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옛날 일이야
도착한 곳은 창파관이었다. 그러나 율이 알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의 창파관을 두배로 축소시켜놓은 듯한, 단촐한 집이었다. 그곳을 향해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은열과, 백온이었다.
율은 어린 은열의 옆모습을 보았다.
‘너무 어려! 그리고…. 귀여워!’
핸드폰이 있다면 사진이라도 찍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단정한 한복을 입고 있는 채였다. 옆에 있는 백온은 갓을 쓰고 있어서 흔한 조선시대 요괴처럼 보였지만, 은열은 부숭한 더벅머리에 한복만 입고 있어서 현대의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기억은 무슨 기억일까.
“앞으로 나를 사부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백온은 그렇게 말하면서 히죽 웃었다.
도사라더니 태호처럼 경박한 사람이었구나. 백온의 표정에는 ‘이런 귀여운 애를 내 곁에 들이다니!’라는 말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율은 그 둘의 반응을 보는 게 재밌었다. 은열은 지금처럼 말이 많지 않고, 아이인데도 신중하게 말을 아껴서 조숙해보였다. 그러나 백온은 감정 표현이 큰 사람 같았다.
“그런데 설마 또 다른 ‘푸른 늑대’가 있을 줄이야. 놀라고 말았잖니. 그동안 어떻게 살아 남은 거니? 네가 요괴인지도 모르고 다녔던 거야?”
은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온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우리는 고독한 존재지.”
율은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여러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 잠깐만! 가만히 있어! 옷을 입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몇 번 말하냐!”
백온이 은열에게 옷을 입히고 있다. 동물의 형태가 더욱 익숙했던 건지, 은열은 처음에 여러 옷을 입는 걸 거부했다. 그러나 점차 얌전해졌다. 백온은 만족하며 그를 보고 웃었고, 껴안아주었다.
‘귀엽네.’
율은 어린 시절의 은열을 본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다. 그렇지만 그 옆에 있는 백온이, 율보다 훨씬 더 크게 웃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은열과 함께하는 것이,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걸 보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그 다음으로 백온이 한 것은 문자와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은열이 자리에 앉아 책을 무미건조한 말투로 읊고 있었다.
“하늘 천, 따 지….”
은열의 목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지만 말투는 비슷했다. 할 말만 하고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백온이 아무리 칭찬해주어도, 은열은 웃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겠어.’라거나, ‘고마워.’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율은 그걸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귀여웠다. 은열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던 거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파관의 방을 넘어섰다. 이렇게 방을 넘어설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나왔다. 다음에는 무엇이 보일까.
시간이 흘렀다.
문을 넘을 때마다 시간이 흘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슷한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은열의 키가 점점 컸다. 백온은 그대로였다. 말을 거의 하지 않던 아이는 자라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백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도깨비불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요괴를 만날 수 있었다.
율은 불과 몇 분 전에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인간으로 변하지도 못해 젖은 나무 아래에서 떨고 있던 은열을. 그랬던 아이가, 백온과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삶을 알게 되었다. 은열은 줄곧 백온과 함께 이곳에서 같이 살았다. 계속해서, 오랜 시간을.
창파관의 크기가 커졌다. 임시로 있었던 집이 본격적인 집의 형태로 변했다. 둘이 함께 지낸 방은, 율과 은열이, 창파관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곤 했던 사랑채가 되었다. 창파관은 요괴들이 간혹 들리곤 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작은 집은 은열의 세계였다. 율은 그 규모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열은 창파관에서 벗어나는 법 없이, 백온을 통해, 세상을 알았다.
그리고 백온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예, 사부님.”
‘사부님이라고 불렀구나.’
“인간들은 우리보다 오래 살지도 못하고, 치졸하고 비겁하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수가 훨씬 많다. 뛰어난 요괴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수많은 인간들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언젠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야.”
백온은 그렇게 말하며, ‘내가 생각해도 현명한 생각이야.’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은 은열의 옆에서, 백온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서 은열을 슬쩍 보았다. 이 시점의 은열은 상당히 성장해 있어서, 마냥 귀엽다고 부를 수 있는 외모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소년의 티는 여전히 몸과 얼굴에 남아 있었다. 중학생 즈음 될까. 실제 시간은 더 지났겠지만.
그때 은열이 손을 들었다.
“왜 그러니?”
백온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볍고, 날아갈 것 같았다. 백온이 질문을 허락하자 은열은 대답했다.
“사부님, 인간이란 본디 요괴들을 싫어합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백온은 그의 말을 잘못 들었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은열은 자신의 팔 소매를 걷었다.
멍이 들어 있었다. 백온은 깜짝 놀라, 그대로 무릎을 굽혀 은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은열의 표정을 보았다. 어린 소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애처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백온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율은 은열의 그 말투가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인간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니?”
은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연산 아래에서 놀다가, 인간 아이들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으로 둔갑하거나 바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인간 아이들이 저를 먼저 찾았습니다. 그리고 ‘요괴’를 발견했으니, 어린 놈이니까, 지금 퇴치해야 한다고….”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말끝을 흐렸다. 백온은 은열을 이리저리 살폈다.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아이들이 은열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율은 옆에서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가르친 건 본인이었다. 인간을 해치지 말라. 인간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라.
“내가 잘 해결해보마.”
백온은 그렇게 말한 뒤, 창파관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그는 다시 은열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인간들은 우리보다 약해. 그들은 강한 사람을 두려워하는 거란다. 인간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두려워하지. 자신 스스로를 지배하는 ‘왕’을 만들어 낼 정도로 말이야.”
은열은 자신의 머리 위로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어색하고 거북한지, 살짝 얼굴을 찡그리긴 했다. 그래도 내빼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숨어 살고, 인간들을 지배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들과 언젠가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너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율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관통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기분을 소년 시절의 은열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가슴에 누가 불을 질러 놓은 것 같은 듯한 기분이다. 서러운 감정에 가까운, 이 감정은…. 따뜻함. 그리고 약간의 분노.
백온은 은열을 방 안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율은 그를 뒤따라 갔다.
*
창파관의 사랑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았다. 물건이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율이 아는 풍경에 가까워지진 않아서, 아무래도 백온이 어떻게 되기 전의 시간대처럼 보였다. 불이 꺼져 있었다. 창파관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붉은 빛이 흘러 들어왔다.
‘예감이 안 좋아.’
율은 바깥으로 나갔다. 이 문을 나선다고 은열의 기억이 끊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창파관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기억 속의 창파관은, 분명 떠들썩했다. 은열을 보러 온 태호, 백온을 찾아 온 여러 요괴들의 소리들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전혀 닿지 않았다. 마치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불길한 그 붉은 빛만을 제외한다면.
“은열?”
율은 결국 소리를 내어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붉은 빛이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불이었다. 창파관의 불이 아닌, 인간의 불.
요괴가 나타났다!
들려온 목소리는 일본어였다. 율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런 시기에 일본어가 들린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알 수 있었다. 첫째. 조선시대 사람인 은열의 기억에 일본말이 들려왔다는 것은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을 의미한다. 둘째. 푸른소매의 힘이 봉인당한 시기는….
──보였다.
은열의 모습이.
그러나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늑대였다. 율이 보았던 바로 그 늑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습은, 율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집채만한 수준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그 아래에는 인간들이 있었다. 인간 퇴마사들이, 늑대를 묶어 놓고 있었다.
계원의 수작과 비슷하다. 하지만 훨씬 정교해보였다. 무엇보다 사람도 많았고, 은열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봉인해야 해! 이 녀석은 어린 놈이라 제대로 힘을 못 쓴다!
퇴마사들이 전부 일본인들이었다. 음양사라고 불리우는, 외래인들이었다. 그들은 늑대를 염주 모양의 영기(靈氣)로 꽁꽁 묶고 있었다.
‘엄청난 스케일…!’
율은 퇴마사로서 놀라워했다. 그러한 규모의 작업은 본가의 책이나 선배 퇴마사들의 무용담으로나 들어 보았다. 실제로 보는 건 상상과 전혀 달랐다. 훨씬 대규모의 작업이었고, 커다랬으며, 화려했다.
그리고 잔인했다.
묶어!
공중에서 노란 끈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은열의 입을 칭칭 감았다.
“안 돼!”
율은 그렇게 외쳤지만 그들은 들을 수 없었다.
이 일은 원래 일어났던 일이다.
바꿀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율은 절망했다.
은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동물이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진다. 그 커다란 몸집으로 요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허공에 커다란 부적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것이 은열의 머리 위로 얹혀졌다. 그리고….
환상에서 깨어났다.
*
모든 게 그대로였다.
율은 긴박한 영화를 본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창파관에 있는 사람이 늘었다. 유나와 현이 돌아왔고, 청영은 보이지 않았다. 태호도 자리에 있었다.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졸고 있었다. 현과 유나는 깜짝 놀란 것처럼, 율을 보았다.
“끝났어?”
현이 생뚱맞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요….”
둘은 동시에 은열을 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율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곧 깨어났다.
“그래서 뭘 한 거야? 태호도 안 알려주고, 청영도 모르겠다고 하고. 이 아저씨는 자고 있질 않나. 너희 둘은 화염에 가려져서 안 보이질 않나….”
은열과 율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손을 조금씩 떼었다.
의식이 끝났다. 두 사람이 본 것은 아주 많았다. 율은 은열의 눈만 봐도 이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은열은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상태이다.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상태.
“은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일단…. 나중에 이야기해요.”
“응.”
“뭐야? 왜 우리 빼고 재밌는 얘기해!”
“저희도 알고 싶어요.”
유나와 현이 두 사람에 성내듯이 이야기하자, 율은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고요…. 집이 안 탄게 신기하네요.”
“밖에 있는 팥죽 먹어도 돼요?”
“팥죽?”
“솥이 넘칠 것 같아서 일단 불을 끄긴 했는데, 좀 맛있는 냄새가 나서요.”
유나가 그렇게 물어보자, 율은 깜빡했다는 듯이 밖으로 급하게 뛰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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