠키주의자나 읽을 책’이라고 했었고. 뭐, 알베르 카뮈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옹호했다고 욕을 된통 얻어먹었잖아요. 위대한 작가라고 해서 좋은 사람일 순 없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친구의 혀를 자른 서류의 초안을 작성했다거나, 절 신뢰하는 친구의 상황을 이용해 죽음을 먹는 자에 입단시킨 일은 다 제쳐두고 생각하자고요. 저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두 발을 뻗고 잘 수 없게 만드는, 제가 성 뭉고 병원의 상담사를 정기적으로 찾게 만드는…… 그런 장면.

그날은 아주 평화롭게 시작한 하루였어요. 이건 제 소소한 취미인데, 아시다시피 제가 말이 많잖아요. 그래서 가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인을 보면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게 해요.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힌 다음 맛있는 빵과 커피를 대접하죠. 그 사람들도 인도적인 대접을 받아서 좋고, 저는 잠시 티타임을 가지면서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윈-윈Win-win인 셈이죠. 적당히 수다를 떤 뒤엔 돈을 쥐여준 채로 길거리에 돌려보내니까 염려할 건 하나도 없어요. 적선이라고요.

어쨌든, 그날도 다이애건 앨리 41번지 앞에 앉아있던 노인을 데려다가 한가롭게 수다나 떨고 있는데……. (그 사람은 리액션이 별로였어요. 내가 두 번 다시 말을 거나 봐라.) 갑자기 윗팔의 문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거예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그런 통증이었죠. 마왕님께서도 참, 어련히 부르면 달려올 텐데 성격이 급하셔……. 저는 노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말수가 시원찮은 티타임 상대부터 예정에 없던 상사의 호출까지. 처음부터 감이 안 좋았던 하루였다니까요.

그래서 가보니까, 뭐? 불사조 기사단의 잔당들이 마왕님의 호크룩스를 노리고 우리 본부를 급습했다고? 인원수가 많이 필요하니 내 도움도 필요하다고? 참내. 내가 웬디 우드워드랑 사이 안 좋은 걸 알면서 그렇게 부르고 말이야.

선생님, 저는 말이죠, 마음이 약해요. 너무 착하다고 할 수도 있죠. 부탁을 좀처럼 거절하는 법이 없어요. 그야 그런 눈으로 보는데 어떻게 거절해. 날 필요로 한다는데. 어쩌겠어요, 가야지.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하…….

저항이, 거세더라고요. 전쟁도 끝났는데 왜 그렇게 유난인지 모르겠어. 뭘 바라서 그러는 건지. 지독한 인간들이야, 아주. 정신을 차려보니까 제 빗자루는 박살나 있었어요. 저는 바닥에 엎드러져 있었고요. 아비규환이었어요. 살 타는 냄새, 피비린내……. 고양이아우성 주문에다 비명, 훌쩍이는 소리. 그리고 부상자들 사이에 그 인간이 서있었어요. 메이블 린드버그. 제 누님. 절 내려다보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누님은 슬프고 화가 나 보였어요. 배신감에 짓눌린 표정이기도 했고……. 실망한 표정이기도 했죠.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제가 이렇게 된 데는 자기 책임도 있잖아요. 집안에서 제가 작가의 길을 걷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면 저도 이렇게 자수성가하려고 애쓸 필요 없었을 거예요. 선생님, 진짜 여유로운 사람들은 전선에 나가지 않아요. 팔뚝에 섬뜩한 해골 문신 같은 것도 새기지 않죠. 안전한 곳에서 한 발 물러서며 지금까지 이룩한 부를 누린단 말이에요. 그 모든 게 제 삶이 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잘나신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님들께서 망할 정의를 못 버리겠다시니까. 나도 나만의 길을 찾아야 했던 거라고요. 그런데 날 그렇게 봐?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이 명료하지만, 그땐 덜컥 겁부터 났어요. 누님께서 절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거든요. 성큼성큼. 일직선으로. 날 죽일 기세였는데. 그 난장판에 날 죽인들 누구 하나 알아챌 리가 있나. 그래서 바닥을 기어서 뒷걸음질치며 팔을 들고 외쳤죠. 디펄소. 지팡이가 하도 떨려서 그런지 쉽게 쳐내더라고요. 그 다음엔 디핀도. 그 다음엔 섹튬셈프라. 무엇 하나 생채기를 내지 못했어요. 아니, 섹튬셈프라는 아예 나오지도 않더라. 제 지팡이가 뭔지 아세요? 월계수, 유니콘의 꼬리털, 9인치, 꽤 유연함. 유니콘의 털은 어둠의 마법에 쉽게 물들지 않는대요. 하여간 도움이 되지가 않아. 용의 심근이었더라면 좀 나았으려나.

‘쥘!’ 코앞까지 온 메이블 누님이 제 멱살을 잡아챘어요. 눈이 분노로 형형하게 빛나는 만큼 제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죠. 누님이 언성을 높였어요. ‘이제 그만해! 네 어머니를 더 실망시키지 마!’

아버지가 저 때문에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 실망해서 쓰러진 뒤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대요. 아버지가. 그 무서운 인간이.

내게 뭘 기대했다고.

웃기죠?

제가 계속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자 뺨을 한 대 올려붙이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지팡이를 제 이마에 대더라고요.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있으라고. 기사단끼리 내 처우를 논의하겠다고. 논의할 게 뭐가 있어, 그 인간들이라면 날 죽이려고 했겠지! 내가 지금까지 그들의 친구들, 그들의 일가친척 중 몇 명이나 죽음을 먹는 자들에게 끌어들였는데! 그 작자들은 미쳤어. 복수심에 눈이 벌개져가지고 옛 정은 죄다 잊어버렸지. 거기서 단념했다면 나는 오래 전에 죽어서 템즈 강 밑바닥에 가라앉았을 거예요.

저는 필사적이었어요.

그러니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죄다 우연이에요. 고의가 아니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아바다 케다브라를 쓸 수 있었는지도 몰랐고, 마침 그때 제 옆으로 굴러들어온 게 자두나무, 용의 심금, 11인치 지팡이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면 뭐였겠어요? (햇빛이 눈부셔서 그랬습니다. 왜 아무도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저는 위협받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건 정당방위였어요.) 저는 누님을 향해 소리질렀어요. 뭐라고 소리질렀더라. 기억도 안 나네. 저 멀리서 루이 누님이 “안돼!” 라고 외치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고, 초록색 불빛이 번쩍이더니……. 침묵.

메이블 누님은 쓰러졌고, 두 번 다시 숨을 쉬지 못했어요.

저요? 저는…… 멍했죠. 선생님, 과실치사는 저지른 쪽도 충격을 받아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도망칠 수조차 없었죠.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러는 사이 루이 누님께서 달려오시더니 메이블 누님의 몸을 감싸안고 울음을 터뜨리시더군요. 흐느껴 울면서 저를 똑바로 노려보시는데, 아, 그 눈빛이란! 아직도 종종 자러 누우면 생각이 나요. 잠든 것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메이블 누님과 저를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는 루이 누님. 원망의 시선이야 살면서 한두 번 받아본 게 아니지만, 그 두 사람의 얼굴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내가 뭘 해야 했을까……. 이젠 모르겠네.

(이 순간 그는 우연처럼 혀가 잘린 친구가 오래 전 했던 말을 떠올린다: 그러니 만약 세상이 저를 죽인다면, 저는 당신이 울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쥘. 마법의 좋은 점은, 그것을 “정말로 원해야” 실현된다는 점이에요. 제가 심장에 아바다 케다브라를 맞는다면 상대는 사람에 대한 살의를 품고 주문을 외웠다는 뜻이 되겠지요. 눈먼 총탄이나 포격에 가루가 되는 건 비참할 뿐 아니라 모욕적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살의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무해하며 다정하매 그런 독살맞을 감정을 품기에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초록색 불빛은 영문을 모르게도 터져 나왔으며……. 메이블 누님도 사람으로서 살해당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과연 그 순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 그는 얼굴을 문지른다.)

루이 누님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쥘.’

그리고 순간이동으로 사라지셨어요. 메이블 누님과 함께.

(침묵. 이어진 말은 반쯤은 농담조다.)

선생님,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거라면 나를 그냥 꼬마 쥘이라고 불러줘도 되잖아요. 예전처럼. 좋았던 때처럼. 그렇게 쌩하니 가버리고 말이야. 나도 힘들다고요. 아니, 어쩌면 메이블 누님은 살아 계실지도 몰라요. 제가 아바다 케다브라를 썼던 게 맞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나는데. 초록색 빛이 나는 주문은 세상에 널렸잖아요. 저는 말이에요, 남들을 괴롭힐 의지도 없어서 크루시오도 못 쓰는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아바다 케다브라를 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선생님? 선생님…….

아, 네. 진정할게요. 물도 마시고요. 네, 감사해요. 꽤 된 일인데도 말할 때마다 이렇게 눈물이 나네요.

어쨌든…….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요? 뭐, 별다른 수가 있나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만성적인 죄책감은 좋지 않다고 선생님께서 하셨잖아요. 요즘 같은 세상에 불사조 기사단에 들어간다는 건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의미니까, 누님의 죽음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보다 제가 받은 이 충격을 좀 건강하게 해소하려고 해요. 이렇게 정기적으로 상담도 다니고, 조깅도 하고. 뭐, 새로운 종류의 시를 써보거나 식물을 가꾸어 보는 것도 좋겠죠. 네. 감사해요. 칭찬이 참 듣기 좋네요. 다른 사람들도 저를 좀 더 자주 칭찬해주면 좋을 텐데.

아, 벌써 오후 두 시네요. 이만 일어나 봐야겠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좀 바쁜 몸이라. 오늘은 갈 곳이 많아요. 학생 연설도 하나 참석해야 하고, 헤롯 백화점에 들려서 설탕 절임 오렌지도 사와야 하거든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 눈이 붓거나 하진 않았죠? 얼굴 관리에 신경써야 해서……. 네, 감사해요. 네.

좋은 하루 되세요, 선생님.

(문이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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