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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 에메아젬

키워드 : 아젬이 휘틀로와 사귄다고 오해하는 에메트셀크.

글자수 : 9,000자

 

에메트셀크는 언제나 느린 걸음을 고수했다. 세상은 이치대로 돌아가는 법이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큰 키와 가면 아래 단단하게 다문 턱 때문인지 여유롭기보다는 거만해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런 걸음 습관을 지니고 있는 에메트셀크가 평소보다 빠르게 걷는 걸 본다면 누구나 ‘저 사람 화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에메트셀크는 드물게도 ‘초조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에게 그런 기이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에메트셀크는 발아래로 소리가 날 듯 묵직하게 걸어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이곳에서 아젬 임명식이 있었다. 오랜 기간 사람들의 곁에서 충실하게 아젬의 역할을 해오던 베네스가 물러가고, 어느 바보 멍청이 같은 여자가 새 아젬으로 공표되는 것이다. 그 바보는 에메트셀크에게 임명식 날짜와 장소를 알려주며 단단히 말했다.

‘에메트셀크, 내 임명식 보러 올 거지? 안 오면 나 삐질 거야. 엄청 오래 서운해할 거라고.’

진지한 행사 따위 늘 성가셔하던 녀석이었지만 자기 임명식은 또 다르게 느껴졌던지, 에메트셀크에게 꼭 오라고 벼르고 별렀다. 그러나 하필이면 바로 어제, ‘에메트셀크’가 꼭 필요한 사건이 터지면서 일정이 꼬였다. 최대한 빠르게 수습하고 오긴 했지만 역시나 임명식 막바지였는지 아젬은 이미 연단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연단 가까이 서 있던 휘틀로다이우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 아, 이젠 아니지. 아젬, 정말 축하해. 너라면 분명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아젬이 될 거야.”

휘틀로다이우스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아젬에게 내밀었다. 꽃다발은 멀리서 봐도 경악이 나올 정도로 흉측한 모양이었다. 흉측하기만 하면 다행이지, 도대체 누가 저런 이데아를 형상화한 것인지 붙잡으면 당장 보고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모양새였다. 도대체 꽃에 날개가 왜 필요해? 차라리 팔을 달아라! 에메트셀크는 이미 자신의 생각이 그들에게 물들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두 사람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에메트셀크의 매서운 반응과 달리 아젬은 사뿐사뿐 걸어가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을 보듯 미소 지었다.

“세상에! 휘틀로다이우스! 살면서 받아본 꽃다발 중에 최고야!”

아젬은 마음 깊이 감명받은 듯 가슴에 양 손바닥을 얹으며 끊임없이 감탄했다. 그녀는 특히 날개 달린 꽃이 마음에 드는지 하얀 날개를 검지로 톡톡 건들다가 어느 순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새나 곤충, 바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번식하는 개체가 되겠어. 무엇보다 날개가 너무 빨라서 웃겨! 정말 고마워, 휘틀로!”

아젬은 짧은 평까지 내리고는 발돋움해 휘틀로다이우스의 품에 안겼다. 휘틀로다이우스는 한 팔로는 꽃다발을 안전하게 지키고, 다른 한 팔로는 아젬을 들어 올리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가면이 달각 부딪칠 정도로 가까웠지만 둘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을 멀리 바라보던 에메트셀크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홱 돌렸다. 공공장소에서 무분별한 스킨십을 하면 안 된다느니 하는 예법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아마 문제는 이 마음이겠지. 에메트셀크는 남몰래 자기 가슴을 짧게 쓸어내렸다. 에메트셀크는 아젬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아주 오래 그 사실을 부정해왔다. 그런 방식으로나마 마음을 접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메트셀크가 마음을 자각한 그때 이미 아젬과 휘틀로다이우스는 연인 관계였으니까. 가장 친한 두 친구가 깊은 관계가 되었는데 축복해주기는커녕 질투하다니… 그런 덜떨어진 짓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고 공표한 것은 아니었다. 에메트셀크에게 따로 언질 준 적도 없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지나칠 정도로 가까웠다. 사과 하나를 번갈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넓은 방에서 굳이 서로의 품에 기대어 잠드는 날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젬은 휘틀로다이우스를 보면 활짝 웃으며 그의 품을 향해 달려들고, 휘틀로다이우스는 언제나 그런 그녀를 힘껏 안아준다.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그러니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에메트셀크는 두 사람이 남몰래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에메트셀크에게 밝히지 않는 건 아마 그를 배려하기 위함이겠지. 새삼 소외감을 느낄 어리숙한 나이도 아닌데. 에메트셀크는 그 배려를 떠올릴 때면 고마워야 할지 처참한 기분을 느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마음이 어둡게 침잠하곤 했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 전체에 아무런 이익도 되지 못해. 에메트셀크로서 바람직하지 않군.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더 배워야겠어.’

에메트셀크는 진지하게 생각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던 ‘연인’은 어느새 구석에 쪼그린 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열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건 바닥에 마구 풀어헤쳐진 ‘꽃다발’이었다. 아젬은 그 중 눈알이 달린 꽃을 쥐고 더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속눈썹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휘틀로다이우스는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대답해주었다.

“이 이데아를 만든 사람은 어차피 눈은 장식일 뿐이라고 했어. 동물처럼 보이고 싶었다는 거지.”

“거기에 어떤 이득이 따르는데?”

“그건 말이지……. 어! 에메트셀크!”

휘틀로다이우스는 설명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에메트셀크를 불렀다. 그러자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아젬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내내 몰두하고 있던 눈알 달린 꽃을 내팽개치며 에메트셀크를 향해 뛰어들었다.

“에메트셀크!”

반가움이 지나친 탓에 온 얼굴이 환했다. 에메트셀크는 서슴없이 가까워지는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팔부터 쭉 뻗었다. 그는 아젬을 폭 안아주었던 휘틀로다이우스와 달리, 몸을 틀어 아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으앗! 왓!”

얼결에 허공에 떠오른 아젬은 허우적거리며 팔을 휘젓다가 생각보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몸에 힘을 뺐다. 심지어 그녀는 에메트셀크에게 ‘낚인’ 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네가 여기 있다니! 어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오늘 절대 못 올 줄 알았어! 생각보다 잘 풀린 거야?”

“아직. 잠깐 틈이 나서 왔을 뿐이야.”

틈이 나기는 무슨. 자기 임명식이니까 꼭 와달라고 조르던 얼굴이 눈에 선해서 억지로 틈을 만들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다시 복귀해야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젬이 기뻐할 줄 알면서도 에메트셀크는 퉁명스레 말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우와! 그 틈에 올 생각을 했단 말이야? 나 지금 진짜 감동받았어!”

아젬은 허공에 매달린 주제에 에메트셀크를 안을 것처럼 두 팔을 뻗었다. 에메트셀크는 기겁하며 그녀를 잡고 있는 손을 더 멀리 밀어냈다. 그러자 아젬은 흔들거리며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젬씩이나 되어서는 자존심도 체면도 다 없는 모양이었다. 에메트셀크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아젬의 삐뚤어진 가면 틈새로 보이는 눈동자와 마주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장난기를 잔뜩 머금은 청록색 눈동자가 마치 잘 세공된 보석처럼 빛을 퍼트리고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그 빛이 자신의 가면 너머로 파고드는 듯하여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하고 네 발로 서!”

에메트셀크는 뒤늦게 호통을 치며 아젬을 내려놓았다. 아젬은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착지하며 에메트셀크에게 양팔을 크게 벌렸다. 당장이라도 끌어안을 태세였지만, 에메트셀크는 그런 그녀의 이마를 꾹 누르며 삐뚤어진 가면을 바로 해주었다.

“제발 체면을 지켜, 아젬.”

“벌써 직함으로 부르는 거야? 나 서운해졌어.”

“서운하긴. 이게 널 존중하는 거야. 베네스 님은 도대체 너의 뭘 믿고 아젬을 맡기신 거지?”

에메트셀크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휘틀로다이우스가 그들에게 다가오며 미소 지었다.

“베네스 님께서도 만만찮게 별난 분이시잖아. 그런 점에서 둘이 통했다고 생각해.”

“그래도 그분께서는 늘 우아하게 모두를 감싸 안아주셨어. 반면에 너란 녀석은…….”

“잔소리는 이제 그만! 자, 나도 아젬으로서 너를 안아줄 테니까!”

아젬은 이번에야말로 에메트셀크를 끌어안겠다는 듯 멧돼지처럼 매섭게 달려들었다. 에메트셀크는 그런 그녀를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고, 아젬은 날랜 몸짓으로 그런 그를 쫓았다.

“휘틀로! 도와줘!”

그 난장에 휘틀로다이우스가 가세하면서 더 이상 이 자리에 엄숙함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임명식이 다 끝난 이후라지만 지켜보는 눈이 없지도 않은데……. 에메트셀크는 그들에게 이제 그만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아젬에게 잡히고 말았다.

“잡았…!”

그런 아젬의 등 뒤로 마구 달려오던 휘틀로다이우스가 겹치면서, 에메트셀크는 두 사람의 무게를 한 번에 지탱하게 됐다. 마법을 쓰기도 전에 몸이 기울어지며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바닥을 마구 굴렀다. 아이고, 아구구. 어느 것이 누구 것인지 모를 신음이 오간 뒤, 샌드위치 속 토마토처럼 꽉 뭉개진 아젬이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그 말에 휘틀로다이우스가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아젬은 고개를 번쩍 들고는 푸하! 하고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녀는 에메트셀크의 배를 깔고 앉은 채 깔깔 웃기 시작했다.

“술래잡기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럴 리가 있겠냐!”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고함을 쳐도 아젬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에메트셀크의 머리를 꽉 끌어안으며 신이 나서 외쳤다.

“잡았다, 에메트셀크!”

에메트셀크는 그게 무슨 대단한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에메트셀크의 몸을 덮은 회색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그의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런 동시에 홀씨처럼 가벼워 금방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비합리적인 감정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유가 뭘까? 에메트셀크는 이 상황을 최대한 ‘이치’에 가깝게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랑은 이치에서 가장 먼 감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

 

아젬 임명식 이후로 에메트셀크는 단 한 번도 아젬을 만나지 못했다. 에메트셀크로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바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아젬의 행방이 너무도 묘연했던 탓이다. 그러다 드디어 오늘, 아젬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에메트셀크는 하던 일을 부랴부랴 마치고 아젬의 거처로 향했다.

아젬의 거처는 주인을 닮아 둥근 창으로 햇볕이 쏟아지는 포근한 공간이었다. 물건이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것마저도 그녀다웠다. 에메트셀크는 폐부로 스미는 따스한 냄새를 맡으며 안으로 들어서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인기척이라도 내면서 들어올걸.

방안에는 휘틀로다이우스와 아젬이 잠들어있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소파에 앉아있었고, 아젬은 그의 무릎을 베개 삼아 녹아내리듯 편안한 자세였다. 두 사람의 팔은 친근하게 얽혀있어서 마치 손을 잡고 있다가 잠결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에메트셀크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헛기침했다.

“음… 왔어?”

다행히 두 사람은 작은 소리에도 곧장 일어났다. 그러나 에메트셀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럽지도 않은지 태평한 모습이었다. 아젬은 입을 가린 채 하품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에 잠이 가득 묻어있었고, 무엇보다…….

“아젬, 너 머리가 왜 그 모양이야?”

에메트셀크는 경악하며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곧은 등으로 찰랑찰랑 흘러내리던 회색 머리카락이 어깨선에서 뚝 잘려 나가 있었다. 그 모양새가 둔탁하기 짝이 없어 과감한 스타일 변신을 시도한 게 아니란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기겁하는 에메트셀크와 달리 아젬은 대수롭지 않게 머리카락을 귀밑에서 탈탈 털었다.

“엄청난 녀석을 만났거든. 발톱에 스치기만 했는데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나갔지 뭐야. 아, 에메트셀크 네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를 부르면 되잖아!”

“불러야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승부가 나버려서 말이야. 그 녀석 정말 대단해서 보여주고 싶긴 했는데, 네가 화낼까 봐 참았어. 잘했지?”

에메트셀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아젬의 머리카락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 ‘스타일’을 계속 고수하시겠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젬으로서 체면을 지키라고! 당장 깔끔하게 다듬지 못해?”

에메트셀크의 불호령에 아젬과 휘틀로다이우스는 서로 마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젬은 훅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 머리 그렇게 이상해?”

“아니. 지금도 꽤 귀여워. 에메트셀크는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야. 네가 다칠 수도 있었던 거잖아.”

“그래? 그런 거야?”

아젬은 휘틀로다이우스의 해석본이 마음에 들었는지 실실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 아젬이 휘틀로다이우스를 연인으로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젬은 솔직한 사람이고, 머리가 엉망이어도 귀엽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을 당연히 좋아하겠지. 나처럼 심통 맞은 사람이 아니라……. 아젬은 에메트셀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에메트셀크, 들어봐. 나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았거든. 너희한테 얘기해주고 싶어서 죽을 뻔했어.”

“그 전에 머리부터 다듬어.”

“그런 건 하나도 급하지 않잖아. 아, 그래. 그럼 네가 해줄래?”

아젬은 검지를 휙휙 움직여 어딘가에서 가위와 빗을 꺼내왔다. 에메트셀크는 얼결에 코앞까지 날아든 가위와 빗을 받기는 했지만 황당해서 미칠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마법으로 하면 되잖아!”

“그렇게 쉽게 하면 재미없잖아?”

“네 녀석은 베네스 님께 배운 게 그런 것밖에 없냐?”

“아주 좋은 스승님이지.”

“아무튼 난 싫어. 이런 걸 하고 싶으면 휘틀로다이우스에게 해달라고 해.”

에메트셀크는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평소라면 ‘그럴까?’라고 말할 휘틀로다이우스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나는 가봐야 해. 둘이 재미있게 놀아.”

“뭐라고?”

“아, 조심해서 가! 나중에 또 놀자!”

“아젬, 좀 더 자주 와. 네가 없으면 에메트셀크가 계속 짜증 낸단 말이야.”

“아하하, 알겠어.”

“이봐!”

에메트셀크는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휘틀로다이우스는 이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젬은 멍하니 서 있는 에메트셀크를 의자 쪽으로 잡아끌었다.

“예쁘게 다듬어줄 거지?”

아젬은 의자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앉아 에메트셀크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에메트셀크는 가위를 든 채 바보처럼 이끌려가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에메트셀크는 아젬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휘틀로다이우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아무리 허물이 없어도 에메트셀크는 유일한 상식인으로서 정도를 지킬 줄 알아야 했다.

머리를 자를 때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모를까, 마법으로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건 이 세계에서 ‘굳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굳이 서로에게 가까이 붙어 서서, 굳이 머리카락과 뺨을 만지고, 굳이 시간을 함께하고……. 그런 건 꼭 연인 같지 않나?

“아젬, 네가 이런 행동에 아무 생각도 없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뭐가? 내 머리 스타일이?”

“아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러면?”

아젬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낮게 기울였다. 에메트셀크를 향해 고개를 꺾어올린 탓에 하얀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에메트셀크는 그 이마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설명했다.

“너무 가까워. 네게는 연인이 있고, 심지어 그 상대가 내 친구이기도 하잖아. 나는 너희 둘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다. 이런 사적인 시간은 갖고 싶지 않아.”

에메트셀크가 간신히 꺼낸 말에 아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늘 장난기 넘치던 청록색 눈동자도 지금은 잠잠했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모양인데, 에메트셀크로서는 조금도 그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아젬?”

뭐라도 좋으니 대답해보라 채근하자, 아젬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에메트셀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에메트셀크는 반사적으로 손을 피하려고 했지만, 속도로 따지면 아젬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아젬은 에메트셀크가 가위를 쥔 손을 둥글게 감싸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랑 휘틀로 그런 사이 아니야.”

“…뭐?”

“굳이 따지자면… 내가 ‘그런 사이’가 되고 싶은 건 너인 걸?”

에메트셀크의 손에서 가위가 빠져나가며 챙강, 하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에메트셀크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여태껏 아젬과 휘틀로다이우스가 사귀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온 터라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은 아젬의 뺨이 조금씩 빨개지고 있다는 거였다. 마치 지금 그런 말을 꺼내는 게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아젬은 에메트셀크와 눈을 한 번 마주쳤다가 쏜살같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뒷목까지 붉어진 게 보였다.

“너도 날 좋아하고, 나도 널 좋아하는데 내가 왜 휘틀로다이우스랑 그런 사이가 돼?”

“그게 무슨……!”

에메트셀크는 잔뜩 당황해서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매서운 얼굴이었지만 반듯한 귓바퀴만큼은 솔직한 분홍색이었다.

“내, 내가, 내가 널 좋아한다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이는 거야?”

그 말에 아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참 아래에 있던 얼굴이 조금씩 다가오자, 에메트셀크는 삐걱삐걱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가깝다. 아젬의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아젬은 그런 에메트셀크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아가며 장난스레 씨익 웃었다.

“그렇구나. 난 네가 똑똑하니까 당연히 다 아는 줄 알았어.”

“알긴, 뭘…….”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거. 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청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네?”

마치 에메트셀크가 말도 안 되는 오해라도 한 것 같은 말투였다. 공식 석상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헤실헤실 웃고 다녔던 게 도대체 누구인데……! 에메트셀크의 얼굴 가득 억울한 기색이 감돌자 아젬은 그게 못내 즐거운 듯 킥킥 웃었다.

“그럼 ‘그런 사이’가 되면 내 머리 예쁘게 다듬어줄 거야?”

아젬은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에메트셀크를 놀려먹을 준비를 마쳤다. 에메트셀크는 허리를 굽혀 손수 가위를 집어 들며, 영원히 이 천방지축 아젬을 이겨 먹을 날이 오지 않으리라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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