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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친애의 證據

에스마일>힐데

트리거/소재 주의: 우울, 죽음과 관련된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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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ll be the saddest part of me

A part of me that will never be mine

It's obvious

Tonight is gonna be the loneli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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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과거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그 뒤에 미래가 이어질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저를 너무 슬프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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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터무니없음 가운데 진실을 숨기는 재능, 혹은 진실을 말하나 그것이 터무니없음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저주에 대해서는 당신이 그만큼은 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함께 트로이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운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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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년기라는 것이 생각보다 걱정 없지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다는 것은 실은 모든 아이에게 해당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의 그는 우리의 어린 시절이 서로에 대한 어떤 고유한, 혹은 심지어 유일무이한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고 오만하게 믿고 있었다. 당신, 힐데가르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이 아닌 집회에 다녀오는 주말을 알고, 첫울음처럼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동지와 연대와 투쟁과 해방에 대한 노래와, 의지와 슬픔으로 가득찬 어른들의 얼굴을 알고, 그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어떤 전율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삶을 알았으니까. 당신은 그가 당신과는 또 다르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는 다름보다는 닮음에 언제나 집중하는 사람이라. 따지자면 그의 첫 친구는 북해를 마주한 그 작은 땅에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당신이 그보다 덜 소중하거나 마음에 깊이 남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그 또한 그 시절에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세실, 헨, 루드비크, 틈만 나면 싸움 한복판에 있는 이들 사이에, 언뜻 이질적으로 당신의 이름을 집어넣었으니까. 당신은 전쟁과 갈등을 두려워하게 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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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 just keep on thinking, how you made me feel better

And all the crazy little things, that we did together

In the end, in the end, it doesn't matter

If tonight is gonna be the loneli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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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보낸 어느 겨울이 있었다.

에스마일 이브라힘 시프는 재차 부정한다. 그에게 종말은 당신보다 조금 일렀다. 그것은 연극제가 끝났을 때, 당신의 대본이 끝났을 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신이 몸과 영혼을 침범당한 충격에서 아직 다 깨어나지 못했을 때, 그 범인과 같은 얼굴을 한 그와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을 감쌀 때. 그는 언제나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것이 두려웠고 그 상처에 다시 상처입는 것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으로 세상에 대해 신뢰를 갖지 못했으나 그 사실에 대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세상에게 토로하고 싶었다. 내가 당신들을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당신은… 언젠가 그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리핀도르라는 단어를 알기 전부터 그리핀도르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 언제나 그가 물러서려 할 때 한 발을 더 내딛고, 그가 도망치려 할 때 그의 손을 붙잡고, 그가 겁에 질려 있을 때 씩씩하게 지나가는 어른 중 길을 물어볼 사람을 골라내고 표지판을 분석해 내야 했다. 동갑인 아이에게 무리한 기대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우리는 미숙했고 제멋대로였으며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제대로 보여준 적 없는 주제에. 일방적으로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시선을 피했다. 그는 그제서야 길을 잃어버렸다.

그날 복도에서 일어난 일은 그 말로에 불과했다. 예정된 결말이었다. 그는 그때 당신의 눈빛을, 표정을, 첫마디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도 기억되지도 기록되지도 못한 순간은 서랍 속에 접힌 천처럼 잠들어야 할 것이며. 어디로도 좋으니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정언 명령과 같은 생각만이 남았다. (나는 내가 결국 당신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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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뒤늦은 깨달음:

“힐데. 저는, 저는… 사실은 오래전에 이미 당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어요. 당신도,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니잖아요. 저를 늘 친구로 아끼셨으니까. 그냥 차라리 이 편이 낫다고, 당신을 다시는 믿지 못할 것 같고, 말해드리지 못하는 게 너무 많은데 그럼 사실 서로 사과해도… 공허하니까. 의미가 없는 거니까. 그렇게 했는데, 근데 생각해 보니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제가 빛난다고 했잖아요. 그런 말을 한 건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기억하세요? 당신이 그 웃긴 모자를 샀을 때, 아무도 저를 바늘로도 찌르지 못하게 지켜 준다고 했으면서, (결국 심장에 칼이 꽂힌 기분을 느끼게 한 것이 당신이었으니까,) 거짓말은 딱 한 개였는데.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세상에게 부정당하는 기분을 당신도 알면서.) 고작 소문 때문에, 얼굴 안 보여준 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비가 오는 날엔 당신의 부풀어 오를 곱슬머리를 생각했다. 이름이 늘 바뀌는 달팽이를 생각했다. 여름에는 당신과 나의 생일이 아무 연락 없이 지나갔고, 청첩장이 도착했을 땐 이 사람은 누구인지, 당신은 새로운 가족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 빈정거림과 어설픔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당신의 삶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생각했다.

문득 올려다보면 시선이 맞춰지지 않는다. 당신이 울고 있어서가 아닌 내가 울고 있어서. 목소리는 부자연스럽게 고저가 없었다가, 돌연 형편없이 망가지는 것을 반복한다. 나는 이해한다. 당신을 멀리하면서 나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죽이고 있었다는 것을. 어떤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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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오지 않은 사월에게: 나는 자주 내가 죽는 꿈을 꾼다. 가끔씩은 당신이 그걸 발견하는 꿈을 꾼다. 그럼 나는 다시 살아나서 당신의 손을 잡고 바다를 보러 간다.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알아서 슬픈 꿈이다.

“…저도, 당신도… 열한 살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에요. 우리는 벌써 자라 버렸잖아요.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다면… 우린 같이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에요. 슬퍼도 같이 슬플 수는, 같이 외로울 수는, 있을 거에요. 비록… 옛날처럼 동지가 될 순 없어도, 친구가 되기에는…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우리의 친애의 증거가 두려움이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우리를 조금 슬프게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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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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