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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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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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다정하게 구는 나누를 보며 순무는 약간 걱정이 가셨다. 그래, 사랑을 하면 다 그런 것 아니겠어. 상대방을 지독히도 원하는 것은 순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나누의 손을 먼저 잡았던 것이다.

나누는 시간이 있는 동안 책을 보기로 했고 순무는 나인테일과 함께 별채 밖으로 나가 아름다운 자태를 다듬어 주었다. 백금빛으로 성스럽게 빛나는 털과 나누를 닮은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 작아도 비율이 잘 잡힌 골격.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감격하며 허리를 숙여 나인테일의 목을 껴안았다. 그러면 폭신한 감촉과 뜨끈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 나인테일은 이제 제멋대로 굴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누에게도 조금은 마음을 열어보기로 한다.

순무는 빗으로 나인테일의 털을 정성스레 빗겨 주었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어온 포켓몬을 돌보는 방법에 관한 책에서는 털을 자주 빗겨 주지 않으면 금방 헝클어진다고 나와 있었다. 빠진 털들이 예쁜 빛을 내며 멀리 날아간다. 나인테일은 고마움의 표시로 순무의 얼굴에 코를 비벼댔다. 차갑고 축축한 코의 감촉이 간지러운 순무는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친목과 산책도 겸해 나인테일과 별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돌아온 순무는 가벼이 마른 땀을 씻어냈다. 그러고서 조용히 방문을 열면 나누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교재를 보며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가, 그를 보고는 굳었던 표정을 푼다. 순무는 나인테일의 털을 빗겨 주고 왔다며 그 영롱한 빛과 부드러운 감촉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누는 잘 따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한다.

순무는 식스테일이 원하던 것을 바로 잡아낸 나누의 능력이 신기했다.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어보니 나누는 손을 뻗어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포켓몬들도 감정을 느끼는 생명체이기에 트레이너를 따르지 않는 것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순무는 송화산에서 식스테일을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가디를 잡고 휴식을 취한 뒤에 어두워진 산길을 더듬거리며 내려갈 때 불쑥 나타난 식스테일은 걸어내려가며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순무는 어쩐지 길을 안내하는 듯한 식스테일이 마음에 들어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식스테일을 유혹했다. 추위와 배고픔에 굶주렸던 식스테일은 단번에 순무와 가디에게로 달려왔고, 순무는 그 틈에 식스테일을 동료로 만들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뒤 식스테일은 따라온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늘 일에 치여 살고 날이 저물면 몰래 빠져나와 숲에서 홀로 단련하는 트레이너. 누가 봐도 한심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순무는 포켓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순무만큼이나 열정을 추구하며 달려 나가길 바랐을 터인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었다.

나누는 표정이 어두워진 순무를 뒤에서 끌어안고 이제 다 잘 될 거라고 속삭인다. 마치 최면에 걸리듯 그 한 마디에 빠져들어 잃을 뻔한 기운을 다시 차리게 된 순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역시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한다. 나누는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라며 순무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나누는 먼저 현관에 서 있다가 뒷정리를 하느라 늦게 나오는 순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순무는 쪼르르 달려왔고 나누는 그대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얼굴을 떼면 나누보다 키가 조금 더 작은 순무의 맑은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현관과 복도는 약간 단차가 있었기에 둘의 눈높이가 딱 맞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딱히 오는 손님도 없어서 청소도 느긋하게 해치운다. 창문을 닫아두어 먼지 앉은 객실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아 빛나게 만든다. 둘은 객실 문을 활짝 열어둔 상태에서 틈틈이 달게 입을 맞추고는 모른 척을 했다. 어느새 순무도 그런 재미에 빠진 것인지 인기척이 없다 싶으면 나누를 끌어들여서 볼, 입술, 귓가에 입을 붙였다. 간지러운 애정 행각에 자극받은 나누는 순무를 안정감이 드는 색의 벽지가 발린 벽에 몰아넣고는 그때처럼 숨결을 빼앗는 입맞춤을 내려 주었다. 순무가 당황하며 나누를 밀어내려 하자 나누는 또 아랫도리가 반응할 것 같아져 겨우 입을 뗐다.

둘은 진정하기 위해 소리가 새어 나올 만큼의 호흡을 했다. 나누는 순무를 내려다보았고 순무는 나누의 눈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봤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등진 나누는 순무가 보기에 약간 무서워 보였고 나누는 그림자에 덮인 순무의 당황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순무는 자신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져 얼굴에 손을 갖다 댄다. 더위와 노동과 열이 어우러진 탓에 시원한 것을 찾고 싶었다. 그걸 본 나누는 순무의 뺨에 자신의 손등을 살짝 댄다. 오를 대로 오른 열을 느끼자 살짝 놀란다. 너무 장난을 친 것 같아서 그 열을 덜어 줄 생각으로 순무의 뺨에 손등을 붙였다. 조금이나마 열이 식기를 바란다.

나누의 애정 어린 마음 씀씀이에 순무는 그가 무얼 하는지를 깨달았다. 덕분에 열이 내린 것 같이 느껴진 순무는 나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그런다. 나누는 자신이 정말 순무의 마음을 빼앗는 지독한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순무 또한 나누의 굳은 자세를 녹여 버리는 열 덩어리라고 느꼈다. 순무와 있으면 나누는 언제나 잘 잡고 있던 딱딱한 태도가 무너졌다.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순무가 입 맞춰 주었던 자신의 손을 빼낸 뒤에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순무는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며 나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나누는 객실을 나서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고양감에 의해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정리가 끝나자 바쁜 것은 카운터 쪽이었다. 둘은 카운터 옆에 있는 작은 탕비실에 앉아 여주인장과 차를 마시며 잡담을 했다. 가끔 울리는 전화는 여름 막바지에도 상관없이 휴식을 취하러 올 사람들의 예약 문의로 넘쳤다. 여주인장은 직원 중 누군가가 가져왔다며 용암전병을 나눠 주었다.

"이게 참 웃긴 게, 이름은 용암전병인데 여기 용암마을에선 팔지 않아. 굴뚝산에서 팔았던가?"

어머니의 물음에 순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누는 그렇구나, 하고 똑 소리를 내면서 전병을 쪼개 먹었다. 문득 점심에 했던 장난질이 떠올랐다. 오래되어 여기저기 얼룩과 흔적이 남은 원형 탁자 아래에서 슬슬 발을 들어 순무의 다리를 간지럽혔다. 그 바람에 놀란 순무는 먹던 것을 뿜었고, 과자 가루가 탁자에 흩날렸다.

"괜찮아? 물 가져다줄게."

"여긴 제가 닦을게요."

나누는 나중에 크게 혼날 것이라 예상하고 벌떡 일어나서 착한 짓을 하기 위해 행주로 탁자를 닦았다. 어머니가 등을 탁탁 쳐 주며 건네준 물을 받아 마신 순무는 나누를 노려보았는데 나누는 그 시선을 피했다. 카운터에서 여주인장을 찾길래 순무의 어머니는 부리나케 탕비실을 나갔고, 순무는 일어서서 나누에게 다가왔다. 다정한 연인처럼 굴 때는 좋지만 이렇게 못된 장난을 하도록 계속 내버려 둔다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 순무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

"너, 경찰이 된다는 사람이 자꾸 남을 괴롭히는 게 말이 돼?"

그 말에 나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말했었잖아. 딱히 되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내 포켓몬이 무슨 타입인 줄 알잖아. 갑자기 장난친 건 미안해."

순무는 농으로 돌리려는 나누에게 뭐라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나누가 그 말을 했던 때가 떠오른 것이다. 계속 여기서 이러고 살 네가 오히려 안타깝다던 말. 그것이 반추된 순무의 표정이 굳어지자 나누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또 왜 그래…… 미안해."

나누는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순무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때 순무의 머릿속에선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꿈이 있어도 꿈이 아닌 나누와 꿈이 있어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 나누는 순무의 등을 토닥여 주고는 떨어진다.

"순무. 너를 믿어."

언젠가 했던 속삭임을 닮은 말에 그만 응어리가 풀려버렸다. 그것을 본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지며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다. 순무는 나누에게 고맙다고 말하려 했으나 돌아온 어머니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뭘 그리 붙어서 서로 쳐다보고들 있는 거니."

참 사이가 좋네, 좋아. 그러고는 탁자에 올려 두었던 일정표를 들고 탕비실을 나갔다. 나누와 순무는 혹시나 어머니가 모든 상황을 지켜봤을지 불안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쁜 일이 없어진 둘은 이른 오후에 돌아가게 되었다. 길을 오르며, 순무는 어머니가 봤을지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나누는 순무가 딸이었으면 나누를 사위 삼았을 거라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만약 다정했던 둘을 보았다면, 그들은 나누와 아들의 관계를 용인해 줄 수 있을까?

"못 보셨을 거야. 보셨다면 난리가 났겠지."

특히나 가업을 중시하는 부모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누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순무는 현관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쉰다.

"그랬겠지? 다행이다."

그러고는 짧은 복도를 걸으면서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이야! 하고 장난스럽게 나누의 뺨을 꾹꾹 찔렀다. 나누는 순무의 손가락을 받아 주며 웃었다. 둘은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닫고 가림막을 친 뒤에 에어컨을 작동시킨다. 햇빛을 받은 방바닥이 아직도 뜨끈하다.

"마음 좀 굳게 먹어야 할 거야."

뜻 모를 나누의 말에 순무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본다.

"내가 봐 온 너는, 생각하고 느끼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거든."

순무는 생각에 잠겼다. 형제가 없으니 이런 지적을 해 주는 사람 또한 나누가 처음이었기에 자신의 성격을 되돌아본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 요령이라도 알려주나 싶었는데 나누는 순무와 함께 벽에 기대어 앉으며 트레이너가 되고 싶으면 냉정한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고 덧붙인다. 말을 끊은 뒤 생각하던 나누는 아, 하고 뭔가를 떠올린다.

"이러는 건 어떨까.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거야. 위기가 닥쳤을 때, 생각을 모두 다 정리하고 나서 대처하면 해결될지도 몰라."

배틀에선 충동을 자제하고 이성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말을 새겨들은 순무는 이때부터 버릇이 생겼다. 난감한 상황에 처하면 마음속으로 정신 차리자, 하고 금세 집중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에 나이가 들어서도 이어졌다.

관찰력 좋은 나누는 앞으로 순무가 보완할 점들에 대해 조언을 해 주었다.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지라 그동안 배워온 것을 떠올리며 순무가 여러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역시나 길잡이가 되어 줄 초보 트레이너 교본이 필요하다. 나누는 정식 트레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가르침에도 한계가 있었다. 순무는 머릿속에서 이번 휴일 때 사야 할 것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좋은 정보가 있으면 알려 주겠다고 한 나누는 아차, 하고 눈치를 살폈다. 이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금하기로 하였는데 무심코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순무와 달리 나누는 졸업 이후를 생각하며 장래를 꾸려야 했기에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미리 가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순무는 애달파진 표정으로 나누를 보았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를 순무를 보며, 나누는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나누도 돌아간 뒤에는 자꾸 순무가 생각날 것이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기분을 전환할 것이 필요해져 담배나 피우고 올까 했지만 울적해진 순무를 혼자 두는 것도 내키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차라리 여기로 오지 않았으면, 까지 생각하다가 그랬다면 순무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 그런 생각은 접어서 날려버린다. 나누는 저답지 않게 타인에게 친절하게 군 것을 되짚고선 역시 순무라서 그렇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에게는 뜨거운 기운이 넘치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상처받으면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나누의 말에 상처받았을 때와 잉어킹을 도난당했을 때에도 그랬다. 한 번에 확 타오르는 만큼 쉽게 꺼지는 셈이다.

나누의 위로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순무는 애달픈 표정 그대로였다. 순무는 눈썹을 찡그리고 나누가 떠난 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성실하게 아침 훈련을 하고, 책을 보며 공부하고, 저녁 시간에는 그것을 응용하라는 것이 나누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순무가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것 말고, 라고 말하자 나누는 겨우 말뜻을 깨달았다.

"겨울 방학 때 또 올게."

그렇게 말한 뒤 손가락으로 코끝을 살짝 잡았다가 뗐다. 울고 싶어진 순무는 나누에게 안 가면 안 되냐고 매달렸지만 나누는 할 일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경찰관이 된 뒤에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해 준다. 그 말에 기분이 풀린 순무는 나중에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집 주소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고개를 끄덕인 나누는 자신이 살아온 관동 지방이 어떤 곳인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형은 다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는데, 대부분이 초원이야. 크기가 작아서 하루 만에 관광을 끝낼 수 있을 거야. 옆에는 성도 지방이 붙어 있고 여기가 관광할 곳이 더 많아. 내가 어릴 때……."

언젠가 듣고 싶었던 관동 지방에 대한 것, 그가 살아온 발자취에 관해 이야기를 듣자 마음속이 포근해진다. 처음 호연으로 왔을 때 기차로 반나절 이상 걸렸다는 말에 놀란다. 나누는 비행 포켓몬 소지 자격증이 있으면 비행 포켓몬을 타고 공중 날기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순무는 그 또한 기억 속에 심어놓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누를 만나려면 필요해 보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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