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ce Upon a Time
오늘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를, 담배 한 개비와 커피 한 모금에 의지해 새벽을 태우며 적는 남자는. 누군가의 플롯을 들었다면 다음과 같이 평했을 것이다. 그것은 뻔할지언정, 뻔한대로의 힘을 가진 이야기라고. 그대로 적히든 방식을 바꾸든, 이야기가 내재한 진동을 모를 독자는 없을 것이라고.
아마 네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동화의 작법이다. 그리고 적당히 팔리다니, 이봐. 내 책의 독자들이 얼마나 까다롭고 섬세한지 네가 알아? 그 요구에 맞추려고 나는 나흘을 밤낮 없이 쓰고, 적은 글을 버리고 새 종이를 꺼낸다고.
그리고 이따금 동화를 쓰는 것은 어른들의 과거인, 오래 깃들어 외로운 어린아이를 마주하게 만드는 과정이고…. 그러니 어느 누군가 플롯을 떠올리는 방식은 자체로 훌륭한 것이다. 그는 어느 어린 아이를 소환해 자기 이야기를 꾸린 모양이니.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지금의 동화에 어울리도록 적는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될 것이다.
옛날 옛날, 어느 외로운 악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악신은 너무나 외로워서, 혼자 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모든 동화는 두렵고 외로운 아이의 것이다. 어린 아이의 깊은 잠을 독려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그것은 한 편의 이야기가 할 수 있던 가장 위대하고 만족스러울 일. 어쩌면 애먼 어른들의 놀이보다도 지독한 자극이 될 성과에 가깝다. 그건 ‘동화’를 쓰는 이 치고는 대단히 세속적인 감상이라 한다면, 원래 대개의 이야기는 그런 법이지-하며 능청을 부리고 말겠으나.
어린아이가 읽는 이야기가 가진 위로의 힘은, 상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과 악의 이분을 제시하는 것과는 또 다른 애정이다. 권선징악은 결국 아이의 안전을 위해 만드는, 고리타분하지만 정이 깊은 디딤돌 같은 거거든. 그러니 선악의 구분은 필요해. 그게 어린아이를 자라게 하니까.
예를 들어볼까 나쁜 마녀와 착한 요정. 혹은 짓궂은 못된 요정과 선량한 마법사. 그런 이분이 왜 오래도록 아이의 침대맡 이야기가 되었는가 하면.
네 말처럼 선악의 구분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지. 유진은 동화 작가의 신분으로 동의한다. 사실 동화를 쓰는 작가란, 누구보다 까칠하고 예민하고 냉소적이고도 현실적인, 합리주의자이기 마련이지. 적어도 저로 그 대상을 한정하면, 일반론은 검증 완료된 정언이 된다. 그러니 오직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제가 말하기를. 인간은 모두 선악을 구분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선함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존재야. 그렇게 오늘과 내일은 어제보다 나은 것이 되어 가지. 애초의 선악 개념이란 불명확하고 실은 허상에 가깝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그래.”
수천 년의 역사는 늘 같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 과거를 기억하고 그로 인해 현재를 다르게 쌓으려 시도하는 까닭이다.
과거를 과거로만 읽는 누군가가 있다면 미안하게 됐지만…, 현실의 합리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난 역사를 지키는 것은 현재를 윤택하게 하기 위함이고, 그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이라고.
고고학은 그러니 몹시도 낭만적으로 현재를 이루는 방식이고, 그걸 기반으로 현실을 어떻게 조형할 것인가는 다른 이들의 몫이 된다.
너는…, 네 길에 너무 오래 오래된 것들만이 놓였던가. 하지만 네가 찾아낸 모든 오래된 역사는 이야기로 쓰여 오늘을 이루거든. 어디에선가 네가 찾아내고 구해낸 옛 이야기를 읽었을 내가, 그를 토대로 한 상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적었을지도 모르지. 그건 어느 작은 아이의 침대 맡에서 잠자리 동화책이 되기도 할 거야. 그러면 과거와 현재는, 미래와 섞인 칵테일이 되는 셈이지.
이 과정에서 조금 덧붙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설에 심취했던 과거를 가진 ‘유진’의 존재. 애초에 유진은, ‘과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슬쩍 미간을 그으며 떠올린 것이 있었다.
손을 한 번 휘적이면 나타나는 막대 사탕 하나와 작은 구슬 모양 사탕 여러 개. 적힌 것 없는 흰 종이와 한 자루의 펜. 사과맛 막대 사탕을 입에 물며 유진은 종이를 채운다.
“사람들이 자주 헷갈리는 개념이 있어. 그건 우주와 시간이고, 그 둘을 합치면 좀 더 헷갈리게 되는 모양인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분절될 수 없어. 사실상 미래라는 시간은 없고, 모든 시간은 현재뿐이고, 정확히는,
고개를 들면 네 금빛 눈에는 쉬이 제가 비칠 것을 알아.
“‘지금’의 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없어.”
여기에 놓인, 사탕들과 같아. 알알이 동그란 조각들은 전부 순간에 속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지나온 순간과 지나치는 순간, 예감에 드는 다음의 순간을 엮으려고 하는 기질이 있어. 그것을 엮어 인간만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하고 영속을 기대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영원이라는 건, 얼마나 허망하고 재미있는 개념일까. 영원을 믿지 않고, 그러나 오직 영원을 향하는 인간의 의지만을 기대하는 유진은 홀로 방향이 다른 길을 떠나는 남자를, 친구를, 너를 마주한다.
너 말이야. 알고 있나? 너를 과거로, 나머지를 미래로 구분하는 점이야말로 너와 다른 사람들을 똑같게 만드는 거라고.
과거가 결국 도달할 곳은, 인간이 과거를 엮어 이루는 것은…, 다음의 사탕 한 개. 그것의 이름은 오늘.
작가인 ‘유진’은, …나는 생각한다.
너는 왜 과거로 건너가 영영 그 너머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구는 걸까.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의식에는 무엇이 담기고, 그의 발화에는 무슨 함의가 있는가. 어쩌면….
“세티님, 너는…. 친구를…, 이를테면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너와 엮이지 않길 바라는 것 같네.”
너는 어쩌면 과거를 향해 나아가는 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네 현실은 남들과는 다르고, 같을 수 없고,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그러나 그보다 내 눈에 들고 귀에 들리는 건 다른 쪽이야. 이를테면,
‘나와 엮이게 하고 싶지 않다.‘라…그 기분이야 모를 것은 아니지만.
은둔자는 가볍게 웃는다.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것과 그것이 다를 것을 알면서, 네 것을 파헤치기에는 저조차 제 심연을 열지 않으니.
다만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아. 그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함이고, 자기를 고립시키기 위함이지. 이쪽도 뭐…, 모르진 않지만.
네 기저에 놓이는 것이 친애라는 이름의 애틋함인 것도 낯설지 않다. 나는 친구를, 이를테면 ‘너’를 돌보기 위한 방법으로, 너를 책임지지 않기를 택하는 사람인만큼.
“…실은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아주 단순해. 내가 그리워하면 과거, 두려워하면 미래일뿐. 너는 미래로는 가고싶지 않을 정도로, 그게….”
현재가, 미래가.
“무서운가, 아니면 무서웠어?”
사실은 고고한 이상과 하늘에 닿는 자존감. 그 모든 것의 뒤에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있듯. 언젠가의 너는 두려운 밤을 건너왔을까. 앞으로도 내내 겁을 내고 싶은가. 누구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구덩이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면. 무서운 채로 남고 싶다면….
네가 그렇다면야, 더는 겉으로나마 누구의 손에 이끌려 걷지 않게 된 어른이 된 이상. 네 선택을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적어도, ‘잠을 재우기로 한 오늘’만큼은 제게도 자격이 있지 않는가 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 유진은, 무심하도록 멋대로 손을 뻗을 것이다.
“엮이고 싶지 않아도, 안타깝게도,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
하다못해 외톨이 은둔자인 나조차 너희의 눈에 담겨, 한 순간의 상으로 맺히지 않았는가.
어쩌면 어느 기저에는, ‘아무도 나와 연을 잇닿아 주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이 섞일지 모른다고. 작가의 예감이나 상상력은 나래를 펼치지만. 그러나 그런 때에 저자로서의 유진은 문장을 적는다. 마법이 담긴 기원을 담아. 반드시 누군가는, 당신의 곁에 있을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고.
나는 영광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그래본 적 없지. 그러니 나의 영광은 적당히 집어치워도 좋아.
나는 너와 함께 과거로 가 줄 수 없어. 그건 누구에게도 좋을 일이 아니니. 함께 도망칠 일도 없겠지. 동화 작가가 도망자가 되면 차기작이 나올 수가 없고, 애들에게 글을 읽힐 수 없거든. 나야말로 현재보다는 미래에 가까울지 모르지. 너와는 그럼 정 반대의 인간이 되나. 나의 일은 다음 세대를 기를 토양을 쌓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현재의 과정에 달려있다.
다만 말했듯, 시간은 선으로 구성되지 않아. 시간이라는 개념을 쪼갠 순간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은, 짧은 영원을 함께한 것으로 보아도 충분하지 않겠나.
어쨌거나, 어느 동화를 이어서 적어볼까. 작가는 덧없는 삶을 사는 ‘악신’에게 반드시 온기를 쥐어줄 것이다. 그것이 동화의 루틴이자 숙명. 그가 다정을 얻으면 미래 세대가 될 아이들은 희망과 꿈의 토양을 얻지. 그건 꽤 근사한 일일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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