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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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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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달라붙어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지고 잡담을 나누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렀다. 즐거운 때는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다. 낮과 저녁 사이에 별채로 온 것 같은데 벌써 저녁이 되었다. 둘은 저녁을 먹으러 길을 내려가면서 손을 잡고 갔다. 손바닥 사이로 땀이 스며 나왔지만 차분한 여름 바람이 그것을 말려 주었다. 주인장은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고 또 고생했다며 솜씨를 발휘해서 식탁을 가득 채웠다.

잔뜩 배가 부른 상태로 돌아온 후에 휴식을 취한 둘은 몬스터볼을 챙기고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기분이 좋아져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해가 지며 주홍빛이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광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누는 나인테일이 먼저 손에 코를 비벼대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이 부드러운 백금빛 털이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꼭 비단 옷감과도 같은 감촉을 닮아 있다. 그것을 본 가디도 자길 예뻐해 달라는 듯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누는 미소를 짓고 가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켓몬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깰 수 없는 벽을 마주한 순무의 괴로움을 옆에서 지켜봐 온 것은 그들이었다. 가디는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순무를 위로해 주었고, 식스테일은 순무를 한심하게 여기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그들은 늘 순무를 격려해 주는 나누의 존재가 고마울 것이었다. 나누 또한 순무를 믿어 준 그의 포켓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순무는 남몰래 꾸던 꿈에서 깨어나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깜까미와 나인테일은 서로를 노려본다. 우렁찬 순무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나인테일이 선공을 날렸고 깜까미는 날렵한 동작으로 그것을 피한다. 뜨거운 불길이 땅바닥에서 타오르며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그것을 지켜보는 가디도 흥분해서 컹컹 짖는다. 나누는 몸을 피한 깜까미에게 공격 기술을 지시했고 이번에는 나인테일이 매끄러운 동작으로 피했다. 깜까미도 따라서 높이 뛰고는, 공중으로 펄쩍 뛴 나인테일의 꼬리를 붙잡는다. 꼬리를 잡힌 나인테일은 놀라서 착지할 때 휘청거렸다. 깜까미는 꼬리를 잡은 채 멋대로 공격을 가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은 나인테일이 낑낑대다 쓰러지자 깜까미가 휙 떨어진다.

순무는 곧바로 나인테일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고 챙겨 온 상처약으로 치료를 했다. 나인테일은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서서 싸울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다. 걱정이 된 순무가 말렸지만 나인테일은 또 말을 듣지 않고 달려 나갔다. 전광석화를 두른 몸통박치기를 맞은 깜까미가 벌렁 뒤로 나자빠진다. 나누는 나인테일의 변화에 놀랐고 순무는 입을 쩍 벌렸다. 깜까미가 일어서기 전에 나인테일이 재빠른 동작으로 자세를 잡아 불꽃을 뿜었고 불길은 회오리모양으로 꼬여갔다. 아, 이게 회오리불꽃이라는 기술인가. 나누는 속으로 생각하며 상황을 지켜본다. 불꽃은 공기 중에 떠다니며 깜까미를 괴롭혔다.

순무와 달리 나누는 아무런 도구를 챙겨오지 않아서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깜까미는 몸을 감싸는 불을 쫓아내려는 듯이 손을 휘젓지만 소용없었다. 강제로 몇 번씩 타오르다 꺼지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나누는 파워젬을 사용하도록 지시했고 깜까미는 목 아래에 달린 보석에서 빛을 모아 나인테일에게 밝은 빛을 쏘았다. 그러나 그것을 피한 나인테일이 달려와서 회오리불꽃에도 상관없이 깜까미를 들이받았다. 강한 바람에 휘날리던 회오리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나누는 쓰러진 깜까미에게 다가가 일어설 수 있냐고 물었고 깜까미는 뛰어서 나누의 등에 매달린다. 나누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깜까미를 달래며 몬스터볼로 돌려보냈다. 이번엔 호되게 당한 깜까미의 저하된 의지에 배틀할 맛이 나지 않게 되자 순무도 흥분한 나인테일과 가디를 달랜 뒤 돌려보냈다.

"좀 컸다 이거지."

나누가 말하자 순무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은 처음 보는데. 진화했더니 자신감이 생기나 봐."

둘은 산길에 나란히 서서 노을빛에 물든 용암마을의 풍경을 바라본다. 짧았지만 열심히 한 탓에 몸에 열기가 올랐으나 자연에서 주어지는 바람이 열을 앗아가서 뜨거웠던 몸은 금세 시원해져 간다.

"녀석이 된통 당해서 놀랬을 거야."

나누는 깜까미가 당황하던 모습이 재밌었다는 듯이 말했다. 순무는 나인테일의 변화에 관해 이야기하며 다시 나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나누는 숨어 있던 나인테일의 뛰어난 능력에 호평을 내리며 특수기를 잘 이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순무는 공부할 것이 많아져서 들떴다. 나누는 새로운 포켓몬을 잡을지에 대해 순무와 상담한다. 전문 트레이너가 아닌 사람들은 포켓몬이 없거나 한 마리만 소지해도 되었기에 여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되어 위험한 일을 맡을 수도 있으니 더 소지해도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순무는 경찰 하면 역시 가디라며 웃었고 나누는 손을 휘저었다.

"가디처럼 먼저 들이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 좋아하긴 하는데 가디들은 바로 얼굴을 핥으려고 하잖아, 하고 덧붙인다. 순무는 그런 점도 꼭 나누답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동굴에 숨어지내며 보석류를 먹이 삼는 깜까미를 마음에 들어 한 이유가 납득된다. 그러고는 호연 지방의 포켓몬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관동에 없는 포켓몬들 이야기에 나누도 귀를 기울이며 즐겁게 순무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다 아무도 본 적 없는 포켓몬의 전설에 대한 얘기까지 나오게 된다. 나누는 관동에서 전해지는 세 마리의 새 포켓몬에 대해 말했다. 순무도 어릴 때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고 한다. 특히 파이어가 모습을 드러내면 봄이 일찍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호연의 신화와 더불어 널리 타지방까지 전해지고 있는 포켓몬들 이야기는 나누도 알고 있었다. 동화책이나 교과서에서 지독하게도 배워 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무가 이름을 올린 앱솔의 존재는 기억이 희미했다. 백 년이 넘는 수명으로 산속에 숨어 살며 자연재해를 미리 감지해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영적인 존재라는 말을 듣자 구미가 당겼다. 순무에게 앱솔을 본 적 있냐고 물어보자 순무는 웃으며 살면서 그 정도로 큰 자연재해가 없었다고 대답한다. 나누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잠깐 동안 말을 거둔 둘은 아스라이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본다. 슬슬 야행성인 풀벌레 포켓몬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며 아직도 계절이 한여름임을 깨닫게 만든다. 어쩐지 낭만적인 분위기에 나누는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은 다른 손에 의해 잡힌다. 그 손을 잡으면 체온이 전해졌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노을을 내버려 둔 둘은 손을 잡고 산책을 좀 더 했다. 나누가 이 숲길을 더 오르면 무엇이 있냐고 물었기에 순무는 저 뒤로 솟아난 산의 정상과 이어져 있지 않을까, 라고 대답했다. 조심스럽게 어두워져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더 많은 나무와 풀들이 나타나며 멀리서 새 포켓몬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는 민망해져 웃음이 터진다. 산책로가 아니다 보니 길은 울퉁불퉁했고 고무 슬리퍼로 계속 걸어가기엔 무리였다. 둘은 웃으면서 발이 아파서 안 되겠다고 하며 다시 내려왔다. 지나가면 별일도 아니고 사소하지만 즐겁고 만족스러운 흐름이다. 별채로 돌아올 때까지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순무는 이렇게 가슴이 간지럽게 구는 나누가 좋았다. 고삐 풀려 욕망을 드러내는 나누는 아직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누도 분명 연애하는 것이 처음이라 했는데 어째서 능숙한지 잠깐 생각해 본다. 성격상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고 역시 도시에서 나고 자라 이런 쪽에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누는 일주일 정도 남은 시간이 주는 압박감을 느끼며 어서 순무를 쓰러뜨릴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기회야 언제든지 있지만 성급하게 굴면 서로에게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스물한 살의 젊음은 그걸 제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또 같이 씻을 거냐 장난스레 묻고는 순무가 당황해하는 것을 즐긴 뒤 깜까미의 몸을 씻겨 주었다. 깜까미는 자꾸만 다친 부위를 가리키며 칭얼댔다. 그런 뒤에 순무가 구비해 둔 상처약으로 치료해 주자 깜까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누의 품을 파고들었다. 차갑고 묵직한 느낌을 느끼면서 깜까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짧게 삐죽 오른 머리칼을 수건으로 말리면서 방으로 돌아온 순무는 옆에 무릎 꿇고 나누를 따라 깜까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누는 눈을 힐끗거리며 벌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햇볕에 타지 않은 허연 피부를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둘의 몸에선 똑같은 비누 향이 났다. 그것에 약간 고양된 나누는 고개를 돌려 순무를 쳐다봤다. 순무는 곧바로 나누의 요구에 맞춰 살짝 입을 맞춰왔다. 망설이지 않은 것을 신호라 여긴 나누는 손을 들어 순무의 턱을 잡아 억지로 입을 벌렸다. 말캉거리는 혀 근육에 힘을 주고 혀를 움직여 보면 순무는 무릎을 꿇고 있어서인지 불편한 자세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것이 안쓰럽게 느껴진 나누는 얼굴을 떼고서 재빠른 동작으로 엉덩이 쪽에 두었던 몬스터볼로 깜까미를 돌려보낸다.

열어둔 창문으로 밤바람이 들어왔으나 둘의 열기를 식혀 주진 못한다. 나누는 순무의 손목을 잡고 무릎을 꿇고 있던 그를 그대로 자기 쪽으로 당겼다. 순무가 앞쪽으로 기대어오자 나누는 다리를 벌리고 다리 사이로 순무를 가둔다. 다시 입을 맞추며 언제나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옷자락을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는 순무의 옷자락도 잡아 올린다. 맞닿는 다리에 손을 올려 살살 쓰다듬자 깜짝 놀라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았다. 나누는 마음 먹고 할 작정으로 허벅지 뒤쪽을 주물렀다. 부드럽고 탄탄한 느낌이 좋았다.

"아……."

교차하는 호흡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누는 다리에서 손을 떼고 두 손으로 순무의 목을 감싼다. 순무는 나누가 위험한 짓을 할까 봐 움찔거리지만 나누는 그저 순무의 옷을 벗기려고 시도할 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채고 나누의 손목을 잡는다. 나누는 입술을 뗀 뒤 약간 강하게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순무의 상태를 살핀다. 갑작스러운 진행에 놀란 건지 순무는 숨을 몰아쉬며 울상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이 꽤 마음에 들지만 우선은 무서운 게 아님을 상기시켜야 했다. 팔을 펴서 등을 감싸고는 괜찮다고 어르고 달래준다.

결국 겁먹는 바람에 오늘도 해내지 못하리라 예상한 나누는 순무를 놓아 주었다. 순무는 어깨에서 흘러내리기 직전의 옷을 가다듬고 나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가슴속에 불을 지피는 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타인과 얽히기를 거부하며 피해왔지만, 나누와 달리 순무는 주어지는 손길에 약했다. 겨우 혀가 진입하는 것엔 익숙해졌어도 몸을 더듬는 것은 낯설어하기에 천천히 다가가려 한다. 나누는 마음속으로 기특한 자신을 칭찬하지만 한편으론 못내 아쉬웠다.

순무를 진정시키기 위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깊어진 밤에는 나란히 깔아둔 이불에 드러누울 뿐이었다. 나누는 진전이 없어 찝찝한 입맛만 다시고는 방의 불을 끈 뒤에 자려고 누웠으나, 거리를 둔 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순무와 달빛 속에서 눈이 마주친다.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는데도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 반칙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누는 한쪽 눈썹을 올리고서 어라? 이것 봐라? 하며 얇은 여름 이불을 들친 뒤, 다른 손으로는 자기 품으로 오라고 이불 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마치 귀여워하는 가디처럼 순무가 쪼르르 나누 품으로 굴러들어오자 나누는 이제 별일이 생기나 싶었지만 역시나 그대로 잡담만 하다가 잠들어 버린다. 순무의 콧김이 나누의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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