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Q사 메일 답신 건] 신년 선물 배송
보낸 사람: Extra B, 받는 사람: 검은 산양
검은 산양님에게,
원래 메일은 이렇게 시작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 쪽에 편지로 발송된다면 이 쪽이 조금 더 편지를 읽을 때 좋을테니 한 번 적어봤어요. 그리고 산양님의 편지를 읽다보니 저도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문이 아니면 마냥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를 하진 못 할 듯 해서 적어봤어요.
보내드린 선물들은 제 나름대로 고심한 끝에 골라 보내드린 건데 도움이 되실까 모르겠네요. (가벼운 농담이지만, 외국인인 친구에게 선물을 사서 보내는 기분이 들었어요. 제 선물을 고르는 안목이 없는걸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전의 답례와 새해의 축하 인사로 여겨주세요.
주신 편지는 꽤 한참 읽고 고민했어요. 한 문단문단들이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하여, 많은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퇴근을 하고 편지를 읽으면서 이런 깊은 생각을 하게 된 건 오래간만인 것 같아요. 바쁘고 어영부영 살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기도 꽤 힘들어지거든요.
저는 길을 잃은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어디로 가야할 진 잘 모르겠어요. 씨앗이라고 표현해주시는 결핍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많은 가량 발버둥을 치는거겠죠. 그 과정들은 참 빛나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성공을 해 이름을 알리고, 명성을 얻는거고요. 누군가는 그 과정중에서 행복을 얻는거겠죠. 지금의 저에게 있어선 꽤 멀고도, 먼 일 같아요.
아마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저는 어쩌면..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부러워하고, 선망하는걸지도요. 그건 저에게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것이 저를 완성할 것 같진 않아요. 저는 천피스의 퍼즐같은 건 아니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퍼즐처럼 전부 끝이 있고,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검은 산양님께서는 어떠한 존재에게 완성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그 완성은 무엇일까요, 어떠한 형태일까요? 검은 산양님은 거기까지 도달해보신 적이 있나요? 혹은 그런 존재를 본 적이 있나요?
전 매번.. 삶을 살면서 어떠한 답이 필요할 때마다, 결국 세상엔 답이 없다는 걸 알고 두려워하는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굳이 예를 들자면, 그렇네요. 지금의 내 수능성적으론 갈 수 있는 마땅한 대학이 없다던가, 대학에 가고 싶어도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다던가요. 돈은 벌어야하는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거나, 지금 당장 저녁 사먹을 돈이 없다던가요. 사실 그런 것들을 채울 수 있는 건 타협과 낙담과 인내가 전부거든요. 물론 그 사이에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도 참 많지만요.
사실 전 그렇게까진 못 하겠어요. 다들 가난을 버티고 박박 기어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해서 성공하면 달라질 거라는데, 그 고통을 참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리 열심히 살고 싶진 않아요. 좀 바보 같은 표현이었을까요? 그렇지만.. 힘들잖아요. 전 뭘 이루는 데 있어서 힘든 걸 참는 데 여간 재능이 없나봐요. 혹은.. 가지고 싶었던 걸 가졌을 때의 성취감이나 행복감, 뭐.. 그런 것들을 배워본 적이 없다던가요. 사실 뭘 이루고 가져서 행복해봤던 적도 별로 생각나지 않거든요. 그렇네요.
인생에서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목표가 있고, 그것만 바라보며 닮아가면 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꽤 짧지만, 긴 29년이란 시간을 살면서요. 물론 학창시절에는 인서울이니 뭐니, 좋은 대학에 가는 게 그 목표로 세워진 적도 있었지만요. 지금은 없네요. 아마 이것에 대한 답을 찾는 게 길을 찾는거겠지란 생각만 어렴풋 드네요. 너무나도, 막연하고, 멀지만요.
이전에 주셨던 편지들을 천천히 흝어보면서 저를 곱씹어 봤어요. 아마 제가 가진 것들은 전부 위태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것들이라 그리 값어치가 높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씀해주셨던 분의 그 고독이 안정적이고 희소했던 이유는 참으로, 참으로 그 고독이 깊고 그것만이 그를 살게해서가 아니였을까 싶네요, 그 고독이 그의 삶을 온전하게 한거겠지요.
대한민국은 꽤 돈이 중요하거든요. 사실 이 지구 상의 대부분의 나라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에 따르지만요. 저희 나라는 참 돈이 많은 것들을 바꾸는 나라 중 하나기도 해요. 그게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까요. 여러모로 돈의 단위와 가치는 꽤 무거운 값을 하죠.
조금 외람된 말이고, 상인으로서의 객관적인 의견을 묻는 말이기도 하지만, 저라는 존재는 얼마의 가치를 지니나요? 당신이 충분히 값어치를 내고 살만한 존재인가요?
저는 참 많은 가량 자신이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드네요.
아마 저의 변화는 이 편지로부터 시작되는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정말 많이, 정말 정말 많이 길을 잃었다는 걸 세삼스럽게 깨달았어요. 제가 변화를 일으킨다면, 조금은 무섭지 않은거였으면 좋겠어요. 이 추운 새해가 더 춥지 않도록요.
매번 답장해주셔서 감사해요. 내용이 굉장히 무겁고 어려워졌지만.. 저에겐 꽤, 정말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부디 하시는 일들이 잘 진행되시고 있기를 기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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