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파편, 수많은 이름에 관하여
너를 처음 만난 날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자주 나를 부르던 어린 날의 모습. 열 다섯의 가을부터 제게 있던 수많은 이상하고도, 나쁘지 않은 일들 속에는 네가 있었다.
능청스러운 인사는 둘째치고 제 이름을 제대로 부르질 않으면서도 태연히 불쑥 나타나는 네게 제 이름을 알려주던 어느 미숙한 날.
그 무렵의 너는, 어째서인지 나무 위, 푸른 잎 사이에서의 싱그러운 얼굴로 먼저 떠오르곤 해. 너무 오랜 날의 일이 어제 같고, 어쩌면 그렇게 오래 되었으니 추억의 장으로 넘어갔으려나 생각하지.
그 무렵의 너는 위태롭거나 위험해보이는 대신 자유롭게 보였고…. 에반. 머지않아 나는, 네 안정이 네가 지닌 오늘의 기쁨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네 착각과는 달리, 내게 너는, 한 순간도 ‘동지’였던 적이 없었다. 울타리 안에서 주위를 지키고 제 노력을 뽐내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또래의 친구였을 뿐이지.
그러니 색이 빠진 듯한 머리색이 서로 비슷한 까닭일까 네 시선이, 닮을 것을 찾는 것 같다고 느꼈던 때. 나는 만일 네가 나와 닮았다면….
여리고 작은, 꼭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 사랑할 것을 두고 보듬고자 하는 마음도 우리는 닮았을 거라고…, 그러니 나를 닮은 네가, 어리고 여린 과거의 너를 놓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가벼운 웃음. 담배를 대신하듯 불러낸 막대사탕을 까득 무는 입. 막대를 걸친 입술은 피어싱이 걸린 네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는 그를 알지만.
네 말처럼, 여전히 우리에게는 닮은 점이 있는가. 너와 나의 닮은 점을 찾거나, 닮게 될 것을 기대할 생각이 없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혹은 이제와서야.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나."
입매를 비틀고 흘리는 한숨. 키득거리는 흰 낯을 향하는 눈은 고요하게 내려앉는다. 네 붉은 눈을 들여보는 채로.
네 붉음은 화염으로 그것은 업화. 그러나 정작 불태울 죄인은 이미 멀리 있어...너는, 그 불로 스스로를 태우지 않으려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어.
그리고 그것은 차라리 핏빛. 너는 피눈물을 흘려 온통 사방을 적시는 것만 같았다면.
그건, 지나친 생각일까.
“…에반.”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의 일. 유진은 신입생 시절 친구의 모습을 한 작은 열쇠고리를 얻었다. 어쩌면 네가 생각했던 대로, 우리는 꽤나 닮았던 모양이라는 생각을, 그 작은 조각을 보면서 했지. 그러나 답을 돌려주기에는 늦은 때. 나는….
어쩌면 인생에서 몹시 무거울, 고민을 했었다.
이걸 네게서 감추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게 기만일까, 혹은 네게 건네는 것이 더 기만이 될까.
너는 어느 기만에 더 아프고, 나는 무슨 선택을 해야 내 친구인 너를 찌를 가시가 되지 않을 수 있나.
오랜 고민을 했어. 생각보다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다만 네가 어느 쪽을 원할지 행동하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
유진은 열쇠고리를 들고 가시 돋힌, 그러나 그 비련함에 더 화사해지는 친구를 찾았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피해 '즐거운 일'만을 찾겠다는 제 다짐과는 대치될, 몇 안 되는 선택. 자칫하면 네가 다치고 그 겨를에 저도 충격을 입을 것을 알았지만…, 선택하지 않는 비겁을 고를 수는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 선택은, 너도 알다시피, 처참한 결말을 맞았지.
유예했던 약속은…, 그것을 되돌려받아 가려는가 하는 물음은. 나를 홀연 찾아온 네가 빈 손으로 떠나며 어설프게 지켜졌고, 그럴 것을 알았던 나는 다시 상자를 닫았으니까.
“…이전과 같을 수는 없어. 너나 나나, 살아온 시간이 이미 길어.”
너는 떠나기를 택했으며…, 나는 나의 삶을 십 년간 걸어왔으니. 우리는 우리이기에도 어려울 테지. 어설프게 닿아있던 손끝조차, 지금은 제대로 닿을지 모를 노릇.
그러나 이미 지나간 날로 여전히, 네가 아프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건 십 년 전에도 그랬지. 그래서 나는…,
...그 어느 날의 나는. 지쳐있던 나에게도 남은 마음을 얼마간 네게 쏟아주고 싶었나. 그만큼 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겠지. 닿지 못할 것을 알고는 차라리, 네게 무거울 것이라면…, 내 무엇도 건네지 않기를 택했지만.
그러니까 친구, 우리의 가능성은 그 무렵에 이미 닫힌 거야. 마친 이야기이고, 이제는 애를 써야만 돌이킬 수 있는 종장과 같지.
그것은 끝나기 전의 모양 그대로일 수 없을 것이고, 나는,
돌이키지 않기를 택하겠지만.
사탕 막대를 씹으면, 끄트머리에 남은 단 맛이 혀 위를 채운다.
"화가 나게 하고 싶을 뿐이라면 그만 둬. 애초에 초대하지 않고서는 닿기 어려운 곳일 뿐더러..."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언젠가의 나는, 네가 웃었으면 싶었지만…, 너는 내가 끓어오르기를 바라는가. 그러면 역시 우리는 같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픽 웃음을 흘리고는 느리게 감았다 뜨이는 눈. 그만큼 느른히 열리는 입술 새로 흐르는 부름은.
"이해가 어렵다면 다시 말할까. 나는...."
내가 오직 관심을 두는 것은 본질. 그러나 그것에 천착하겠다고 말한 적 없다.
"본질도 아닌 것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여력도 없어. 하다못해 관심을 갖게 하려면 그 정도는 들고 오라는 소리야. 그렇다고 해도, 그걸 쥐는 것은 내 선택일테고."
네가 내게 방기한 네 어린 날을 쥐지 않고 떠나기를 택하였듯. 내게도 선택의 권리라는 게 있지 않겠는가 하고.
네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쓰는 손은, 머지않아 내려진다. 고개를 기울이는 네 눈에 담긴 물음은 내가 바라는 것을 묻고 있는 듯 하지만.
나는 네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혹은 누구에게도.
오직 누군가의 걱정을 사지 않고자 했던 어린 날과는 또 다른 내가 되었고….
미간을 짚고 말을 잇는 너를 보며,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답을 건넨다.
"여전히 원하는 걸 알지 못한다면 안타깝게 생각해. 이제는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두기도 하고, 혹은 알고 싶은 것을 인정할 나이도 되지 않았나 싶지만…."
무엇보다, 제 몫의 혼란을 책임질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지만, 저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을 테니. 그저 무엇이든, 과한 참견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말끝은 무뎌진다. 실소와 함께 머리를 쓸며 잠시 흩어내는 낮은 한숨.
“…어쨌거나, 괜한 생각을 할 필요 없어. 나는 그저, 반복되는 상황에 조금 질렸을 뿐, 네게 지칠 정도로…, 마음을 쓰지는 않았으니까.”
체온을 섞는 일은 마음을 섞는 일과 다르다고 한 것은, 누구의 말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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