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 자캐커플
키워드 : 고록 스타일
글자수 : 6,000자
별이 더 이상 특별한 소녀가 아니게 되어도 세상은 달라지는 것 하나 없었다. 여전히 홀은 사람들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도심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특별한 학생’들이 홀을 처리하기 위해 발 빠르게 도착하는 모습이 연이어 포착됐다. 한때 별은 그 풍경에 완벽하게 섞여 있었고, 또 한때는 그들을 볼 때마다 눈썹을 시무룩하게 기울이며 마음속의 공허를 달래야 했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를 졸업한 지 일 년이 넘은 지금도 그 공허를 완벽하게 제어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별은 평소와 달리 오늘은 시무룩한 상태가 아니라 심통 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이야?’
오늘은 별에게 있어서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러니까 작년 이맘쯤에 재오는 대학에 입학했다. 재오가 당연히 자기와 함께 놀러 다녀줄 거라고 생각했던 별은 처음에는 경악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재오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고, 그런 그가 대학 생활에 흥미를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재오에게 별은 그냥 수많은 친구 중 하나일 텐데 대학에 가지 말라고 말할 권리가 어디 있겠는가. 당시에는 여자친구도 아니었는걸. 물론, 별은 재오에게 대학에 가지 말라고 투덜거려보기는 했다. 진심을 아주 쪼오끔 담은 장난이었고, 재오는 그런 별의 투정이 귀엽다는 듯 최선을 다해서 달래주었다. 별은 한참 동안 재오의 반응을 즐기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대학 들어가도 나랑 놀아주기다? 나 가고 싶은 곳 엄청 많단 말이야.”
“그 엄청 많은 곳 다 나랑 가고 싶은 거야?”
“너 지금 나 친구 없다고 놀려?”
간신히 달래놓은 별이 또 토라지려고 하자, 재오는 별을 거의 안을 듯 가까이 서서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아니. 나는 좋아서 그러지. 별이 네가 나랑 그만큼 놀아준다는 거니까.”
그 말에 별은 꽁했던 마음이 다 풀려서 그냥 헤 웃어버렸다. 그러면 재오도 뭐가 좋은지 웃고, 둘은 바보처럼 실실대다가 어느 순간 별이 그만 웃으라고 성을 내는 걸 시작으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대화를 나눴던 게 벌써 일 년 전이었다. 두 사람은 봄이 오기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됐다. 별은 날이 풀리면 여러 명소를 놀러 다니며 맛있는 걸 먹을 생각에 머릿속까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당연하지만 그 계획에는 재오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있었다. 그런데,
“별아, 나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약속 잡으려는데 괜찮아?”
이놈의 남자친구가 사흘이나 못 본다는 엄청난 폭탄 발언을 던진 것이다. 하루종일 재오 옆에 찰싹 붙어있는 걸 즐거움으로 생각하던 별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대학 친구들이 개강하니까 만나자고.”
“너 자퇴한 거 애들이 몰라?”
그 말에 재오는 턱을 괴며 아주 짧은 생각에 잠겼다. 이어지는 답은 어딘가 건성이고 애매했다.
“아는 애도 있고 모르는 애도 있고.”
아마 그렇겠지. 어쩌다가 화제가 나오면 대수롭지 않게 말해줬을 거고, 그렇지 않은 애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거다. 고등학교 시절 재오에게 여러 번 ‘잊힌’ 경험이 있다 보니 별은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날짜가 너무 붙어있지? 별이 네가 싫다고 하면 취소할 거니까.”
재오는 다정하게 말하며 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아마 여기서 별이 절대 싫고 무조건 자기 옆에 있으라고 하면 재오는 고개를 끄덕일 게 분명했다. 한때 별이 하는 말을 까먹고 서운하게 만들었던 남자는 어느새 최고의 남자친구가 되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그러니 별수 없지. 별도 한 번쯤은 너그러운 여자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됐어. 그 대신 주말은 전부 내꺼야.”
“그건 당연하지. 먹고 싶은 거 말해줘. 내가 잘하는 곳 찾아둘 테니까.”
재오는 별의 뺨을 간질이며 달랬고, 별은 새침하게 흥, 하는 소리를 내며 재오의 가슴에 풀썩 기댔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자, 새빨간 눈동자가 유순하게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별은 재오의 눈 아래 난 점을 검지로 콕 찍으며 외쳤다.
“그럼 나 초코케이크! 꾸덕꾸덕한 걸로. 너무 달지는 않은 거! 살찌니까 커피는 아메리카노 마실 거야. 그러니까 커피도 맛있는 곳으로!”
너그러운 여자친구가 되어주는 대가로 맛있는 초코케이크를 먹을 거라고 생각하니 당시에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재오가 없는 사흘은 정말 미치도록 지루했다. 주말 데이트에 입을 옷 고르기 놀이를 사흘이나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심했지. 그러니 데이트 당일에 별이 얼마나 신이 나서 뛰쳐나갔겠는가. 그런데 그 고대하던 데이트 날, 심지어 재오가 찾아낸 완벽한 카페 바로 옆에 홀이 나타나는 게 말이 되냐고? 별은 신을 저주하다 못해 머리를 쥐어박고 싶어졌다.
카페 정문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봉쇄되었고,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뒷문을 통해 건물 안쪽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홀이 불러온 엄청난 파장으로 전기가 나가서 커다란 건물 전체가 캄캄했다. 별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으며 얼결에 챙겨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꼭 쥐었다. 플라스틱 컵의 차가운 물방울이 손바닥을 적시자 어디 두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재오가 손을 뻗어 음료를 받아 갔다.
“혹시 모르니까 들고 가자. 내가 들게.”
재난은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르는 법이었다. 각성자 여럿이 곧장 달려온 만큼 해결이야 되겠지만 생각보다 홀의 규모가 컸다. 지금도 건물의 1층이 죄 막혀버리는 바람에 위층으로 줄 서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위층에 문제가 생긴다면 장시간 이곳에 있어야 하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마실 것이 필요해질 수 있다. 재오의 빠른 판단에 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 사람은 이런 극적인 상황에 익숙했고, 긴장으로 갑자기 목이 타는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거다. 그러니까 이건 함께 대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각성자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니 여전히 일반인보다는 각성자에 가까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것도 두 사람, 특히 재오였다. 재오는 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뒤쪽으로 따라오는 사람들을 살폈다. 그는 삼삼오오 모여 핸드폰 플래시를 다발로 켜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검지를 까딱거렸다.
“플래시 몇 분만 켜셔야죠. 보조배터리 엄청 많이 챙겼어요?”
가벼운 언행에도 사람들은 재오를 잘 따랐다. 친근한 태도에 묻어나는 침착함은 현장에서 얻고 기른 것이었기에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심지어 그 재오의 팔 안에 안겨있는 작은 여자애도 울먹이거나 새파랗게 질리기는커녕 성가셔죽겠다는 눈치였다.
“케이크 다 못 먹었는데.”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여기는 한동안 문 닫을 텐데?”
“아, 그러네. 그럼 별이가 더 좋아할 만한 곳 찾아볼게. 그러니까 기분 풀어.”
평범하게 길가에서 꽁냥거리며 눈 둘 데를 모르게 만드는 커플을 여기서도 보다니. 두 사람이 알콩달콩 속삭이는 소리가 사람들을 맥 빠지게 했고, 다소 풀린 긴장감은 누구 하나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사람들은 어린 커플을 따라 결국 옥상까지 올라갔다. 카페에 들어설 때 이미 저녁때였는지라 복도를 빠져나와도 하늘이 캄캄했다. 그래도 다행히 옥상에서는 사람들을 구조할 준비가 전부 끝나있었다. 별과 재오는 습관적으로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게끔 몸을 피했다가 아차 했다. 이제는 그들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각성자에게 구조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미 몸을 뺀 데다가, 상황이 안정되었는데 굳이 욕심을 부릴 이유도 없어서 두 사람은 가장 마지막까지 옥상에 남아 있게 됐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다들 무슨 생각을 했던지 연신 고맙다고 허리를 굽히며 차례차례 구조되었다.
“딱히 그런 거 아닌데.”
“그래도 저런 감사 인사 되게 오랜만에 받네.”
돌아보니 재오가 “그렇지?”하며 웃고 있었다. 그런 재오의 뺨 옆으로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별은 그 별을 시작으로 고개를 꺾어올려 새카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꼭 그날 같았다. 졸업식을 마치고 재오에게 별을 선물 받았던 그날. 마음은 허망함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서운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그래도 네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던 그날. 별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재오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하 웃었다.
“어쩐지 하늘이 꼭 그때 같다. 네가 ‘마지막 별’을 보여줬던 그때 말이야. 그때도 옥상이었는데.”
별의 눈이 크게 뜨이며 분홍색 눈동자로 달빛이 반짝 반사되었다. 뭔가를 말하기 위해 열렸던 입술은 이제 그저 놀람을 표현하는 작은 구멍이 되어 있었다. 재오는 별의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거렸다.
“아, 맞아. 나 나쁜 습관이 있지. 하지만 나 그때 이미 널 좋아하고 있었는걸. 널 좋아한 이후에 일어난 일은 빠짐없이 기억해.”
“정말?”
“정말. 네가 나 막 무섭게 겁줬던 것도 다 기억해. 그때 별이 표정이 진짜 사악했는데.”
재오는 쿡쿡 웃으며 별이를 더 가까이 꼬옥 안았다. 그 모습이 어딘가 애교스러워서 이번에는 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재오를 올려다봤다. 역시나, 재오는 난처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어설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기 드문 표정이라 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오의 얼굴을 낱낱이 살폈다.
“저기 별아, 혹시 아직도 옛날 일 서운해? 나한테 섭섭한 거 남아 있어?”
“으음, 어떨 거 같은데?”
“서운한 거 있으면 다 말해주면 안 돼? 나 이제는 다 기억할 수 있어.”
이 말은 진심이고 또 진실일 것이 분명했다. 재오는 이제 별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기억해서 그 모든 게 특별한 것처럼 소중하게 다뤄주었다. 이제는 그런 재오가 없으면 고작 사흘도 버티지 못하게 됐고, 그녀 외의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섬세한 사람이 되어줄 거라고 상상하면 속에 바위가 얹힌 듯 답답해졌다.
친구들한테 자퇴했는지 안했는지도 확실하게 말하지 않아서 여태 연락이 오는 너를 보면, 핀잔하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돼.
“한재오. 나 그때도 널 좋아하고 있었나 봐.”
“…응?”
재오는 대화를 쫓아가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그야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 달랬더니 대뜸 고백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을 테니까. 하지만 별은 지금 느낀 이 감정을 그대로 재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며 재오의 양어깨를 단단하게 짚었다.
“맞아, 나 아직도 서운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있다는 거.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기억하는 시절이 있다는 거. 근데 네가 알아야 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두 사람은 이미 가까웠는데도 별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것처럼 자꾸만 발뒤꿈치를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재오는 그런 별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면서도 그녀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금 별의 분홍색 눈에는 재오에 대한 애정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내가 널 좋아해서, 네가 날 기억해주길 바랐어. 난 그때 이미 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던 거야. 네가 기억해야하는 건 그거야.”
별은 재오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옮겨 그의 양 뺨을 꽉 붙들었다. 볼록해진 입술에 위풍당당하게 쪽, 입을 맞추자 술렁였던 마음이 쑥 가라앉았다. 별은 씩 웃으며 재오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이걸 이제야 알다니. 나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을 하면서도 별은 그저 만족스럽기만 했다. 어째서 재오가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주면 놀랍고 기쁜지, 그때의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재오를 들들 볶았는지 전부 깨닫게 되었으니까.
별은 구조대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걸 눈치채고 천천히 재오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재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별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은?”
내가 너를 특별하게 여기는 만큼, 너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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