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20화

돌아온 성녀 06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돌아온 성녀 06


루블, 보쓰, 히즈

***

“아트레우스입니다. 들어가시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나치게 조용해서······. 안에 계시지요?”

그레이스는 헬레니온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잠잠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레이스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아트레우스는 들어오자마자 급격히 얼어있는 분위기에 당황했다. 그대로 모른 척 문을 닫고 나가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에버렛 씨가 도와달라는 눈짓이었다. 누가 봐도 불구덩이로 보이지만, 그게 에버렛 씨의 말이라면 일단 한 번 뛰어들어보는 아트레우스였기에 결국은 한숨을 삼키며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일 있습니까? 보스가 들어가서도 나올 생각을 않기에. 곧 일정이 있습니다, 보스.”

“······무슨 일정?”

“오늘 그······ 그 늙은 너구리가 접촉하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아까 저택에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아트레우스는 아마데아를 의식해서 말을 조심했다. 아마 아마데아는 그 인물을 잘 알 것이기 때문에 흘려도 되는 정보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아트레우스와 다르게 헬레니온은 과감하게 아마데아를 향해 말했다.

“오늘 안드레아스 후작이 은밀히 접촉을 요청했습니다. 아마 알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안드레아스 후작은 대표적인 신전파 귀족 중 하나였다. 그가 헬레니온에게 은밀히 접촉한다? 아니,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헬레니온이 아니라 그의 성인 엘레우시스였다. 엘레우시스 가문이란 이름이 뭔가 익숙하긴 하지만 어디서 들어본 것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데아는 혼자서 기억을 곱씹는 게 아니라 이번엔 물어볼 사람이 곁에 있었다.

“헬레니온. 너의 성이 엘레우시스라는 말을 들었다. 왠지 귀에 익지만 어디서 들은 이름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구나. 네 가문이 어느 작위인지 들을 수 있겠느냐?”

헬레니온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아트레우스는 가문 문제가 보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머뭇거리는 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어서였다. 

옆에 있던 아트레우스는 기어이 보스가 여자 하나에 푹 빠졌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다. 물론 보스는 존경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좋아한다지만, 아무리 보스의 미래 후계자까지 모시고 싶다고 생각은 해 왔지만! 상대가 문제였다. 하필 골라도 예로케리들의 수장이라니. 사실상 아녹스의 차기 수장으로 대우받고 있는 그에겐 걸림돌이 될 것이 뻔했다.

대체 얼마나 성녀를 믿는 것인지, 방금 기밀 사항이라 암호로 바꿔 부른 것마저 다 실토하지 않았던가. 아트레우스는 속이 탔다. 그나마 제 생각과 비슷한 마음을 품었을 그레이스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헬레니온을 대신 말려주길 바라는 눈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작게 도리질 쳤다. 그녀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었다. 

‘뭘 모르는 구나. 이제 막 제 감정을 깨달아가는 남녀를 강제로 떨어뜨려봤자 외려 역효과만 나지. 사랑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외압이 가해지면 더 단단해지는 법이거든. 차라리 내 생각대로 성녀가 헬레니온 님을 받아들여 쥐 죽은 듯 고요히 살게끔 하는 편이 낫다.’

아트레우스는 그레이스의 속내 대부분을 알아채진 못했으나, 그레이스가 말릴 의사가 없다는 것만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결국 아트레우스는 순응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성녀를 제거하게 되더라도 그는 보스의 관심이 완전히 식은 때여야 할 것이다.

아트레우스와 그레이스가 묘한 눈짓을 주고받는 사이, 헬레니온이 입을 열었다. 잠깐 사이에 목소리가 깊게 잠겨있었다.

“잠시 둘만 있게 해주겠습니까?”

더없이 정중한 어조이지만 아트레우스는 그 속에서 위태로움을 느꼈다. 아마 그레이스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만 남겨두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레이스는 문이 닫히기 직전 흔들리는 눈으로 두 남녀를 끝까지 응시했다.

아마데아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레이스를 두둔하다가 갑자기 아트레우스가 들어오더니 안드레아스 후작이 어쩌고······. 그러다 무심코 헬레니온에게 그의 가문에 관해 물었을 뿐인데 주변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민감한 주제인 걸까? 내가 말을 잘못 꺼낸 걸 수도······.’

곤란한 질문이었다면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 그가 먼저 얘기했다.

“아마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할 겁니다. 현재 엘레우시스 가문은 귀족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으니까요. 그게 벌써 10년도 전 얘깁니다.”

헬레니온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손은 의자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아마데아는 조심히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이어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제가 10살 무렵에, 적법한 가문의 후계가 모두 세상을 뜬 이후부터였습니다. 저는 엘레우시스 가문의 사생아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가문 모두가 거들떠도 볼 필요가 없는, 발에 채는 돌멩이였지요.”

가감없이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 오히려 얘기를 듣던 아마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낮추지 말라며 끼어들고 싶었으나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힘이 없을 시절에는 절 허수아비로 삼으려는 친족들을 내버려 두고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도련님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전 그저 당하고만 사는 머저리는 아니었습니다.”

의자 손잡이가 부러질 듯 힘겨운 소음을 냈다. 헬레니온은 눈치채지 못한 채 담담한 어조로 제 끔찍했던 과거 얘기를 지속했다.

“하나하나 다 담아두며 칼을 갈았지요. 언젠가 저들을 모두 뛰어넘어 보이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저의 노력은 시작부터 꺾일 위기에 처했습니다.”

헬레니온은 바닥으로 고정됐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마데아를 마주 보아오는 눈빛에는 약간의 분노도 담겨있지 않았다. 외려 그것은······.

“이 아우레티카에서 어둠의 세례를 받은 인물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전 성녀였던 아마데아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이단 심판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존재가 바로 성녀일진대 어찌 모르겠는가. 이단자로 판명된 자는 이단 심판관의 판단 아래 추방 혹은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

“저는 10살 무렵에 어둠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야 적응해나가며 꿈이라는 게 생긴 시절에요.”

끔찍한 이야기였다. 빛의 나라에서 어둠의 세례가 내려온 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자로서 더더욱 듣기 힘들었다.

“어둠의 세례가 내려왔을 때, 제게 남은 신성력과 충돌하여 저는 고통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간신히 길가의 수풀에 숨은 채 이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랐죠. 결국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나, 신세 한탄도 했습니다. 이제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사라진다는 두려움이 온몸의 고통을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아마데아는 안타까운 이야기에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헬레니온은 그녀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그녀의 턱을 짚어 그를 똑바로 보도록 했다. 어쩌면 강제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행위임에도 그의 손길에는 그녀를 배려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니, 배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숭배였다.

“하지만 제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강한 빛의 대리인이자 여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자가 제게 기적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의 한 손이 아마데아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마치 깃털이 내려앉은 듯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자, 이제 괜찮을 것이다. 다만 또 다시 불경죄를 저지르는 일은 없도록 하거라.”

다소 뜬금없이 나온 말투였으나 아마데아는 급격히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의 목적을 몰라 전전긍긍하며 홀로 두려워하던 나날들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동시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때, 추격당하던 나를 구해주고 살려주던 너의 눈빛이 그리 따스했던 이유도.

「당신이 나를 구해주었듯이, 이번엔 제가 당신을 지킬 겁니다.」

그 한마디에 나의 슬픔이 멎은 이유도.

네가 오지 않아 가라앉던 내 마음도.

그가 내게만은 약한 이유도.

아마데아는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숨을 쉬는 법을 까먹었다. 대체 어떻게 그의 앞에서 일상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는지,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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