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너는 웃었고, 그럼에도 너는 웃겠지
서류를 넘기던 사라의 손이 문득 멈췄다.
“손님이 왔군.”
그가 밖을 보며 던진 말에 서류를 정리하던 세이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여기로 오나요?”
어리둥절한 보좌관의 얼굴에 사라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걸쳐두었던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놓는 모양새가 제법 경쾌해 보이기도 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사라가 세이를 돌아보며 작게 스트레칭을 했다.
“아니, 내가 가야지. 그러니 땡땡이란다! 으하하하!”
세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윙크하며 웃음을 터뜨린 사라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문을 넘었다. 허공을 박차고 망설임 없이 향한 곳은 지부의 훈련소 근처의 언덕이었다. 바닷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그 언덕에서는 해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그 푸르른 곳에,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 인영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냐. 우리 애들도 꽤 괜찮지?”
넉살좋게 건네는 사라의 말에 후드를 쓴 인영이 고개를 돌렸다. 후드 아래로 드러나는 붉은 빛을 띄는 자안이 잠시 놀란듯 커지다가, 이내 눈꼬리를 휘었다.
“오랜만입니다, 사라 소장님.”
이아네는 헤어졌을 때와 다름없이 제게 웃어보이는 사라를 향해 목례했다.
“열심히 먹이고, 열심히 굴린 애들이지. 어딜 가서도 제 밥값은 한단다.”
이아네는 훈련소를 내려다보는 사라를 따라 다시 고개를 내렸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보고 있던 훈련소였다. 훈련을 하는 해군들 사이에서 활기가 감도는게 보였다. 다른 지부의 훈련에 감히 말을 보탤 수 는 없는 법 이었지만, 모두가 해군으로서 빛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들만의 신념과 긍지가 엿보였다. 그것이 어쩐지 그리운 감정들을,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 이아네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소장님께서 자랑스러워 하실만하군요. 모두 훌륭한 해병들로 보입니다.”
“으하하하! 그럼 그럼!”
이아네의 말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사라의 얼굴에 뿌듯함이 어렸다. 고개를 끄덕이던 사라가 이아네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이렇게 있을게 아니라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 여기엔 무슨 일로 온게냐?”
이아네는 흔들리는 몸을 곧추세우며 조금쯤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저도 이렇게 일찍 이곳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고, 오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사라가 곧바로 나타날 줄도 몰랐던 탓이었다. 사실 막상 오기는 했지만, 사라를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섬에 우뚝 자리한 해군 지부와 지부에 써져있는 정의라는 글자는 이아네에게 많은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기억은 참으로 묘하게도, 추억이 되는 순간 많은 것들을 미화하고, 꾸며버리며, 감정까지 되살려 버린다.
무너지지 않을것 처럼 견고한 정의를 보는건, 괴롭지만 그립고, 슬프면서도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아네는 아주 오랜 시간을 정의라는 이름 안에서 살았고, 정의를 따르며 살아왔다. 기실, 이아네가 괴롭고도 슬픈 기분을 느끼는건, 더이상 그 안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자신이 정의와 질서를 위해 행동한다 한들, 그것이 정의로 취급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그것은 집착도, 미련도 아니었고, 그저 제 삶의 이유가 덧없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가까웠을 테지만, 그는 그런 스스로를 알면서도 제가 선택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왔다. 이제 정의를 등에 질 순 없지만, 그렇다고 이 길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펜을 든 순간 떠오르는 말은 많았다. 쓰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러나 막상 종이 앞에 앉아 펜을 들면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그동안 무수히 써왔던 서류들과 요청들과는 다른 글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먼저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서류에 밝힐 이름도 직급도 떳떳하지 못한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떠돌았고, 그래서 웨스트 블루로 오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사라가 머무른다는 지부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던 길 이었는데, 때마침 이곳으로 오는 배를 타게 되서요.”
“그렇구만. 그렇다면 역시 뭐라도 먹어야겠지! 그간 밀렸던 얘기나 좀 하자꾸나. 전에는 진득하게 얘기할 기회가 없었잖니. 따라오렴.”
이아네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유유자적하게 자리를 뜨는 사라를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이아네가 보는 사라는 단단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언덕에서 사라의 집까지 이동하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주민들이 그를 향해 미소를 띄며 인사했고, 사라 또한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받았다. 사라의 정의 아래에서 그들의 웃음이 지켜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 하는 모습에서 예전의 모습이 겹쳐보여 이아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코트는 어디에 두고 오신겁니까?”
이아네의 물음에 양팔 가득 식재료를 안고 있던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 이아네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서 자연스럽게 짐을 가져와 나눠 들었다.
“집무실에 두고 왔지. 땡땡이치고 나오는 길이었거든.”
개구지게 웃는 사라의 모습에 이아네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해군 앞에서 이렇게 편하게 있어본지가 까마득하게 오래 된것 같았는데, 사라의 곁에 있으면 몸을 옥죄던 것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하하, 부관들이 고생 꽤나 하겠군요. 땡땡이 자주 치신다고 그러시긴 했지만 말이죠, 오늘은 제가 운이 좋았네요.”
“음? 친구가 왔는데 당연하지. 네가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기는 힘들테니 말이다.”
이아네는 그말에 작게 멈칫했다가, 다시 식재료가 든 봉투를 고쳐쥐었다. 어쩐지 조금 선뜩해진것 같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짓던 이아네는 새삼 눈앞의 사람이 옛적에 중장으로 진급 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라는 여전히 즐거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이아네를 제 집으로 안내했다. 사라의 집은 마당이 아주 넓었고, 집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마당을 지나쳐 현관 앞에 다다르기까지 허브들의 향기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이아네는 손님방으로 안내를 받았고, 사라는 자연스레 주방으로 들어갔다. 손님방은 꽤나 넓고 안락했으며, 목화향이 은은하게 났다. 이아네는 제 키의 두배쯤 되어 보이는 침대를 잠시 쓸어보다가 사라가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사라가 어느새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재료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제가 도울거라도 있나요?”
“고맙지만 사양하마! 손님에게 일을 시킬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주방에서 요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거든.”
사라가 작게 키득거리며 윙크했다. 이아네가 어쩔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자, 사라는 다시 손질을 시작했다.
“심심하지 않게 얘기나 좀 해주렴. 그간 어떻게 지냈니?”
이아네는 조금쯤 곤란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라는 작게 추임새를 넣어가며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었고, 이아네와 사라의 이야기는 식사가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화려하게 채워졌던 식탁이 비워지고, 작게 자른 치즈와 햄, 과일 등으로 다시 채워졌다. 이아네는 제 취향의 과일을 입안으로 쏙 집어넣으며 사라가 술을 꺼내 들고 오는 것을 바라봤다.
“그래서, 속은 좀 풀렸니?”
“..예?”
“답답해 보이는 얼굴이었어서 말이다. 고민도 있어 보였고.”
사라가 크리스털 잔에 얼음을 넣고, 호박색 액체를 따라 이아네에게 건넸다. 그가 맞은편에 털썩 앉는 모습을 시선으로 느릿하게 좇던 이아네가 손안의 묵직한 잔을 조용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너는 말이지, 대화하다가 중간에 흐리게 웃어버린단 말이다. 말을 아끼는건 좋은 습관이지만..”
사라가 작게 투덜거리며 술을 머금었다. 이아네는 사라의 말을 곱씹으며 잔을 천천히 매만졌다. 크리스털 잔에 새겨진 무늬가 손끝에 부딪히며 토독거렸다.
“사람들 틈에 부대껴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표정을 보면 대충 그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더구나. 아, 얼굴에서 드러난다는 소리는 아니야. 난 그런건 잘 몰라. 다만 표정을 어떤 상황과 대화에서 짓는지를 보면, 그냥 감이 오더구나.”
이아네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위스키로 입을 적셨다. 알코올 특유의 맛과 향이 물밀듯 들어왔다. 이아네는 사라가 말하는게 무엇인지 알것 같다가도, 이내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짐을 느꼈다. 새삼 습관처럼 당겨지는 얼굴 근육이 느껴졌다.
“사람들과 그냥 대화를 하다가, 아니면 얼굴을 보고는 문득 의문이 떠오를 때가 있어. 너를 보고 떠오른 질문은 이거란다.”
왜 웃는거니?
이아네는 사라의 질문에 목에 무언가 턱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무엇을 묻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아네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사라를 응시했다. 사라는 눈을 내리 깔고, 손안의 잔을 만지작 거렸다.
“감정을 삼키고 웃음이라는 방패를 꺼내든건, 무엇을 지키기 위함이며 무엇으로 부터 지키기 위함인지... 나는 모르지만, 온전히 모르지는 않지. 너는 정의를 논할때마다 눈을 빛내니까 말이다.”
사라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이아네를 마주봤다. 이아네는 사라의 눈이 온화하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보며 눈을 빛내는 것 같기도, 노인이 과거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는 때, 가면을 벗고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니. 아무도 없거나, 아니면 알아보는 이 없는... 온전히 혼자만의 장소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그 찰나. 그 찰나에 드러난단다. 드러난 눈동자가 처음 향하는 곳, 떠올리는 것.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장소. 미련과 후회들..”
사라가 빙그레 웃었다.
“누구를, 무엇을 떠올렸니?”
이아네는 정의 아래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과, 동료들, 부하들, 생도들을 떠올리면서 저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립고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갔고, 남아있다. 원망도 고마움도 그리움에 함몰되어 목 언저리에 툭 틀어박혔고, 이아네는 그것을 뱉어낼 수 있는 말을 선뜻 고르지 못했다. 그래서 늘 그랬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사라도 마주 웃었다. 이아네는 사라가 제 자조적인 웃음마저 이해했음을 알았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을 하는 이유가 옳음에 있는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있는지에 따라 그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게야. 너는 네가 느낀 수많은 부당함들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문것과 다름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건 나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니.”
“하지만 소장님은..!”
이아네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사라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또한 입을 다문거야. 난 감히 체제를 바꿀 생각도 못했어. 그래서 감히 혁명을 논하는 이들을 범죄자라 부르지 못하는 거란다. 그것 또한 필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거든. 세상엔 옳기만 한 길은 없으니까, 수많은 길들이 합쳐지고 겹쳐져야 겨우 한걸음 더 내딛는 거라는걸...”
"그래도 사라 소장님은.. 다르십니다. 제가 했던 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귀하께서는 이곳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행동하고 계시니까요."
"...섬에서의 대화를 기억하니? 나는 네가 말했던 정의로운 선을 지킨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단다. 자유가 버겁다는 말도 마찬가지야. 내가 너에게 하고싶은 걸 하라고 한것은, 네가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나는 네가, 네가 원하는 대로 글을 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린 후에 홀가분하게 떠날것 같았단다. 낙화하는 동백처럼, 그렇게 미련없이 가버릴것 같아. 마지막 순간까지도 웃으면서... 하하, 그래서 글을 쓰고, 보여달라고 한거였어. 그럼 너를 다시 만날테고, 너를 잡을 수도 있겠다는 늙은이의 미련이었지."
이아네는 사라의 말에 어쩐지 그가 떠올렸을 모습이 그대로 이아네의 머릿속에도 그려져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글을 쓴 이후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적이 없었던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떠올리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라의 말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저는... 언젠가 해군에 체포되겠죠. 범법자의 말로란 그런거니까요."
이아네는 술잔의 남은 술을 털어 마셨다. 슬슬 올라오는 취기에 사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이아네를 바라봤다.
"으하하하! 원하는건 원한다고 말하렴! 그게 네 미련을 조금이나마 달랠수 있는 길이라면 나쁘지 않겠지. 다만, 놓친것에 대한 미련이 네가 원하는 것을 삼키게 두지 마렴. 지켜야 할게, 지키고 싶은게 많았을 테지. 그렇지만, 네가 한 모든 것들이 그저 쓰레기통에 처박히기만 한건 아니야. 너의 목소리는 분명 누군가에겐 닿았을 거란다. 그게 상부일지, 부하들일지, 전우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가슴에는 남았을 게야. 네가 본것을, 너만 보았을까. 너와 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너뿐이었을까. 그런 이들에게 분명 닿았단다."
이아네가 사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봤다. 사라는 굳이 가르자면 이아네와 비슷한 과였다. 자신의 신념이 있고, 그것에 어긋난다면 목소리를 높이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라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을 것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지금 사라는 해군이고, 자신은 그저 범죄자라는 사실도 뼈저리게 알았다.
이아네는 지금 이순간 자신이 여전히 해군이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봤다. 저는 신세계의 소장이고, 사라는 여전히 웨스트 블루의 소장일 터였다. 어쩌면 같은 직급이니 만큼 여러번 만났을 수도 있었다. 사라는 여전히 이아네에게 음식을 만들어 줬을테고, 둘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아네는 사라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었을 테고 어쩌면 사라의 도움으로 이아네의 입지를 단단하게 다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아네는 술과 함께 이어지는 생각들을 넘겼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달콤하지만, 그래서 더 씁쓸하기만 했다.
"이아네, 소장.. 이제는 해군이 아니지만, 네가 해군이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아. 해군으로서, 노고가 많았어."
이아네는 저를 부르는 말에 잠시 몸을 굳혔다가, 멍하니 사라를 바라봤다.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는데도, 그것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아오른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그 버석거리는 느낌에 깊게 묻어놨던 과거의 편린이 막을 새도 없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건…! 민간인에게 갈 피해가 너무 큰 작전 입니다!'
'...그만해라. 상부의 명이야.'
저를 흘끗 보며 내뱉는 미약한 짜증이 담긴 말에 목이 턱 막혔고, 고개가 자연스레 떨어졌었다. 그순간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는지, 아니면 힘이 풀렸는지 이아네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수없이 모의 작전을 떠올려보고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을 했었다.
"왜 그런 죄스런 표정을 하니.. 침묵으로 이루어진 평화는 겉보기에만 그럴듯 하지. 너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부에 요청하고 보고하고 안건을 올렸던거잖니. 규율과 규칙 안에서 해결해 보려 안간힘을 썼던거 아니냐... 책망하는게 아니란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어."
이아네는 고개를 숙였다. 위험했다. 사라는 너무 쉽게 자신을 무방비하게 만들었고, 불쑥 제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채워지는 잔에 사라의 얼굴이 흐리게 비춰졌다. 일렁이는 호박색 액체처럼 이아네는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아하하, 귀하의 앞에선 어쩐지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도 소장님은 제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포기했는지 모르세요. 나는.."
"그래, 모른다. 그런데 너는 그걸 계속 기억하고 있잖니. 네가, 네가 저지른 잘못들을 외면하지 않고 있잖아. 나 또한.. 많은 잘못을 했어. 내가 했던 실수들이 수도 없이 많지. 나는 그걸 품고 가야하기 때문에.. 더욱 더 단단해져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지키는 정의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너에게 미안하면서, 네가 대견한거야."
이아네는 사라의 말을 술과 함께 삼켰다. 이아네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뜻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사라 또한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아네를 바라보며 그를 이해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정의를 품고, 그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이었다. 이아네가 당한 일들이 사라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사라가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사라는 결국 이아네 역시 제가 돕지 못했다고 여겼고, 그게 못내 씁쓸했다.
이아네는 쏟아져 내리는듯한 다정함이 버거워서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저릿거렸다. 괜스레 잔을 쥐지 않은 손을 쥐었다 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아네가 사라에게 과거를 얘기한적은 별로 없었는데도 그는 어쩐지 이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사라는 차분하게 일련의 모습들을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지켜봤다. 지금의 세상은 참 가혹했다.
"사실은 말이다, 내 밑에는 예전에 나쁜짓을 했던 놈들이 좀 있단다. 수배자도 있지."
이아네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다가 정리되었다.
"하하.. 하지만 그들은 저와 다르죠. 그들은 정체를 숨기고 입대한거지만 저는... 탈영병이자 배신자인걸요."
"뭐 어떠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거다. 나는, 우리는 평화를 위해,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게 기묘하게 뒤틀려버렸지."
이아네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사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술을 머금었다. 이아네는 그들이 입대했을 이유를 떠올려보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들은 진급에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이아네는 저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부러 내뱉지 않았다. 사라가 잔을 내려놓고 가라앉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쉽게 예를 들어볼까. 한 왕국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왕국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우리는 왕국의 지배 계층을 지키기 위해 따로 병력을 편성하고, 그들을 호위한단다. 그건 그들이 중요한 이들이어서 그런게 맞아. 그렇지만 그건 그들만을 위한게 아니야. 지배 계층이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지. 가장 큰 피해는 결국 약자들의 몫이니까... 그런데 그게 지속될수록, 지배자들은 우리가 그들을 호위하는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거야. 우리를 부릴수 있는 자들로 여기지. 그건 우리들에게도, 그들에게도 아주 은밀하게 파고들게 된단다. 그들이 폭정을 휘둘러도, 우리는 그것을 저지할 명분도 없어지는 거지. 그러니 그 왕국의 사람들이 직접 제도를 개편하거나, 지배자를 바꾸거나 하지 않으면, 그 왕국은 그대로 고여버리는 거야. 이제 이걸, 세계로 바꿔보렴."
이아네의 눈이 커졌다. 사라가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아네도 사라도 이것이 위험한 말임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사라가 한 말을 보고한다면, 징계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라는 눈을 감은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해군으로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지금 이 세계는.. 해군이라는 한 집단이 바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위험하신 분이셨군요. 질서가, 정의가 감당할 수 없다면 무엇이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요.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은 평화도, 그 무엇도 되지 못합니다."
"흐흐... 나는 칼이 아니라 방패란다. 정의라는 이름의 칼날은 필요해. 그걸 부정하지 않아. 그러나, 칼만 있다면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리지 않겠니. 정의도 질서도 혼란도... 보이지 않는 것들은 대게 제멋대로지. 누군가에겐 정의가 혼란이고, 누군가에겐 질서가 정의인 것 처럼... 그렇지만 분명 정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질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혼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하하.. 저는 언제나 제가 정의이자 질서이기를 바랐는데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하고 견고한 질서를 만들기를 바랐어요."
사라가 몸을 일으켰다. 이아네는 저를 똑바로 마주하는 눈빛에서 작은 즐거움을 읽었다. 비어버린 크리스털 잔을 두드리는 손짓에서도 기대감 같은게 묻어났다.
"그렇다면 질서와 정의를 위해 움직이면 되는것 아니겠니.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 당장 만들어 내는게 충격과 혼란일지라도, 그것이 곧게 추구하는게 정의라면, 그를 위해 행동하는게 되겠지."
사라는 이아네의 눈에서 망설임을 읽었지만, 그저 웃으며 제 잔과 이아네의 잔을 채웠다. 사라의 말은 단순했지만, 무거웠다. 말이, 그 말을 내뱉는 사람을 대변하듯 사라라는 사람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사라가 씨익 미소지었다.
"너는 혼란을 만들렴. 나는 그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거란다. 그리고 네가 만든 혼란이, 다른 혼란들과 합쳐져서 이 세계를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겠지... 나는 늘 그걸 바라고 있어. 그리고 그날을 위해 준비해오고 있단다."
탁-
잔을 테이블 위에 놓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아네는 그것을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날뛰어보렴. 최대한 받아줘 보마."
이아네는 왜 사라의 웃음과 말이 저를 휘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장이 꽉 죄여졌다가 풀리고, 아래로 처박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마음이 울렁거리니? 그 또한 좋을테지. 선택은 너의 몫 이란다. 나는 늘 준비되어 있어."
사라가 말을 끝마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먼저 돌아간다고 말하는 사라를 그저 바라보던 이아네가 어쩔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휘저어놓더니 떠나는건 또 담백했다. 그런데 그게 또 편안하게 느껴져서 이아네는 오랜만에 취기를 즐기며 잔을 기울였다.
[왜 웃니? 너는 왜 웃는거니? 감정을 삼키고, 웃음이라는 방패를 꺼내든건, 무엇을 지키기 위함이며, 무엇으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니. 너는 제 신념을 굽히려 들지 않고, 끝까지 빛을 보며 걸어가는데, 그런 네가 웃음으로 흘려버려야 할 악의는 무엇이었니. 너또한 생기 넘치고 싱그러웠을 터인데, 무엇이 너를 가로 막았니. 너는 왜 웃음으로 상실을, 절망을 삼키니. 네 신념을 위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버린 너의 다른 파편은 무엇이니. 너의 무엇이 마모되어 갔니. 왜.. 왜 터진거니. 체념으로 넘기지 못한 하나의 선.. 그것이 무엇이었니. 어쩔수 없는것들이 많아져서, 그게 숨통을 조였구나. 아무렇지 않은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덕망이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주변이 너를 끌어내렸구나. 손발을 하나씩 없애고, 네가 무언가를 얻으면 다른 무언가를 잃게 만들어 절망을 맛보게 하고... 너를 벼랑으로 몰았어. 너도 그걸 알았구나. 알았는데도 받아들였어. 차마 넘을 수 없는 너의 마지막 선. 그것이 지금의 너를 야기 했구나. 끊임없이 후회하게 될 실수이자 실수가 아닌것. 너의 마지막을 온전히 해군으로서 맞이하게 하지 못한 너의 선택. 네가 원하는 대로 글을 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린 후에 홀가분하게 떠날거니? 낙화하는 동백처럼, 그렇게 미련없이 몸을 던질거니? 너는 마지막 순간에도 웃겠구나. 네 내면에 있는 너는 누구니. 그와 대화해 본적 있니. 반짝이고 빛나던 시절의 너구나. 평화를 품은 눈이 반짝거리며 위를 올려다 보고 있어. 그에게 숨구멍을 틔워 주렴. 숨을 쉬어도 괜찮아. 인생의 대부분을 바친 곳이 더이상 너를 품어 주지 않는데, 어떻게 담담할 수 있겠니. 습관처럼 해군들을 눈으로 좇는구나. 자세, 생각, 강함의 정도, 실력, 약점, 개선의 가능성....군 개혁의 가능성 까지. 여전히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여전히 바라고 동경하는 구나. 그래도 바뀌었네. 저번의 조난 이후로 너를 덜 옭아매게 되었구나. 아직 작지만 새로운 빛을 품었어. 다정한 사람아, 망설임에게서 조금 벗어났구나. 그 새로운 빛을 따라 간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거야. 아기새가 껍질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듯, 너 또한 이전까지와는 다른 시야로 세상을 맞이하게 되겠지. 정의를 위해 불의를 넘기지 못하다보면 계속해서 해군들과 마주하게 될거야. 그래도 이젠 그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겠구나. 다정한 얼굴로, 가차없이 현실을 꼬집으면서... 수많은 인연들을 가슴에 품고 있는 다정한 너라면, 그들이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할거라는걸 알겠지. 부담을 느끼고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짊어지려 하지 말거라. 그들은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라, 너의 곁에 있는 친구이며, 동료다. 너는 다정한 카리스마로 그들을 포용하고 이끌었고 보살폈구나. 그래서 그들이 너를 믿고 그들의 마음을 네 곁으로 보낸 거겠지. 쉽게 내려놓을 수 없겠지. 미안함도, 안타까움도 클테고. 그들이 믿은 너를 믿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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