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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방

마법사와 쥐가 된 여자아이

디지 by 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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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약속을 안 지켜요?”

아주 당돌한 목소리가 마법사의 뒷통수를 때렸다. 후려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도 모른다. 실제 빗자루를 들고 내리쳤대도 더 놀랄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돌아본 마법사가 평소처럼 시치미를 떼려 했으나 실패했다. 오늘은 쥐만한 여자애가 더 빨랐다. 두번째 호령이 날아들었다.

“순 거짓말이야, 누가 누구더러 말만 많대? 그렇게 중요한 일이 따로 있다구? 제가 어디 골목 구석 식당에서 일할때도 침대 한 칸은 주…”

“아아, 진짜야, 진짜 공사중이야!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라구.”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다구요? 온갖 뒤처리하는 사람한테 겨우 방 한 칸 내주는게 어려운데 마법은 잘도 풀겠어! 공사가 벌써 몇주째야, 이제 상자에 난 구멍엔 바람이 들어서 얼어죽겠어요! 쥐라서 괜찮을 것 같아요? 언제는 다 같다고 듣기 좋게만 말하더니 전혀 아니잖아. 난 지금 생존에 대해 얘기하는거예요, 정말 얼어죽겠…”

쏟아지는 비질에 몹시 찔린 듯 눈만 껌뻑이던 마법사가 마지막 말에 발끈한 표정을 짓고 크게 외쳤다.

“진짜라니까! 이거 봐!”

마법사가 바로 옆의 벽을 때렸다. 그러자 벽돌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소리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이 울리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벽이 우그러든건 순식간이었다. 어디로 빨려가는 듯 검은 구멍이 생기더니, 곧 그 자리에 아주 미세한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생겨났다.

혼자 움직이는 커튼이나 뒤를 졸졸 따라오는 양동이 같은 것에 익숙해졌다지만 마법이 만드는 새로운 기현상엔 끝이 없었다. 이런 건 또 처음 보게 된 여자애가 눈을 깜빡였다, 만 잠시였다.

“못 믿어. 나와요! 그 문을 지금 그냥 벽에 그린건지 뭔지 내가 어떻게 알고? 거짓말쟁이는 안 믿어.”

“아, 진짜 미완성이라 그래! 초인종도 안 달았고…”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가 말한건 몇개도 아니고… 내 침대랑 깨끗한 화장실이나…”

그리고 쥐가 되었다.

말 그대로, 정말 쥐가 될 시간이었다. 벌써 하루 중 마법이 풀리는 여섯 시간이 끝난 것이다. 입가의 수염이 자라려는 간지러움을 느끼고 있던 쥐-여자애는 순식간에 문고리로 뛰어들었다. 마법사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당황하는 사이, 문은 너무 쉽게 열렸다, 작은 쥐가 매달리기만 해도 돌아가는 힘으로. 흰 쥐의 얼룩덜룩한 귀끝이 쏜살같이 벽 사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쥐-여자애는 이 마법사에게 당해내려면 보다 빨라야만 한다는 걸 마침내 깨달았고 지금 마침 빠른 발의 얼룩쥐로 변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어, 쥐 발에 닿는 차가운 돌바닥을 느끼며 여자애는 속으로 혀를 찼다. 또 순간이나 모면하려고, 이번 기회에 단단히 일러서 게으른 마법사에게서 어떻게든 원하는 바를 이뤄내려는 각오를 하던 그때.

딱 하고 쥐-머리를 부딪힌 여자애가 소리를 냈다.

“야!”

허겁지겁 따라들어온 마법사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멀리서부터 미세한 초침과 같은, 불티 소리가 들렸다. 기둥을 따라 달린 램프에 불이 붙는 소리였다. 이마를 감싼 얼룩쥐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의자 다리가 보였다. 아니, 아주 높고 커다란 방이. 쥐가 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큰 방이, 쥐로 한껏 달려도 초원같고 하늘같은 넓고 깊은 방이.

마법사가 바닥의 쥐를 양 손으로 조심스레 떠올리자 높아진 시야로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한마디로…

잡동사니 천국.

한순간 정말로 서럽게 실망할뻔한 눈 앞에 걸린 꽃무늬 식탁보는 어디 성에나 어울릴 법한, 열두명의 기사가 앉아도 좋을 법한 식탁을 덮고 있었다. 벽에 붙은 거대한 화덕에서는 바베큐를 구울 만한 불이 넘실대고 있었고 열대우림에나 어울릴법한 나무 - 기가막히게도 나무의 키를 따라 거기만 층고를 높여놓았다 - 가 심긴 화분과 본래 어떤 무늬인지도 모르게 틈도 없이 벽을 덮은 태피스트리들, 크고 작은 조립식 인형과 반짝이는 달걀 퍼즐, 방금 진 해는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환한 빛이 드는 창틀에 얹힌 계절없이 활짝 핀 꽃무리. 들여다보면 황금일지언대 놓인 위치도 제멋대로에 어울림이라곤 생각하지 않은 듯 채워넣기만 한 방 안은 어느 다락방 창고처럼 어지럽고 복잡해서 정말이지 그냥 창고를 내 준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눈 앞의 식탁으로 뛰어내린 쥐-여자애가 조심스레 앞으로 향했다. 의자 손잡이를 타고 늘어진 인형의 손에 매달리고 푹신한 쿠션 위로 떨어져가며 방 안을 구석구석 쏘다녔다. 이 탐험이 끝나려면 아주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내가 좋아하는 향기잖아. 쥐의 코가 씰룩였다. 스치듯 지나가며 보았던 머리핀들이 마녀의 방에나 어울릴 번쩍이는 장식 거울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러니까, 다 내가 좋다고 한 것들이잖아…

네 명이 자고도 남을 넓이의 침대를 횡단할때는 좀 달려야 했다. 푹푹 꺼지는 이불이 얼마나 쥐-다리를 힘들게 하던지.

오르내리는 얼룩쥐를 안절부절 바라보던 마법사는 쥐-여자애가 거울 뒤를 지나 더 안쪽으로 향할 때 깜짝 놀라 쫓아왔다.

“야, 여긴 안 돼, 진짜!”

조심스레 작고 큰 잡동사니들을 헤치며 돌아다니던 쥐 발이 멈췄다.

“봤지? 어? 아직 정리가 덜 돼서 그래. 진짜 공사중이었다니까! 내가 어, 이렇게 방을 만들어 본 적은 없어서… 여긴 이제 뭐 없어. 하는 중인거 알았으면 이제 나가자. 진짜… 진짜 나흘 안에 다 정리해둘게.”

쥐-여자애는 짧게 찍, 하는 소리를 냈다.

“뭐? 안돼. 뭐 없다니…”

고양이도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튀어오른 쥐가 마법사의 발등을 스쳤다. 오늘은 작은 쥐가 큰 남자보다 매서운 날이었다. 아주 작정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마법사의 단말마를 뒤에 남겨두고 그림자 속 책상 위로 뛰어오른 쥐의 눈에 비친 것은 아주 작은 침대였다. 정말 작은, 섬세한, 침대. 무려 사방에 기둥이 있는 형태로 딱 얼룩쥐만한 크기가 웅크리면 적당히 남을법한, 마법사의 손바닥 크기와 닮은 요람이었다. 기둥 한 면에 제비꽃이 덜 새겨진 침대 옆에는 깃펜 촉보다 가느다란 송곳이 툭 떨어져있었다.

“덜해서 그래!”

마법사가 소리쳤다.

쥐는 제자리에 앉았다.

“어, 내가 손재주가 있지?”

쥐 한마리 안 움직이는 침묵 속에서 마법사가 말했다. 으스대듯 말하려고 애썼지만 변명처럼 들렸다. 입을 꾹 닫은 마법사는 서둘러 다가와 쥐를 들고 방을 빠르게 가로질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손을 꾹 덮어 단단히 가둔 것이 무색하게 쥐-여자애는 얌전했다.

“내일, 내일까지만 밖에서 자.”

구멍 난 소파 위의 박스에 쥐를 내려놓은 마법사가 손짓 한번으로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문을 사라지게 했다. 벽은 전처럼 차가운 돌로 돌아갔고 방 안의 거대 화덕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약하지는 않은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상자 구멍 사이로 불 그림자가 일렁였다.

“추…우면 말을 하고, 어. 쥐 말이겠지만, 대강 찍찍대면 되잖아.”

툴툴거리는 소리를 낸 마법사가 잠시 침묵했다. 상자 안에 든 쥐는 찍소리도 없었다.

“…내가 몰랐어.”

그렇게 중얼거린 마법사는 평소처럼 털뭉치니 뭐니 얼굴을 들이밀고 놀리는 일도 없이 사라졌다. 밤이 그렇듯, 순식간에.

식욕을 없애긴 싫었거든. 다들 수면이나 식욕부터 없애곤 하는데, 난 그냥… 배고픈 감각을 떼놓기가 싫었어. 왜인지는 몰라도 그 기분이 마법을 하고 싶게 하거든. 이런 말 이해 안 되겠지만, 마법은 이런 직감을 따라야 할 때가 많아.

아침부터 기운찬 소리로 혓바닥에 버터칠을 하는 마법사가 온데간데 없어져 식탁만 벅벅 닦던 여자애는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고개를 쭉 뺐다. 안인 줄 알았는데 밖이었다. 저도 모르게 김 샌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는데, 노크 없이 자물쇠가 열렸다. 손님이라도 온 줄 알았더니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나갔다 온 마법사가 얼굴에 그을음을 묻히고 있었다.

“갑자기 새벽에 일이 있어서…”

남자가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칼 위에도 재가 앉아있었다.

“내일까지랬는데, 하루만 더 줘.”

제 집 현관 계단 중턱에 선 채, 피로에 풀린 눈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마법사의 얼굴에 대고 해야 할 말이 어려워서, 여자애는 쥐고 있던 마대를 더 꼭 쥐어잡고 입을 뗐다.

“마음에 들어요.”

“어?”

“몸 숨길 곳이 많잖아요. 똑똑한 쥐한테는 그런 게 필요하다면서요, 어디 쏘다니면서 들키지나 않게.”

“그건… 그.”

“너무 좁은 것도 사실 싫어요, 사람일 땐 단순한게 좋긴 한데 쥐 입장일땐 또 다르긴 하니까요. 뭐, 그냥 나는… 혼자 누워있을 곳이 필요했던 거고…”

설명같은게 길어진다는 걸 느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눈꼬리 좀 내려갔다고 그 재수없는 얼굴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자신에게 어이도 없었지만 여자애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좋다구요.”

겨우 숨을 곳으로 전락한 온갖 마법 도구와 옛 유적의 유물같은 것들이 억울하게, 마법사가 활짝 웃었다. 아주 순간이었고, 반짝이던 것은 순식간에 구부러져 빙글대는 웃음으로 변질되어,

“그치? 그럴 줄 알았어, 해내는데는 내가 일가견 있다니까…”

같은 말로 상대의 미간을 구기게 했지만.

아침이라기엔 시간이 늦어서, 마법사가 밥을 나가서 먹자고 했지만 여자애는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투덜대며 미완성 방의 문을 연 마법사의 불만은 쥐-여자애가 그 열두명의 기사를 위한 식탁에 부드러운 빵 바구니와 라즈베리-치즈-꽃의 향기를 그 애만의 비법으로 아주 잘 섞은 잼을 두 병 내려놓자마자 해소되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여자애는 쥐가 되었지만, 벽 너머 자신만의 거대한 방을 가진 쥐였다.

너무 오래되고 커다란 것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 위압감에 짓눌리는 일은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잡동사니들은 그냥 잡동사니였다. 그것도 마법사의 쩔쩔매는 고민이 먼지보다 많이 묻어 있는.

먼지정도는 닦으면 그만이지만 그 고민들은 작은 쥐의 밤눈으로 올려다보아도 번쩍일만큼 티가 나서, 자신을 향한 걱정 속에 잠드는 밤은 그 마법사의 희한한 집에서 보낸 날들 중 가장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이만하면… 계속 있을 만도 하지?

아주 작은 침대 위에 몸을 만 얼룩 쥐는 저녁을 다 먹고도 앉아있는 시간에 문득 튀어나왔던 마법사의 질문에, 억지로 미뤄둔 답을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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