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닛코부키] 영원의 이름
[오마카세 타입] 겜사구팽님이 신청하신 글커미션
written by. @saniwa_jeyeon CM
영원의 이름
그날 이후로 소년은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그에게 소환된 악마, 닛코 이치몬지는 이불을 덮고 얌전히 누워있는 제 계약자를 그저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악마 소환의 흔적은 닛코가 다 지워냈으므로, 대 악마가 인간과 계약을 맺어 지상에 머문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지금 머무는 장소는 소환장소 근방에 있던 여관으로,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나는 형제를 표방하고 있었다. 조금 귀찮지만, 동생이 병약해서 오래 머물게 될 것 같다고 하자, 인심 좋은 여관 주인 부부는 닛코가 부러 부탁하지 않아도 환자가 먹기 좋은 음식이며 약 따위를 가져다주었다. 묽은 수프를 스푼으로 떠서 조금씩 의식이 희미한 부키츠의 입에 흘려 넣으며 닛코는 생각했다. 악마가 소환되고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이 간병이라니, 세상은 이렇게도 변하는군.
이윽고 수일이 흘러 부키츠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부키츠가 눈을 떴을 때, 닛코는 방의 창가에 서 있었다. 커튼을 친 상태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래도 뭔가 보이는 것인가, 악마에겐 보이는 것인가, 하고 부키츠는 되는대로 생각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닛코가 부키츠를 돌아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가득 부키츠의 모습이 비춰졌다. 뇌리에 스치는 색은 보랏빛이었는데, 머리카락 때문에 착각한 것일까. 부키츠도 닛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콧대와 단단히 다물린 입술, 날카로운 얼굴선을 차례로 지켜보다 다시 닛코의 눈으로 시선이 갔다. 선명하게 진지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푸른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이제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계약자.”
남자답게 절도있는 목소리가 부키츠의 귀에 파고 들어왔다. 부키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진작에도 할 수 있었다.”
침대쪽으로 걸어온 닛코가 그 앞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했으면서 말은 잘도 한다고 콧웃음 칠 수도 있을 텐데, 부키츠의 악마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런 성정인가, 하고 부키츠는 머릿속에 제 악마에 대한 정보를 한조각 더 쌓았다.
“우리 사이의 계약은 정상적으로 맺어지지 않았다.”
닛코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를 할 수 없어 부키츠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계약자, 너는 계약의 대가로 무엇을 바쳤다고 생각하지.”
“보통은 영혼이 아닌가?”
부키츠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것이 확정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받았겠으나, 뭔가를 받았다는 인식이 없다.”
“그렇다면 기억일 거라고 생각한다.”
아닌가? 닛코를 소환하기 전에도 머릿 속에 닛코 이치몬지라는 악마의 이름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기억을 대가로 준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당최 무엇을 주고 계약을 맺게 된 것인지,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부키츠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알겠군.”
이런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며, 지상에 올라온지 아무리 오래되었다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결론을 알았다면, 말해주길 희망한다.”
“계약자, 너게 너 자신이 무엇인지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기억이 없기 때문인가?”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네 진명이 오가지 않았을 거다. 너는 계약 당시에 ‘부키츠’라는 이름을 댔지만, 그것은 네 진명이 아니겠지.”
그것은 고대어로 ‘포도’라는 뜻이다. 사람의 이름으로 쓸법한 단어가 아니었다.
진명을 대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계약이 성립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계약은 분명히 성립했다. 불완전하고 이상한 계약이긴 했지만. 대악마니 오랫동안 존재해왔지만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니 파기하고 싶은가?”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라도 엄연히 계약은 계약이다. 나는 네 소원을 들어주고, 대가를 받은 후에 지하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계약자. 소원을 말하라. 나는 너의 소원을 알지 못한다.”
닛코 이치몬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사무적인 물음이, 그의 지난한 계약의 단초라는 것을. 제 악마의 물음을 들은 부키츠는 입을 다물고 제가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무엇을 갈망하는지만은 선명하고 분명했다.
대 악마 닛코 이치몬지.
닛코 이치몬지를 영원히 곁에 두는 것. 그것이 죽는 날까지인지, 내세가 있다면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 영혼이 먼지가 되어 스러질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인지 부키츠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영원이었다. ‘곁에 있는 것’이라는 소원은 지금 자체로도 이루어졌으니 그렇게 말하면 대가를 받고선 다시 지하로, 부키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부키츠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계약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닛코 이치몬지가 제 곁에 영원히 있겠는가.
그리고 부키츠는 답을 찾았다.
“원하는 것을 말하겠다, 닛코 이치몬지.”
“듣겠다.”
“나는 나의 ‘진명’을 찾고 싶다. 그러니 그 이름을 찾을 때까지 너는 내 곁에 있어야한다.”
부키츠의 진명을 찾는 것. 부키츠 스스로도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의 진명을 찾는 걸 소원이라 말했다. 명확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없더라도 소원은 소원인 법이다. 닛코 이치몬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이고, 인간의 이름을 찾는 것이므로 시간을 들이면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닛코는 부키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부키츠, 나의 계약자. 너의 진명을 찾을 때까지 나는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또한 곁에서 보필하겠다.”
“닛코 이치몬지, 나의 악마. 나의 진명을 찾아 계약을 완수한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네게 줄 것이다.”
푸른색의 빛과 보라색의 빛이 부키츠와 닛코 사이를 노니며 수많은 선분과 도형을 그려댔다. 계약은 불완전성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로 다시 한번 단단히 매듭이 묶였다. 계약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부키츠는 마침내 흡족하게 웃었다. 닛코는 제 계약자가 웃는 얼굴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닛코 이치몬지는 알까?
부키츠가 찾는 그의 진명은, 영원과 다름없다는 것을.
아마도,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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