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에
좀비버스 : 뉴블러드 ㅣ 덱스 X 성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좀비버스 뉴블러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합니다.
“정말 가려고?”
시영의 말에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듯, 가방을 들쳐 멘 진영은 다시금 신발을 단단히 매었다. 그런 진영을 보며 시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사태가 일어나고 나서 지옥같은 순간들을 함께 헤쳐나갔던 전우이자 아끼는 동생인 그가 다시 위험한 길로 제 발로 들어가겠다고 하는데도 막을 수가 없었다. 저런 얼굴의 진영이는 결정을 번복한 적이 없다. 그건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의료원에 무사히 항체를 전달하고 1년. 정부에서 운영하는 보호시설에서 둘을 비롯한 일행은 비교적 편안하게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풍요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안전한 잠자리와 배급되는 식량 덕분에 모두가 점차 여유와 웃음을 되찾아갔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누가 뭐라해도 면역체의 혈액을 의료원으로 무사히 전달한 일등공신은 진영이었다. 무리의 리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려내기도 했다. 항상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움직였던 그는, 의료원에 들어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혔다. 다른 이들과 대화를 잘 나누지도 않았고 딱히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매일 한번씩 의료원 연구실에 들려 백신 제작의 진행 현황을 물어보는 것이 진영의 일상의 전부였다. 힘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일행들은 그런 진영을 걱정했지만, 3개월 정도 지난 후에는 그냥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하기야, 진영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들이었다.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보호시설 내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정도였으니, 남을 걱정하기에는 이미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지난 주, 드디어 의료원에서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 성공을 알려왔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항체를 가져오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일행들은 그 소식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들을 수 있었다. 항체를 전달하면서 요구했던 그들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떠나려고 하는 진영의 품에 있는 저 한 병의 액체의 소유권이었다. 개발된 백신과 치료제의 우선 소유권. 바로 그것이었다. 진영은 그 두 가지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제게 주어진 10억의 권리를 포기했다. 백신은 받은 그 날 바로 제 몸에 주사했다. 독한 백신으로 인해 5일을 꼬박 앓았던 그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이었다.
“아직 위험한 건 알지? 백신도 맞았고, 치료제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물어뜯겨서 나는 상처로 인해 죽을 수도 있어. 그건 바이러스 치료제이지, 완전하게 널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아요, 누님.”
시영이 하려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진영은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1년이라는 시간을 오직 이 때만을 기다리며 보냈으니까. 시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조심해. 가까우니까 빨리 다녀오고. 시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영은 몸을 돌려 보호시설 밖으로 나섰다. 방음으로 인해 차단되었던 괴이한 소리들이 고막을 찔러댔다. 한 해가 지나고서야 다시 마주하는 지옥이었다. 진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지긋지긋한 지옥아.
1년 후에
by. Aleum
보호시설을 떠나온 지도 3일이 지났다.
그 사이 겉잡을 수 없이 퍼진 바이러스 때문일까. 좀비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좀비가 된 이들은 이성이 없다. 오로지 무언가를 물어뜯고자 하는 본능만이 남아있을 뿐. 그러다보니 마구잡이로 망가져 피칠갑이 된 몸을 질질 끌며 서울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좀비들의 모습은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상해있어서 웬만큼 비위가 좋지 않고서야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물론 진영은 그런 모습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백신을 맞았다고 해서 좀비로 보여지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좀비들은 그를 인간이자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어딜 가든 죽일듯이 달라드는 좀비떼로 인해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동이 쉽지 않았다. 챙겨온 지도로 봤을 때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주변이 온통 폐허가 되어 현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군 출신이 아니었으면 정말 어려울 뻔 했다.
밤. 진영은 간신히 비어있는 상가 건물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생라면을 부쉈다. 내일이면 도달할 것도 같았다. 목표했던 그 지점에. 여기까지 홀로 좀비를 피하며 오다 보니 온몸이 긁히고 쓸린 상처로 가득했지만 진영은 딱히 상처를 신경쓰지 않았다. 간단한 상처는 내버려두었고, 좀 깊은 상처는 대충 지혈만 해뒀다. 진영은 부숴진 생라면을 입 안으로 밀어넣고 대충 한 쪽 구석에 몸을 구겨 누웠다. 언제라도 긴급 상황이 되면 움직일 수 있게 짐은 모두 가방 안으로 집어넣어 정리했다. 가방을 끌어안고 머리를 뉘이자 피로가 쏟아졌다.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디였더라, 지하철 대피소였나. 날이 추웠는데 담요가 넉넉하지 않았던 그 날, 무심코 온기를 찾아 걔를 끌어안았던 그 기억.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히 떠올렸나. 이제는 그리운 추억인지, 끔찍한 악몽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기억을 도로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애썼다. 잠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찾았다.
진영은 이제는 굳어버린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이전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건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애초에 좀비떼로 가득하던 곳이다. 그리고 다른 좀비들보다 상대하기 힘든 실험체같은 것들도 존재하던 곳이었으니 정신이 있으면 다가가지 않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진영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빠르게 건물 가까이로 다가간 진영은 보호시설에서 몰래 빼돌렸던 권총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곳의 좀비들을 제압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결코 쓰지 않았던 물건. 머리를 맞으면 좀비라도 즉사였지.
일단 좀비가 되면 머리가 터지지 않는 이상은 치명상을 입어도 다시 움직여요. 남들이 보기에 죽을 만큼의 상처라도. 가슴이 완전히 뻥 뚫려도 움직여. 그게 좀비에요. 죽어도 죽지 않는 거. 끔찍하지. 팔다리가 완전히 부러져도 기어다닐걸.
퍼억, 까드득! 우드드득-
건물 뒷마당쪽에서 괴랄한 소리가 들렸다. 더 많은 좀비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 출입구를 완전히 봉쇄한 진영은 뒷마당으로 향하는 내부의 좁은 통로에서 거침없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좀비의 남은 한 쪽 다리가 완전히 부러졌다. 사지가 부러졌음에도 입을 딱딱거리며 괴성을 내뱉는 좀비의 꼴이 꽤나 끔찍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좀비를 향해 다시 한 번 파이프를 휘둘렀다. 아드득, 척추가 부러진 좀비의 몸이 무너졌다.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다시 달라드는 좀비의 얼굴을 박살냈다. 움직임이 멎었다. 그나마 좁은 통로로 인해 많은 좀비가 한 번에 몰려들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예상보다는 수가 많지 않은 것 또한 천운이었다. 입구 쪽의 좀비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후, 진영은 총을 꺼내 들었다. 지독한 혈향이 진동했다. 덱스야, 가지마.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조금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차라리 그 때, 가지 말라고 해주지 그랬어. 옆에 있어 달라고 해주지 그랬어.
타앙, 탕-!
총소리와 함께 좀비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저 괴물같은 게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2m가 넘는 괴물같은 몸집의 그 좀비는 목이 부러지고 얼굴이 반이 뭉개진 상태임에도 저에게 달라들었다. 씨발, 저 악몽같은 괴물 새끼. 진영은 나가버린 어깨를 붙잡고는 이를 악물고서 뼈를 도로 맞췄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간신히 맞춰졌다. 입가는 다 터져서 피가 줄줄 새고 있었고, 발목은 언제 나갔는지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저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악몽같았던 옥상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진짜 웃기지도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게. 저게 저기 있는 거라면, 그 아래에는. 시체인지 좀비인지 알 수없는 고깃덩어리들이 엉켜있는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있을까. 시체들이 마구 엉켜있는 그 더미 속에는 아직 생체 기능이 살아있는 좀비들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시신들로 인해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진영은 이미 다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네가 저기에 있으면 어떡하지. 1년 동안, 저 구역질나는 구렁텅이에서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몸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면 어떡하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공포라고는 없었는데, 이제 와서 두려움에 손이 벌벌 떨렸다.
좀비가 되는 형태는 두 가지가 있어요. 살아있는 상태에서 좀비가 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숨이 끊어진 후에 좀비가 되거나. 둘 다 경험해 보셨으니 알죠? 팔이나 다리, 어깨같이 물린다고 당장 죽지 않는 곳을 물렸을 때에는 한동안은 의식이 남아있어요. 그러다가 바이러스가 뇌까지 침투해서 들어가면, 몸은 살아있지만 좀비가 되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반대로 물어뜯긴 부위가 즉사할 정도로 위험한 위치에 있을 경우에는 완전히 심장이 멎은 후, 빠른 속도로 좀비로 변합니다.
시체더미를 마구 헤쳤다. 시체와 좀비가 잘 구분이 되지 않아서 마구잡이로 쌓인 것들을 걷어내다보니 제 손을 기를 쓰고 물어대는 좀비들도 있었다. 보호장갑을 끼고는 있었지만 이미 다 해지고 닳아 이가 맨살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진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정신을 놓은 듯 그곳을 파헤치던 진영이 멈칫했다. 이제는 핏물이 다 들어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파란색 셔츠. 딘딘 형의 옷이었다. 그리고 그런 옷을 미친듯이 쥐어잡고 있는 피칠갑이 된 손. 아, 아아. 진영은 떨리는 손을 어쩌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잘 들어요. 이 치료제는 확실하게 감염된 자도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듭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좀비가 되었다면 가능해요. 처음부터 죽어서 좀비가 된 자들은 살리지 못하지만, 심장이 멎지 않은 상태에서 바이러스에 의해 좀비가 된 것이라면 되돌릴 수 있어요.
갈색 빛이 도는 머릿결. 피에 푹 젖어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꿈에 나왔으니까.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숨이 끊어져 축 늘어진, 처음부터 함께했던 형의 몸을 더미에서 끌어내렸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을 꽉 쥐고 있던, 아래에 깔려있던 한 좀비도 질질 끌려나왔다. 오랫동안 눌려있던 시신과 좀비의 다리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해 있었다. 공간이 약간 남아있었던 것인지 형을 끌어안고 있던 팔만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말은, 아래에 깔린 좀비가 아직 기능이 정지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진영은 형의 몸을 좀비와 떨어트려놓았다. 움직이지 못하는 좀비는 진영을 발견하고 마구 괴성을 내질렀다. 이상하게 허공을 끌어안듯이 마구 손을 휘젓고 있었다. 진영은 그 옆에 털썩, 무릎을 끓고 앉았다. 손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저를 죽이고 싶다는 듯이 바라보는 좀비를 향해 팔을 뻗은 진영은 짓물러 남아나지 않은 좀비의 몸을 제 앞으로 당겼다. 몸체를 들고 나서야 뒤통수가 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추락했을 때의 상처일 것이다. 그 순간 눈 앞의 좀비가, 아니 성재가 팔을 움직여 저를 꽉 끌어안았다. 멍하니 있던 진영은 사람의 몸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망가진 몸을 힘을 줘 끌어안았다. 콰악, 어깨가 강하게 물려왔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끌어안은 몸을 더 강하게 자신에게 당길 뿐이었다.
다만, 이미 신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손상되었다면-
진영은 품 속에 고이 두었던 유리병과 주사기를 꺼냈다. 생살이 뜯기는 고통이 상상 이상일텐데도 진영의 입에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에 애써 힘을 줘 병에 있는 약을 주사기에 채워넣었다. 저를 물어뜯고 있는 중이어서 그런걸까, 성재는 저를 끌어안은 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무사히 약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주삿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의 몸은 그 정도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어깨의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뼈가 드러나버린 것도 같았다. 고통을 무시한 채 약물을 밀어넣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리고 아주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진영은 숨을 헐떡이며 몰아쉬었다.
인간으로 돌아와도 목숨이 붙어있지는 않아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저를 꽉 끌어안았던 두 팔이 힘없이 늘어지는 걸 느끼면서. 어깨를 물어뜯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아주 오랫동안 참았던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제 품 안에 완전히 늘어진 몸을 미친듯이 끌어안았다. 알고 있었다. 살리지 못하리라는 것쯤은. 이미 저 옥상에서 추락하는 순간, 인간이라면 당연히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까.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서도 이 자리까지 온 것은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내 같잖은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저열한 욕심 때문이었나. 결국 지켜주지 못한 것은 나다. 마지막 기회의 순간에도 널 살리자는 설득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나다. 이제와서 이러는 게 얼마나 웃기는 짓인지 잘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인간으로 죽게 해주고 싶었어.
“성재야.”
다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겨우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성재야. 다시 혀를 굴려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했던 이름을 다시 입에 담았다. 어색하고, 익숙했다. 내가 이렇게 너를 부르면, 너도 날 불러주었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품에 있던 몸을 제게 기대어 눕게 만들었다. 겨우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독기가 빠진 얼굴은 평온해보였다. 가만히 감겨있는 눈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가만히 들어 핏자국이 얼룩덜룩하게 묻어있는 볼을 감싸안았다. 이미 죽어있던 몸은 싸늘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투둑.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얼마만에 울고 있는 거지, 내가? 진영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는 지도 모르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는, 길었는지 짧았는지조차 모를 시간이 지난 후에 익숙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덱스야.”
제대로 목소리륻 들었을 텐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진영을 보며 성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영이 떠나고 나서 상부에 반협박을 하면서까지 군용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항체를 구해올 정도로 좀비들 대처에 능숙한 그들 일행을 이용하고 싶었던 상부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자신들의 일에 앞으로 협력한다는 조건 하에 차와 병력을 내주었다. 협상장에서 시영이 그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일이었다. 진영이 여기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렇게까지 넋이 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진영.”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저를 부르는 성우의 목소리에 진영의 어깨가 움직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진영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어깨는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온전하게 돌아올 수는 있을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의 상처였다.
“아…, 형님.”
“그래.”
“….”
“…성재, 이제 그만 놓아주자. 보내줘야지.”
순간 진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축 늘어져있는 몸이 느껴지자 진영의 눈빛이 더욱 탁해졌다. 아. 실소가 흘렀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아 보일만한 미소였다. 아니, 미쳤다고 말을 해야 옳을지도 몰랐다. 진영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어떡하죠. 형님.”
“진영아, 일단-.”
더는 지체해서는 안됐다. 빨리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급하게 진영에게 다가서던 성우는 이어지는 말에 걸음을 멈췄다.
“저, 얘 사랑했나봐요.”
씨발, 진짜 좇같게. 사랑을 했나봐, 내가.
제 사랑을 고백하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절망적이어서, 성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을 구해도 네 세상은 지옥이구나. 원래 생이란 이다지도 잔인한걸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만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건물 내의 좀비들을 제압한 군인들이 다가올 때까지,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괴로운 1년의 기다림의 끝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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