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연기담

22.

팥죽을 주걱으로 저으면서 그릇에 담았다. 하지만 제정신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은열은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계속해서 사랑채를 힐끗거리며 보았는데, 태호와 은열이 이따금씩 나와 의식을 벌인 재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율은 멍하니, 주걱으로 팥죽을 휘휘 젓고만 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마음이 아프다.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을, 느낀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서 이렇게 팥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잠시나마 은열의 그러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백 년이나 살아온 요괴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문에서 교육을 받을 때에도, 꿈에서 만난 요괴를 보았을 때에도, 아란을 만날 때에도, 책에서 요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에도. 그런데 지금은 몸으로 그 절망을 체감하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족쇄와, 갑작스러운 재앙처럼 떨어진 소중한 이와의 이별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가슴이 아팠다.

“율.”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와줄게. 다 같이 먹을 거잖아.”

“아, 네.”

은열은 율이 담아둔 그릇을 쟁반에 담았다. 그 동작들은 아무런 말 없이 이루어졌다. 다시 한 번,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그건 은열이 답답해서도 아니었고, 율의 마음이 앞서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율은 이상하게 은열만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 온 사람의 몸에는, 시간의 분위기가 배어 있다. 그 분위기는 사람을 힘들케 한다. 얼마나 많은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걸까.

율은 은열을 잠자코 따라갔다.

“은열.”

“나중에.”

은열은 사랑채로 들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또 이런 걸까. 모두가 있는 곳에서는 말할 수 없어서. 아니라면 생각이 아직 정리가 안 되어서. 똑같은 패턴에 익숙해진 건지, 이제는 화가 별로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도 생각으로 가득차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율은 은열과 함께 사랑채로 들어갔다. 어느새 현과 유나가 돌아와있었다. 율은 안으로 들어가며, 시덥잖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온통 은열 뿐이었다. 그는 창파관의 요괴들, 그리고 유나와 자연스레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선은 자꾸만 은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율을 보지도 않은 채, 그저 그곳의 대화에 끼어든 채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고 있었다.

이어진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다. 계약은 제대로 된 것 같은데, 마음 속에 켕기는 게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그와.

*

그날 밤. 저녁을 다함께 먹었다. 유나는 현과 함께 귀연산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태호는 아는 요괴를 만난다고 했고, 청영은 집으로 돌아갔다. 창파관에는 은열과 율밖에 없었다.

율은 처음에 백온의 무덤으로 향할까 싶었다. 그곳으로 향한다면 은열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창파관 사랑방에서 고민하고 있던 율에게, 은열이 먼저 찾아왔다.

“…….”

은열은 문을 열고 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오는 것 말고,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율은 그를 가만히 보았다. 그는 이제 율에게, 그렇게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되었다.

이제 창파관에는 아무도 없다. 다시 둘만이 남아 있다. 어떤 걸 이야기해도 좋고, 무엇을 해도 좋다.

율은 입을 열었다.

“백온 사부님을 봤어요.”

은열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어 율을 보았다.

“사부님은… 어땠지?”

긴 머리의 백온.

경박한 사람.

그렇지만, 좋은 사람. 소중한 경험을 물려준 사람. 한 사람의 세계가 된 사람. 율은 그 거대한 감정을 말로 어떻게 표현할 지 몰랐다. 은열 역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온은 은열의 전부였으니까.

“좋은 사람이었어요. 멋진 사람이고요.”

은열은 그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이 많이 그리우신 거잖아요, 은열은. 그렇지 않으면 무덤에 매번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고요.”

“매번까지는 아니야. …태호가 또 쓸데 없는 이야기를 했나 보군.”

과연 은열도 무덤의 사념체와 이야기한 적이 있을까? 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알려주는 게 좋겠지.

“사실 백온 사부님과 이야기한 적 있어요.”

“무덤에 있는 ‘그것’인가.”

은열은 냉담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진짜가 아니야. 사부님이 남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인형에 가까워. 그게 말하는 걸 믿지마. 그곳의 기운과 귀연산의 요괴들 기운이 뒤섞여, 이상해져버린 녀석이니까.”

율은 은열의 냉담한 반응에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은열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있는 곪은 부분을 보아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그 녀석이 뭐라 그랬지.”

“‘잘 지내서 다행이다’라고 말했어요.”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허공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평소에 그런 말을 듣지 못한 걸까? 하지만, 백온이 직접적인 표현을 안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주둥이가 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은열을 생각했다. 백온 도사는 그때 봉인되어 있었다. 은열이 그걸 막으려고 했지만, 퇴마사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 무력함. 아무것도 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은열은 오십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살아 왔을 것이다.

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은열에게 말했다.

“백온 도사님은 당신을 용서했을 거예요.”

그의 말에 은열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확신해.”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절망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지? 죽은 사람은 말하지 않고, 관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아. 나는 사부님을 구하지 못했어. 그건 변하지 않아.”

가슴이, 찔린다.

몇 번이고 곱씹은 그 생각은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율은 생각해보았다.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한낱 파트너 주제에, 그 몇 백 년의 세월이 인간들에 의해 허무해진 그 순간을, 과연 내가 덮을 수 있을까?

율은 울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 원혼은 ‘잘 지내었으면 됐다’라고 말했어요. 은열도, 죽은 사람은 그런 말을 안 하는 거 알잖아요.”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은열의 손을 잡았다.

“은열과 계약하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가슴이 답답했어요. 그건, 은열이 그만큼 백온 도사님을 소중하게 생각해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분을 놔줄 때도 되었어요.”

은열은 율의 눈을 보았다. 지금, 율의 눈은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강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은열은 되려 율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 인간은 무엇이기에 나를 이렇게 믿는가.

“저를 믿어주세요.”

율은 그렇게 말한 다음, 웃어보이려 했다. 그러나 참은 눈물이 눈에 새어나왔다. 아, 지금 이런 표정을 지으면 엄청 별로일텐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손으로 눈을 닦았다.

“뭔가, 제가 대신 울어주는 것 같은데요…. 아까 그걸 하고 난 다음에, 은열과 더 강하게 동조되었나봐요.”

“응. 나도…. 지금, 기분이 이상해.”

은열은 손을 잡은 다음, 율을 보았다.

“평소에 이렇게 밝은 기분으로 살아갔구나.”

은열은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슬쩍 올려보였다. 미소가 더욱 자연스러웠다. 율은 그 모습을 보고서, 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인간 퇴마사는 울지를 않나, 그걸 보는 푸른소매는 평소에 짓지 않던 미소를 짓지 않나.

“제가 한 밝음 하긴 하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헤실헤실 웃었다.

“고마워, 율.”

은열은 맞잡은 율의 손 위에, 자신의 다른 손을 올려 놓았다. 그 커다란 양손으로 율의 손을 꽉 쥔 다음 고맙다고 말하는 요괴가, 율의 눈앞에 있었다.

“사부님이 날 용서했다는 말은, 솔직히 믿기 어렵지만…. 그렇게 받아 들이려고 노력해볼게.”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네요, 뭘!”

율은 그렇게 말한 다음 눈가를 마저 닦았다. 감정이 동조되어서 그런지,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비단 그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수한 기쁨이 자라나고 있었다.

은열은 율을 보고 따스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진정될 즈음에 입을 열었다.

“나도 네 어린 시절을 봤어.”

“헉.”

어린 시절의 뭔 기억이 있을까? 아빠한테 혼난 거? 아니면 할머니랑 수련한 거? 옛날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예전에도 요괴랑 만난 적이 있었던데.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기억해?”

─어?

율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요? 전에 요괴들이랑 만난 적이 있다고요?”

“응.”

은열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 두 명과 뱀 형태의 요괴 한 명, 그리고…. 새처럼 생긴 요괴.”

──꿈에 나타난 요괴들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갑자기 마음이 낙하하는 기분이 들었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며, 가슴을 쿡쿡 찔렀다.

“으….”

“왜 그래?”

“아니, 그냥….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전혀 기억할 수 없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분명 알아도 좋을 게 없을 거였다. 율의 내면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은열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는데, 네가 그러지 않으면….”

율은 손을 내밀어서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괜찮아요.”

너무 칼같은 차단에, 은열은 당황했다. 그는 율을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생각해봐. 네가 겪었던 일은 진짜로 있었고 그 요괴들도 진짜로 있었으니까.”

은열은 그렇게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외면한 것처럼 너 역시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간은 걸리겠지만, 옆에서 최대한 도와줄 게.”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 꿈을 해명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분명 좋지 않은 결말을 맺고 만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지금 은열이 있다.

율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앞으로는 창파관의 일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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