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n it'll last for Ever
Turn over the ashes
재스퍼는 최근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한참이나 늦은 시간이지만 1분 1초라도 걸음을 서둘렀고 졸음에도 잠들지 않고 늦은 밤 직접 마중을 나오는 벤야민은 그를 매일같이 기다리다 잠들거나 함께 밤을 보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귀가한 후 무릎 위에 올라앉은 벤야민의 허리를 안고 포근히 입술을 맞물린 채 몸을 겹쳤다. 부피감 있는 지방과 근육 위로 벤야민의 몸이 파묻히듯 안겼고 긴장감에 열 오른 서로를 지분대는 손길엔 애정이 듬뿍 묻어있었다. 말쑥한 체형에 딱 맞춰 제작한 베스트의 납작한 복부가 입맞춤으로 열오를 때마다 터질 듯 움찔대며 오르내리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벤야민은 스스로 올라탄 그의 상체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지분댔고 옷 안쪽의 총을 꺼내 바닥에 내팽겨친 뒤 마저 옷을 벗겨내려다 무언가 기시감을 느껴 그의 가슴팍을 쓸고 거칠게 더듬었다. 그리고 곧 어떤 것을 발견해 웰트 포켓에 손을 쑤셔넣고 묘함의 정체를 확인하면, 그것은 오션 스트링스 클럽 VIP 회원권과 웬 시카고 주립 대학 교수들의 명함이었다, 재스퍼는 곧장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벤야민은 이미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프락치, 프락치!” 앞날을 예측하기라도 했을까. 고문 끝에 진실을 고하는 인질처럼 두 손을 들어 악의가 없음을 밝히고 그를 진정시켰다. “너 이 새끼, 그 짓거리 이제 안 하기로 했잖아.” “나도 싫었는데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나 클럽 싫어하는거 알잖아, 응? 벤야민.” 지금 중요한건 재스퍼의 클럽 호불호 따위가 아니었다. 벤야민은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건조하지만 들끓는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다 한 손으로 키스했던 입가를 만지작대며 주변을 맴돌았다. 벤야민은 손 댔던 사업에선 업종을 불문하고 톱이었기에 남들 다 서 있을때 편히 앉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게 유난 떨고 품위 지키는 족속일수록 지저분하게 놀아대는 것은 인류의 지독한 역사였고, 물밑 사업에서는 어느정도 손을 뗐지만 그 바닥이 얼마나 추잡한지는 아주 잘 알았다. 벤야민이 받았던 것들과 간혹 스스로를 상품 삼아 기분은 잡쳐도 보다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일들, 원하지 않아도 그래야만 했던 날들. 그리고 그런 절 쫓는 피라미 새끼들은 묘비도 못 박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 길을 직접 인도한 자는 본인이었고. 화가 가라앉지 않는 듯 정장 자켓을 등 뒤로 넘겨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명함에 적힌 교수 나부랭이와 제 어린 남자친구 중 어떤 놈을 먼저 족칠지 고민했다. “어디까지 대 줬어.” “…엉덩이 좀 만지고 가슴에 비비던데.” 재스퍼의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그의 구둣발이 소파 위로 올라와 허벅지 사이를 내리찍혔다. 비스켓 여러 개를 겹쳐 잡고 쪼갠 것 같은 파열음이 들렸다. 재스퍼가 앉은 자리에서 재빨리 다리를 벌리지 않았으면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소원이 될 “나와 너를 반 씩 닮은 사랑스러운 2세”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벤야민은 구둣굽에 찢어져 터지기 일보 직전인 소파에 다리를 걸친 채 당황함과 두려움에 눈을 토끼처럼 뜨고 뻐끔거리는 재스퍼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냥 떼자.” 그 말을 들은 재스퍼는 고민 끝에 후들후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제 나름 그를 안심 시키겠다고 그래도 앞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안하느니만 못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벤야민은 고요히 방으로 들어가더니 골프채를 들고 나왔다. 그게 일주일 전 일이다.
“이거 고쳐줘요.”
“아, 응. 다녀와서 고쳐줄게. 안그래도 공구함 새로 산 것 왔더라고.”
“다녀 와서?”
모양새로는 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전시된 현대미술 작품처럼 보였다. 소파 한 가운데에 골프채가 꽂혀 있다. 허리 나빠서 스윙 휘두르는 것도 어려워하면서 힘 좋게 우드를 내다 박아놨다. 골프채를 가로지른 소파는 찢어진 구멍으로 솜을 주륵 흘리는데, 사물에 이목구비가 달린 것도 아닌데 눈물이 흐른 것만 같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팝콘을 나눠 먹고, 서로에게 소원한 사람들의 멘탈 메디컬 다큐멘터리를 보며 “우리는 저러지 말자.” 말하고 서로를 어루만지다 입 맞추고, 깊은 정사까지 나눴던 엊그제의 그 소파가 맞는데. 혹시 그 날은 꿈이었나,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꿈인걸까. 놀랍게도 둘 다 현실이었다. 벤야민이 같이 살 집을 마련해줬으니 가구는 제가 하겠단 재스퍼의 말을 꼴딱 무시하곤 몇 십개 한정판의 프랑스 장인 상품을 직접 공수해왔지만, 결국 휘둘러진 골프채로 인해 최고급 가죽 소파는 한순간에 그의 취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빈티지 펑크로 전락했다. 비약하자면 재스퍼가 과거에 머물던 방 2개짜리 아파트 가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진열장이나 식탁, 침대… 공간 자체를 포함해 온갖 살림살이는 그가 전부 마련했기에 사실상 벤야민의 집이었고 재스퍼는 거기 얹혀 사는 양심없는 놈팽이었기에 이러자 저러자 할 권한은 없었다. 그래도 벤야민이 제 것은 애지중지 아끼는 타입인데 소파를 이렇게까지 박살내놓은 것은 해소되지 않은 불만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는 속마음을 내뱉지 않는 타입이었다. 이전 일에 대해선 지겨울 정도로 사과하고 이번 건만 끝나면 프락치 일은 안하겠다는 신용도 떨어지는 약속도 받아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탐탁치 않아했다. 비슷한 이유로 쪽박이 난 가구 중엔 그의 옷장도 있었는데, 반으로 쩍 갈라진 수납칸 꼭 야생 코코넛 열매 같았다. 나무 조각이 삐져나온 서랍장에서 하나뿐인 연인에게 잘 보이려고 산 셔츠나 그가 좋아하는 헐렁한 후드티를 제치고 티셔츠와 속옷을 꺼내 익숙하게 욕실로 향했다. 그의 분노엔 보통 원인이 있었지만 나이 먹을수록 히스테릭해지는 그의 짜증에 도저히 이유를 찾기 어려워졌다. 짜증내는 그가 싫은 건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걸고 넘어지니 갈등이 해소되기 어려웠다. “이젠 내 말도 무시해? 어딜 다녀와?” “으응, 응? 아냐. 다 듣고 있어.” 벤야민의 맥 빠진 헛웃음은 재스퍼의 태도에 대한 복합적인 감상문이었다. …이 새끼, 한 눈 팔고 있는 거 아냐?
“오늘은 일 없다면서요.”
“응, 근데 갑자기 생겼네. 기자회견 일 때문에. 두 세시간이면 될거야.”
“……….”
요즘 바빠졌어. 일 때문에 피곤해, 다음에. 없으면 죽을것처럼 굴다가 어느 날 권태기 찾아온 듯 심드렁하게 구는 애인의 단골 멘트였다. 하지만 결단코 권태기는 아니었다. 크기를 잴 수 있다면 그를 사랑하게 됐을 처음과 지금이 여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하늘에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재스퍼 입장에서 변명을 하자면 대학원을 졸업한 후 시험에 합격해 근무처 병원에서도, 일정 조율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 이그나이츠에서도 제법 자리잡게 되어 자신의 스케쥴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쏟아지는 일감, 매일 아픈 환자들과 하루가 멀다하게 위험한 도시의 시민들. 재스퍼는 쉐이빙 크림을 턱에 잔뜩 펴바르고 벤야민과 세트로 맞춘 녹색 칫솔로 이를 문지르다 치약을 뱉어냈다. 고개를 올리면 고급스러운 건식 세면대의 거울면에 벤야민의 답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 반사되어 비춘다. 침대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퍽 기운도 없는데다 초조해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이런 사람이었나. 꼭 분리불안이 온 반려 동물 같았다.‘날 위해서 뭐든 하겠다며. 거짓말이었어?’ 한 적도 없는 그의 말이 재스퍼의 심장에 자격지심처럼 날카롭게 꽂혀 돌부리가 걸린 듯 답답했다. 벤야민을 이렇게 놔둬선 안 되는데. 주변을 돌보고 앞길을 닦느라 바빠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반려자이며 사랑하는 연인. 영원한 적이자 영원한 아군인 벤야민을 기자회견 따위에 밀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가서 대화하자.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네가 가장 소중하다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해주자. 그리고 정말 빨리 돌아와야지, 3시간? 음…, 2시간 안에 돌아오자. 턱에 묻은 크림을 덜어내면 피부와 면도날이 스쳐 미세하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턱 아래를 빙 둘러 미지근한 물로 세안하고 다 쓴 칫솔을 케이스에 걸어두려다 문득, 세면대의 칫솔 통에 노란 메모지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사용인 캐시로부터, 재스퍼 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재스퍼는 그 메모를 보는 즉시 칫솔을 들고 안방으로 척척 걸어나갔다.
“벤야민, 내 칫솔로 욕실 청소했지.”
“내가 안 했어요.”
“’내가’?”
벤야민, 지금 장난해? 이 상황에서 잘한 것 하나 없는 소원한 연인의 입에서 나오긴 가소로운 적반하장이었다. 주말에는 아무데도 나가지 않겠다며 기다리게 한 쪽이 누군데. 벤야민은 웬걸 기분이 상했는지 아무 대답도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열 받을때마다 무언가 걷어차 화를 삭혔는데, 항상 희생되었던 코너의 정강이가 보기 드물어지자 이젠 살림살이를 부쉈다. 게다가 술에 취하면 간헐적으로 감정적인 행동을 보였는데 그 중 하나로 사용인에게 그의 칫솔로 욕실을 청소하길 지시했다고. 캐시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닦으면 화를 내셔서 정말 닦진 않았고 시늉만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보면 벤야민이 가진 인간적인 양상을 잘 확인할 수 있다. 또, 벤야민이 예민해질때마다 해고당할까 겁 나서 조심스럽게 구는 그녀를 보면 그냥 잘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이롭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만 다른 사용인들이 “벤야민 씨는 너무 까다로워요.” ”예민해서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일 그만둘래요.” 이런 말들도 썩 반갑진 않았다. 몇 번 사람을 바꾼 적도 있지만 이젠 선택권이 없다. 지금의 사용인은 다정했고, 벤야민과 재스퍼가 늘 잘 지내길 바랐다. 지금까지 고용한 사용인 중 벤야민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 재스퍼 또한 그와 함께 지내길 원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네 애인의 칫솔로 바닥 타일을 닦고 싶어? 그 입으로 키스하고 싶은거냐고? 그건 아닐 것 아냐. 나도 욕실 청소한 칫솔로 혀 닦고 내게 하나뿐인 사람에게 사랑을 고하며 키스하고 싶지 않다고. 설마 아예 안 하겠단 선전 포고야? 너한테 잘 보이려고 프로틴과 단백질로 끼니 때우고, 하루에 4시간씩 운동하며 인스타그램에서 페로몬 향수인지 나발인지도 사서 뿌리고 살았는데, …아, 젠장. 이 티셔츠도 찢어져 있잖아!
“어디 가.”
“기자 회견 간다니까.”
“당신 카메라 싫어하잖아요.”
“미안해, 벤야민. 이번엔 정말 가야…”
“가지 말라고.”
대각선으로 쭉 찢어진 티셔츠를 도로 벗어내다 멈칫했다. 이 옷처럼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재스퍼를 노려보는데 그 눈이 꼭 눈물을 쏟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잠잠해졌다. “금방 올게.” 그리 말했지만 벤야민의 마음엔 들진 않았나보다. 재스퍼는 옷장을 열고 샀을때보다 사이즈가 작아진 셔츠를 구겨 입었다. 그가 앉은 침대에 걸터앉아 정강이와 발목 사이까지 닿는 양말을 신은 뒤 색깔 맞는 정장 바지를 골라 바짓구멍에 허벅지를 밀어넣고 벨트를 묶었다. 곧장 원목 장식장을 열면 두꺼운 유리로 된 아랫면에는 벤야민이 잘 어울린다고 골라준 값비싼 롤렉스, 브레게 시계나 조말론 향수 등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중 가장 선호하는, 동시에 가장 저렴한 것인 스마트 워치를 손목에 끼워 고정했다.-이 또한 그가 사준 것이지만- 윗 칸에 손을 뻗어 깨끗한 정장 자켓을 걸치고 머리를 조금 넘겼다.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브라운 구두를 앞으로 끌어당기다 결국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고개를 들면 여전히 어둡고 축축한 그의 모습이 보인다.
벤야민은 최근 혼자 있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쇠약해진 몸은 과로를 견디지 못해 쓰러졌고 그 결과 업무량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현재는 차근히 휴식하며 조금만 일하고 있지만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날 일이 적어져 재스퍼를 찾는 빈도가 상당히 늘었다. 반대로 바빠진 그가 벤야민을 체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갱년기라도 온 모양인지 그는 자주 침울해하고 작은 일에도 예민해졌으며 건강 상태도 나빠졌다. 몸은 건조하고 차가운데도 열은 자주 나고,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식은땀을 흘려 손수건은 필수가 되었다. 기침은 말할 것도 없다. 잠드는 것도 약이나 술에 의존해야 하여 잠들때까지 정사를 나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가장 곤란한 점은 이능력인데, 능력 자체를 사용하면 병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자비한 통증이 도졌고 오리진을 복용하면 일상 생활조차 어려운 약물 부작용이 몸을 덮쳤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제하자고 서로와 약속해 현재까진 잘 지켜졌지만 한 번 뚜껑 열렸다 하면, 혹은 스스로가 정말 필요하다 판단하면 물 불 가리지 않는 성격 덕분에 언제 어떻게 문제가 생길지 몰랐다. 자멸에 가까운 이능력이 그를 집어삼키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는데도 미래를 알 수 없었다. 거울에서 몸을 돌려 침대에 앉아 책을 펼쳐든 그에게 한 발 다가가 허리를 낮추고 입 맞추려다,… 제가 이 닦은 칫솔이 화장실 바닥을 스쳤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을 물렸다.
“……다녀올게.”
“꺼져.”
안방을 나설 때 재스퍼의 뒤통수에 책이 날아왔지만 타이밍 좋게 닫힌 문에 힘없이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들어오던지 말던지. 이름도 모르는 새끼들 구해주다가 뒈지던…” 까지 말하는 것을 들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현관을 나서 차고에 세워둔 바이크를 세우고 엔진 스크린의 먼지를 닦아냈다. 귀 뒤로 인이어를 연결해 무전기와 휴대폰에 잭을 연결하고 헬멧을 머리에 넣어 끈을 조였다. 시트에 올라타 반대쪽 다리를 걸치고 그립을 쥐어 시동을 걸 때 마당 앞으로 한 여성이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재스퍼 씨, 안녕하세요. 이제 출근해요?”
“캐시, 안녕하세요? 네,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아, 그리고… 쪽지 확인했어요. 고마워요.”
”하하, 다행이네요. 요 근래 벤야민 씨 컨디션이 나빠 보여서요.”
“음,… 오늘은 2시간이면 돌아오니까 그 때까지만 조금만 신경써줘요.”
“네,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제 집사람 컨디션 나빠 보인다는 말에 안절부절 덩치값 못 하는 남성, 재스퍼 콜린스. 올해 아마도, 36세였나. 나이 많고 돈 많은 남자를 운 좋게 꼬셔서 팔자 핀 놈. 이 집도 가구도 전부 집주인인 벤야민 씨의 것이고 이 자도 벤야민 씨의 애착 인형 비슷한 부류였다. 쭉정이인줄 알았는데 시카고 이그나이츠 의석과 NPTE 물리치료사 1급 자격도 있다고 하니 아주 못 써먹을 놈은 아니었다. 그는 “벤야민 잘 좀 부탁해요, 미안해요.” 하고 급한 일 있는 사람처럼 바이크에 시동 걸고 어디론가 냉큼 가버렸다. 뻔하지, 신문이나 매스컴에도 제법 실렸으면서. 지난 주에도 뉴스에서 봤는데…… 집 안에 들어가면 골프채가 꽂힌 소파가 일주일째 그대로라 이제는 인테리어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벤야민 씨에게 인사를 건네도 건성으로 흘려 듣고 난장판 사이에서 안경을 끼우고 꾸역꾸역 독서를 한다. 지루해서 농구라도 하셨는지 바닥에 나자빠진 책을 주워 도로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래, 사사건건 잔소리 하시는 것보다야 지금이 훨씬 낫다. 제 월급 주는 벤야민 진 사장님, 올해로 49세. 직업은 미술품 감정사. 착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성격의 벤야민 씨는 일주일에 6일 정도 짜증이 나 있다. 하루는 어떤지 모른다. 그 날 휴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유는 매번 달랐지만 오늘은 보아하니 부부 싸움이다. 이젠 그림자만 봐도 왜 열받았는지 알 것 같아서 그에게 심신 안정에 좋은 메리골드 꽃잎을 띄워 우려낸 티를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처럼 보여도 속에서 천불이 나는지 뜨끈한 차를 물 마시듯 목 뒤로 울컥울컥 넘겼다.
도시 내에서도 가장 비싼 타운에 파격적인 평수. 탁 트인 미시간 호와 시티 타워가 넓게 보이는 베스트 플레이스. 작년 즈음에 경매에 나온 걸 누군가가 초고가에 입찰했다는 소문이 돌아 그 주인이 누구일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그리고 저는 어쩌다 운 좋게 그 집의 하우스 키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집주인인 벤야민 씨를 처음 봤을땐 정말 놀랐다. 차고엔 롤스로이스를 비롯한 3대의 차량이 있었고 기분 내킬때마다 원하는 걸 탔는데 그걸 운전하는 사람이 또 따로 있었다. 양복 가게도 아닌데 정장 종류는 말할 것도 없이 넘쳐났고 남녀 가리지 않고 꼬셔낼 정도로 타고난 외모는 결국 본인보다 13살 어린 놈팽이 꼬시는 것에 사용한 듯 했다. 그 다음은 성격이었는데 이 부분은 잘릴 수도 있으니 각설하겠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게 정말인지 벤야민 씨는 건강 상태가 나빴다. 제가 고용된 가장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위험한 상황에 빨리 대처하기 위해서. 반려자가 의료인인 만큼 응당 문제 없을 부분인줄 알았는데, 어찌나 바깥을 싸도는지. 연인 사이라고 했던 두 사람은, 글쎄. 과거엔 재스퍼가 벤야민의 재산을 노리고 있거나 그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 얼굴만 보면 끙끙대는 개처럼 오늘 벤야민 어땠어요? 하고 눈치를 보며 물어댔고 벤야민 씨는 그런 재스퍼에게 쌀쌀맞았으니. 하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나보다.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냉장고에 식재료 좀 채워달란 부탁을 받은 적 있었다. “저녁 만들어 놓을까요?” “아뇨, 오늘은 바깥에서 식사하기로 했어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안에서 먹고 가셔도 돼요.” 그 날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민한 벤야민 씨도 그런 벤야민 씨를 홀랑 놓고 나가버리는 엉덩이 가벼운 놈도 없으니. Siri, 2056년 히트곡 플레이 리스트 재생해줘. 그루브한 비트에 몸을 싣고 쓸데없이 여덟 칸이나 달린 냉장고에 느긋하게 장 봐온 것들을 채우고 있었다. 그 때, 현관문이 덜컥 열리더니 난데없이 술냄새 잔뜩 묻힌 벤야민과 재스퍼가 서로의 넥타이고 자켓이고 살가죽까지 벗길 기세로 몸을 더듬으며 진하게 키스하는 모습을 직관해버렸고 하필 떨어뜨린 생크림 토스트가 잼 부분으로 바닥에 철퍽 내리 꽂혔다. 그 날 현관 로비에 눕혀져 흐트러진 벤야민 씨와 눈이 마주쳤을때 난생 처음으로 사망 보험을 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행이 별 일 없었지만, ……이후에 드레스를 한 벌 사뒀다. 죽을 때 입을 옷 아니고 아니고 정말 예쁜 드레스, 결혼식장 가야 하니까. 부케는 누가 들으려나, 벤야민 씨는 뭐 드는 거 싫어하니까 재스퍼에게 시키겠지. 괜찮은 그림 같다. 생각해보면 백날 천날 죽어라고 싸우는 이유도 지독한 사랑 때문이겠다.
아, 그리고 그 날은 빠르게 퇴근시켜 주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의 기념일을 기대했다. 보험도 들었고.
“캐시, 저 나갈 거예요. 외출 준비좀 도와요.”
“어라, 저녁은 안 드시고요?”
“입맛 없어요. 옷 좀 가져다 줘요.”
벤야민 씨는 앉아있던 침대에서 기운 없이 일어났다. 내일 모레 오십이면 그렇게 나이드신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유난히 몸이 약했고 챙겨 먹어야 하는 약도 많았다. 찬장을 뒤져 갖은 종류의 약 병을 가로지르고 폐 기능 개선에 필요한 약을 종류별로 꺼내 트레이에 올리고 따뜻한 물 한잔을 챙겨두었다. 식사도 거르고 어딜 나가시는거냐 물으면 잠깐 바람 쐬러 간다고 하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데리러 가려는 거 다 안다. 아깐 예민하고 까칠해서 대하기 힘들다 했지만, 그건 그거고. 벤야민 씨는 다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재스퍼에게 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내는 모습을 보는 일도 퍽 즐거워졌기에(그리고 나도 먹고 살아야지.) 그의 옷장을 열어 어떤 것을 준비할지 고민하다 스트레이트 무늬가 그어진 사이즈 딱 맞는 검은 셔츠와 그와 어울리는 색상의 포멀한 정장 웃옷, 허리부터 허벅지 윗쪽까지 슬림하게 주름 잡힌 정장 바지 세트를 멀끔히 다려 준비했다. 꽉 끼는 골드 체인이 달린 베스트에 애쉬 그레이 색상의 쓰리 피스 정장을 준비하려 했지만 오늘 벤야민 씨 기분으로 보아선 이 쪽이 좀 더 어울리는 거 같네. 벨트는 뭐가 좋으려나. 재스퍼는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벤야민만 보면 어쩔 줄 몰라했으니 뭘로 싸웠든 화해하겠지. 그래, 나 같아도 화 풀리겠다. 그는 제가 가져온 옷이 살짝 부담스러운 듯 곤란한 눈을 흘기다 별 생각없이 받아 입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오늘 집에 안 들어올 거예요.”
“어라? 재스퍼 씨는 아까 두 시간이면 온다고…”
네, 네. 그 이름을 듣자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기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능숙하게 옷을 준비하고 벤야민이 입고 있던 실내복을 개어 침대에 올리고 바구니에 담긴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고르던 그는 곧 귀찮은 듯 손에 들린 것들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아차차, 바닥 아직 안 닦았는데. 얼른 주워야지. “차 키좀 가져와요.” “네~.” 거실 주변을 둘러보고 여길 치우라 시킬지 말지 고민하던 그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 쉬더니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적당히 시간 때우다가 원할 때 퇴근하라고 했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가끔 보았던 덩치 좋은 남성이 나이키 추리닝에 까치집 된 갈색 뒷머리를 만지작대며 서 있었다.
“사장님, 저 오늘 휴무인데…”
“…운전만 좀 해요.”
“네에….”
모처럼의 휴일인데 또, 또 날 너무 좋아하는 사장님한테 전화… 어라? 음? 안녕하세요? 제가 말하는 타이밍인가요? 제 이름은 코너, 벤야민 사장님의 못 하는거 빼고 다 하는 조수 겸 비서예요. 제가 방금 했던 말은 비밀로 해주세요! 오늘은 황금 같은 일요일인데 사장님이 오라고 시켜서 나왔어요.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이러시지만,… 내일이 월급날이라 오늘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재스퍼는요?”
“……아~ 알겠어요. 그런 표정 좀 그만…”
진 사장님이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곤 못 하지만 특정 인물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아마도요? 요즘 저를 걷어차지 않으시는거 보면 요즘 몸이 예전같지 않거나 정말 좋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는 정답일테니까요. 재스퍼도 없고, 해질녘에 불러내신 거 보니까 오늘 또 두 분이 싸운 모양이네요. 최근 별 일 없이 잘 지내시는 줄 알고 당분간은 주말에 부르시진 않겠다 싶었는데. 둘이서만 알콩달콩 지낼 순 없는걸까요? 재스퍼가 사장님을 잘 다독이고 예뻐해줘야 저도 주말에 좀 놀러 다닐텐데요,…그래도 숫기 없는 사람들인데 서로에겐 헌신적으로 보여서 신기하기도 해요. 제가 말하면 둘 다 듣기만 한다니까요? 뭐 사장님은 듣는 시늉만 하는거지만. 어쨌든 어쩜 그리 똑같은지. 이전에 재스퍼한테 물어보니 정말 가당치도 않은 걸로 싸우던데, 그런 거 보면 둘이 참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걸 본 게 벌써 10년은 된 것 같네요. 그래도 제가 더 사장님이랑 오래 지냈어요! 저는 한 15년 이상? 그런데 제가 이런 말 하면 재스퍼가 좀 싫어해요. 왜 싫어하는거지? 잘 모르겠네요. 사장님은 이유를 아시는데 안 알려주세요. 그냥 웃겨 하시기만 하셔서, 뭐… 그래. 두 사람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싶더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아닌 것 같아요. 뒷자석 문을 열어드렸는데 사장님 표정이 평소보다 좀 더 안 좋았어요. 그리고 들어오는 전화도 전부 무시하고, 방금까지 담배 피우고 계셨는데 앉자마자 다시 한 대 꺼내 피우시는 것 보니, 말 못할 스트레스라도 있는 모양이네요!
“그런데 어디로 가요?”
“이그나이츠 시카고 지부.”
“거긴 왜요?”
“부숴 버릴거야.”
이야… 역시 이번엔 크게 싸운 모양이에요! 하지만 사장님이 까라면 까는게 제 일이겠거니. 앞뒤가 길쭉한 고급 세단에 올라타 운전석에 차키를 돌려 꽂고 부드럽게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켜요. 이미 네비게이션 최근 검색지에 등록되어 있는 이그나이츠 시카고 지부를 상단에 업데이트 한 뒤 핸들을 돌려 차도로 빠져나가는 중. “노래 틀어드릴까요?” “됐어요.” 그 뒤론 정적이 감돌고 있네요. 비욘세 노래 틀고 싶은데,… 이거 완전 불후의 명곡인데 말예요. 하지만 시끄러운 거 싫어하시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사장님, 오늘 입고 오신 정장, 뭐라고 해야하지. 젊으셨을때 느낌이 나는 것 같아요. 건달 같다고 해야하나? 역시 이런 옷발 하나는 받으신다니까요, 그 쪽 일 하시던 짬이 있어서 그러신가. 이전에 재스퍼에게 “이상형이 뭐야?” 라고 물었을때 순진한 사춘기 10대처럼 “으응, 자상하고 귀엽고,… 나랑 있는 거 좋아하고. 챙겨주고 싶은 사람. 아, 또… 어른스럽고, 멋있고…” 이렇게 말했는데, 음~! 아니야. 이 말은 다 거짓부렁이에요. 재스퍼는 얼굴만 봐요.
“그런데~ 사장님.”
“알고 있어.”
“태울까요?”
“떨어뜨려.”
운전하다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 아니겠나요. 평범하게 차도를 운전하다 주변을 빠르게 훑으니 샛길로 나가는 도로가 보이네요. 느슨한 손에 힘을 줘 기어를 꽉 붙잡아 내리고 후진해서 골목을 꺾은 뒤 엑셀을 밟아 속도를 올렸어요. 사장님이 저에게 이거 하나는 잘 한다고 칭찬 해주신 거, 운전 실력! 러시아워도 일은 아니지만 주말 저녁의 차도는 그다지 혼잡하지 않았기에 이 정도 도로를 유연히 빠져나가는 것은 케이크 한 조각 먹는 것 만큼 쉽죠~. 한 손으로도 가능! 사업이나 채권 문제에 엮인 사람들, 무슨 이유로인지 연락처 좀 달라는 졸부들이 사장님을 쫓아오는 일은 무수히 많았지만 이번엔 좀 곤란하네요. 저렇게 쫓아오는 강아지를 어떻게 두고 갈 생각을 하지? 사장님 정말 피도 눈물도 없다니까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차 옆을 바짝 따라붙는 사람이,
“벤야민! 왜 전화 안 받아? 차 좀 세워봐!”
재스퍼일줄은 몰랐거든요.
제가 바이크로 따라잡는걸 못 봤을리가 없다, 봤으니까 피하는거다. 전화는 왜 안 받은거야? 시계를 생일 선물로 줬던 것엔 안 좋은 기억이 있어 피하고 싶지만 반드시 이번 생일 선물은 최신형 스마트 워치를 사줄 것이다. 혈압이나 맥박 관리도 해주고 수면 시간 체크에, 네게 들어오는 전화, 문자. 단 한 통도 놓치지 않게 해준다고. 속도를 내어 위험할 정도로 차 옆에 붙어 창문을 쾅쾅 두드려봤다, 제 바이크의 사이드 미러에 그의 차면이 살짝 긁힌 것 같은데 이렇게 비싼 차의 수리비를 내려면 제 몇 달 월급을 때려 박아야 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보다 벤야민이 이 쪽을 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제가 집을 비워버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생각보다 일은 잘 풀렸고 금방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얼른 퇴근하고 돌아가려는 찰나에 반대쪽 도로에서 너무나 익숙한 차량이 다가와서 방향을 틀어 얼른 쫓아갔다. 코너가 운전을 하고 있는 경우라면 보통 벤야민이 뭔가 위험한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 99.9%였다. 거사를 치루고 혼자 운전해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걸 떠나서라도 할 이야기가 있다.
“음~… 사장님, 창문 부숴질 거 같아요.”
“…….”
“재스퍼 씨 적당히 먹이셔야 할 것 같아요.”
“차 세워요.”
십 몇 마일 정도를 도로 위에서 그를 불러대며 창문을 두드리니 주변 차량들은 저를 알아서 피해갔다, 이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건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있는것처럼 부끄러웠지만 그거보다도 저를 모른 체 하는 벤야민이 더 미웠다. 한참이나 뒤에서 불러대니, 교차로에서 교량으로 빠져나가는 언저리에 그제서야 차를 세운다. 그를 보고 얼른 바이크에서 내리니 코너는 차 창문에 팔을 걸치고 이 쪽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웃음을 띄길래 살짝 손을 흔들었다. 차에서 내린 벤야민은, 아니……. 그런데 이렇게 차려입고 어딜… 어딜 가? 이런 옷은 어디서 났어? 원래 있던 거야? 눈을 어디에 둬야 하지?
“아주 노골적으로 훑어보네.”
“…흠, …어딜 가길래 그리 차려입고 가나 싶어서 봤지.”
“네 묫자리 찾으러 간다.”
“우리 집 개가 뒈질 때가 됐거든.”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화난거야. 제가 그동안 못한 건 인정한다. 그런데 인정하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제게 하나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제 소중한 사람을 속상하게 한 마음은 어떻게든 풀어주고 싶었다. 집에 있을때까지만 해도 조금 화나고 토라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면 지금의 벤야민은 정말 누구 하나를 죽여야만 분이 풀릴 것 같은 결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에 힘을 줘 이리저리 굴려보다 생각해낸건 생각보다 단순했다. 가까이 다가가 헬멧을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아 뺨에 키스하고 고개를 부볐다. 미안해, 응? 나랑 집에 가자,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주면 안될까? 나 너 정말 사랑하는데…… 낯뜨거운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벤야민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흥미롭게 이 쪽을 보고 있던 코너의 이목구비가 흐릿해지더니 바깥으로 빼고 구경하던 몸을 도로 집어넣고 창문을 올렸다. …아무튼. 부끄러워서 시도 한 번 못했던 필사의 보루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눈 앞의 그이기에 이거라도 비벼봐야 했다. SNS 보니까 이런 거 해주면 다들 좋아한다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도 좋을 것 같긴 했다. 그래서 그도 그러길 바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표정 하나 안 바꾸는 그를 바라보면 아까보다 훨씬 화난 얼굴로 날 죽일 계획을 구상하는 것 같았다. 예일대 수석 졸업생 아니랄까봐 작업 속도도 참 빠르다. 다시금 눈이 마주치니 뒷골이 쎄한 것이 죽음의 칼날이 모가지에 닿아오는 것 같아 뭐라도 지껄였다.
“미안해, 벤야민. 이제 정말로 너랑만 있을게. 가는 길에 네가 좋아하는 복숭아 케이크 사가자. 요즘은 어플로 당일픽업 예약도 되더라고. 저녁도 내가 차릴게, 네가 좋아하는 송로 버섯 스프에 연어 스테이크로 저녁도 만들어서… 아니면 전에 가자고 했던 전시회 갈까? 그거 보고 밀레니엄 파크에서 산책 하고. 근사한 레스토랑 가서 식사하고 밤에 같이 볼 DVD도 하나 대여하자. 그리고 소파도 고쳐 놓을게. 응?”
“…….”
“으응…?”
“…… 이번만 넘어가는 거예요.”
정말이야? 된 거야? 1차원적인 방법은 생각보다 먹혔나 싶지만, 정확히는 그가 저를 봐준 것 뿐이다. 옆으로 사람이나 차량, 지나가는 유모차, 길고양이들까지 전부 이쪽을 바라보니 당연히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을 것이다. …그에게 강제로 민망함을 준 것 같아 미안했지만 저를 봐주는 것은 여전히 좋았기에 여전히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뺨에 볼을 살며시 부비고 얼굴을 붉혔다, 역시 부끄럽지만 그래도 붙어있으니 기분은 좋았다. “이게, 어디까지 기어오르려고…….” 귀찮은 듯 상체를 밀치던 벤야민은 몸이 밀려나질 않자 가슴팍이 폭 오르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결국 눈꺼풀을 내리고 아주 옅게 웃었다, 일리노이 주 최고 쿨 뷰티 미남인 벤야민이 저를 보고 웃어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로 돈 주고 살 수 없는 행복, 그건 바로 그를 향한 사랑이었다. 벤야민이 웃는 모습만 보면 온 세상 걱정이 다 없는 일 같았다. 불행이라는건 정말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그러니 나도 그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었다, 기쁘게 해주고 싶어. 일 생각은 그만두고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집도 깨끗하게 치우고. 그리고 그이가 좋아하는 근사한 저녁도 준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소파에 앉아 시시콜콜한 TV쇼 보면서 피식대다 제 어깨에 기대 잠든 그를 보며 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이그나이츠 3채널, 응답 바랍니다.”]
“…….”
“……….”
“…으…”
“대답하면 뒈질 줄 알아.”
그 순간 무전이 울렸다. 아, 제발! 지금은 내버려두면 안 돼? 지금 딱 화해할 타이밍이었는데. 선택권 없이 자동 호출된 무전 이어폰은 이그나이츠 시카고 지부 채널 3번에 자동으로 연결되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고 인이어를 눌러 소리를 키웠다. “리버스입니다, 부탁인데 30분만…” 눈 앞에서 벤야민이 입 모양으로 “30분?” 하고 읊었다. 몽글몽글한 우유 케익같이 풀렸던 표정은 다시금 서슬 퍼런 살인자의 눈이 되어 제 머리통을 관통할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벤야민을 바라보면 그의 표정은 날카롭게 굳어 지쳐 있었다. 시민의 안전이냐, 사랑하는 사람이냐. 꼭 트롤리 딜레마에 빠진 것만 같았다. 잡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음성이 귓가에 꽂힌다. [지금 어디죠? 그 거리에서 벗어나요. 당장!] 무전기의 호통과 동물적인 본능으로 벤야민의 손을 낚아채 품에 가둬안고 한 쪽 어깨로 날아온 거대한 파편을 가로막았다. 굉음과 함께 살갗이 짓이겨져 피가 터지는 통증보다 걱정이 앞섰다. 괜찮냐고 물으며 그의 상태를 채 점검하기도 전에 이 쪽을 향해 날아오는 폐차를 보고 그를 벽 쪽으로 밀쳤다. 양 팔을 가슴에 올려 막아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무리였을까. 묵직한 몸뚱이가 통째로 붕 떠 날아간 것 같은데, 강한 충돌로 빵 반죽처럼 차도를 세 바퀴 정도 구르고 움푹하게 찌그러진 M 모양의 버거 광고판에 부딪혀 채 재활을 마치지 못한 몸에 콘크리트 철골이 쑤셔졌다. 온 몸의 뼈마디가 피부를 꿰뚫고 나갈듯한 고통에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었고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린 쇠 맛이 번졌다. 온 몸의 근육이 경련해 흐릿한 시야로 눈을 깜빡였다. 벤야민이 나가서 뒈지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랬는데 어디서 별똥별이라도 날아와 그 소원이 이뤄진 건 아니려나. 그에게 소홀했던 대가를 치루게 되는걸까. 어디까지 굴렀고, 어디까지의 생각이 유지되고 있었는지 까무룩한 정신을 퍼뜩 붙잡으면 제 품 안에 벤야민이 없었다. 기름이 쏟아지고 불길로 타오르는 바닥을 기어 다니다 장기가 다 쏟아질 것 같은 복부를 쥐고 일어나 찌푸린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벤야민은? 애쉬는 어디에 있지? 이명이 귀에 울리고 눈 앞에 암흑이 엄습해도 애타게 그를 찾았다. 설상가상으로 코 아래로 흘러내리는 코피가 거슬려 손등으로 밀어 닦아내는데도 멈출 줄을 몰라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가 눈에 보이지 않자 강한 불안감이 전신을 관통했다. 부유하는 먼지 뒤로 네 죽음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네 부재를 짊어질 각오가 되지 않았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같이 죽고 싶었다. 그의 생존을 확인하는 매 초의 시간이 꼭 저주받은 영겁의 시간 같았다. 오감이 으깨진 것 같아 이성이 허공을 떠돌고 목구멍에서 강한 피 맛과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다 멀지 않은 곳에 전복된 버스가 한 대 보인다. 그 곳에에 기대앉아 몸을 숨긴 그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가 뺨을 붙잡고 몸을 둘러보다 꽉 껴안았다, 정말 다행이다. 무사해서.
철컥.
마음을 놓았던 것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갑작스레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가 2cm쯤 밀려났다. 문제는 그 총구가 향한 곳이 제가 아니라 벤야민이었고 제 등 뒤로는 무장한 폭도들이 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반 이능력 집단의 횡포는 오래 전부터 이어졌다. 이그나이츠 명찰을 단 조직원은 비능력자인 일반 시민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할 수 없는 규율을 이용한 일종의 테러였다. 그들은 이러한 횡포로 정보나 자원을 갈취했고 상황을 원하는 방향대로 끌어갈 수 없을땐 망설이지 않고 무력을 사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과학적인 능력이라면 죽임당해도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그나이츠 실전 매뉴얼 2권 33페이지에 이미 일어난 죽음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사후에 대한 금기 사항도 당연히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윤리적으로도 당연히 안 되는 일이다. 차들의 경적 소리와 폭발 소음에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매뉴얼에 적혀있지 않았던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눈을 굴리고 빠져나갈 거리를 측정했다. 기대앉아 버겁게 숨을 내쉬던 벤야민은 아무렇지 않게 “좀 일으켜줘요.” 말했고 반사적으로 한 쪽 무릎을 꿇어앉아 그의 어깨를 잡고 부축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호흡을 들이키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부상으로 짓이겨진 어깨춤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벤야민은 눈을 흘겼다. 냉소적인 헛웃음을 띄고 제 가슴팍을 거칠게 밀치고선 바닥을 짚어 스스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드문드문 찢어져 시뻘겋게 고혈이 맺힌 타박상이 거슬렸는지 입고 있던 정장 웃옷을 벗어던지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머리에 화약 냄새 밴 총구가 닿아있던 말던 주머니에서 알약 몇 정을 꺼내 물도 없이 어금니로 씹어 삼켰는데 그건 오리진이었다, 안 돼. 그건 안 돼. 그를 향해 다가가려는 것을 제지하는 놈의 얼굴을 팔뒤꿈치로 내리 찍었다 그대로 억눌려 제압당했다. 그 모습을 본 벤야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 씨발, 이 개새끼들이 이젠 단체로….”
사람 잘못 봤어. 이그나이츠 애송이랑 붙어먹는다고 나도 그 쪽으로 보였나봐. 그의 주변에서 잿가루가 타오르는데 오히려 냉기가 느껴졌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무장 폭도들은 제가 움직일수록 총구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럼에도 벤야민은 전혀 초조함이 없었다. 제 등 뒤로 장전한 놈들과 자신의 속도, 어떤 것이 더 빠를지 계산기라도 두드리는 모양새였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고 호흡이 가빠진다. 놈들이 제 몸뚱이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보이는 놈들만 열 댓명 이상. 등 뒤엔 몇 놈이 있는지 모른다. 이 인원을 능력으로 한꺼번에 재 아래 묻으면 그의 몸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쿵쾅대는 심장이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무어라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벤야민, 안 할거지. 이제 이능력은 안 쓰기로 약속했잖아. 네가 부작용 때문에 아프고 괴로운 건 싫다고 했잖아. 별 것도 아닌 얼간이들 상대하느라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살 수 없을 것 같아. 너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데, 네 곁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데, 죽어서 별이 되더라도 너의 위성이 되고 싶은데, 온 우주가 재로 불타버려도 마지막까지 네 손을 잡고 싶은데. 그 말을 스스로 복기하니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자연히 떠올랐다, 지금 일의 모든 것들이 퍼즐처럼 맞춰진다.
그 혹시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혼자 있길 두려워했나, 곁에 잡아두려고 했던 걸까.
자의식 과잉에 가까운 망상은 머릿속에서 끓어올랐고 흘러넘친 거품은 눈꺼풀을 비집고 눈물로 침수된다. 이렇게 바보 같을수가 있나, 늘 곁에 두면서도 왜 네 생각을 못 했을까. 주제 넘게 네 아픈 과거를 알면서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을까. 어디에도 말 못할 외로움에 고독해하던 너를 혼자 내버려뒀을까. 말도 안 되는 설득에 넘어가주는 척 하며 형편없는 나 따위를 구해주겠다고, 약한 통증에도 고통스러워하는 네가 왜 온 몸을 불사지를 각오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이대로 널 살려주지 않으면 어쩔 생각인데, 쇠약해진 널 정부에 팔아넘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는데. 네게 그렇게 믿음직한 사람이 아닐텐데도 어떻게 날 의심조차 안 해, 이 바보야. 그냥 도망쳐. 느닷없이 눈물을 짜고 흐느끼기 시작하면 그의 시선이 저를 향해 잠시, 멈추었다 다시 주변을 견제했다. 영역을 지키는 초원의 맹수처럼 신중히 공격의 기회를 노리던 때에 한 차례 더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고 무언가 커다랗게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큰 굉음과 불빛에 폭도들 몇몇이 폭발에 휘말려 중앙선 너머로 날아가고, 잔해 섞인 먼지바람에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시야를 가리는 사람들을 밀치고 그가 폭발에 휘말리기 전에 달려들어 온 몸으로 막았다. 아비규환에 행렬을 잃은 폭도들의 총구는 제게로 향했고 그것을 본 벤야민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몇 놈은 재로 터져나가고 개중 몇 놈은 일부만 산화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해 요란한 비명을 질러댔는데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선 결국 총기 발포음이 들렸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몇 번이더라, 한 일곱번 정도. 일곱번, 그래. 좋은 숫자다. 럭키 세븐은 그와 잠깐 보호했던 고양이 이름이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버림받았던 그 착한 아이는 안전하게 구출되어 벤야민의 사무실에서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으며 잘 살다 잘 갔다. 양심 없는 말이지만, 나도 그렇게 너랑 딱 붙어서 잘 살다가 잠든 채 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고비만 몇 개만 넘기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본능적으로 감싸안은 그의 몸이 따뜻했다, 아니면 제 복부가 뜨끈한 것인가. 아무렴 좋았다, 아수라장이 된 전쟁터에서 끝내 네 손을 잡았으니. 제 어깨에 손을 올려 안은 그의 표정이 젖어있다. 이런 표정은 또 처음 보는데, 생각보다 좋진 않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벤야민, 우는 거 아니지.” “입 닥쳐, 말 하지 마.” “하하,… 쌀쌀맞긴.” 어른 말 들을걸 그랬나, 쓸데없는 말을 내뱉다 심장에서부터 피가 울컥 차올라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입 밖으로 고인 핏덩어리를 토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귀에서 시끄럽게 웅웅대는 무전이 잘 들리지 않았다. 가쁜 숨을 간신히 목넘기고 내뱉는데 벤야민이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조급한 표정에 눈물이 맺히고 푹 젖은 목소리는 꼭 천사의 환송예배 기도문 같았다. “같이 살자며, 이 개자식아. 그런데 네가 이러면 뭐 어쩌잔거야. 이그나이츠 치유사란 이름은 폼이야? 빨리 뭐든 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뭐든 하라고.” 비창한 음성이 온 몸의 신경을 짓눌렀다. 제 멱살을 잡고 늘어지다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구조대를 부르려는 손이 벌벌 떨렸다. 간신히 손에 쥔 휴대폰은 핏물에 미끄러져 바닥에 퍽 떨어진다. 그는 놓친 물건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어설프고 급하게 제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심장과 복부 사이에 닿는 손길이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곧 창백하게 질린 그의 손을 큰 손으로 감싸쥐고 고개를 저었다. 상체를 겨우 들어올리면 콜라 캔처럼 짓밟힌 내장이 모조리 찌그러질 것 같았다. 입고 있던 정장 자켓의 단추를 후들대는 손으로 풀러내 벗어 내던진다. 하나, 둘, 셋, 넷... 빈 탄환이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맑은 소리가 총 일곱 번 들린다.
“럭키가 우리를 지켜줬나….”
“이거, 방탄 수트야.”
수트의 웃옷을 털어내면 박혀있던 탄환이 지면에 툭 툭, 튕기고 바닥을 굴렀다. 곧 일곱 발의 탄환을 털어낸 수트를 네 어깨에 빙 둘러 단단히 덮어 감쌌다. 지금의 출혈은 금방 전 차에 치여서 생긴 상처고. 총알은 단 한 발도 제 몸을 꿰뚫지 못했다. 왜일까, 주변에 수호 천사라도 있었나. 그를 안심시키고자 괜찮단 말을 몇 번이나 읆조리고 네 볼에 묻은 핏자국을 덜어내자 긴장감으로 가슴팍과 어깨가 오르내리던 몸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누가 너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었더라, 언젠가의 저도 그랬겠지. 뺨을 훑던 손을 내려 가지런한 네 손을 어루만졌다. 소중한 사람의 근처에 피 한 방울 묻게 하면 안 되는데 이미 혈흔으로 얼룩덜룩한 서로의 손은 엉망이었다. 그는 뜻밖의 안도감에 어쩔 줄 몰라하다 별안간 제 가슴팍에 품에 고개를 푹 묻었다. 멱살 잡고 제 뺨을 내리쳐도 겸허히 받아들이려 했으나 뜻밖의 상황에 말문이 턱 막혀 코 끝이 빨개진 것 같다. 지금 너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내가 싫어졌으면 어쩌지. 나는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네가 훨씬 좋아진 것 같은데. 꽉 맞잡은 손이 제 관절이고 인대를 전부 꺾어버릴 것만 같은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놓치지 않을 것 같아 든든했다. 검은 고양이가 불행의 상징이라는건 저와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이것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 덕분이려나, 내게 검은 고양이는 행운의 상징이었다.
다시금 짙은 연기 사이로 무장 집단과 마침 수배중인 언레드 패거리가 보였다. 이 놈들은 어설프게 무리지어 이능력으로 남의 주머니를 털어 매 끼니 바지런히 처먹는 무뢰한 떼거지들이었고 어떻게 동족을 알아본건지 한 팀으로 손을 잡고 나타났다. 저에겐 사이좋게 잡아 빵에 처넣을 좋은 기회였다. 소방이나 경찰에서 수배하기에 한계가 있고 위험 부담이 커 이그나이츠로 영장이 넘어와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시기에 제 발로 찾아와주니 기특했지만 낄 때 끼고 빠질때 빠지는 것을 모르는걸 보니 전생에 쌓은 덕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러니 전부 수갑 채워서 원없이 콩밥 먹게 해주마. 그보다 다친 벤야민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흠. 이야기의 주인공은 늘 마지막에 도착하는 법이랬나. 주변을 점거한 이들을 가로질러 이그나이츠 지원군이 차례차례 도착해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중엔 반가운 얼굴도 여럿 보였다. 머리 위로 뜬 헬기에선 요란한 포위 명령이 내려졌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흠!] [자기야, 그거 재밌어 보여요. 나도 할래!] […뭐를 같이 해요?]
[자! 이제부터 시카고 치안에 흠집 낸 놈들 전부 잡아서 은색으로 된 커플 팔찌를 채워줄 겁니다!]
멀리 뜬 헬기 위에선 확성기를 내리고 “오! 재프, 먼저 와 있었네!” 하는 테오와 목소리와 크게 손 흔드는 일리야의 모습이 보인다. 그 뒤엔 이 일에 끼어도 되는지 곤란한 표정의 머피가, 위험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바람을 타고 주변을 맴도는 얀. 구호가 필요한 사람은 홀 선생님에게로 가라는 방송까지 들렸다. 인도는 단이 돕고 있었고 캐슬링의 능력이 그늘을 만들었다. 잦은 폭발로 뒤틀린 지면 위에선 애런이 한숨을 폭 내쉬며 빨리 와서 도우란 표정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또 한번 마음이 놓였다. 지독한 삶에선 늘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만이 일어났는데,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이들 덕분이었다. 손을 뻗고, 잡아내고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들. 벤야민은 또 탐탁치 못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래. 이 낯의 의중을 이제 알겠어. 웃음기 띈 얼굴로 고개를 살짝 내려 그에게 가볍게 입맞췄고 그는 밀어내지 않았다. 그리고 말한다. “벤야민, …돌아가면 결혼할까.” 이제부턴 어디든 함께 하자. 네가 내게 준 모든 것들을 나도 네게 건네주고 싶으니까. 네가 나만큼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살아남는 것이 널 위한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게. 너랑 한 번 영원히 살아볼게. 참 낭만도 무드도 없는 말. 프로포즈 반지도 없었고 네 머리에 총구를 겨누던 의식 잃은 개자식의 몸을 짓밟은 채 까지고 피에 젖은 손등 위에 입을 맞추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 그는 웃었다. 그래, 제 바람을 끝내 완성시키는건 언제나 네 미소였다.
“그럼 절대 뒈지지 마.”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사람의 가장 낭만적인 답변. 마찬가지로 웃었다. 안고 있던 네 팔을 바짝 당겨 한번 더 부드럽게 입맞추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가 무어라 잔소리하기 전에 고개를 물리고 그의 몸을 번쩍 들어 바이크 뒷자석에 실었다. 갑자기 키스하더니만 짐처럼 멋대로 들어졌다 내려졌다 하니 당황함과 짜증에 버둥거리던 벤야민은 헬멧이 씌워져 고개 아래로 끈을 고정할때 쯤 얌전해졌다. 저 또한 바이크 시트에 다리를 올리고, 두 손을 깍지끼운채 앞으로 쭉 뻗으면 뼈 마디가 꺾이는 소리가 난다. 온 몸이 상처로 엉망이고 아픈데도 전혀 괴롭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빼 바이크 핸들을 잡고 엔진 시동을 건다, 꽉 잡아. 헛숨을 내쉬던 벤야민은 체력이 다 했는지, 아니면 또 저를 봐줄 생각인지 마음대로 하라며 순순히 제 등에 고개를 기대고 허리를 감싸안았다. 깊은 동굴처럼 두근거리는 울림이 누구의 심장 박동인지 헷갈렸지만 스마트 워치가 심박수 경고 알림을 띄워준 탓에 내 것임을 알았다. 순간과 영원은 결이 달랐지만 어딘가 비슷했다. 세상에 영원한건 없지만 매 순간 네가 있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내가 숨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바다 같은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또 뭘까. 실은 알고 있다. 뻔하지만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 감정이 멈추거나 고갈되는 순간은, 글쎄. 생각해본적 없다. 그럴 일이 없을테니까. 왜냐면 이 순간이 끝날 것 같을땐 이번처럼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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