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방랑자, 혹은 이상을 쫓는 삶에 관하여
유리잔을 매개로 빛은 유난히 밝은 그늘을 내린다. 모든 곳에 공평히 비치는 빛이 예상치 못한 매개를 만나 진행 방향을 달리하는 굴절의 현상, 혹은 무언가의 법칙. 유진은 어두운 테이블에 그리는 빛의 그림자를 가만히 눈에 담는다. 어쩌면 옛 이야기에서 신의 광휘를 발견한 이들은 이러한 경험을 기적이라 명명했을까 생각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불경으로 여길까.
하지만 세티님, ...세티. 변명이야말로 수많은 초고가 필요한 종류야. 네가 아주 잠시라도 서럽거나 원망스럽거나 나를 미워하게 되었다면, 그건 분명 내가 잘못한 탓이겠지.
그러나 조금쯤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은.... 너는 내가 네게 관심을 두지 않거나, 내가 널 버려두는 것 같을까. 이상한 일이지. 나는 내가 바람을 닮은 너를 지나치게 오래 잡아두는 것 같은데도.
하지만 이런 것이야 진심은 되더라도 진실은 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진실만을 취급하는 네게는, 닿지 않을 생각으로 내리깐 눈을 한 채 유진은 잠시 웃는다.
"그렇다면 나는 작가라서, 최선을 다해 진실을 묻어놓는 게 나의 일인데."
오직 진실만을 향한 선서. 유진은 그런 것을 제 것으로 여겨본 적 없지만, 한때는 오로지 진리만을 제 무기로 여겨본 적이 있다. 그것은 십 년도 지난 어린 날의 일. 유년의 순진함이 남았던 날들의 기억.
정설이 아니면 듣지 않고 읽지 않으며, 올바르지 않은 허위를 걸러낸 계단만을 밟아가던 날의 끝은, 제 예상과는 조금도 같지 않게 되었지만... 그를 아쉬워하기에는 이미 건너온 낮과 밤이 세월만큼 지난 탓에.
그러니 찬란한 금빛 눈을 들여다보고, 모든 빛을 삼키는 검은 머리칼을 쓸며 듣는 이야기를 멋대로 이어붙이는 것은 지금의 자신이다. 나는 네가 아니라 진실을 쫓지 않고, 현재의 진실을 발견하기도 어려운 대신 멋대로 이야기를 짜맞추는 유형의 인간이므로. 이번에도 내 마음대로 이야기를 하나 엮어볼까.
이를테면... 마법이 흐르는 사막의 왕국을 배경으로 해보자.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막의 밤과 같은 짙은 머리와, 내리쬐는 태양의 빛을 담은 눈동자를 가졌을 거야. 그는 신으로부터 마법의 힘과 수호의 책무를 받아 과거를 지키는 일을 하지. 그렇지만 과거의 범위란 너무도 넓어서 남자는 일평생을 떠돌아. 신들과 정령들은 마법으로 자아낸 밤의 비단을 방랑하는 남자에게 둘러주고, 어디에선가 생겨난 지팡이는 모래 사막을 짚는 도구가 되려나.
그렇게 오래 떠돌던 남자는 별자리가 되어 사막의 여행자를 수호하는 길잡이가 될지도 몰라. 혹은 방랑자의 수호신이 될 수도 있겠지. 하물며 그가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능력이 있다면, 이야기는 전설이나 신화에 이를 수도 있겠네.
하지만 글을 이렇게 쓰면, 출판사는 퇴짜를 놓을거야. 이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어느 과거'를 왜 지켜내고자 마음먹었는지가 빠져있고, 나는 그걸 알 수 없을 테니.
빈 칸을 채울 것이 무언지 다 알지 못하는 나는, 미완성의 이야기를 억지로 완결짓는 대신 그저 아는 얘기를 하나 할까.
가령 열다섯에 만났던 천재 마법사 왕의 후손. 조금 이상한 별명을 가졌던 동갑내기 친구에 관하여.
그애는 열다섯에도 꽤나 순진해보였는데, 돌이켜보자면 그것은 그애가 가진 강함이었지. 그 어리던 날에도 어렴풋 그를 모르지는 않았다. 제 별 것 아닌 말에 가려진 세밀한 진실을 파내 먼지를 털어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이미 네가 오래 전부터 가졌던 너의, 어쩌면 너를 닮은 재능.
하지만 돌이켜 떠올려도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도 네 마법은 다른 것이었거든. 가령 네가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습관,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유심히 살피고 의문 없이 기억해두는 방식. 혹은 이르게 피어난 현안을 처음 만난 친구에게 기꺼이 나누는 태도.
이런 것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실은 나도 꽤나 옛날 이야기를 오랫동안 되짚는 버릇이 있어. 너만큼 오랜 과거로 거슬러 가기는 어렵겠지만.
너와 아직은 천진함이 남은 어린 날을 나눈 열 다섯. 서로가 조금쯤 다른 길로 갈 것이 예견되었던 열 여덟. 다만 '약속'을 매개로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것이 이전과는 다른 일.
그 무렵의 밤, 혹은 낮. 어린 아이라도 재우는 듯 낮고 조용한 구연은 덕분에 배운 능력. 잠든 곁에서 제 할 일을 하며 이따금 네가 잠들기 어려워하는 까닭을 궁금해하기도 했던가는 이제 떠올리기에는 오랜 일이다. 적어도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어린 영혼이 저 혼자가 아니라는 감상은 조금 오래 남더라도.
그러니 어느 이야기의 주인공을 향하여. 이미 오래 전에 자란 어른의 눈과, 여전한 소년의 버릇을 가진 네게 내가 할 말은 어쩌면 정해져 있다는 얘기야.
언젠가의 습관인 듯, 빼앗아가지 않아도 제 잔을 네게 밀어주고 유진은 느린 시선을 옮긴다. 실소와 같은 웃음 뒤로 더는 호선을 그려내지 않는 얼굴은, 어쩌면 지나칠만큼 차가울 것을 모르지 않지만.
"선과 악에 발을 걸쳐놓고, 정작 지키고자 하는 건 다른 것이니 그렇지."
어느 편에도 설 생각 없으면서 양쪽 모두에 발을 걸치고는, 다른 걸 지키려드니. 어디에도 상처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하고.
선과 악은 불분명하고, 그럼에도 어느 한 편을 골라 제 것으로 쥐는 이들에게마다 네가 미움을 산다면. 그건 분명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너를 질투하는 탓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개념 그대로의 가치가 맞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어느 한 쪽을 고르는 순간 사람은 편향의 색과 냄새를 입거든.
그러니 어느 색도 향도 입지 않은 너는 마치 흑과 백이 아닌 금빛 세계에 혼자 머무는 듯 눈에 띄겠지. 균형을 지키고서 땅에는 발을 딛지 않는 너는, 존재만으로 가시만큼 저들을 찌를테고.
다만 네 기묘한 택일은 어쩐지 인간의 방식이 아닌 듯 비치는 동시에, 삶과 죽음에 발을 걸치고 사랑을 고르는 인간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면. 그건 단순한 착각일까. 다만 지금은 인간의 속성이라고 하자. 네가 동의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네 생애는 그렇다면 영원한 것을 쫓는 삶일까. 이방인의 신을 닮은 이름을 따라가는 길이 되나. 마치 앞선 네 말은 누군가가 쫓아와주지 않아 다른 것에 쫓겨다니기를 택한 듯 들린다면 그쪽이야말로 착각일테니. 그것이야말로 차치하고.
그런 네 선택이야말로,
"…과거를 지키느라 네 현재를 내버려두는 건, 그다지 ‘중간에 선’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러니 결국은 기울어짐을 택한 셈이고, 네가 고른 건 그쪽인가. 유진은, …나는. 네가 네 사명을 쫓느라 버려둔 소년을 떠올린다. 그애는 제게 애틋한 친애의 대상이고, 불면이라는 상흔을 가진 어린아이를 놓아둘 수만은 없는 탓에.
누구의 삶에도 감히 제가 끼어들어 참견할 여지는 없겠으나….
느리게 닫히고 열리는 눈꺼풀은 여전히 너를 향한다. 낮지만 선명할 목소리 또한.
세티.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은 과거뿐인가?"
너는 마치 신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신의 세계에 발을 걸친 반신 같지만. 하지만 친구, 들어봐. 결국 너는 인간일 수 밖에 없어. 여전히 남은 네 흉은 내게 그 증거로 보이지.
너는 신들의 무덤에 남아 수호신이 되는 대신 인간의 세계로 돌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면.
안타깝지만, 인간은 인간적인 삶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지. 네 피가 아직, 여느 인간과 같이 붉은 것이 맞는 한은.
검은 머리 타래의 아랫단을 가볍게 쥐는 유진의 눈은 자연히 내려진다. 손 안에서 흐르는 모래, 밤의 비단결과 같은 것. 그를 가만한 손으로 감은 채 저도 모르게 흐르는 말은.
"인간에게 상처받고 인간을 다치게 하는 일보다…. 공허하고 정처 없는, 바닥조차 없는 이상을 쫓는 일이 더 값지게 느껴지는 것을 나도 알아."
너와 같은 무게와 크기일지 몰라도, 이상을 가져본 적 있는 나는. 하지만….
별을 쫓는 일은 훌륭해. 하지만 바닥을 제대로 밟지 않으면 모래 언덕을 건너는 대신 구덩이에 빠질지도 몰라.
그리고 그 순간 다른 누구도 곁에 없다면, 네가 그 안에 빠져있다는 걸 아무도 알 수 없겠지. 어쩌면 너는, 차라리 그런 것을 바랄지도 모르지만…. 아니, 이런 추측도 그저 제가 가진 억측에 불과하지만.
“네 현실을, 현실의 너를 좀 지켜줘. 네게는 네 임무가 중요한 모양이지만, 내게는 내 친구의 행복이 그보다 귀할 것 같으니까.”
너는 정말로 머무를 현실이 필요 없나? 깊게 잠드는 밤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것인 현실에 여전히 발을 떼지 않은 증명이 아닐까 싶다면, 여전히 내 착각이 될까.
즐겁게 썼으니 편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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