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감기

우로랑 마유

끄적끄적 by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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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로는 익숙해졌다.

홀로 지새우는 밤에. 두 명분의 온기에.

차디찬 겨울바람과 꽃샘추위도 보내고, 따스한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을 맞이했다.

추운 날들이 지나갔으니 다음 추위가 오기까지 추울 일은 없었다.

그리 생각했다.

*

여우로의 부재를 알아챈 사람은 당연하게도 륜이었다.

륜의 옆자리가 여우로였을뿐더러, 륜이 소년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또 누가 괴롭힌 건가?’

그건 아닐 텐데. 그 형제의 일로 누군가가 괴롭히면 륜이 항상 저지했다. 이를 몇 번 반복하자 괴롭힘은 잦아들었고, 하늘마저 합류하자 결국 노을이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여우로 역시, 학당을 다시 나온 뒤로는 누군가 괴롭힌다 한들 집에 틀어박히지 않았다. 자길 위해 화내는 이들 뒤에서 멍청이들을 한심한 눈으로 봐줄 뿐. 그 후로 계절이 두 번 바뀌었으니 여우로를 힘들게 할 일은 없을 터였다.

'우노도 없네?'

형이 없어도 여우노는 꼬박꼬박 학당에 나왔다. 이건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륜의 비상한 머리가 돌아갔다.

*

콜록.

륜이 맞았다.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여우로는 작게 기침하며 무거운 눈을 떴다. 텅 비었던 눈에 달이 차올랐다.

무거운 건 몸도 마찬가지였다. 옴달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 다만 감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우로를 옭아매고 있는 건 그의 동생이었다.

"……."

여우노는 이불도 덮지 않고 형을 이불로 돌돌 말아, 그것을 끌어안고 있었다. 푸른 머리의 의원이 감기 옮는다며 적당히 떨어져 있으라고 했지만 여우노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더라, 햇님은 무적이랬나.

여우로는 몸을 비틀어 팔다리를 빼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요 며칠 푹 쉬었더니 몸은 가벼웠다. 소년은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황도네 의원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흐릿하지만 드문드문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까, 낮에 륜과 하늘이 찾아왔었다. 열이 오른데다 잠기운에 비몽사몽한 채로 맞이했던 터라, 륜이 두고 간 은사과거리 간식이 아니었다면 꿈인 줄 알았을 것이다. 륜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륜의 말들은 뭉개진 채로 떠올랐다. 걱정하는 말이었겠지.

하늘이 바보도 아니고 여름 감기에 걸리냐고 놀린 건 확실히 기억난다.

퍽!

여우노가 이불을 걷어찼다. 잠버릇이 이렇게 심했나? 한숨을 폭 내쉬고 재차 이불을 덮어주던 그 순간.

-우노는 널 닮아서 추위를 안 타나 봐.

나른하게 부드러운 목소리와, 이불을 덮어주는 따스한 손길.

-…잠버릇도 비슷하고.

날이 더우면 손부채질을 해주고, 날이 추우면 이불을 덮어주던, 항상 제 곁에 있었던 존재가 떠올랐다. 동생이 이불을 뻥뻥 차더라도, 아무리 바람이 매서워도 그것을 막아줄 존재가 있었다. 그러니 소년이 감기에 걸린 것이다. 그는 이제 없었기에. 여우로는 이제서야 그때 느끼지 못했던 애정과 그 애정의 부재를 깨달았다.

"…윽…."

한 방울. 두 방울. 굵은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꽉 다물린 잇새로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한참 눈물을 떨구니 열이 올랐다. 여우로는 차가운 공기를 쐬려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봤다. 여우로의 눈에도 똑같은 하늘이 박혀 있었다.

"여우로 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여우로가 고개를 돌리자 푸른 머리의 의원이 있었다. 야간 회진을 끝내고 돌아오는 모양새였다. 마유는 지긋이 여우로의 빨간 눈가를 보고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여우로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쪽마루에 걸터 앉았다.

그렇게 달을 보고 있길 한참, 마유가 나무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여우로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은 후 그 사이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흰색 찻잔이 두 개 있었는데, 붉은 빛깔을 띠는 것이 안을 채우고 있었다. 마유는 여우로에게 손짓하고 제 잔을 가져갔다. 여우로는 그런 마유를 보며 잔을 들었다. 잔은 그리 뜨겁지 않았지만, 차를 한 모금 마시니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곧 따끈한 온기가 서서히 몸에 퍼졌다. 미지근하면서도 따뜻한, 적당한 온기였다.

"열은 좀 어떤가요?"

의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우로에게 물었다. 의원의 시선은 달을 향하고 있었다.

"…괜찮아."

여우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차를 마신 덕분인지 목소리는 갈라지지 않았다. 여우로도 시선을 돌렸다.

짧은 문답이 몇 번 오가고,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는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 들렸다.

"제가 여우로 님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말은, 그리 와닿지 않을 것 같네요."

정적을 깬 것은 마유였다. 마유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마유는 고개를 돌려 여우로와 눈을 마주쳤다. 소년은 어쩐지 마유의 눈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 사라진 슬픔."

그리 말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마유는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의 빈자리."

담담히 말하는 말투에 여우로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없겠지만."

마유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지만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의 공간이 더 커지면. 그리고 그 공간을 다른 것들이 채우면."

연보랏빛 눈에 달빛이 차올랐다.

"괜찮아질 거예요."

자기가 그렇다는 듯,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더 이상 슬프지 않다고는 안 하네.'

그런 생각부터 들었지만, 여우로는 이상하게 술렁이던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 같았다.

"…응."

또륵. 눈물 한 방울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마유는 여우로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여우로는 마유의 손이 살짝 떨린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마유는 아무 말 없이 여우로를 토닥였다. 그것이 마유의 얼마나 큰 상냥함이었는지, 어린 여우로는 몰랐다. 이윽 손이 떠나갔지만, 온기는 여전히 등에 남아 있었다. 찻잔도 그것처럼 따뜻했다.

*

시간이 지나, 금란의 산.

“…그런데 황도님, 왜 륜이랑 마유 형만 보냈어요?”

여우로는 그들이 향한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륜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마유 형의 변화를 바라신 거 아니에요?”

양쪽 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란 대답에, 여우로는 싱긋 웃었다.

“따지는 건 아니에요. 륜에게도 마유 형에게도 도움 될 것 같아서 좋으니까.”

진심이다. 언젠가 마유가 여우로에게 그랬듯, 륜이 마유에게 그런 존재가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도와준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좋았디.

형이 쉽게 바뀌진 않겠지. 시간이 흘러 여우로는 변했지만, 마유는 여전히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으니,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변할 때까지 륜이 있을 테고, 여우로가 있을 것이다. 이제 마유의 한 공간에 자리할 정도로는 자랐으니.

그가 전해주었던 온기가 그에게도 닿기를. 여우로가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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