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네가죽어 / 케이사라

키워드: 첫 데이트, 조심스러워하는 케이지와 헷갈리는 사라

글자수 : 6,200자

[ 곧 도착해요. ]

사라가 문자 메세지를 보내기 위해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액정 위로 먼지 같은 것이 톡 떨어졌다. 불어내려고 하자 마치 거기 없던 것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눈?’

사라는 그제야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라고 칭하기 민망할 정도로 자그마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입춘인데도 눈이 내리는구나. 사라는 잠시 입을 벌린채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문자 메세지를 전송했다. 다시금 사라는 목도리에 입과 코를 파묻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사건’으로부터 벌써 계절이 몇 번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때 벌어진 일들은 아직도 사라를 쉬이 잠들지 못하게 했고, 죽은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보면 무심코 걸음을 멈추곤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빠짐없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 숨을 쉬고 내쉬는 순간순간이 아팠다. 그러니 ‘네 잘못이 아니라’는 상투적인 기만 따위가 그녀가 짊어진 죄책감을 덜어주진 못했다. 그러나 미시마의 말대로 시간만큼은 만인에게 공평했으므로 결국 그녀에게도 도피처 한켠을 내어주었다. 아파했던 나날이 우습게도 이제는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게 떠오르기도 했고, 날이 좋으면 산책로를 거닐었고, 하고 싶은 일도 생겼다.

그 땐 그저 뭐라도 좋으니 몰두할 거리가 필요했다. 잠시라도 여유시간이 생겨나면 끔찍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니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은 사라에게 제법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사라는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했다. 덕분에 반년간의 공백이 우습다는 듯 사라는 어렵지 않게 교과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3학년으로 진급하고 본격적인 입시 철이 되자 사라가 제일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지망 대학교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희망 진로. 지망 대학교.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사라는 한 박자 늦게 드물게도 제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고 있는 걸 느꼈다. 덕분에 사라는 큰 고민도 없이 종이 위에 네모반듯하게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경찰 대학교. 그리고 동시에 그 순간 사라가 정말 오랜만에 떠올린 것은,

‘…케이지 씨.’

시노기 케이지였다.


 

문 앞에 선 사라가 긴장된 표정으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케이지를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이 카페의 문은 열 때마다 묘하게 긴장이 됐다. 특히 오늘은 더 그랬다. 길었던 입시를 끝내고 나서는 근 3개월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니. 마지막으로 목을 한 번 가다듬은 사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카페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라가 마주친 것은, 카운터에서 턱을 괸 채로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케이지의 모습이었다.

“케, 케이지 씨?”

“67초.”

“…네?”

“문 앞에서 67초 머뭇거렸어. 우리 사라.”

케이지가 예의 그 능글거리는 미소를 짓자, 사라의 눈썹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전부 다 지켜보고 계셨어요?”

“곧 도착한다고 하길래…. 아저씨 창밖만 바라보면서 우리 사라가 언제 오려나― 쭉 지켜보고 있었거든.”

맙소사. 사라는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앞에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한숨을 쉬었다가, 목을 가다듬으며 머뭇거리던 모든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아까까지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뺨에 열기가 홧홧하게 올라왔다. 사라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할 일이 없으신가 보네요.”

“응. 한 시간째 말야, 손님 하나 없이 텅텅 비었거든.”

그 말에 사라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확인했다. …정말 아무도 없어. 파란색의 둥근 테이블이 고작 세 개뿐인 자그마하고 아늑한 10평 카페. 케이지가 1년째 운영하고 있는 ‘카페 블루’였다. 사라의 시선이 잠시 뒤편으로 머물다 다시 자신을 향해 돌아오자, 케이지가 바에 앉을 것을 손짓으로 권하며 짧게 물었다.

“핫초코?”

“네.”

우리 사라는 한결같이 단 걸 좋아한단 말이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은 케이지가 말없이 초코시럽과 초코파우더를 꺼내들었다. 달콤한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라에게 주는 핫초코엔 꾸덕한 초콜릿 시럽과 초콜릿 파우더를 평소보다 조금 더 컵에 부어 넣고 뜨거운 물을 넣어 휘젓는다. 물론 이것은 사라에게는 엄금사항이지만.

사라는 발을 앞뒤로 흔들며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처음엔 저 모습이 어찌나 낯설고 어디가 그렇게 이상해서 웃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요식업이라면, 비슷한 분야라고 해도 살짝 비틀어 술을 따르는 모습이 그에게 훨씬 더 어울릴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까만 앞치마를 두른 채 샷을 내리고, 음료를 제조하는 케이지의 모습은 억지로 총을 들어야 했던 이전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어 사라도 점차 그 모습에 익숙해져갔다.

“…자. 엄청 뜨거울 테니 식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앗. 마시멜로우.”

“안 좋아하니?”

“아, 아뇨. 좋아합니다. 무척….”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사라가 살며시 두 손으로 머그컵의 표면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열기가 무감각했던 손가락 마디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핫초코 위에 동동 떠 있는 하얀 마시멜로에 시선을 빼앗긴 사라를 지켜보던 케이지가 이내 바에 숨겨두었던 서적을 꺼내 들었다. 그가 경찰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사용했던 전공 서적이었다. 조금은 빛이 바랜 서적의 책등에는 교과목이 적혀 있었다. 수사 일반, 사건사고 현장지휘, 언론 대응….

“그리고 이건… 부탁했던 것들이야. 아저씨 글씨 알아보기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

“아,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많이….”

“아저씨가 이 책 쓴지도 10년이 가까운데 말이야…. 새로운 개정판이 없다니 정말 놀랐는걸.”

“덕분에 케이지 씨에게 아직 전수받을 지식이 이렇게나 많으니, 저로썬 행운이죠.”

사라는 어느새 핫초코를 옆으로 밀어둔 채, 케이지가 넘겨준 책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케이지가 직접 메모한 것들을 속으로 따라 읽으며 어느새 집중한 사라의 모습에 케이지 역시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졌다. 그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오고 반년 뒤… 였던가. 사라가 경찰대학교에 가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기 위해 연락했을 때 얼마나 의외였는지. 어떤 식으로든 간에 한 번쯤 연락이 닿을 걸 기대했으나 이런 식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렇다 해도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사라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정면승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게 ‘경찰’을 진로로 정한 것은 썩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직도 코앞에 닥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그와 비교하면 사라는 그야말로 가능성으로 반짝이고 있는 원석이었다.

“재판 결과 전해 들었어요, 케이지 씨. 복직 명령 받으셨다면서요.”

“뭐어…. 글쎄. 아직 고민 중이야.”

드디어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신 사라가 컵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달콤한 맛 끝에 아주 약간 씁쓸한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사라는 눈을 내리깐 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 생각을 강요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저는… 케이지 씨가 정말로 후회 없을 만한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

“이런 저희라도… 살아있는 동안 조금은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요.”

사라는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예상이 갔다. 케이지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라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쓱쓱 쓰다듬었다.

“우리 사라가 이렇게 축 처져 버리면 아저씨가 잘못한 것 같단 말이지.”

“축 처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우리 사라는 웃는 편이 훨씬 귀여우니까.”

그의 손이 사라의 머리를 몇 번 더 부드럽게 훑고 떨어져 나갔으나 사라는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로 진로 상담을 핑계로 몇 번이고 만나곤 했지만… 이제껏 어떤 방식으로든 케이지가 사라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아, 난 역시 케이지 씨가….’

케이지 역시 손을 떼고 나서야 제 실수를 눈치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머그컵만 바라보고 있는 사라의 귀끝이 벌겠다. 그걸 보는 케이지도 괜히 가슴께가 소란스러웠다. 잠시만 방심해도 제멋대로 건드려버린다니까……. 케이지는 괜스레 뒷목을 긁다가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사라. 잠깐 그거 마시고 있을래? 아저씨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케이지 씨.”

“…응?”

문득 사라가 고개를 번쩍 든 채 케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 뺨이 발그레하게 물든 채로. 사라는 어쩐지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제가 경찰대에 합격하면 소원 들어주시기로 한 거.”

“아… 그런 약속을 했었던가아….”

드물게 당황한 케이지가 사라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지만, 사라는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소원, 들어주세요. 지금 당장.”

“…으음. 사라의 소원이 뭔지 한번 들어볼까?”

잠시 입을 우물거리며 머뭇거리던 사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해요. 데이트.”

“데…….”

케이지가 말문이 막혀 입을 살짝 벌린 채 멍청하게 사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활활 불타오르면서도 사라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맙소사. 케이지가 급하게 표정을 가리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노기 케이지가 한 가지 잊어버리고만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치도인 사라는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카페를 나섰을 땐 진눈깨비처럼 나부끼던 것은 어느덧 함박눈이 되어 있었다. 당장 데이트하자는 말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선 가게 문부터 닫고 무작정 나오긴 했지만…. 사라의 머리 위로 빠르게 쌓여가는 눈송이들을 보니 잘못된 선택이었나 싶은 게 사실이었다. 눈을 털어줄지 말지 고민하며 케이지의 손이 잠시 사라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끝내 제 자리로 돌아갔다.

‘데이트라고 하니까 어쩐지 이상하게 의식되잖아….’

케이지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한번 크게 쓸어내렸다. 사실 케이지는 일반적으로 여성과의 데이트에서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곧잘 하는 편이었다. 그 습관 때문에 그가 이제껏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또 헤어졌었는지 사라는 모를 것이다. 사실 상대가 사라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그는 상대방의 어깨를 팔로 끌어안고 자연스럽게 제 품으로 끌어당겼을지 모를 일이었다. 케이지는 잡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가볍게 털곤 넌지시 물었다.

“우리 사라… 춥지 않니?”

그 물음에 사라가 고개를 들어 케이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라의 얼굴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추워요.”

짧은 한마디 속에 사라는 자신의 기분을 꽉꽉 눌러 담았다. 사라는 마치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 케이지를 불만스레 쳐다봤다.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어른답게. 속으로 뇌까리며 말을 고르고 고르던 사라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케이지 씨는 데이트할 때 보통… 이렇군요.”

말에 뼈가 실려 있었다. 때 늦은 자책이 케이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귀여웠어도 상대는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어린애일 뿐인데. 대체 왜 그렇게 스스럼없이 귀여워하고, 만져대고, 추근덕댔었는지. 살아나오지 못할 것이라 장담했으니, 스스로도 리미트가 없었던 게 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파렴치한 인간에게 경찰 자격은….

“…….”

자책은 자책이고, 데이트는 데이트였다. 한번 너에게 맡겼던 목숨이니 네가 원한다면 그 정도는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작게 한숨을 내쉰 케이지가 결국 사라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것만으로도 사라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이 눈에 훤했다. 죄책감,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케이지의 손을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손이 가볍게 주먹을 쥐고 있는 사라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앗 하는 사이 케이지는 사라의 손을 감싸 쥔 채로 제 코트의 주머니로 쑥 집어넣었다.

“이러면 조금… 덜 추우려나.”

“…….”

“아니면 역시 지금이라도 차를 타고 가는 게….”

“아뇨. 이대로 걸어가죠.”

당돌한 대답과 동시에 사라의 손이 케이지의 커다란 손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잠시 기다리자 가느다란 사라의 손가락이 케이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추위로 꽁꽁 언 손가락이 맞닿은 부분에선 냉기가 아니라, 모순적이게도 아주 희미하게… 온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손깍지…. 케이지가 움찔하자, 사라가 케이지의 손을 움켜쥐었다.

“도망치지 마세요. 케이지 씨.”

“…….”

“체포…입니다.”

사라는 어느덧 평소의 장난기 많은 얼굴로 케이지를 의기양양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케이지가 작게 폭소를 터뜨렸다.

“큭…. 크크크….”

“어째서 웃으시는 거예요.”

“벌써 실무 연습에 돌입하다니. 우리 사라는 분명히 훌륭한 경찰이 될 거야.”

“누가 봐도 장난이잖아요!”

사라가 빈손으로 케이지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소리내어 웃고, 떠들며, 투닥거리면서도 맞잡은 두 손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커미션 사이트 https://kre.pe/3Pqp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