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거리로 가자
비묘사서 美司書 / 산책 신뢰도 100 대사 네타가 있습니다. (22.09.01)
"좋아요."
"네?"
"떠나자구요."
"어, 어디로요?"
"어디든 상관없지 않겠어요?"
야마다는 그 대답을 듣고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실제로 도망갈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말을 되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전철에 탑승한 뒤였다.
열차에서 내려 가마쿠라鎌倉 역에 처음 발을 딛자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열차가 역에 정차하며 불어온 바람이었다. 낯선 도시라는 점이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일까, 역의 풍경은 별로 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길에 올라탔음을 느끼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평일 오전인데도 역 앞은 북적였다. 사람들은 에노덴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역의 출구로 걸어가며 저마다 들뜬 얼굴로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다는 죽상이었다.
"우리가 몰래 빠져나왔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할 건가요! 아아, 지금쯤 도서관은 대혼란일 텐데..."
"알고 있어요."
"그러면 왜!"
"그야, 선생님이 같이 도망가자고 제안했으니까."
"......"
야마다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다.
'저기, 후회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랑 같이 도망갈래요? …라던가.'
분명…말하긴…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가 늘 던지는 짓궂은 농인 줄 알고 두근거림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했다.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뭐, 사랑은 언제나 제정신이 아닌 법이니 어느 정도는 진심도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진지하게 던진 말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망친 후의 감당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정부 소속이라는 신분도 직업도 임무도 사명도 모두 벗어던지고 둘이서 사랑을 위해 훌쩍 떠나버리면, 그 다음은? 다음을 책임져주는 타인은 아무도 없다. 둘만의 세계를 위해 도망쳤다면 세계의 책임자는 오직 둘뿐. 앞으로의 모든 것을 난폭한 운명에 맡기고 계속해서 도망치며 살아야 한다. 당연하지만 야마다는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사랑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냥 입버릇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자신의 업보다. 사서의 말대로, 도망가자는 말은 야마다 자신이 먼저 꺼내지 않았는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녀를 잘 설득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로 도서관에 함께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구질구질하게 그냥 해본 말이니 우리 돌아가자, 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체면이 있지! 아름다운 풍경도 기분 좋은 공기도 모두 별세계 이야기다.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시련-이라기에는 확실한 업보였지만-에 야마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아, 입버릇이 또 이렇게 일을 키울 줄은! 이놈의 입, 입, 입! 그러나 후회해봤자 이미 열차는 가마쿠라에 도착했고, 바다가 보이는 역의 맞은편에서부터 소금기 실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며, 언제 챙긴 것인지 여행 안내서를 보고 있는 사서는 신 나 보이기까지 했다.
"일단 밥 먹으러 갈까요. 온 김에 코마치도리小町通り 구경도 하고 싶고요."
"태평하시네요, 이런 엄청난 일을 턱 저질러 놓고."
"일단 배를 채워야 뭐라도 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아침도 안 먹고 나왔잖아요."
아침 일찍 나와 전철을 탔으니 아침밥을 먹을 시간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야마다는 간밤에 깊게 잠들지도 못했다. 어젯밤 사서가 긍정의 대답을 보인 이후로 신경이 쓰여 영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얕은 잠이 들었다. 오후까지 뒹굴거릴 생각으로 창밖의 새소리도 무시했다. 물론 그 모든 계획은 아침 일찍 방문을 두드려 사람을 깨워놓고는 '준비하고 나오세요.'라는 영문 모를 말 한마디를 뱉고 유유히 사라진 사서에 의해 모두 무너지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리하여 이것이 잠도 깊게 못 자고 아침밥도 못 먹은 가엾은 야마다가 가마쿠라 역에 사서와 둘이서 서 있는 이 중대한 사건의 전말이었다. 물론 가엾다고 하기에는 지금 이 상황의 모든 것이 순전히 그의 업보 탓이기는 했다.
"점심 카레로 괜찮죠?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식당이 있어서."
야마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조금도 괘념치 않는 듯 사서는 그렇게 말하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의 손을 잡고 성킁성큼 걸어 사람이 붐비는 역사를 빠져나왔다. 동쪽 출구를 빠져나오니 저어기 끝에 거대한 붉은 토리이 같은 건축물이 코마치도리의 입구를 알리고 있었다.
"자, 갈까요?"
사서가 환하게 웃었다. 야마다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따라 웃으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지 않았던 가마쿠라 도피여행의 시작이다.
신기하게도 점심을 먹고 나니 제법 기분이 괜찮아졌다. 세상의 모든 비참한 기분은 공복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야마다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서가 끌고 간 식당에서 했던 식사가 제법 만족스러웠던 탓이다. 오픈 직후에 들어가 쉽게 앉을 수 있었지만 과연 유명한 곳인지 잠시 뒤에는 줄이 꽉 차 대기 손님이 생기기까지 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가게에서 나오자 그제야 주변이 좀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 들뜬 얼굴의 사람들은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렸고, 낯선 풍경들과 표지판이 여기가 가마쿠라라는 것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는 낯선 도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함께 섞여 복잡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야마다는 아무 말 없이 사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골목 한쪽에 서서 여행 안내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래도 가마쿠라까지 왔는데, 뭔가 유명한 곳 구경을 하는 게 좋을까요?"
"유명한 곳이라고 하면?"
"신사라던가?"
그렇게 말하며, 사서는 안내서의 신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야마다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슬쩍 쳐다보며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야마다는 좀 어이가 없었다. 여기까지 멋대로 끌고 온 것은 당신인데, 왜 이제 와서 내 눈치를 보는 거람? 그러나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서가 어쩐지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다는 생각까지 멋대로 사고가 도달하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야마다는 조금 더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가 보죠,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잖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의외일 만큼 흔쾌한 목소리였다.
야마다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사서는 관광 안내서를 탁 소리 나게 덮더니 가방 안에 적당히 집어넣고는 그의 옷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그럼, 갈까요! 사서의 말에 야마다는 못 이기는 척 끌려갔다. 앞으로 일어날 예정인 이런저런 문제들을 생각하면 관광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은 그 문제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기로 했다. 야마다를 잡아끌었던 사서의 표정은 지금껏 본 적 없는, 그러니까….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표정을 좀 더 가까이서 느긋하게 보고 싶었다. 두사람은 코마치도리의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걸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예, 아무렴요…."
평온한 척하는 대답과는 달리 음료수를 받아드는 손은 무안할 정도로 머쓱했다. 야마다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사까지는 잘 갔다. 경내에 들어가서 손도 씻고 기도도 했다. (도서관에 돌아가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서가 에마를 사서 소원을 적고 거는 것까지 나름대로 즐겁게 지켜봤다.
"뭐라고 적었어요?"
"비밀이에요."
"저한테도? 같이 도망친 사이인데 알려줘도 좋잖아요."
그렇게 말했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미소 지으며 '선생님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은 따로 있다'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지만. 아무튼 거기까지는 다 좋았다. 날씨도 나쁘지 않았고, 줄곧 들떠있는 관광지 분위기도 싫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에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자기 말 그대로 코앞에 있는 풀숲에서 튀어나와 달려들다시피 야마다의 옆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깜짝 놀라서 고양이를 피하려다 다리가 꼬여서 삐끗했다.
잘 걷다가 달려든 고양이 때문에 놀라서 넘어질 뻔하다니. 그대로 근육이 놀라서 한 걸음만 내딛어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탓에 앉아서 쉬고 있는 꼴이라니…. 체면 운운한 것이 무색할 정도의 수모다. 달리 할 말도 없어서 야마다는 가만히 앉아 애꿏은 연못만 노려보았다.
연못 근처의 벤치는 나름대로 조용했고 물 위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여럿 떠다니고 있었다. 새들은 사람들이 자주 먹이를 줘서 그런지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은근슬쩍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들이 어쩐지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사서는 야마다의 옆에 조용히 걸터앉아 작은 오코노미야끼를 우물거렸다. 언제 사왔나 했는데 아까 마실 것을 사러 가는 김에 사 온 걸까.
"맛있어요?"
"음, 그냥 노점 오코노미야끼 맛."
그렇게 대답하는 것치고는 먹을 때 표정이 제일 즐거워 보인단 말이지.
"다리는 좀 괜찮아졌어요?"
"예, 뭐 덕분에요. 조금만 더 쉬면 걸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아침부터 끌고 나와 무리시키고 있는 사람이 말은 잘한다. 야마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서는 마지막 남은 오코노미야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뭔가 먹을 것을 주지는 않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근처의 비둘기들이 어디론가 퍼드득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쏟아지는 햇빛이 바람과 함께 나뭇잎 사이를 통과해 사서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연못 위로 떨어진 빛무리가 반짝이다가 흩어졌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사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용히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마다는 그 옆모습을 훔쳐보듯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름대로 제법 멋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갈까요. 아직 봐야 할 곳도 남은 거죠?"
그렇게 손을 내밀자 사서는 동그래진 눈으로 야마다를 쳐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뭐지, 이 침묵은. 야마다는 내심 당황했지만 그걸 겉으로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는 손을 거둬도 이상하고 그대로 있어도 이상하지만,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나을 거라는 순간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아주 잠깐이었겠지만 겪는 사람으로서는 천년의 세월 같은 시간이었다. 이윽고 사서가 야마다의 손을 잡았다.
"네, 갈까요!"
"대답이 느리잖아요."
"후후, 저도 모르게 그만."
"머쓱하게 만들지 말아달라구요."
야마다는 짐짓 토라진 체 불평을 내뱉었다. 사서의 상쾌하고 경쾌하기까지 한 대답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는 것은 비밀로 해둘까.
두 사람은 다시 걸어서 가마쿠라 역으로 향했다. 초록색 바탕에 '에노덴 승강장'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니 아까 내렸던 역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승강장이 있었다. 두 역이 서로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관광 명물이라 그런지 작은 역에도 제법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야마다가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사서는 게시판에 붙은 시간표를 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행사의 광고 포스터나 안전 주의 안내문 옆에 비교적 작은 크기로 붙어 있는 녹색 시간표에는 열차가 12분에 한 대꼴로 들어온다고 적혀 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곧 에노덴이 들어오며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조종실 앞칸에서 보는 풍경은 옆 창문으로만 보는 풍경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눈앞으로 쭉 펼쳐진 선로를 따라 움직이는 열차는 꼭 놀이공원의 어트랙션 같았다. 가마쿠라 역에서 목적지인 이나무라가사키까지는 대여섯 정거장 정도가 걸릴 터였다. 야마다는 그 시간 동안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뜬 사서의 표정이라도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마을의 풍경들은 낯설지만 포근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도망쳐왔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 평화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쓴웃음이 삐져나왔다. 일단은 관광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니고 있지만 오늘이 끝나면 내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도저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언젠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그 언젠가라는 것도 이렇게 갑자기 닥쳐오면 당황스러울 뿐. 준비되지 않았을 때 찾아온 기회는 달갑지 않다.
차라리 도서관으로 돌아가면….
아니, 그건 또 아니지.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자신들이 투닥거리며 맞부딪친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이 전부 마음에 안 드는가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단둘이 여행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정말 즐겁다는 듯 웃는 사서의 얼굴은 평소 도서관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귀한 표정이라 어쩐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 그녀의 일부분을 독점하고 있다는 낭만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한 시선으로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맞은 편의 어린아이의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하긴 애꿎은 머리카락을 괴롭힌다고 해서 그럴듯한 해답이 나올 일은 아니다.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 밖을 바라본다.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철길을 따라 달리던 열차가 천천히 이나무라가사키 역에 정차했다. 사서는 내리자마자 뭔지 모를 종잇조각을 들고, '그러니까 이 방향이라는 거지….' 따위를 중얼거리며 야마다를 끌고 또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 슬쩍 봤더니 손으로 그린 어설픈 약도였다. 그건 또 어디서 났어요? 하고 묻자, 아까 신사에서 오코노미야키를 살 때 노점상에게 슬쩍 가볼 만한 가게를 물어봤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추천해주며 약도까지 그려줬단다.
"당신의 친화력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그런가요? 이 정도는 보통 아닌가요? 그냥 관광객에게 추천해준 것 같던데."
"그렇다고 약도까지 그려주지는 않죠, 보통."
하긴 그런 친화력이 또 장점인 사람이긴 하지만.
종이 위에 그려진 구불구불한 선을 따라 걷다 보니 평범한 주택이 가득한 민가 골목에 과연 카페가 하나 나왔다. 인기가 있는 가게인지 생각보다도 관광객이 많은 느낌이었다. 현지인 추천 가게라고 해서 숨겨진 맛집을 생각했건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애매한 시간대인데도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밝은 목소리의 '어서 오세요!'가 들려왔다. 비어 있던 창가 쪽 자리에 앉자 점원이 금방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사실은 여기, 식사류가 맛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애매하죠."
"확실히, 밥 먹을 시간은 아니죠."
사서는 조금 투덜거렸다. 늦은 점심을 먹기에도, 이른 저녁을 먹기에도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아침을 늦게 먹었으니 별수 있나, 그게 아침 겸 점심이었는걸. 하는 수 없이 시선을 음료 메뉴가 있는 쪽으로 옮겨 커피 두 잔을 주문한다. 야마다는 오늘의 블렌드, 사서는 아이스 라떼였다.
카페 안에는 가벼운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전축인지 가끔 소리가 튀었다. 멜로디에 맞춰 발끝을 까딱거리던 사서가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야마다에게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아침부터 나와서."
"허어."
인제 와서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었던 말인가. 그 말대로 잠도 덜 깼는데 다짜고짜 끌고 나온 것은 본인이지 않은가.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참 의외의 발언이다.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감탄이 아닌 의미로 감탄사를 내뱉자 사서가 조금 뚱한 목소리로 받아친다.
"뭐예요, 그 반응. 저도 조금은 신경 쓴다구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신경써야 하지 않나요?"
"후후."
불리할 때만 웃음으로 넘어가기는. 이 기회에 무언가 그럴듯한 불평을 조금 더 말해 주려 했는데, 타이밍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주문했던 커피가 나왔다. 사서는 잽싸게 커피잔을 손에 쥐었다. 어찌나 민첩한 움직임이었는지 더 이상의 잔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결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전에 유행했을 법한, 나쁘게 말하면 촌스럽고 좋게 말하면 레트로한 튤립 무늬가 그려진 얇은 유리잔 속에서 각진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야마다가 주문한 오늘의 블렌드에서는 약간의 산미가 느껴졌다. 희미한 과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있죠, 선생님."
"네에."
일부러 말을 피했던 사서가 그렇게 운을 띄워서, 야마다는 비꼬듯 말꼬리를 늘여 대답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사서가 앉아있는 쪽을 돌아보자 오후의 햇살이 한줄기, 두 사람이 앉아있는 사이를 비췄다. 그 분위기가 어쩐지 심상치 않아서 야마다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멀리에서부터 덜컹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사서가 뺨을 복숭아색으로 물들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균형이 크게 무너져버릴 것 같은 애매한 침묵이었다. 잠시 뒤 사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부끄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살짝 옮기며, 옅게 미소 짓고.
그러니까 꼭, 고백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는데,
"저는, 선생님이랑―"
다음 말은, 선로를 달리는 열차 소리에 묻혀서―
"잠깐, 못 들었어요."
멋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마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적당히 알아들은 척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야마다의 전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꼴불견이라도 상관없다. 지금 사서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모른다면 영영 모르게 될 것 같았다.
야마다의 말을 들은 사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아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두 번은 말 안 해줄 거예요."
"……."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쪽에서 보챌 수도 없고.
끌려다니며 휘둘리고 있으니 왠지 진 기분이었다. 나는 당신의 속을 도저히 모르겠는데, 당신은 꼭 나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야마다는 엄청나게 손해 본 기분이 되어, 애꿎은 커피만 벌컥 들이켰다. 처음 잔을 받았을 때는 뜨거웠던 커피가 어느새 적당히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어 있었다. 아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커피 맛도 제대로 안 느껴진다.
휘둘리는 건 적성이 아닌데. 나는 휘두르는 쪽이라구요.
오늘의 사서는 온종일 태평한 태도로 야마다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당장 지금도 야마다가 입을 댓 발 내밀고 있어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지금 막 전축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스윙 재즈의 리듬에 맞춰 유리컵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야마다는, 정말로 그녀는 이것저것 다 던져버리고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이렇게나 태평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겨우 눈이 마주친다. 사서는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지었다.
"바다, 가요."
"바다?"
"가마쿠라까지 와서 바다를 안 보고 갈 수는 없잖아요?"
괜찮죠? 하고 동의를 구하는 표현도 아니고, 가볼까요? 하고 권유하는 표현도 아닌, 드물게도 강한 어조. '가자'는 말을 들어버리니 바다에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야마다는 투덜거리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창밖으로 전차가 또 한 번 철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거의 저녁에 가까운 시간대였는데도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있었다. 해가 긴 것을 보니 여름이구나, 야마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름이 온 지는 이미 한참 지났는데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나무라가사키 역부터 바다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와 역을 지나 철길을 건너 길을 따라 쭉 걷기만 하면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졌으므로, 굳이 근처의 공원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바람을 타고 오는 짭조름한 냄새를 따라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밟았다. 밀려왔다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발치에서 부스러지는 흰 물거품들이, 바다가 내는 소리가, 모든 것이 여름을 말하고 있었다.
길도 없는 바다를 사서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평선 너머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 헝클어뜨렸다. 한 걸음 앞을 가는 사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야마다는 앞선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각거리는 모래 소리가 났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분명히 있는데, 왠지 말로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글을 엮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인데도, 어쩜 한심하게도. 그렇게 입술만 달싹거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앞서 가던 사서는 어느새 멈춰 서서 눈을 감고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야마다도 따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해야 할 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 자신이 뱉는 말은 언제나 마음까지 따라와 주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서, 결국 야마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아, 어쩜 이렇게 한심한지. 거대한 바다를 앞에 두고 서 있으니 더더욱 자신이 작아 보였다.
저녁 노을의 색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세상은 온통 아름다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닷바람에 사서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것을, 그 옆모습을, 야마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이건 몇 년이 지나고 나서도 눈에 담아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장면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의 빛깔과 냄새와 공기 속에 언제까지고 머무르고 싶었다. 물살이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사서가, 열렬한 시선을 느낀 듯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선생님."
"…네."
"표정이 죽상이에요."
사서가 야마다의 볼을 쿡 찔러 입술을 위로 밀어 올렸다. 그제야 제 표정이 줄곧 굳어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야마다는 몸을 슬쩍 뒤로 빼며 머쓱한 듯 시선을 피했다.
"오늘 재미없었어요?"
"재미없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선생님이랑 둘이서 모르는 동네 구경하는 거, 저는 재밌었어요."
야마다는 복잡한 마음으로 가만히 사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서 좋았어요. 계속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시간이 안 나서 방문하지 못했던 음식점에서 식사했던 것도 기뻤고요. 거리 구경도, 신사에서 에마를 사서 소원을 적은 것도, 에노덴도, 카페에서 마신 커피도, 저는 전부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들릴 듯 말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사서는 키득거렸다.
"이렇게 같이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어서 기뻐요."
"사서 씨."
"오늘은 미안했어요. 너무 억지 부렸죠?"
마음이라는 것은 참 묘하게도 금방 억울함이나 섭섭함에 울컥하는가 하면 또 한마디 말이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풀려버리는 것이라서. 소금기 섞인 바람을 등지고 노을빛으로 물든 바다와 제 모습을 눈동자에 담고 지금 이곳에 함께 서 있는 사서를 보니, 야마다는 온종일 느꼈던 불안함이나 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속상함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아졌다. 이제야 결심이 섰다. 함께라면 괜찮을 것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설득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설득되어 버렸구나.
야마다는 사서의 손을 잡았다.
"이제 어디로 가죠?"
그 체온을 거부하지 않고, 사서는 야마다를 향해 미소 지었다.
"도쿄역으로 가요."
"그 다음에는?"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카라멜 쿠키를 살 거예요. 코요 선생님에게 선물로 사 가기로 약속했으니까."
"네?"
"네? 라뇨. 돌아가야지요? 도서관으로."
야마다는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제 귀를 의심했다. 사서가 기어이 꺄르륵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진짜 안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어쩐지 죽상이더라니!
"그야, 당신이 먼저!"
"아하하, 하하하…."
"정말, 웃지 마세요! 저는 진짜로―"
"선생님."
정말 즐겁다는 듯한 표정으로, 사서가 야마다를 불렀다.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저는, 선생님이랑 휘두르고 휘둘리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함께."
"네?"
"오늘 두 번 말했답니다."
"예??"
물론 야마다가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카페에서도 어쩌면 이런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말해달라고 보채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들어버리면…. 되물어볼 수밖에는….
"한 번만 더 말해 주세요."
"후훗, 세 번은 안 말해요? "
장난기 가득 섞인 목소리로 사서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야마다의 손을 잡아끌며,
"자, 가요! 여기서 꾸물거리다가는 도쿄역에 있는 쿠키 가게가 문을 닫아버릴 거라구요."
하고, 모래사장을 힘차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해가 넘어가며 천천히 검푸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저어기 하늘 어딘가의 한쪽 끝에서는 손톱만한 초승달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아아, 오늘은 완전히 당해버렸구나. 신발에 잔뜩 들어간 까끌까끌한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야마다는 머릿속으로 백기를 들었다. 코요는 분명히 이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 돌아가면 가장 먼저 찾아가 카라멜 쿠키를 던지고 빽 소리를 질러주리라 야마다는 다짐했다. 뭐, 돌아오는 것은 '그러니까 입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같은 고리타분한 잔소리겠지만.
그 하루 사이에 조금 익숙해진, 하지만 아직은 낯선 도시의 기분 좋은 바닷바람이 야마다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멀리서부터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마다는 사서를 따라 바다로부터 거리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을 올랐다.
앞으로도 아마도, 휘두르고 휘둘리며 살게 되지 않을까,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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